「예술, 인간을 말하다」 EP.48

1793년 7월 13일, 파리.
욕조에서 한 남자가 죽었습니다. 심한 피부병 때문에 매일 몇 시간씩 약수에 몸을 담가야 했던 혁명가. 샤를로트 코르데이라는 여인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혁명 청원서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욕조 안의 남자가 청원서를 읽었습니다. 그 순간 칼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장 폴 마라(Jean-Paul Marat). 자코뱅파의 급진적 혁명가. 수천 명의 처형을 촉구했던 사람.
이 소식이 파리에 퍼졌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욕조로 달려갔습니다. 아직 시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케치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완성했습니다.
《마라의 죽음(La Mort de Marat, 1793)》.
욕조에 기대 죽어있는 마라. 손에 편지를 쥐고 있습니다. 샤를로트가 보낸 편지. "나는 매우 불행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바랍니다." 다른 손에 펜이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민중을 위해 일하다 죽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닙니다.
마라의 얼굴이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평화롭습니다. 배경이 텅 비어있습니다. 어둡습니다. 오직 시신과 욕조와 편지. 이 단순함이 그림을 충격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자세가 예수의 십자가 피에타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비드가 의도한 것이었습니다. 마라를 혁명의 순교자로 만드는 것. 그가 그린 것이 현실이 아니라 신화였습니다.
반 룬은 이 그림에서 예술이 무기가 된 순간을 봅니다. 가장 강력하고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이것이 혁명과 예술이 만나는 순간의 본질이었습니다.

혁명 이전 : 쌓인 불만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 그러나 그것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간 쌓인 것들이 있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 귀족이 세금을 면제받는 동안 평민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냈습니다. 1788년의 대기근. 빵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이 굶주렸습니다.
정치적 불만. 삼부회(Estates-General)에서 제3신분, 즉 평민 대표들이 1, 2신분(성직자, 귀족)에 의해 번번이 무시당했습니다. 계몽주의의 자유와 평등 사상이 이 불만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술.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1784년에 그려졌습니다. 조국을 위한 희생이라는 주제. 나중에 보면 그것이 혁명을 5년 앞선 예언이었습니다.
반 룬은 예술이 혁명에 앞서간다는 것을 봅니다. 화가들과 시인들과 음악가들이 변화를 먼저 감지합니다. 그들이 시대의 가장 예민한 수용체입니다. 다비드가 1784년에 그린 그림이 1789년의 혁명을 준비했습니다.
다비드 : 혁명의 공식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그는 신고전주의 화가이면서 동시에 혁명가였습니다. 미술 아카데미의 권위에 반기를 들면서 동시에 자코뱅당에 가입했습니다. 예술과 정치가 그에게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혁명 정부가 그를 공식 화가로 임명했습니다. 혁명의 의례와 축전을 기획했습니다. 공화국의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The Tennis Court Oath, 1791)》. 1789년 6월 20일, 삼부회에서 제3신분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선언하고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역사적 순간. 다비드가 거대한 캔버스에 이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방향을 바꾸고 많은 주인공들이 반혁명으로 몰려 처형되면서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이 미완성 그림이 어떤 의미에서 혁명 자체의 은유입니다. 시작했지만 완성되지 못한 것. 이상이 현실과 충돌한 것.
《마라의 죽음(1793)》. 앞서 살펴본 이 그림이 혁명 예술의 최고점이었습니다. 선전(propaganda)이 예술이 된 것. 아니, 예술이 선전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 것.
반 룬은 다비드의 딜레마를 봅니다. 그가 진정한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도구였습니다. 《마라의 죽음》이 위대한 예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조작된 이미지입니다. 실제 마라보다 더 순결하고 더 숭고하게 그려진.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예술이 정치와 만날 때 일어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술이 더 강력해질 수도 있고 더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공포 정치 : 혁명이 자신의 자녀들을 먹다
1793년~1794년, 공포 정치(La Terreur).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안위원회가 반혁명 혐의자들을 대량으로 처형했습니다. 단두대. 파리에서만 수천 명이 죽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예술가들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혁명 이전 귀족의 후원을 받던 많은 예술가들이 도망쳤습니다. 비제 르 브룅이 그랬습니다. 일부는 처형되었습니다.
다비드는 살아남았습니다. 공안위원회 위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처형 명령서에 서명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그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습니다.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었습니다. 이것이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 공포 정치가 끝났습니다. 다비드가 체포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석 달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을 내렸던 화가가.
반 룬은 이 부분에서 말을 아낍니다. 다비드가 한 것들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역사가 개인들을 어떤 선택으로 몰아가는지를. 그리고 예술가가 정치에 깊이 개입할 때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를.
나폴레옹 등장 : 혁명이 제국이 되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1804년 황제가 되었습니다.
혁명의 이상, 즉 자유, 평등, 박애는 어디로 갔는가. 새로운 황제가 들어섰습니다. 루이 16세 대신 나폴레옹이.
그러나 나폴레옹이 단순히 구체제를 복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혁명의 성과들, 즉 나폴레옹 법전, 능력주의 행정,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황제의 권위를 절대화했습니다.
예술이 다시 권력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다비드가 나폴레옹의 공식 화가가 되었습니다. 혁명의 화가가 황제의 화가가 된 것. 역설처럼 보이지만 다비드에게는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권력의 화가였습니다. 권력이 혁명에서 제국으로 이동했을 뿐이었습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 권력의 이미지 제조
다비드의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보나파르트(Napoleon Crossing the Alps, 1801)》. 이 그림이 나폴레옹의 가장 유명한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백마가 뒷발로 서있습니다. 나폴레옹이 한 손으로 말을 통제하면서 다른 손으로 저 멀리 알프스를 가리킵니다. 망토가 바람에 날립니다. 그의 표정이 자신감과 결단력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안내인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그는 나중에 다비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전쟁터에서 평온하게 앉아 있는 것이 위대한 장수다. 말 위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은 군마의 임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 그림의 이미지를 원했습니다. 현실이 아닌 신화. 그는 이 그림을 다섯 점이나 주문했습니다. 유럽 각지의 동맹국 궁정에 선물하기 위해.
이것이 권력이 예술을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 다비드가 그 도구였습니다.
반 룬은 이 그림을 보면서 이미지의 힘을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나폴레옹 하면 이 그림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실제 나폴레옹이 어떻게 알프스를 넘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예술이 만든 신화가 역사적 사실을 덮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 권력의 절정
《나폴레옹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 1805~07)》. 다비드의 가장 거대한 작품. 가로 9.79미터, 세로 6.21미터. 인물이 200명이 넘습니다.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는 날.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교황에게 왕관을 받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왕관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썼습니다. 교황보다 자신이 더 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비드가 이 순간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정확히는 그 직후. 나폴레옹이 무릎 꿇은 조제핀 황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순간.
이 선택이 의도적이었습니다. 스스로 왕관을 쓰는 장면보다 황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이 더 자비롭고 더 우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황이 그 뒤에서 손을 들고 축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는 교황이 행사 내내 불편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이 그림을 보고 말했습니다. "다비드여, 훌륭하다."
반 룬은 이 그림이 역사화가 아니라 역사 조작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일어난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을 그린 것. 200명의 인물 중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가 맨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레티치아는 아들 나폴레옹과 불화 중이어서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다비드가 그녀를 그렸습니다.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예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반 룬은 이 질문에 단순하게 답하지 않습니다. 예술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예술을 이용해 역사를 조작할 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경계가 항상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비드의 삶이 그 경계의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나폴레옹의 미술 약탈 : 제국의 문화 전략
나폴레옹이 예술을 단순히 자신의 초상화로만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럽 전체의 예술을 파리로 가져왔습니다.
이집트 원정(1798~1801). 군대만이 아닌 학자들, 예술가들, 과학자들도 함께 갔습니다. 이집트의 유물들을 수집했습니다. 로제타석(Rosetta Stone)이 이때 발견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점령. 베네치아, 로마, 밀라노. 이 도시들의 미술관과 교회에서 수천 점의 작품들이 파리로 이송되었습니다. 루브르가 세계 최대의 미술관이 된 것은 이 약탈 덕분이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문명의 수도인 파리가 세계의 예술을 보관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 위대한 예술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
이 논리가 오늘날에도 반향이 있습니다. 대영 박물관의 엘긴 대리석, 루브르의 이집트 유물들. 약탈인가 보존인가. 이 논쟁이 나폴레옹 시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반 룬은 이 약탈이 혁명의 이상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나폴레옹이 생각했다는 것을 봅니다. 혁명이 귀족의 특권에서 예술을 해방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국가의 독점에서 예술을 해방해 인류 공동의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 주장이 자기 정당화였습니다. 그러나 루브르가 결국 인류 공동의 보물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베토벤의 배신감 : 《영웅》의 탄생
음악에서 나폴레옹과 예술의 관계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베토벤의 것입니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존경했습니다. 혁명의 이상을 실현할 영웅으로 보았습니다. 새 교향곡을 완성하고 헌정하려 했습니다. 표지에 "보나파르트(Buonaparte)"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베토벤이 격분했습니다. 그가 표지를 찢었습니다. 너무 세게 찢어서 나중에 구멍이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도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군. 이제 그는 모든 인권을 짓밟고 오직 자신의 야망만을 위해 살 것이다."
이 교향곡이 《교향곡 3번 E♭장조 Op.55》. 나중에 부제가 바뀌었습니다. 《영웅(Eroica)》.
영웅이 누구인가. 나폴레옹이 아닙니다. 혁명의 이상.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인간. 그리고 어쩌면 베토벤 자신. 귀가 멀어가면서도 작곡을 멈추지 않는 예술가.
반 룬은 이 이야기에서 예술가와 권력의 관계의 또 다른 방식을 봅니다. 다비드가 권력을 섬겼다면 베토벤이 권력에 실망하고 그 실망을 작품으로 승화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위대한 예술가인가. 반 룬은 답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모두 인간적인 선택이라고.

저항의 예술 : 고야의 대답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을 점령했습니다. 1808년.
고야는 EP.44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봐야 합니다. 혁명과 제국의 맥락에서.
다비드가 권력을 아름답게 그렸다면 고야가 권력의 결과를 있는 그대로 그렸습니다. 《1808년 5월 3일》. 처형당하는 스페인 시민들. 얼굴 없는 처형자들.
이 두 그림이 같은 시대에 같은 나폴레옹 제국을 배경으로 그려졌습니다. 다비드가 제국의 공식 이미지를 만들었다면 고야가 제국의 현실을 고발했습니다.
반 룬은 예술의 두 역할이 이 두 화가에서 가장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봅니다. 권력을 섬기는 예술과 권력에 저항하는 예술. 다비드와 고야. 두 사람 모두 위대한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것이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두 사람을 모두 기억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역사가 어느 쪽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술의 역사는 선과 악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다비드의 망명과 예술의 유산
1815년 나폴레옹의 패배. 다비드는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했습니다. 프랑스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공식 화가였다는 이유로.
브뤼셀에서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신화적 주제들. 아름다운 그림들. 그러나 혁명의 에너지는 없었습니다.
1825년, 77세에 브뤼셀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유해를 프랑스로 돌려보내 달라는 요청이 거부되었습니다.
반 룬은 다비드의 삶 전체를 하나의 질문으로 봅니다. 예술가가 정치에 개입할 때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다비드가 얻은 것. 권력의 핵심에서 활동하는 기회. 역사적 순간들을 직접 기록하는 특권. 그리고 《마라의 죽음》처럼 영원히 남는 작품.
다비드가 잃은 것. 독립. 자신의 목소리. 예술이 현실을 조작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저항.
이 물음이 다비드의 시대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예술가가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이 질문이 지금도 계속됩니다.
혁명이 예술에 남긴 것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가 예술에 무엇을 남겼는가.
첫째, 예술의 공공화. 루브르가 1793년 공화국의 미술관으로 시민들에게 열렸습니다. 예술이 왕과 귀족의 것에서 시민의 것으로. 이것이 현대 미술관의 기원이었습니다.
둘째, 예술의 정치화. 예술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전달해야 한다는 인식. 다비드가 그것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19세기와 20세기의 정치 예술이 모두 이 유산 위에 서 있습니다.
셋째, 예술의 저항 가능성. 고야가 보여준 것. 예술이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다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예술의 의무라는 것.
반 룬은 이 세 유산이 서로 모순된다고 봅니다. 공공 미술관이 예술을 민주화했지만 국가가 그것을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예술의 정치화가 강력한 메시지를 낳았지만 선전으로 변질될 위험도 있었습니다. 저항 예술이 진실을 말했지만 때로는 탄압받았습니다.
이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 세기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이어진 모순이 현대 예술을 만들었습니다.
이번 화 감상 추천
혁명의 이상과 제국의 현실, 그 사이에서 탄생한 세 작품을 권합니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3번 E♭장조 Op.55 《영웅(Eroica)》》 전악장 :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다 분노로 표지를 찢었던 교향곡. 1악장의 웅장한 주제, 2악장의 장송 행진곡, 3악장의 스케르초, 4악장의 변주와 마지막 승리. 혁명의 이상이 좌절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 이 교향곡 전체가 혁명의 시대를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E♭장조 Op.81a 《고별(Les Adieux)》》 :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하던 1809년, 베토벤의 제자이자 후원자 루돌프 대공이 빈을 떠날 때 작곡한 소나타. 1악장 고별, 2악장 부재, 3악장 귀환. 전쟁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흔드는지가 피아노 소나타 안에 담겨 있습니다.
- 루이지 케루비니, 《레퀴엠 C단조》 : 프랑스 혁명 직후 활동한 작곡가. 혁명 정부의 공식 행사들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나중에 루이 16세의 기일에 공식 추도 음악으로 연주되었습니다. 혁명과 처형과 제국과 왕정복고를 모두 경험한 시대의 가장 깊은 기도. 베토벤이 자신의 레퀴엠이 있다면 이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음 화 예고
다음 시간에는 1815년 나폴레옹 몰락 이후부터 반 룬이 이 책을 쓴 1937년까지의 거대한 한 세기를 조망합니다.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입체파, 추상미술까지. 이 모든 것이 불과 100년 남짓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격동의 세기가 예술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그리고 그 표현들이 서로 어떻게 대화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P.49 격동의 한 세기: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까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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