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인간을 말하다」 EP.45

1873년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
한 화가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39세. 빅토르 하르트만(Viktor Hartmann). 건축가이자 화가. 러시아 민속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비통해했습니다. 악보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빅토르가 죽었다.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 친구의 이름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이듬해 187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르트만의 유작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무소르그스키가 그 전시회를 걸었습니다. 방에서 방으로. 그림에서 그림으로.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3주 만에 완성했습니다.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10개의 그림이 10개의 악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림과 그림 사이의 걸음이 반복되는 산책(Promenade) 테마가 되었습니다. 그가 전시회장을 걷는 발소리.
반 룬은 이 작품 앞에서 질문합니다. 어떻게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는가.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들리는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변환에서 원래의 것이 사라지는가, 아니면 더 깊어지는가.
예술의 가장 신비로운 경계가 여기 있습니다. 시각과 청각이 만나는 곳.

예술들 사이의 오래된 대화
시각 예술과 음악은 언제나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 음악, 춤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무사(Musa, 뮤즈)의 선물이었습니다. 뮤즈라는 말에서 음악(music)이 나왔습니다. 예술의 분화가 나중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중세 성당에서 건축, 조각, 회화, 음악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함께 작동했습니다. 고딕 성당에 들어갈 때 스테인드글라스가 색채로 빛을 노래하고 천장의 높이가 신을 향한 열망을 시각화하는 동안 오르간 음악이 그 공간을 채웠습니다. 눈과 귀가 함께 신성을 경험했습니다.
르네상스에서 예술들이 독립했습니다. 회화가 음악과 분리되었습니다. 각각의 규칙이 생겼습니다. 각각의 역사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분리된 후에도 예술들은 서로를 그리워했습니다. 음악이 그림처럼 되려 하고, 그림이 음악처럼 되려 했습니다. 그 상호 열망이 예술 역사의 가장 풍요로운 교류를 만들어냈습니다.
반 룬은 이 교류가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술들이 서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 한계를 넘으려 했다고. 음악이 색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색채를 꿈꾸고, 회화가 시간 안에서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임을 꿈꿉니다. 그 불가능한 꿈이 새로운 것을 만들었습니다.

《전람회의 그림》그림이 음악이 되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으로 돌아옵니다.
이 작품이 왜 중요한가. 단순히 그림을 음악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소르그스키가 한 것이 더 복잡했습니다. 그는 그림들 앞에서 자신이 느낀 것을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의 내용이 아닌, 그림을 보는 경험이 음악이 된 것입니다.
《난쟁이(Gnomus)》. 하르트만이 그린 기이한 모양의 크리스마스 장식품이 원본이었습니다. 무소르그스키는 이것을 뒤뚱거리며 걷는 다리가 구부러진 난쟁이의 음악으로 만들었습니다. 반음계적으로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선율. 듣는 사람이 불안하고 기이한 존재를 상상하게 됩니다.
《키예프의 대문(The Great Gate of Kiev)》. 마지막 악장. 하르트만이 설계한 키예프 성문의 설계도가 원본이었습니다. 거대하고 장엄한 러시아풍 건물. 무소르그스키는 이것을 온 종소리가 울리는 웅장한 피날레로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의 혼이 담긴 클라이맥스.
그런데 이 그림들 중 상당수가 사라졌습니다. 하르트만의 작품들이 부주의하게 관리되어 많은 것이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전람회의 그림》의 일부 악장들은 그것이 묘사한 그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음악만 남았습니다.
반 룬은 이 역설이 아름답다고 봅니다. 그림이 사라졌지만 음악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이 지금도 사라진 그림들을 우리의 상상 속에서 살려놓습니다. 예술이 예술을 통해 계속 살아가는 방식.

라벨의 재창조 : 변주와 확장
1922년, 코세비츠키(Koussevitzky)가 라벨에게 요청했습니다.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 작품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해 달라고.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오케스트레이션의 마술사.
라벨이 한 것이 단순한 편곡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을 통해 전혀 새로운 오케스트라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본 피아노 음악에 없던 것들을 더했습니다.
《옛 성(Il Vecchio Castello)》. 피아노 원본에서 슬픔이 담긴 멜로디. 라벨이 이것을 알토 색소폰 독주에 맡겼습니다. 색소폰은 중세 성이 아닌 완전히 현대적인 악기입니다. 그러나 그 색소폰의 독특한 음색이 오히려 시간을 초월한 고독과 향수를 표현합니다.
라벨의 편곡이 원본을 가린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 음악이 더 원초적이고 러시아적이라고. 라벨의 편곡이 너무 세련되어 그 날것의 에너지를 희석시킨다고.
반 룬은 이 논쟁이 예술의 근본 문제를 건드린다고 봅니다. 편곡, 번역, 재해석. 이것들이 원본을 배반하는가, 아니면 원본을 새롭게 드러내는가. 라벨의 오케스트라 버전과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 원본이 같은 음악인가, 다른 음악인가. 답이 없는 질문. 그리고 그 답 없음이 오히려 이 작품을 계속 살아있게 합니다.

표제음악, 이야기가 된 음악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표제음악(Programme Music)의 가장 유명한 예 중 하나입니다. 표제음악이란 음악 외적인 것, 즉 시, 그림, 이야기, 자연 현상에서 영감을 받아 그것을 표현하는 음악입니다.
표제음악의 반대는 절대음악(Absolute Music)입니다. 음악 자체 외에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음악. 바흐의 푸가, 베토벤의 소나타들. 형식과 음악적 논리가 전부인 음악.
표제음악이 음악의 역사에서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비발디의 《사계》가 그 초기 예입니다. 각 협주곡이 계절을 묘사합니다.
클레망 자느캥(Clément Janequin, c.1485~1558). 르네상스의 프랑스 작곡가. 그의 합창곡 《새들의 노래(Le Chant des Oiseaux)》에서 성악가들이 새소리를 모방합니다. 뻐꾸기, 나이팅게일, 메추라기. 악보에 어떤 새의 소리인지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표제음악의 초기 형태였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Pastoral)》. 베토벤이 악장마다 제목을 붙였습니다. 시냇가의 장면,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 폭풍우, 폭풍 후의 감사. 그러나 베토벤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감정의 표현이라고. 자연 현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것을 표현한다고.
이 구별이 중요합니다. 반 룬은 이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표제음악의 가장 위대한 것들이 소리로 이미지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지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것, 그 감정의 진실을 소리로 표현했습니다. 그 차이가 음악을 문학의 하위 예술이 아닌 독립적인 예술로 만들었습니다.
리스트의 교향시 : 그림이 오케스트라가 되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그가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형식을 발명했습니다.
하나의 악장으로 된 오케스트라 작품. 그것이 문학 작품이나 회화나 자연 현상을 표현합니다. 소나타 형식의 여러 악장 교향곡이 아닌, 하나의 감정적 여정으로서의 음악.
리스트의 교향시들. 《오르페우스(Orpheus)》, 《전주곡(Les Préludes)》, 《타소(Tasso)》. 각각 신화, 시, 역사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특히 리스트가 화가들의 그림에서 직접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훈족들의 전쟁(Hunnenschlacht)》. 카울바흐의 거대한 역사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 《이상적인 것들(Die Ideale)》. 쉴러의 시를 통해 인간의 이상을 표현한 것.
리스트가 이 교향시 형식을 만들면서 음악이 무엇을 담을 수 있는지의 범위를 확장했습니다. 형식의 제약에서 벗어나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게 했습니다. 표현해야 할 것이 음악의 길이와 구조를 결정하는 것.
반 룬은 리스트의 교향시에서 낭만주의 음악의 가장 야심 찬 측면을 봅니다. 음악이 문학, 회화, 역사를 흡수하려 한 것. 그 야심이 과도할 수 있었지만 그 야심 없이는 말러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없었습니다.
드뷔시와 호쿠사이 : 일본 판화가 음악이 되다
앞서 EP.43에서 다루었지만 여기서 더 깊이 들여다봅니다.
드뷔시가 자신의 《바다(La Mer)》 악보 첫 판의 표지로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파도》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악보 위에 자신의 이름을 호쿠사이가 자신의 판화에 이름을 새기는 위치, 즉 하늘 위에 썼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드뷔시가 이 음악과 이 그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뷔시가 조심스럽게 덧붙였습니다. 자신이 바다를 그린 것이 아니라고. 바다에 대한 감정의 흔적들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그림을 음악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림이 불러일으킨 것을 음악으로 만든 것이라고.
이 차이가 드뷔시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호쿠사이를 흉내 내지 않았습니다. 호쿠사이에서 영감을 받아 완전히 다른 예술을 만들었습니다. 그림이 씨앗이 되고 음악이 꽃이 된 것입니다.
반 룬은 이 관계를 예술적 영향의 이상적인 모델로 봅니다. 모방이 아닌 변형.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 과정에서 원본도 살고 새로운 것도 탄생합니다.
생상스의 《동물 사육제》: 유머가 된 표제음악
표제음악이 항상 진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 그의 《동물 사육제(Carnival of the Animals, 1886)》. 14개 악장. 각 악장이 하나의 동물을 묘사합니다. 사자, 수탉, 거북, 코끼리, 캥거루, 수족관, 새장,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가 동물 목록에 들어있다는 것이 유머입니다. 생상스가 피아니스트들을 놀리기 위해 넣은 것이었습니다. 서툰 음계 연습을 흉내 낸 악장.
그리고 《백조(The Swan)》. 이 작품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장. 두 대의 피아노가 물 위를 흔들리는 물결을 표현하고 그 위로 첼로가 우아하게 노래합니다. 백조가 헤엄치는 모습이 소리로 표현됩니다.
생상스는 이 작품을 자신의 생전에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장난스럽다는 이유로. 그러나 《백조》만은 예외로 허락했습니다.
반 룬은 생상스에서 표제음악이 진지함과 유희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봅니다. 예술이 항상 무거울 필요가 없습니다. 동물들에 대한 음악적 농담이 《백조》처럼 깊은 아름다움과 같은 작품 안에 공존할 수 있습니다.
칸딘스키 : 색채와 소리의 융합
음악과 회화의 교차에서 가장 극단적인 실험을 한 사람이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였습니다.
그는 공감각(Synesthesia)을 경험했습니다. 소리를 들으면 색채가 보이고, 색채를 보면 소리가 들렸습니다. C장조가 특정 색채로 보이고 그 색채가 특정 악기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음악 연주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경험 후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음악이 제게 색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의 회화가 어떤 것을 당신의 음악처럼 들리게 할 수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것이 두 예술가 사이의 유명한 우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칸딘스키는 회화가 음악처럼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음악이 형태 없이 순수한 감정을 전달하듯, 회화도 현실의 형태 없이 순수한 내면을 표현할 수 있다고. 이것이 추상 미술의 이론적 기반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쇤베르크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전문 화가가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그렸습니다. 칸딘스키가 그의 그림들을 전시회에 포함시켰습니다. 음악가가 화가가 되고 화가가 음악가와 대화한 것.
반 룬은 칸딘스키에서 예술의 통합이라는 꿈을 봅니다. 리하르트 바그너도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모든 예술이 하나가 되는 것, 종합예술(Gesamtkunstwerk). 이 꿈이 실현 가능한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예술의 경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실험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무소르그스키 초상화와 하르트만 : 우정과 작별
무소르그스키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하르트만이 죽었을 때 무소르그스키가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빅토르 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배우는 것인가?"
이 슬픔이 《전람회의 그림》의 산책 테마에 담겨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지만 매번 조금씩 다른 이 테마가 단순히 걷는 발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친구의 그림들 앞에서 혼자 서 있는 화가의 걸음입니다. 그 걸음이 기억이고 애도이고 사랑입니다.
반 룬은 이 사실이 《전람회의 그림》을 단순한 표제음악이 아닌 인간적인 문서로 만든다고 봅니다. 그림들이 음악의 원인이었지만 진짜 원인은 우정이었습니다. 상실이었습니다. 그 감정이 음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술의 교차가 가장 깊어지는 지점입니다. 시각 예술이 청각 예술로 변환되는 것이 아니라, 두 예술가의 삶이 하나의 작품으로 녹아드는 것. 하르트만의 그림들과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이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된 것. 한쪽은 사라졌지만 다른 쪽이 그것을 영원히 살려두는 것.
반 룬이 예술의 교차에서 읽어낸 것
반 룬은 이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시각 예술과 음악의 대화가 가르쳐주는 것을 정리합니다.
각 예술이 다른 예술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결핍이 예술들을 서로를 향해 열리게 만듭니다.
음악이 색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색채를 꿈꿉니다. 드뷔시의 음악에서 색채가 들립니다. 음악이 그림을 가질 수 없지만 그림을 만들어냅니다.
회화가 시간 안에서 전개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악처럼 되기를 꿈꿉니다. 칸딘스키의 추상화에서 음악이 보입니다. 회화가 음악을 가질 수 없지만 음악을 창조합니다.
이 불가능한 꿈들이 예술의 역사를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차에서 탄생한 것들, 《전람회의 그림》, 드뷔시의 《바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들이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습니다. 그 경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경계가 때로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이번 화 감상 추천
시각과 청각이 만나는 세 작품을 권합니다.
-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모리스 라벨 편곡,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이 에피소드 전체를 상징하는 작품. 하르트만의 그림들이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 음악이 되고 다시 라벨의 오케스트라 색채로 변환됩니다. 그림에서 피아노로, 피아노에서 오케스트라로. 변환이 거듭될수록 원본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집니다. 오케스트라 버전의 마지막 《키예프의 대문》이 울릴 때 하르트만의 설계도가 음악의 건축이 됩니다.
- 카미유 생상스, 《동물 사육제》 중 〈백조(Le Cygne)〉 : 첼로와 두 대의 피아노. 3분의 완벽한 음악. 피아노가 물 위의 물결을 만들고 첼로가 백조의 유영을 노래합니다. 시각적인 것이 청각이 된 가장 아름다운 예. 이 짧은 음악을 들으면서 눈앞에 백조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음악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이미 음악 안에 있는 것입니다.
클로드 드뷔시, 피아노 전주곡 1권 중 〈가라앉은 성당(La Cathédrale Engloutie)〉 : 브르타뉴 전설. 바다 속에 가라앉은 이 세(Ys)의 성당이 안개 낀 새벽에 잠시 수면 위로 솟아올라 종소리를 울리다가 다시 가라앉습니다. 드뷔시가 이 전설을 피아노로 표현했습니다. 피아노가 건축이 됩니다. 오르간 소리가 들립니다. 성당이 보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물속으로 사라집니다. 시각 예술, 문학, 음악이 하나의 피아노 소품 안에서 만납니다.
다음 화 예고
다음 시간에는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거대한 이름들을 한자리에 모읍니다. 바로크에서 고전주의로 넘어가는 대전환의 시대.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이 다섯 거인이 각각 어떤 방식으로 음악의 역사를 바꾸었는지, 그리고 그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흘렀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P.46 음악의 거인들: 바로크에서 고전주의까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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