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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예술, 인간을 말하다

EP.40새로 유행한 오락 : 즐기는 것도 예술이 되다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2.

「예술, 인간을 말하다」 EP.40

루이 14세 밤의 발레

1669년, 파리 팔레 루아얄.
루이 14세가 서명했습니다. 왕의 칙령. 프랑스 왕립 음악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Musique) 설립. 이제 파리에서 유료로 음악 공연을 열 수 있는 독점적 권리가 이 기관에 주어졌습니다.
그 이전까지 오페라는 궁정의 것이었습니다. 왕의 결혼식, 왕세자의 탄생, 외교 사절 환영. 왕이 원할 때, 왕이 허락한 자리에서만 공연되었습니다.
이제 다르게 되었습니다.
돈을 내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귀족이 아니어도. 왕의 초대를 받지 않아도. 상인이, 법률가가, 의사가. 공연 날 저녁 극장 문 앞에서 돈을 내면 됩니다.
이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시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 룬은 압니다. 이것이 예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 중 하나였다고.
예술이 귀족의 특권에서 시장의 상품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 관객이 수동적 수혜자에서 능동적 소비자가 된 것. 예술가들이 왕의 명령이 아닌 관객의 취향을 고려해야 하는 존재가 된 것.
새로 유행한 오락. 이 말이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 18세기 유럽 문화의 거대한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즐기기 시작했는가. 그리고 그 즐거움이 어떻게 예술이 되었는가.


루이 14세 초상화, 이아생트 리고 작 (1701년), 루브르 박물관

즐거움의 역사 : 오락이 죄가 아니게 되다

중세 기독교는 즐거움을 경계했습니다. 육체적 쾌락은 영혼의 적이었습니다. 연극은 위험했고, 음악은 의심받았고, 춤은 악마의 놀이였습니다. 축제는 허용되었지만 그것은 종교적 의미를 가져야 했습니다.
르네상스가 이것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현세의 기쁨이 내세를 향한 금욕과 반드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 변화가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즐거움은 여전히 변명이 필요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즐거움의 정당화가 더 강해졌습니다. 철학이 도왔습니다. 에피쿠로스주의의 재발견.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고대의 생각이 다시 읽혔습니다. 경제가 도왔습니다. 상업의 발전으로 중산층이 성장하고 그들이 오락을 소비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들이 도왔습니다. 즐거움을 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그 직업의 가치를 주장했습니다.
이 변화의 결과로 18세기가 되면 오락이 당당한 문화적 형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즐기러 가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페라 극장, 콘서트홀, 커피하우스, 공공 정원. 이 공간들이 도시 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반 룬은 이 변화를 개인의 자유의 역사와 연결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즐길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 이것이 단순해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혁명적이었습니다. 오락의 자유가 종교적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정치적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작게나마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런던 복스홀 가든의 그랜드 워크, 카날레토 작 (18세기)

발레 :춤이 예술이 되다

새로 유행한 오락들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발레(ballet)였습니다.
발레의 기원은 15세기 이탈리아 궁정의 연회 무대 공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귀족들이 직접 참여하는 정교한 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발레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발레가 하나의 독립된 예술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프랑스에서였습니다.
루이 14세. 그는 뛰어난 무용수였습니다. 아홉 살에 처음으로 궁정 발레에 등장했고, 스물두 살에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에서 태양의 역할을 맡아 공연했습니다. 이 공연에서 그의 별명 태양왕(Roi Soleil)이 나왔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직접 발레에 참여했습니다.
1661년, 루이 14세가 왕립 무용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Danse)를 설립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발레 학교. 춤의 기술을 체계화하고 표준화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 아카데미에서 발레의 다섯 가지 기본 발 위치(five positions)가 정립되었습니다. 오늘날 발레 수업에서도 가르치는 그 기본 자세들.
장 밥티스트 륄리. 루이 14세의 음악 감독. 그가 발레와 오페라를 결합하여 오페라 발레(opéra-ballet)라는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음악, 춤, 이야기가 하나의 공연 안에 있는 것.
반 룬은 이 초기 발레에서 중요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처음에 발레는 귀족 남성들이 추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14세 자신이 대표적인 예. 여성이 무대에서 발레를 추기 시작한 것은 1681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하이힐을 신고 춤을 추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발레리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것.
발레가 오늘날의 형태에 가까워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습니다. 장 조르주 노베르(Jean-Georges Noverre, 1727~1810). 그가 1760년에 쓴 《무용에 관한 편지(Lettres sur la Danse)》에서 발레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발레가 단순한 기교의 전시가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마임과 표현을 통해 이야기를 말해야 한다고.
이 개혁이 발레를 기예에서 예술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낭만주의 시대 발레의 황금기를 준비했습니다. 《지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 작품들이 나중에 가능했던 것은 18세기의 발레 개혁 덕분이었습니다.


복스홀 가든 《런던 미시코스모스》 삽화 (1808~10년)

콘서트 : 음악이 공공의 것이 되다

발레와 함께 18세기에 새롭게 탄생한 오락 형식이 공개 연주회, 즉 콘서트(concert)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콘서트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홀에 모여 연주를 듣는 것. 그러나 이것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까지 음악은 세 가지 장소 중 하나에서 연주되었습니다. 교회. 궁정. 귀족의 사저. 어느 것도 일반 대중에게 열린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에서 최초의 공개 유료 콘서트가 시작되었습니다. 1672년, 바이올리니스트 존 배니스터(John Banister)가 런던에서 최초의 공개 유료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입장료를 받고 원하는 사람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연주회.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콘서트의 시작이었습니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들도 중요했습니다. 17세기 후반부터 런던 전역에 퍼진 커피하우스가 음악 연주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재즈 클럽이나 라이브 카페와 비슷한 개념.
라이프치히의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 바흐가 1729년부터 이 시민 음악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 시민들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 모임. 이 모임의 연주회가 짐머만의 커피하우스에서 열렸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바흐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빈의 공개 콘서트 시리즈들. 18세기 후반 빈에서 귀족들이 자신의 저택을 개방하여 공개 연주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이 연주회들을 위해 음악을 썼습니다. 이 시리즈들이 점점 더 공개적이고 더 상업적이 되었습니다.
반 룬은 이 콘서트 문화의 탄생에서 음악의 민주화를 봅니다. 왕과 귀족의 것이었던 음악이 시민들의 것이 되는 과정. 그리고 이 과정이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을 형성했습니다. 왕실 예배당이나 귀족 살롱이 아닌 공공 홀에서 연주될 음악. 더 넓은 청중을 위한 음악. 이것이 교향곡 형식의 발전과 직접 연결됩니다.


영국 화가 토머스 허드슨(1701-1779)이 그린 독일-영국 작곡가 조지 프리드리히 헨델의 초상화

바스티유 이전의 파리 : 거리의 오락

파리의 거리와 광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생제르맹 시장과 생로랑 시장. 파리의 두 큰 정기시장. 이 시장들이 열리는 기간에 공연 업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줄타기 곡예사, 인형극 공연자, 동물 묘기꾼, 거리의 배우들.
이 시장 공연들에서 새로운 예술 형식들이 탄생했습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전통을 이어받은 즉흥 코미디. 풍자적인 파로디 연극. 그리고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 노래와 대화가 번갈아 나오는 프랑스 특유의 희극적 음악극.
오페라 코미크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공식 왕립 아카데미의 독점에 저항하면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왕립 오페라 아카데미가 파리에서 음악이 있는 공연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장 공연자들이 법의 경계를 찾아다녔습니다. 대화 중간에 노래 한 곡만 넣으면 오페라가 아니라는 것. 공식 무대에서 금지된 것들이 시장의 임시 무대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이 거리의 예술들이 단순한 저급 오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이 당시 사회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귀족을 풍자하고, 부패한 관료를 조롱하고, 종교적 위선을 웃음으로 폭로했습니다. 거리에서만 가능한 것들. 궁정 무대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
반 룬은 이 거리 문화에서 예술의 가장 자유로운 형태를 봅니다. 후원자도 없고, 검열도 어렵고, 관객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공간. 이 자유가 때로 가장 솔직한 예술을 낳습니다.


모차르트 초상화, 요제프 랑게 미완성 초상 (1789~90년)

영국의 퍼셀과 헨델 : 오락이 위대한 예술이 되다

영국에서 새로운 대중 오락과 위대한 예술이 만난 사례가 있습니다.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이자 가장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서른여섯 살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생애에 남긴 것이 놀랍습니다.
퍼셀이 활동하던 찰스 2세 복위 이후의 영국은 오락에 목마른 시대였습니다. 청교도 혁명 기간 동안 연극과 음악이 억압받았습니다. 왕정이 복고되면서 억눌렸던 오락이 폭발적으로 되살아났습니다.
퍼셀이 이 분위기 속에서 작업했습니다. 궁정 음악, 교회 음악, 극장 음악. 그는 모든 장르를 소화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독특한 기여는 극음악이었습니다.
《요정 여왕(The Fairy Queen, 1692)》.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바탕으로 한 이 세미 오페라에서 퍼셀이 음악으로 요정의 세계를 표현했습니다. 왕의 오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그 음악이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독일 태생이지만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작곡가. 그의 이야기가 새로운 대중 오락의 역사와 완벽하게 겹칩니다.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로 영국 정복을 꿈꿨습니다. 1711년 런던에서 《리날도(Rinaldo)》가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는 오페라 극장을 세우고 이탈리아 최고의 가수들을 불러 공연했습니다. 영국 귀족들이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왔습니다. 1728년 존 게이(John Gay)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등장했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격식을 풍자하는 이 작품이 런던을 뒤집었습니다. 귀족의 예술을 조롱하는 서민의 오락이 귀족의 오락을 압도했습니다. 62회 연속 공연. 전례 없는 기록.
헨델이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오라토리오(oratorio). 이것이 헨델의 새로운 무기가 되었습니다. 오페라처럼 무대 장치와 의상이 없습니다. 연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독창자들과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성경 이야기나 영웅 서사를 노래합니다. 극장이 아닌 콘서트홀에서, 일반 시민들을 위해 공연됩니다.
《메시아(Messiah, 1741)》. 헨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런던에서의 초연 공연 중 할렐루야 합창이 울렸을 때 국왕 조지 2세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왜 일어났는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그러나 왕이 일어서면 모두가 일어서야 했습니다. 이것이 할렐루야 합창에서 기립하는 전통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반 룬은 헨델에서 예술가의 유연성을 봅니다. 시대가 바뀌고 관객의 취향이 바뀔 때 함께 바뀌는 것. 이탈리아 오페라가 더 이상 환영받지 않자 영국 관객이 원하는 것을 찾아낸 것. 오라토리오.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극적입니다. 교회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극장의 흥분을 줍니다. 이 절묘한 조합이 헨델을 영국 문화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커피하우스 문화 : 새로운 공공 공간

18세기의 새로운 오락을 이야기할 때 커피하우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650년대 영국에 처음 등장한 커피하우스가 18세기에는 유럽 전역의 도시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런던에만 수천 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습니다.
커피하우스가 왜 새로운 오락의 중심이 되었을까요.
그것이 민주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분에 관계없이 커피 한 잔 값을 내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귀족과 상인과 작가와 의사가 같은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신문을 읽고, 토론하고, 논쟁하고,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음악이 커피하우스에서 울렸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바흐가 라이프치히 짐머만 커피하우스에서 콜레기움 무지쿰을 이끌었습니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들에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음악이 배경이면서 동시에 주제가 되었습니다.
시와 문학도 커피하우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조나선 스위프트, 조지프 애디슨, 리처드 스틸. 이들이 커피하우스에서 글을 쓰고, 읽히고, 비판받았습니다.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지가 커피하우스에서 읽혔습니다.
파리의 카페 들 레 프로코프(Café de Procope). 1686년에 문을 연 이 카페가 파리 지식인 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볼테르,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 《백과전서》의 편집자들이 여기서 만났습니다. 계몽주의가 여기서 대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반 룬은 커피하우스에서 시민 사회의 탄생을 봅니다. 교회도 아니고, 궁정도 아닌 제3의 공간. 신분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공간.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교환되는 공간. 이 공간들이 계몽주의를 키웠고, 계몽주의가 혁명을 준비했습니다. 커피 한 잔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장이 아닙니다.


로코코의 오락 : 가볍고 우아하고 즐거운

18세기 전반의 예술 양식 로코코(Rococo)는 새로운 오락 문화와 완벽하게 어울렸습니다.
바로크가 웅장하고 압도적이었다면, 로코코는 가볍고 우아하고 장난스럽습니다. 바로크가 신과 왕의 위대함을 표현했다면, 로코코는 귀족의 한가로운 즐거움을 표현했습니다.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 1684~1721). 로코코 회화의 창시자. 그의 그림들에서 우아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공원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연애를 합니다. 이 장면들을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 우아한 축제)라고 불렀습니다. 특정 행사를 묘사한 것이 아닌, 귀족적 즐거움의 이상화된 세계.
와토의 그림들을 보면 그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동시에 얼마나 덧없는지를 느낍니다. 그 행복한 사람들이 곧 이 자리를 떠날 것 같습니다. 즐거움이 절정에 있으면서 동시에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의 아름다움과 그 순간의 덧없음이 공존합니다.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 루이 15세의 총희 퐁파두르 부인의 화가. 그의 그림들에서 목가적인 장면들, 신화적 연인들, 장난스러운 사랑의 신들이 부드러운 색채 속에 펼쳐집니다. 즐거움이 목적입니다. 도덕적 교훈이 없습니다. 그냥 아름답고 기분 좋은 것.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 로코코 회화의 마지막 거장.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그네(The Swing)》. 아름다운 여인이 그네를 타고 있습니다. 그녀의 신발이 날아갑니다. 아래서 한 남자가 올려다봅니다.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가볍고 유머러스합니다. 이것이 로코코의 정신입니다.
반 룬은 로코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한편으로 그것이 너무 가볍다고 느낍니다. 카라바조의 어둠도 없고, 렘브란트의 깊이도 없고, 푸생의 지적 무게도 없습니다. 그냥 아름답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가벼움이 하나의 성취라고 봅니다. 예술이 무거워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즐거움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예술도 필요합니다. 로코코가 그것을 했습니다.


정원의 음악 : 바크스홀 가든과 유사한 공간들

18세기 유럽의 새로운 오락 중 독특한 것이 공공 정원 음악회였습니다.
런던의 복스홀 가든(Vauxhall Gardens). 1661년에 문을 열어 1859년까지 운영된 이 공공 정원이 런던 대중 오락의 중심이었습니다. 입장료를 내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밤에 수천 개의 등불이 켜졌습니다. 나무들 사이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습니다. 사람들이 걸으며 음악을 들었습니다.
복스홀 가든에서 헨델의 음악이 자주 연주되었습니다. 그의 《수상 음악(Water Music)》과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Music for the Royal Fireworks)》이 이런 야외 공개 행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야외 음악회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배경이기도 하고 전경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집중해서 듣는 사람도 있었고, 산책하며 반쯤 듣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음악이 대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음악 감상의 방식이었습니다.
비엔나의 프라터 공원, 파리의 공공 정원들에서도 비슷한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음악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된 것. 특별한 행사가 아닌 산책길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
반 룬은 이 야외 음악 문화에서 음악의 완전한 민주화를 봅니다. 왕궁에서, 교회에서, 귀족의 살롱에서 나온 음악이 공원에서 울렸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듣든 안 듣든, 이해하든 이해 못하든. 음악이 그냥 거기 있었습니다.


하이든 : 대중을 위한 위대한 예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 그의 이야기가 18세기 새로운 오락 문화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하이든은 거의 30년을 에스테르하지(Esterházy) 가문의 궁정 음악감독으로 보냈습니다. 헝가리의 귀족 가문. 그는 그들을 위해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교향곡, 실내악, 오페라. 모두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음악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791년,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죽으면서 하이든에게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는 런던으로 갔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요한 페터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의 초청으로. 잘로몬이 런던에서 유료 공개 콘서트 시리즈를 기획했고, 하이든이 그것을 위해 새 교향곡들을 작곡하고 직접 지휘하기로 했습니다.
런던 청중이 열광했습니다. 하이든이 등장하면 환호성이 울렸습니다. 그의 교향곡들이 공연될 때 청중이 앙코르를 외쳤습니다. 교향곡의 악장을 반복 연주하는 것. 오늘날에는 드문 일이지만 당시에는 흔한 반응이었습니다.
런던에서 만들어진 열두 곡의 런던 교향곡(London Symphonies). 이 작품들이 하이든의 가장 위대한 성취입니다. 귀족 후원자를 위한 음악이 아닌, 돈을 낸 일반 청중을 위한 음악. 그 청중을 즐겁게 하고, 놀라게 하고, 감동시켜야 하는 음악.
《놀람 교향곡(Surprise Symphony, Op.94)》. 느린 2악장에서 갑자기 큰 음이 터집니다. 졸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깨어납니다. 하이든이 의도한 농담. 교향곡에 유머가 들어간 것.
반 룬은 이 농담을 예술의 진보로 봅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종교적 감동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면, 하이든은 유머로 청중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예술이 반드시 무거울 필요가 없다는 것. 웃음과 놀라움도 위대한 예술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


모차르트와 대중 : 천재가 시장과 만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그의 짧은 생애가 18세기 예술가의 처지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모차르트는 신동(Wunderkind)으로 시작했습니다. 여섯 살부터 아버지 레오폴트에 의해 유럽 궁정 순회를 했습니다. 왕들과 황제들 앞에서 연주했습니다. 유럽의 모든 왕실이 그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모차르트에게 왕실의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고용인이 되었다가 모욕적인 대우에 반발하여 뛰쳐나왔습니다. 음악사에서 예술가가 귀족 후원자에게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저항한 사례 중 하나.
빈에서 독립 음악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작곡 위탁을 받고, 피아노 레슨을 하고, 공개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빈에서 막 발전하기 시작한 공개 콘서트 시장이 그의 수입원이었습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들이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27개의 피아노 협주곡. 이 작품들 대부분이 그가 직접 연주할 공개 콘서트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청중을 즐겁게 해야 했습니다. 이해하기 쉬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어야 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 모차르트가 했습니다. 그의 협주곡들은 첫 번째 들음에서 즐겁습니다. 그러나 열 번 들으면 처음에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립니다. 스무 번 들으면 또 다른 것들이 들립니다. 표면의 아름다움 아래 무한한 깊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대중 예술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말년은 비극이었습니다. 공개 콘서트 시장이 변덕스러웠습니다. 몇 년 동안 빈 청중이 열광하다가 갑자기 관심이 식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대중. 예술가에게 충성하지 않는 시장. 모차르트가 빚에 시달리며 서른다섯에 죽었습니다.
반 룬은 모차르트의 비극에서 시장과 예술의 관계가 가진 근본적인 긴장을 봅니다. 시장이 예술을 해방시켰습니다. 귀족의 변덕이 아닌 대중의 선택으로 예술가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이 또한 예술가를 위협했습니다. 대중의 선택이 예측 불가능하고, 대중의 취향이 변하고, 시장이 냉정하게 실패를 벌했습니다.
이 긴장이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예술가가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대중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은 때로 대중이 아직 원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모든 예술가의 도전입니다.


반 룬이 새로운 오락에서 읽어낸 것

반 룬은 이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18세기 새로운 오락 문화가 무엇을 바꾸었는지를 정리합니다.
18세기는 예술 역사에서 민주화의 세기였습니다.
오페라 극장이 대중에게 열렸습니다. 콘서트가 공개적으로 열렸습니다. 발레가 전문 예술가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커피하우스에서 음악이 울렸습니다. 공공 정원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습니다.
이 모든 변화가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술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것이 되는 것. 왕과 귀족만의 것이 아닌,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의 것이 되는 것.
그러나 반 룬은 이 민주화가 완전하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봅니다. 18세기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오페라 극장에 갈 수 없었습니다. 커피하우스는 주로 남성의 공간이었습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음악을 즐기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했습니다. 예술이 대중에게로 이동하는 것. 그리고 그 이동이 예술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 왕을 위한 음악과 대중을 위한 음악은 다릅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에스테르하지 공작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빈 시민들을 위한 음악이었습니다. 그 차이가 그 음악을 더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반 룬은 1937년 이 챕터를 쓰면서 자신의 시대가 예술의 또 다른 민주화 시대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라디오가 음악을 모든 가정으로 가져갔습니다. 영화가 연극을 대중화했습니다. 레코드가 콘서트를 소유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씁니다. 새로운 오락이 언제나 기존 예술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예술을 더 넓은 곳으로 퍼뜨린다고. 18세기의 커피하우스 음악이 클래식 음악을 오염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사랑하게 했습니다. 새로운 오락이 나타날 때마다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술은 항상 살아남았습니다.
즐거움이 죄가 아닙니다. 오락이 예술의 적이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아름다운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술의 민주화이고 그것이 인류의 진보입니다.


이번 화 감상 추천

18세기 새로운 오락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음악으로 경험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1749년 런던 그린 파크에서 열린 공개 야외 행사를 위해 만들어진 이 음악이 당시 대중 오락의 분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해줍니다. 1만 2천 명의 관객이 리허설을 보러 모여들어 교통이 마비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야외의 환호 속에서 이 음악이 울렸을 때, 예술이 대중의 것이 되는 그 순간이 소리 안에 있습니다.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교향곡 94번 놀람》: 런던의 유료 공개 콘서트를 위해 만들어진 이 교향곡에서 하이든의 유머가 살아있습니다. 2악장의 조용한 선율 뒤에 갑자기 터지는 큰 음. 청중을 웃기고 놀라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위대한 예술의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교향곡이 보여줍니다. 새로 유행한 오락이 위대한 예술이 된 가장 명쾌한 예입니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K.467》: 빈의 공개 콘서트를 위해 만들어진 이 협주곡이 대중을 위한 음악과 예술적 깊이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악장에서 청중이 즐거워하고, 2악장에서 청중이 침묵 속에 빠져들고, 3악장에서 함께 기뻐합니다. 이것이 모차르트가 새로운 대중 음악 시대에 이룬 것입니다.


다음 화 예고

다음 시간에는 18세기의 화려한 오락 문화 너머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새로운 예술 세계로 넘어갑니다. 로코코의 가볍고 우아한 세계가 저물고, 더 깊고 더 진지하고 더 개인적인 감정을 향해 예술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가 고통받고, 베토벤이 예술의 새로운 언어를 찾기 시작하는 시대. 낭만주의의 여명, 그 거대한 변화의 시작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P.41  로코코 시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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