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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예술, 인간을 말하다

EP.37 배우가 다시 등장하다 : 무대 위로 돌아온 인간의 목소리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19.

「예술, 인간을 말하다」 EP.37

1589년, 런던 템스강 남쪽 뱅크사이드.
한 남자가 빈 무대 위에 서 있습니다. 관객석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상인, 장인, 귀족, 하인.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간으로 모여듭니다. 사과 행상이 소리칩니다. 술집 아이가 에일을 나릅니다. 누군가 웃고 누군가 다툽니다.
그리고 막이 오릅니다.
한 배우가 걸어 나옵니다. 그는 왕이 아닙니다. 귀족도 아닙니다. 그는 그냥 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 공간이 바뀝니다. 템스강 옆의 허름한 원형 건물이 덴마크 왕궁이 되고, 베로나의 거리가 되고, 아테네의 숲이 됩니다.
이것이 연극입니다. 이것이 배우의 힘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오기까지 인류는 천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반 룬은 이 챕터에서 하나의 믿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한때 배우라는 직업이 유럽에서 사라졌다는 것. 무대가 비었다는 것. 그리고 그 빈 무대가 서서히, 조금씩, 여러 세기에 걸쳐 다시 채워지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배우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연기하고 싶은 충동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충동이 억압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억압된 것은 언제나 다시 나타납니다. 더 강하게, 더 다양한 모습으로.


그리스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바라본 모습

고대의 무대 : 배우가 신과 만나던 시절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됩니다.
배우(actor)라는 단어의 뿌리가 거기 있습니다. 그리스어 휘포크리테스(hypokrites). 원래 뜻은 대답하는 사람, 혹은 해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신전에서 합창단의 노래에 응답하는 한 사람. 그것이 배우의 기원이었습니다.
기원전 534년, 아테네. 테스피스(Thespis)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합창단에서 한 발 나와 독립적으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이 순간이 서양 연극의 탄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영어에서 배우를 뜻하는 thespian이라는 단어가 그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이 세 거장이 그리스 비극을 완성했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희극을 완성했습니다. 그리스 연극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 행사이자 시민 교육이자 공동체의 자기 성찰이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 매년 봄 아테네에서 열리는 이 축제에서 연극이 공연되었습니다. 아테네 시민 전체가 모였습니다. 공연이 며칠씩 계속되었습니다. 시민들이 공연 비용을 부담했습니다. 가난한 시민들에게는 국가가 입장료를 지원했습니다. 연극이 민주주의의 한 표현이었습니다.
배우들은 존경받았습니다. 그들은 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면을 쓰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고 더 큰 존재를 담는 행위였습니다.
로마로 넘어오면서 연극은 더 대중적이 되었습니다.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의 희극. 원형 극장에서 거대한 관중을 향해 공연되는 연극. 검투사 시합과 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오락.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배우가 오락 제공자로 내려가면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도 내려갔습니다. 로마 법에서 배우(histrio)는 시민권이 제한되었습니다. 군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공직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전통적인 가족 제도 밖의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반 룬은 이 변화에서 연극의 운명을 결정한 씨앗을 봅니다. 신성한 것에서 시작한 예술이 점점 세속화되면서, 그 예술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지위도 함께 하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락이 이후 천 년의 비극을 예비했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디오니소스 극장

교회가 무대를 닫다 : 천 년의 침묵

4세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연극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혹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 교부들이 연극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배우는 거짓말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기만이라는 것. 그리고 로마 연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적 표현, 폭력의 묘사, 이교 신들의 이야기가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
455년 서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극장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전쟁과 혼란 속에서 연극을 지탱하던 사회적 인프라가 사라졌습니다. 교회는 이 공백을 채우며 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극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배우들이 사라졌습니다. 떠돌이 광대들, 곡예사들, 저글러들, 마술사들. 이들이 중세 초기의 대중 오락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의 주변부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했습니다. 정착지 없이 떠도는 존재,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반 룬은 이 천 년의 공백을 단순히 억압의 시대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묻습니다. 인간이 연기하고 싶은 충동을 정말로 천 년 동안 억눌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충동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예배 자체가 일종의 연극이었습니다.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는 것, 성가대가 노래하는 것,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성경 이야기를 시각화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연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연극을 금지하면서 동시에 연극적 방법으로 신앙을 전달했습니다.


기원전 200년경 – 기원전 1년경 고대 그리스의  미리나 에서 발견된  디오니소스 의 가면, 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

교회가 연극을 발명하다 :  전례극의 탄생

역설이 있습니다. 연극을 금지한 교회가 연극을 다시 발명했습니다.
10세기경, 부활절 미사에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직자들이 라틴어 텍스트를 단순히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나누어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사가 무덤을 지키는 여인들에게 묻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여인들이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를 찾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그는 여기 없다. 그는 살아나셨다.
이 짧은 대화, 퀠 퀘리티스(Quem Quaeritis, 누구를 찾느냐)가 서양 연극의 재탄생으로 기록됩니다. 성직자들이 처음에는 제단 근처에서, 그다음에는 성당 본당에서, 나중에는 성당 밖 광장에서 이 장면들을 연기했습니다.
전례극이 발전했습니다. 성탄극, 수난극, 부활극. 성경 이야기 전체가 무대 위에 올라왔습니다. 처음에는 성직자들이 연기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평신도들이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비극(Mystery Play)과 기적극(Miracle Play)이 등장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이 연극들이 공연되었습니다. 길드들이 특정 장면의 공연을 담당했습니다. 빵 만드는 길드가 최후의 만찬을 담당하고, 항해사 길드가 노아의 방주를 담당하는 식이었습니다.
도덕극(Morality Play)도 생겨났습니다. 추상적인 덕목과 악덕이 인물로 등장하는 알레고리 연극. 《에브리맨(Everyman)》이 가장 유명합니다. 죽음이 에브리맨을 찾아오고, 에브리맨이 자신과 함께 갈 동반자를 찾는 이야기. 우정, 재산, 쾌락, 지식, 선행. 죽음 앞에서 누가 진정으로 함께하는가.
반 룬은 이 전례극의 발전에서 연극의 생명력을 봅니다. 억눌린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허용된 형태를 찾아 돌아옵니다. 교회가 연극을 금지했지만 인간의 연극적 충동이 교회 안으로 침투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자란 씨앗이 결국 교회 밖으로 나왔습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한 장면

코메디아 델라르테 : 배우가 거리로 나오다

연극이 교회에서 거리로 나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였습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이 직업 연극은 이전의 모든 것과 달랐습니다.
직업 배우들이 있었습니다. 성직자도 아니고, 길드원도 아닌, 연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 남성 배우뿐 아니라 여성 배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중세 연극에서 여성 역할은 항상 남성이 맡았습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고정된 캐릭터들이 있었습니다. 아를레키노(Arlecchino, 영어로 Harlequin). 색색의 마름모꼴 패턴 의상을 입은 재치 있고 민첩한 하인. 판탈로네(Pantalone). 탐욕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늙은 베네치아 상인. 도토레(Dottore). 허풍스러운 학자. 이나모라티(Innamorati). 사랑에 빠진 연인 커플들. 이 고정된 캐릭터들이 매번 새로운 상황에서 만났습니다.
즉흥 연기(improvisation)가 핵심이었습니다. 대본이 없었습니다. 배우들이 기본 줄거리(scenario)만 가지고 즉흥적으로 연기했습니다. 이 즉흥성이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살아있게 했습니다. 배우들이 관중의 반응을 즉각 읽고 조정했습니다.
광장에서 공연했습니다. 시장터, 거리, 어디서든 관객이 모이면 무대가 되었습니다. 관객이 웃으면 더 하고, 관객이 지루해하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 형식이 유럽 전체로 퍼졌습니다. 프랑스, 스페인, 영국, 독일. 아를레키노가 영국에서는 Harlequin이 되고 프랑스에서는 Arlequin이 되었습니다. 판탈로네에서 pantalone, 즉 오늘날 바지(pants)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캐릭터들과 연기 방식이 이후 유럽 희극 전통 전체에 스며들었습니다.
반 룬은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연극의 가장 본질적인 형태를 봅니다. 화려한 극장도, 문학적 텍스트도, 왕의 후원도 필요 없습니다. 배우와 관객과 이야기. 이 세 가지면 충분합니다. 광장에서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들이 수백 년의 침묵을 깨고 연극을 민중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탈리아 풍경 속 코메디아 델라르테 장면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 셰익스피어의 세계

16세기 말 영국. 연극이 가장 찬란하게 부활한 곳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시대(재위 1558~1603).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양 강국으로 부상하던 시기. 상업이 번성하고 도시가 성장하고 새로운 중산층이 생겨나던 시기. 이 에너지가 연극으로 흘러들었습니다.
1576년, 제임스 버비지(James Burbage)가 런던 북쪽에 영국 최초의 전용 극장 건물을 세웠습니다. 이름이 '더 시어터(The Theatre)'였습니다. 극장이라는 개념이 너무 새로워서 이름도 그냥 '극장'이었습니다.
이후 템스강 남쪽 뱅크사이드에 여러 극장들이 들어섰습니다.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 로즈 극장(Rose Theatre), 포춘 극장(Fortune Theatre). 이 극장들이 매일 공연을 올렸습니다. 관객이 수천 명씩 모였습니다.
그 배경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가 등장했습니다.
반 룬은 셰익스피어에 대해 조심스럽습니다. 너무 많은 말이 이미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신 셰익스피어가 가능했던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글로브 극장의 구조가 중요했습니다. 원형 극장. 무대가 관객석 안으로 돌출되어 있었습니다. 3층 갤러리에 앉은 귀족과 마당에 선 평민이 같은 공연을 보았습니다. 이 민주적 공간이 셰익스피어로 하여금 모든 계층을 위해 쓰게 했습니다. 하층민을 위한 광대 장면과 귀족을 위한 시적 독백이 같은 연극 안에 공존했습니다.
직업 배우 집단이 있었습니다. 체임벌린 경의 부하들(Lord Chamberlain's Men). 셰익스피어가 속한 이 극단이 오늘날 직업 극단의 원형이었습니다. 배우들이 함께 투자하고, 함께 공연하고, 함께 수익을 나누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극단의 배우이자 작가이자 주주였습니다.
반 룬은 이 구조에서 연극의 완전한 성숙을 봅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 연극이 르네상스 영국에서 새로운 형태로 부활했습니다. 신을 위한 연극이 아닌 인간을 위한 연극. 성직자를 위한 연극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연극. 이것이 배우의 귀환이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글로브 극장, 런던, 영국

배우의 사회적 지위 : 경멸에서 존경으로의 긴 여정

그러나 배우가 무대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즉각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에서도 배우들은 법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고정된 후원자 없이 떠도는 배우들은 부랑자(vagrant)로 체포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극단들이 귀족의 후원을 구했습니다. 체임벌린 경, 애드미럴 경. 귀족의 이름을 달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 몰리에르의 장례 거부가 보여주듯 17세기에도 배우들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 상태에 있었습니다. 정식 임종 의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배우로서 죽으면 거룩한 땅에 묻힐 수 없었습니다.
이 이중성이 배우들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왕을 연기하면서 무대 밖에서는 이류 시민으로 취급받는 것.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교회의 성례전을 거부당하는 것.
그러나 서서히, 매우 천천히,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스타 배우들이 귀족 가정의 초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루이 14세가 몰리에르의 극단을 후원했습니다. 영국에서 찰스 2세 복위(1660년) 이후 왕립 극단들이 왕의 이름을 달고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중요한 변화 하나가 더 일어났습니다. 여성 배우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공식 무대에 선 것은 1660년 이후였습니다. 넬 그윈(Nell Gwynn)이 그 선구자 중 하나였습니다. 찰스 2세의 연인이 되기도 한 이 배우의 등장이 영국 연극의 성격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남성이 여성 역할을 하던 셰익스피어 시대의 관습이 끝났습니다.
반 룬은 이 변화들이 단순한 연극계 내부의 일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배우의 지위 향상은 더 넓은 사회 변화의 반영이었습니다. 르네상스가 개인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상업 사회가 새로운 형태의 문화 소비를 만들었습니다. 그 속에서 배우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회의 중심을 향해 이동했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

스페인의 황금 세기 : 또 다른 무대

영국만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16~17세기에 연극의 황금기가 왔습니다.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 1562~1635). 그의 생산성은 전설적입니다. 추정되는 작품 수가 1,500편에서 1,800편에 이릅니다. 그 중 오늘날 남아있는 것이 약 400편. 이 숫자만으로도 당시 스페인 대중이 연극을 얼마나 원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로페의 연극은 귀족과 평민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명예, 사랑, 충성, 배신. 스페인적 가치들이 무대 위에서 살아났습니다. 그의 연극에서 평민이 귀족의 부당함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스페인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가장 민주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ón de la Barca, 1600~1681). 스페인 바로크 연극의 절정. 그의 《인생은 꿈(La vida es sueño)》은 오늘날에도 공연됩니다. 왕자 세히스문도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묻습니다. 삶이 꿈이라면 무엇이 진짜인가. 이 철학적 질문이 극적 형식으로 표현된 것.
반 룬은 스페인 황금세기 연극에서 가톨릭 신앙과 연극적 열정이 어떻게 공존했는지를 봅니다. 프랑스에서 몰리에르가 교회와 갈등을 빚었다면, 스페인에서는 연극이 가톨릭 신앙의 언어 안에서 번성했습니다. 같은 예술 형식이 다른 문화 맥락에서 전혀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극장 건축 : 무대가 공간을 만들다

배우가 돌아오면서 극장 건축도 발전했습니다.
중세의 연극 공간은 임시적이었습니다. 성당 광장, 시장 마당, 귀족의 연회장. 특별히 연극을 위해 설계된 공간이 없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최초의 현대적 극장 건물이 등장했습니다. 비첸차의 올림피코 극장(Teatro Olimpico, 1585년).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하고 빈첸초 스카모치가 완성한 이 극장은 고대 로마 극장을 실내에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정교한 원근법 무대 장치. 영원히 거기 있는 도시 풍경처럼 보이는 배경.
영국의 엘리자베스 시대 극장들은 달랐습니다. 글로브 극장의 원형 구조. 무대가 관객석 안으로 돌출되어 있어 배우가 관객에게 둘러싸이는 형태. 자연광. 최소한의 무대 장치. 이 단순함이 관객의 상상력을 최대화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이 나무 O자 안에서"라고 쓸 때 그것이 글로브 극장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식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 극장이 발전했습니다. 무대와 관객석을 명확히 구분하는 액자형 구조. 정교한 무대 기계 장치. 비행 장치, 바닥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장치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극장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오페라 극장. 18세기에 완성된 이 공간에서 왕이 최고 관객의 자리에 앉고 나머지 모든 사람이 왕을 향해 앉았습니다. 무대가 관객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에게 말하는 공간. 이것이 절대주의 시대 극장 구조의 의미였습니다.
반 룬은 이 극장 건축의 역사에서 권력과 예술의 관계가 공간에 새겨지는 방식을 봅니다. 극장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그 사회가 연극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민주적 원형 극장과 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 극장. 같은 예술이 전혀 다른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배우의 귀환이 의미하는 것

반 룬은 이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배우의 귀환이라는 현상의 깊은 의미를 성찰합니다.
왜 인간은 연기를 하는가. 왜 다른 사람인 척하는가. 왜 그것을 보러 가는가.
반 룬의 답은 단순합니다. 연극이 삶을 이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무대 위에서 한 인물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관객은 그 선택을 보며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생각합니다. 무대 위에서 한 인물이 비극적 결말을 맞습니다. 관객은 안전한 거리에서 그 감정을 경험합니다. 무대 위에서 한 인물이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관객은 웃으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입니다. 정화. 연극이 감정을 자극하고 그 감정을 통해 관객을 정화시킨다는 것.
그러나 반 룬은 더 나아갑니다. 연극이 단순히 감정적 경험만이 아니라고. 연극이 공동체를 만든다고.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들이 디오니소스 극장에 함께 앉아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본 것. 중세 영국에서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노아의 방주를 함께 본 것. 엘리자베스 시대 런던에서 귀족과 평민이 글로브 극장에서 핵릿을 함께 본 것. 이 공유된 경험이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연극을 금지했을 때, 교회는 어쩌면 이 공동체 형성의 힘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릅니다. 연극이 만드는 공동체는 교회가 만드는 공동체와 달랐습니다. 신 앞에 복종하는 공동체가 아닌, 인간 이야기 앞에 동등하게 모이는 공동체.
배우가 무대로 돌아온 것은 단순히 한 직업이 복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말할 권리를 되찾은 것이었습니다.
몰리에르가 무대 위에서 쓰러졌을 때, 그것은 한 배우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천 년의 침묵을 깨고 돌아온 목소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배우는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번 화 감상 추천

배우가 돌아온 시대, 연극과 음악이 하나가 된 순간들을 경험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오르페오》 중 〈나는 강력한 정신을 가졌노라〉 : 1607년, 연극과 음악이 오페라로 결합되는 바로 그 순간의 음악. 배우이자 가수인 오르페오가 지하 세계의 신에게 에우리디케를 돌려달라고 노래할 때, 천 년의 침묵을 깨고 돌아온 인간의 목소리가 얼마나 강렬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배우의 귀환과 오페라의 탄생이 같은 에너지에서 나왔습니다.

    • 헨리 퍼셀, 《요정 여왕》 중 〈이제 밤은 쫓겨나고 (Now the Night Is Chased Away)〉: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바탕으로 퍼셀이 만든 이 세미 오페라의 여명 장면. 글로브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배우들이 만들어낸 세계가 음악으로 이어진 것처럼 들립니다. 긴 밤이 물러가고 빛이 밀려오듯, 연극의 긴 침묵이 끝나고 인간의 목소리가 돌아오는 여명을 이 음악에서 듣습니다.


다음 화 예고

다음 시간에는 배우의 귀환과 동시에 탄생한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넘어갑니다. 노래하는 배우, 연기하는 가수. 음악과 연극이 하나가 된 예술. 1600년경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이 고대 그리스 비극을 재현하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을 발명했습니다. 오페라. 이 새로운 예술이 어떻게 유럽 전체를 사로잡았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이 노래하는 배우의 이야기에 이토록 감동받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P.38 : 오페라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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