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인간을 말하다」

1640년, 안트베르펜 루벤스의 작업실.
루벤스가 죽었습니다. 예순두 살.
그의 장례식에 안트베르펜 전체가 모였습니다. 상인들, 귀족들, 화가들, 길드 장인들. 스페인 왕, 영국 왕, 프랑스 왕이 조의를 보냈습니다. 왕들이 화가의 죽음에 조의를 보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의 작업실에는 미완성 작품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조수들이 멈추었습니다. 어떤 붓 자국이 마스터의 것이고, 어떤 것이 자신들의 것인지를 이제 마스터가 없이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루벤스가 만든 세계가 작업실 밖으로, 플랑드르 밖으로, 유럽 전체로 이미 퍼져나간 후였으니까요.
반 룬은 이 장면 앞에서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하나의 시대가 끝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시대는 갑자기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시대가 심어놓은 씨앗들이 계속 자랍니다. 루벤스의 씨앗이 반 다이크로, 요르단스로, 그리고 유럽 전체의 바로크 궁정 예술로 자랐습니다.
황금시대의 절정은 루벤스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만든 세계, 그 세계를 이어받고 변화시킨 사람들, 그리고 그 세계가 닿은 모든 곳이었습니다.

황금시대란 무엇인가 : 두 개의 황금시대
황금시대라는 말이 17세기 예술을 이야기할 때 두 번 사용됩니다.
하나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입니다. 앞 챕터에서 살펴본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할스의 세계. 칼뱅주의 공화국에서 꽃핀 시민 예술.
다른 하나가 이번 챕터의 주제입니다. 플랑드르의 황금시대. 가톨릭과 스페인 왕실의 지배 아래 있던 남부 네덜란드, 즉 오늘날의 벨기에에서 꽃핀 예술. 루벤스를 중심으로 한, 더 화려하고 더 관능적이고 더 압도적인 예술.
이 두 황금시대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문화권에서, 그러나 전혀 다른 정치적·종교적 조건 아래서 피어났습니다. 이 대조가 반 룬에게 깊은 흥미를 줍니다.
같은 민족이 어떻게 이토록 다른 예술을 만들었는가. 북부의 개신교 공화국은 절제와 고요와 일상의 미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남부의 가톨릭 군주국은 과잉과 열정과 장대함의 미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반 룬의 답은 간단합니다. 예술은 그것이 자란 사회를 닮는다고. 칼뱅주의 상인 사회가 페르메이르를 원했고, 가톨릭 궁정 사회가 루벤스를 원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위대한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둘 다 자신의 사회를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루벤스의 유산 : 씨앗이 뿌려지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그를 다시 봐야 합니다. 앞 챕터에서 소개했지만 이 챕터에서 그의 유산을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벤스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의 시스템이었습니다.
그의 작업실을 들여다봅니다. 안트베르펜의 거대한 작업실에 수십 명의 조수들이 있었습니다. 루벤스가 밑그림을 그리면 조수들이 그것을 캔버스로 옮겼습니다. 루벤스가 중요한 부분, 특히 얼굴과 손을 직접 완성했습니다. 이 생산 방식으로 유럽 전역의 주문을 소화했습니다.
이것이 품질 저하를 의미했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루벤스는 자신이 어느 정도 직접 그렸는지를 가격에 반영했습니다. 그의 친필 비율에 따라 다른 가격이 매겨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미술 시장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원칙의 원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루벤스의 더 큰 유산은 그가 직접 훈련시킨 화가들이었습니다.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루벤스의 가장 뛰어난 제자. 그는 스승의 풍성한 바로크 양식을 흡수했지만 자신만의 방향을 찾았습니다. 더 우아하게. 더 심리적으로. 더 귀족적으로.
야코프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 루벤스 이후 안트베르펜 최고의 화가. 그는 루벤스의 생명력을 이어받되 더 대중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농민들의 축제, 가족의 식사, 일상의 즐거움. 루벤스가 신화와 역사를 주로 그렸다면 요르단스는 지상의 삶을 더 직접적으로 담았습니다.
반 룬은 이 세 사람, 루벤스와 반 다이크와 요르단스가 만들어낸 플랑드르 황금시대를 하나의 완결된 예술 세계로 봅니다.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세 거인이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서 서로를 자극하며 최고의 것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안토니 반 다이크 : 귀족을 영원하게 만든 사람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그는 열다섯 살에 루벤스의 작업실에 들어갔습니다. 열아홉 살에 이미 독립적인 마스터로 인정받았습니다. 루벤스 자신이 이 제자를 가장 뛰어난 조수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반 다이크는 스승의 그늘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1620년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를 공부했습니다.
1632년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찰스 1세의 궁정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영국 왕실을 시각적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만들었습니다.
반 다이크의 초상화들에서 귀족들은 어떻게 보이는가.
우아합니다. 손이 길고 섬세합니다. 의복이 풍성하게 흘러내립니다. 표정에 약간의 권태가 있습니다. 그 권태가 오히려 세련됨을 표현합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상인의 초상이 아닙니다. 여유롭게 존재하는 귀족의 초상입니다.
《찰스 1세 기마상(Equestrian Portrait of Charles I, 1637~1638)》. 런던 내셔널 갤러리. 말 위의 왕. 배경에는 드라마틱한 하늘과 숲. 왕이 고개를 약간 돌려 보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단순한 초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군주권의 시각적 선언입니다. 왕은 자연의 주인입니다. 말을 탄 채 드라마틱한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
아이러니는 이 그림이 그려진 지 10년 후 찰스 1세가 처형당했다는 것입니다. 반 다이크가 만든 불멸의 이미지와 역사적 현실의 충돌. 예술이 현실보다 오래 산다는 것의 역설적 증명이기도 했습니다.
반 다이크는 서른두 살에 죽었습니다. 너무 짧은 생애. 반 룬은 이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씁니다. 반 다이크가 더 살았다면 영국 회화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 짧은 생애에 그가 영국에 심어놓은 씨앗이 이후 200년 영국 초상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야코프 요르단스 : 삶의 열정을 그린 사람
야코프 요르단스(Jacob Jordaens, 1593~1678)는 루벤스, 반 다이크와 함께 안트베르펜 바로크의 삼두체제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 중 가장 덜 알려져 있습니다.
요르단스는 루벤스의 직접적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루벤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고, 루벤스 사후에는 그의 미완성 작품들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요르단스의 특기는 축제와 가족이었습니다.
《왕은 술을 마신다(The King Drinks, 1640년대)》. 이 그림에서 한 가족이 공현절(Epiphany) 파이를 나누고 있습니다. 파이 안에 숨겨진 콩을 찾은 사람이 그날의 왕이 됩니다. 왕 역할을 맡은 할아버지가 잔을 들어 올립니다. 가족 모두가 외칩니다. 왕이 마신다. 주위에 웃음이 넘칩니다. 개도 짖습니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탁자 위에 음식이 어지럽게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루벤스였다면 더 웅장하고 더 이상화되었을 것입니다. 요르단스는 다릅니다. 더 현실적입니다. 더 냄새가 납니다. 더 소란스럽습니다. 이 가족들이 실제로 존재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웃음이 실제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요르단스는 나중에 칼뱅주의로 개종했습니다. 가톨릭 플랑드르에서 가톨릭 주문으로 바로크 그림을 그리다가 개신교로 전향한 것입니다. 이 전환이 그의 그림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더 도덕적인 주제들, 더 절제된 표현.
반 룬은 요르단스에서 예술가와 신앙의 복잡한 관계를 봅니다. 신앙이 바뀌면 예술도 바뀌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르단스의 말년 작품들에도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신앙의 변화가 예술을 죽이지 않았지만 예술의 성격을 바꾸었습니다.
바로크의 확산 : 루이 14세의 프랑스
루벤스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나라 중 하나는 프랑스였습니다.
루이 14세(재위 1643~1715). 태양왕. 그는 유럽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화려한 군주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역사상 가장 의식적인 예술 후원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예술이 권력의 도구임을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권력의 시각적 선언으로 만들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 파리 남서쪽의 이 거대한 건축물과 정원이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쳐 만들어졌습니다.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 길이 73미터의 이 홀에 17개의 거대한 아치형 거울이 반대편 창문들을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정원이 펼쳐집니다. 거울들이 정원과 빛을 반영합니다. 왕이 이 홀을 걸을 때 그의 모습이 모든 거울에 비칩니다. 이 공간의 압도적인 규모는 프랑스의 압도적인 권력을 표현합니다.
루이 14세가 선택한 화가는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이었습니다. 르 브룅은 프랑스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수장이 되었고, 프랑스 예술의 공식 양식을 결정했습니다. 루벤스의 화려함에 프랑스적 절제를 더한 양식. 바로크이지만 고전주의적 규율을 유지하는 것.
이 프랑스 바로크, 혹은 고전주의 바로크가 유럽 귀족 예술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반 룬은 루이 14세의 예술 정책에서 국가와 예술의 가장 노골적인 관계를 봅니다. 루이 14세는 예술을 사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예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은 거주 공간이기 이전에 권력의 선전입니다. 화려한 궁정 행사는 오락이기 이전에 복종의 훈련입니다. 예술가에게 정규 봉급을 주는 것은 후원이기 이전에 통제입니다.
이 냉정한 이해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궁전 중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술가들을 왕의 시녀로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것과 문제적인 것이 같은 결정에서 나왔습니다.
니콜라 푸생 : 이성의 바로크
루이 14세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를 논한다면, 역설적으로 로마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낸 사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푸생은 프랑스인이었지만 로마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고대 조각과 르네상스 거장들을 연구하면서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바로크의 감정적 과잉을 거부하고, 고전적 이성과 질서를 회화에 적용하는 것.
《아르카디아의 목자들(Et in Arcadia Ego, 1637~1638)》. 이상적인 전원 세계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이 무덤을 발견합니다. 무덤 위에 새겨진 글귀. 나도 아르카디아에 있었다. 죽음이 낙원에도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에도 죽음은 찾아옵니다.
이 철학적 주제를 푸생은 완벽하게 균형 잡힌 구성으로 표현합니다. 인물들이 수학적으로 배치됩니다. 색채가 절제됩니다. 감정이 통제됩니다. 이것이 바로크인가, 아니면 고전주의인가. 푸생은 그 경계에 있습니다.
프랑스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서 푸생은 이상적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성적이고 절제된 양식이 프랑스 예술 교육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반 룬은 푸생에서 흥미로운 역설을 봅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가 프랑스를 떠나 로마에서 고대를 공부함으로써 가장 프랑스적인 예술을 만들어냈습니다. 뿌리에서 벗어남으로써 뿌리로 돌아가는 것. 이 역설이 종종 가장 창조적인 경로가 됩니다.
클로드 로랭 : 빛의 풍경화
같은 시기 로마에서 활동한 또 다른 프랑스 화가가 있습니다.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
그의 전문은 이상화된 풍경화였습니다. 이탈리아의 황금빛 오후. 고대 신전의 폐허가 있는 강변. 빛이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항구. 이 장면들이 클로드의 그림 속에 영원히 포착되어 있습니다.
클로드의 혁신은 빛에 있었습니다. 그는 태양이 수평선 근처에 있을 때의 빛을 즐겨 그렸습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빛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 대기가 안개처럼 빛에 의해 부드러워질 때.
이 빛의 표현이 이후 영국 풍경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지프 터너가 클로드를 공부했습니다. 터너가 죽으면서 자신의 두 그림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할 때 조건을 달았습니다. 클로드의 그림 옆에 걸려야 한다는 것. 그가 클로드의 계승자임을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반 룬은 클로드의 풍경화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만남을 봅니다. 이탈리아적 웅장함과 네덜란드적 빛의 관찰이 한 화면에 공존합니다. 그리고 이 공존이 낭만주의 풍경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터너를 거쳐 컨스터블로, 그리고 19세기 인상주의의 빛의 탐구로.
스페인 바로크 : 어둠과 신비
바로크 예술의 또 다른 중요한 중심은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 바로크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다릅니다. 더 어둡습니다. 더 신비롭습니다. 종교적 주제에서 더 깊은 내면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페인 가톨릭의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반종교개혁의 열정, 예수회의 엄격함, 이단 심문의 그림자.
후세페 데 리베라(Jusepe de Ribera, 1591~1652). 스페인 출신이지만 나폴리에서 활동했습니다. 카라바조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그림들에서 성인들이 고통받습니다. 피부가 거칩니다. 근육이 축 늘어집니다. 이것은 화려한 바로크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의 신학입니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1598~1664). 수도원을 위한 그림들. 수도사들이 명상하는 장면들. 흰 수도복의 빛과 그림자. 극도로 단순한 구성. 극도로 강렬한 집중. 이것들이 수르바란의 세계입니다. 카라바조의 빛이 여기서 신비주의적 명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이미 앞에서 소개했지만 스페인 바로크의 절정으로 다시 언급해야 합니다. 그의 《시녀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이 스페인 바로크 전체를 특징짓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재 사이의 간격. 이미지와 현실의 경계. 예술가의 역할.
반 룬은 스페인 바로크에서 고통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스페인적 이해를 봅니다. 이탈리아 바로크가 신앙을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면, 스페인 바로크는 신앙을 고통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더 어두운 신앙인가. 반 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신앙입니다. 영광보다 수난에서 신을 만나는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이 깊은 예술을 낳았습니다.
무리요 : 사랑의 종교화
스페인 바로크에서 전혀 다른 방향이 있었습니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
무리요는 세비야의 화가였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리베라나 수르바란과 달리 밝고 부드럽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름답습니다. 아기 예수가 사랑스럽습니다. 천사들이 달콤합니다. 거리의 아이들이 천진합니다.
그의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Immaculate Conception)》들은 스페인 바로크에서 가장 사랑받은 종교화들입니다. 하늘빛에 감싸인 마리아, 발아래 구름과 천사들. 이것은 신학적 선언이기 이전에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신앙을 불러일으킵니다.
무리요는 또한 거리 아이들의 화가였습니다. 세비야의 가난한 아이들이 그의 모델이었습니다. 파이를 먹는 아이들, 서로 이를 잡아주는 아이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 이 그림들에서 렘브란트적 연민이 스페인적 온기와 만납니다.
반 룬은 무리요에서 바로크의 또 다른 얼굴을 봅니다. 카라바조의 극적 어둠, 루벤스의 풍성한 과잉, 벨라스케스의 지적 복잡성. 이것들과 나란히 무리요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바로크는 하나의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대 전체의 에너지였고, 그 에너지가 서로 다른 기질의 화가들을 통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바로크 조각의 완성 : 베르니니 너머
베르니니가 바로크 조각을 창시했다면, 그의 영향 아래 수많은 조각가들이 이 언어를 발전시켰습니다.
프란체스코 두케스노이(François Duquesnoy, 1597~1643). 벨기에 출신으로 로마에서 활동했습니다. 베르니니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지만 더 절제된 고전주의 양식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에서 감정이 베르니니보다 더 내면화됩니다. 폭발하지 않고 깊어집니다.
알레산드로 알가르디(Alessandro Algardi, 1598~1654). 역시 로마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조각가. 베르니니의 경쟁자. 베르니니가 극적인 움직임을 추구했다면 알가르디는 더 고요하고 더 클래식한 방향을 추구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베르니니와 함께 17세기 로마 조각의 다양성을 만들었습니다. 하나의 시대, 하나의 도시에서 세 가지 방향이 공존했습니다.
반 룬은 이 다양성에서 바로크 시대의 지적 풍성함을 봅니다. 모든 예술가가 같은 방향을 향했다면 그 시대는 풍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갈등하고 논쟁하고 서로 다른 해법을 찾는 것이 예술적 생산성의 원천이었습니다.
황금시대가 저물다 : 시대의 변화
17세기가 끝나가면서 황금시대도 서서히 저물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상업적 번영이 쇠퇴했습니다. 영국과의 해전, 프랑스와의 전쟁. 암스테르담의 경제적 주도권이 런던으로 넘어갔습니다. 예술 시장이 위축되었습니다. 렘브란트가 파산한 것이 상징이었습니다.
플랑드르에서는 루벤스의 죽음 이후 그 수준을 이어갈 화가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반 다이크가 일찍 죽었습니다. 요르단스가 오래 살았지만 그의 후반기 작품들은 전성기만큼 강렬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 루이 14세의 절대주의가 예술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왕립 아카데미가 허용하는 양식과 주제만이 인정받았습니다. 이 관료주의가 창의성을 줄였습니다.
그러나 반 룬은 이 쇠퇴를 단순한 종말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의 시대가 끝날 때 그것이 심어놓은 씨앗들이 다른 곳에서 자랍니다.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시민 예술 전통이 영국으로 건너가 18세기 영국 회화를 낳았습니다. 루벤스의 색채 혁명이 드라크루아를 거쳐 인상주의로 이어졌습니다. 베르니니의 극적 조각이 이후 200년 유럽 조각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클로드의 빛이 터너를 낳았습니다.
황금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황금이 만든 것들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반 룬이 황금시대의 절정에서 읽어낸 것
반 룬은 이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위대한 시대의 의미를 성찰합니다.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시기들이 역사에 몇 번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시대,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리고 17세기 바로크의 황금시대. 이 시기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반 룬은 세 가지를 봅니다.
첫째, 경제적 번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번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번영이 창의성에 투자되어야 합니다. 루벤스의 안트베르펜, 렘브란트의 암스테르담,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이 모든 곳에서 경제적 에너지가 예술적 에너지로 변환되었습니다.
둘째, 경쟁이 있었습니다. 루벤스와 반 다이크,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 베르니니와 알가르디. 이 경쟁자들이 서로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독점은 창의성을 죽입니다. 경쟁이 최선을 끌어냅니다.
셋째, 사회가 예술을 필요로 했습니다. 신앙의 언어로, 권력의 언어로, 시민의 삶의 언어로. 사회가 예술에게 역할을 부여했고, 예술이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발전시켰습니다.
반 룬은 1937년 유럽이 다시 전쟁을 향해 가는 것을 보면서 이 황금시대들을 이야기했습니다. 황금시대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황금시대가 만들어낸 것들은 전쟁보다, 제국보다, 시간보다 오래 삽니다.
루벤스의 색채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렘브란트의 빛은 지금도 빛납니다. 페르메이르의 창문은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베르니니의 조각은 지금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번 화 감상 추천
황금시대의 절정, 바로크 예술의 웅장함과 깊이를 음악으로 경험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 아르칸젤로 코렐리, 바이올린 소나타 Op. 5 No.12 〈라 폴리아〉 : 루벤스와 렘브란트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탈리아 작곡가. 이 변주곡에서 단순한 스페인 민요 선율이 점점 복잡하고 화려하게 변화합니다. 루벤스의 그림들처럼 처음에는 단순해 보이다가 볼수록 풍성해지는 음악입니다.
- 장 밥티스트 뤼리, 오페라 《아르미드》 서곡 : 루이 14세의 궁정 작곡가. 이 음악에서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과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이 소리로 들립니다. 푸생의 고전적 질서와 루벤스의 바로크 에너지가 프랑스적 우아함으로 결합된 것 같습니다.
- 얀 피테르스존 스베링크, 오르간 환상곡 D단조 :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음악적 기둥. 암스테르담 구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그의 음악은 렘브란트의 빛처럼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옵니다. 복잡한 대위법적 구조 속에서 감정적 깊이가 살아납니다. 황금시대 예술의 가장 완벽한 음악적 표현입니다.
다음 화 예고
다음 시간에는 황금시대의 마지막 빛이 꺼지기 전 찾아온 한 특별한 예술 세계로 넘어갑니다. 희극의 왕, 코미디의 거장,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가장 날카롭게 해부한 사람.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극작가이자 배우이자 연출가. 몰리에르. 그리고 그가 만든 연극의 세계가 어떻게 바로크 예술의 또 다른 언어가 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EP.36 : 몰리에르는 죽어서 성지에 묻히다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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