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진 한 장
이 회를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하고 싶다.

1985년 9월의 어느 날. 서울의 한 호텔 로비. 60대 여성이 한 노인 남성을 마주 보고 있다. 두 사람 다 울고 있다. 그러나 그 울음이 어떤 종류인지는 사진만으로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환희인가, 회한인가, 그 둘 모두인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아닌 무엇인가.
두 사람은 형제다. 1950년 12월 흥남에서 헤어졌다. 그때 형은 19세, 동생인 그 여성은 13세였다. 가족이 흥남 부두에서 함정에 오르려다 어머니와 둘째 동생과는 함께 탔지만 형과는 떨어졌다. 형은 부두에 남겨졌고, 가족은 부산으로 향했다. 그 후 35년이 지났다. 1985년의 그날 두 사람은 호텔 로비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사이의 35년 동안 그들 사이에 흐른 시간을 그 자리에서 어떻게 다 옮길 수 있었을까.
이 사진 한 장이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새긴 가장 깊은 흔적을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EP.22에서 다룬 반공국가의 거시 구조 아래에서, 한국인 개개인이 평생 안고 살아간 것들. 그 안고 살아간 무게가 가족 단위에서, 마을 단위에서, 그리고 한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모양을 가졌는가. 이번 회의 주제다.
이산가족이라는 말
먼저 "이산가족"이라는 말의 무게를 짚어두어야 한다.
이산가족(離散家族)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가지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흩어진 가족"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으로 분리된 가족, 그리고 그 후 수십 년 동안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던 가족을 가리킨다.
이산가족의 정확한 수는 오늘날까지 확정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공식 추산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이산가족의 총수는 약 1,000만 명에 이른다. 그 중 남한 측에 살아남은 이산가족 1세대(직접 헤어진 세대)의 수는 1980년대 초 시점에 약 50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1세대가 점점 사망해갔다. 2020년대 시점에 살아 있는 1세대 이산가족의 수는 약 4만 명 이하로 줄었다.

이산가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는 여러 갈래다. EP.18에서 다룬 1·4 후퇴 시기에 가족 일부만 남쪽으로 이동한 경우가 가장 많다. 흥남 부두에서, 한강에서, 38선 부근에서 가족이 흩어진 경우. 점령기 90일 또는 점령기 직후에 가족 중 누군가가 북쪽으로 끌려가거나 또는 자발적으로 이동한 경우(EP.11에서 다룬 김규식과 정인보 같은 인사들의 가족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전, 즉 1945년에서 1950년 사이 38선이 사실상 국경이 되어가던 시기에 한 가족이 양쪽에 분리된 경우.
이 모든 경우의 공통점이 있다. 가족이 헤어진 순간에 누구도 그 헤어짐이 평생의 헤어짐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 흥남 부두에서 형을 두고 떠난 그 여성도, 부산에 도착하면 곧 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점령기에 끌려간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전쟁이 끝나면 곧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38선이 닫히던 시기에 양쪽에 흩어진 가족들도,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예상이 무너졌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에도 남북 사이의 인적 교류는 완전히 단절된 채로 유지되었다.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30년 이상 지속된 것이다.
1985년 9월의 첫 만남
남북 이산가족의 첫 상봉은 1985년 9월 20일부터 23일 사이에 이뤄졌다. 한국전쟁 정전 후 정확히 32년 만이었다.
이 첫 상봉의 규모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남측에서 50명, 북측에서 50명, 합계 100명만이 참가했다. 그들은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자기 가족을 만났다. 만남의 시간은 매우 짧았다. 약 3박 4일의 기간에 합쳐서 11시간 정도의 면담이 가능했다. 그 후 그들은 다시 헤어져야 했다. 32년의 그리움 끝에 만난 가족과 11시간을 보내고 다시 헤어지는 일. 그 무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박완서는 이 1985년 첫 상봉에 관한 짧은 산문을 남겼다. 그녀의 가족에 직접 이산가족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그 상봉의 의미를 깊이 받아들였다. 그녀의 글에서 인상적인 한 구절이 있다. "그날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잃고 살았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잃어버린 가족이 아니라, 그 가족과 함께 잃어버린 우리 자신의 일부였다."
이 표현이 이산가족 문제의 가장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산가족은 단순히 가족이 분리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의 일부, 즉 자기 가족과의 연결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 자신의 일부가 평생 끊긴 채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끊김의 무게가 약 1,000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의 삶에 새겨졌다.
1985년 이후, 그리고 그 사이의 33년
1985년의 첫 상봉 이후에도 이산가족 상봉은 결코 정례화되지 않았다. 1985년 9월의 첫 상봉 이후 다음 상봉이 이뤄지기까지 다시 15년이 걸렸다. 2000년 8월에 두 번째 상봉이 이뤄졌고, 그 후에는 일부 정례화되었다. 그러나 그 정례화도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남북 관계의 부침에 따라 상봉은 자주 중단되었고, 2015년 이후로는 사실상 거의 중단된 상태다.
2000년 이후 이뤄진 모든 상봉을 합쳐도 직접 가족을 만난 사람의 총수는 약 2만 명에 불과하다. 약 1,000만 명의 이산가족 중 0.2퍼센트 정도만이 살아 있는 동안 가족을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99.8퍼센트의 이산가족은 평생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사망했거나, 또는 만나지 못한 채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 통계의 무게는 단순한 숫자로는 다 옮길 수 없다. 한 가족의 사연을 통해 그 무게를 짚어볼 수 있을 뿐이다. 1985년 첫 상봉에 참가한 한 70대 노인이 평양에서 자기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90대였다. 두 사람은 1950년 12월 평양에서 헤어진 후 35년 만의 만남이었다. 11시간의 상봉 후 두 사람은 다시 헤어졌다. 그 노인이 서울로 돌아온 후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았을 때, 나는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그의 어머니는 다음 해에 평양에서 사망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런 사연이 약 2만 건이다. 그리고 그 2만 건 너머에 만남 자체를 갖지 못한 약 998만 건이 있다. 한국전쟁이 한국 가족에 새긴 가장 깊은 상처가 이 숫자들 안에 있다.
부역자 가족이라는 또 다른 침묵
이산가족의 침묵 외에 또 다른 종류의 침묵이 한국 가족에 새겨졌다. 부역자 가족 또는 의용군 가족의 침묵이다.
EP.12에서 다룬 박완서의 오빠 박종서의 사례를 다시 보자. 그는 1950년 7월 의용군으로 끌려갔고, 후에 탈출해 가족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인생 전체가 "의용군 출신" 의혹의 그림자 아래 있었다. 그 의혹이 그의 결혼, 취업, 군 입대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박종서 자신뿐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가 그 의혹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야 했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들이 묘사한 그 가족의 그 후 인생을 짧게 옮겨두고 싶다. 박종서는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보호 아래 그 의혹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의혹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는 평생 자기 과거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그 시기에 관한 어떤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박완서 자신도 약 40년 동안 그 시기에 관해 쓸 수 없었다. 그녀가 비로소 그 시기를 자전적 소설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사건으로부터 40년 이상이 지난 후였다.
이 40년이 무엇이었는가. 김동춘은 그것을 "강요된 침묵"이라고 표현했다. 부역자 또는 의용군 의혹을 받은 가족은 그 의혹의 그림자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과거에 관한 모든 말을 봉인해야 했다. 어떤 말이든 그 의혹을 다시 떠올리게 할 수 있었고, 그 의혹은 가족 전체의 사회적 생존을 위협할 수 있었다. 그 위협의 무게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가족 안에서 작동했다.
박완서 가족의 사례가 한국 전역의 수많은 가족의 사례를 대표한다. 한국전쟁 이후 약 30년에서 40년 동안 한국 사회에는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가족이 비슷한 침묵을 안고 살았다. 그 침묵은 결코 자발적인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침묵이었다.
보도연맹 가족의 절망
또 다른 종류의 침묵이 있었다. 보도연맹 학살 피해자 가족의 침묵이다.
EP.13에서 다룬 보도연맹원 학살의 희생자 수는 적어도 수만 명, 많게는 10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른다. 그 희생자 각각에는 살아남은 가족이 있었다. 어머니, 아내, 자식들. 그들이 한국전쟁 이후 어떻게 살았는가가 한국 사회의 가장 깊은 침묵 중 하나다.

보도연맹 학살 가족의 침묵이 부역자 가족의 침묵과 달랐던 결정적 측면은 두 가지였다. 첫째, 그 학살의 가해자가 한국 정부 측이었다는 사실. 따라서 그 학살에 관해 입을 여는 일 자체가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었다. 둘째, 학살의 희생자가 "좌익" 또는 "좌익 의혹자"로 분류된 사람이었다는 사실. 따라서 가족이 희생자에 관해 입을 여는 일이 자기 자신을 "좌익 가족"으로 노출시키는 위험을 동반했다.
이 두 가지 위험이 결합되어 보도연맹 학살 가족의 침묵은 부역자 가족의 침묵보다 더 깊고 더 길게 지속되었다. 약 50년 이상 그들은 자기 아버지나 남편이나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이 침묵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 2000년대 진실화해위의 활동을 통해서였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1기 진실화해위가 활동했고, 그 활동을 통해 보도연맹 학살 사건들이 공식 조사되었다. 비로소 희생자 가족이 자기 가족 구성원의 죽음의 진실을 정부로부터 공식 확인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확인이 도착한 시점에 1세대 가족 다수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EP.13에서 다룬 거창의 한 가족의 사례를 다시 보면, 아내는 70대 노인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도 50대가 되어 있었다. 한 가족이 진실을 공식 확인하기까지 50년이 걸렸다는 것은, 그 50년 동안 살아남은 가족이 어떤 무게를 안고 살아야 했는가를 보여준다.
가족 단위의 트라우마 전수
이 모든 침묵이 가족 안에서 어떻게 작동했는가. 그것이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수되었는가. 이것이 한국전쟁 트라우마 연구의 한 핵심 주제다.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이 2000년대 이후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한국전쟁 트라우마는 1세대(직접 경험 세대)에서 2세대(자녀 세대), 그리고 3세대(손자녀 세대)까지 일정한 형태로 전수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1세대의 경우, 그들의 트라우마는 직접적이었다. 학살의 목격, 가족의 사망, 의용군 동원, 점령기의 공포, 피난의 가혹함.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다양한 증상이 1세대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그 시기 한국 사회에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없었다. 1세대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그저 견디며 살았다.
2세대의 경우, 그들의 트라우마는 간접적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부모 세대의 침묵, 부모 세대의 분노나 불안, 그리고 가족 내부의 미묘한 긴장이 2세대의 정서적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부역자 가족의 자녀들은 부모의 말할 수 없는 과거의 그림자 안에서 성장했다. 보도연맹 학살 가족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부재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성장했다. 이산가족의 자녀들은 부모가 평생 안고 산 그리움의 무게를 자기 가족 안에서 느끼며 성장했다.
3세대의 경우, 직접적 트라우마는 거의 없지만 가족 내부의 정서적 풍경이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평생 침묵하던 어떤 시기, 가족 안에서 어떤 사건에 관해 말하지 않는 분위기, 가족 모임에서 일정한 정치적 입장이 당연시되는 경향. 이런 미묘한 풍경이 3세대의 정치적 의식과 정서적 자아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 세대 간 트라우마 전수의 양상이 한국 사회의 정치 문화의 한 깊은 층위를 만들었다. 정치적 의견의 차이가 가족 모임에서 종종 격렬한 갈등으로 번지는 한국 사회의 현상의 한 배경이 이 세대 간 트라우마의 차이에 있다. 1세대에게는 한국전쟁이 직접 경험이고, 2세대에게는 부모의 트라우마이며, 3세대에게는 어떤 거리감 있는 역사라는 차이. 같은 한국전쟁이 세 세대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그 의미의 차이가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표면화된다.
마을이 사라진다는 것
가족 단위의 침묵 외에 또 다른 차원의 변형이 있었다. 마을 단위의 신뢰 파괴다.
한국 농촌 사회는 전통적으로 강한 마을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한 마을 안의 사람들은 평생 함께 살았고, 그 사이의 신뢰가 농촌 생활의 핵심 기반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이 신뢰를 결정적으로 파괴했다.
EP.11에서 다룬 박완서의 회상이 한 사례다. 친근한 이웃 아주머니가 점령기에 인민위원회 직책을 맡고 자기 가족의 출신 성분을 조사하러 왔다. 그 한 사건 후에 그 아주머니와 박완서 가족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까. 박완서 자신이 그 후의 관계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의미심장하다. 그 관계는 결코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건이 한국 전역의 수많은 마을에서 일어났다. 한 마을 안에서 누군가가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되었고, 그 학살에 다른 마을 사람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가담했을 수 있다. 누군가가 의용군으로 끌려갔고, 그 끌려감에 다른 마을 사람의 신고가 작용했을 수 있다. 누군가가 부역자로 처벌되었고, 그 처벌의 증언에 또 다른 마을 사람이 가담했을 수 있다.
이 모든 사건이 한 마을 안에서, 즉 평생을 함께 살아온 이웃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한국 농촌 사회의 마을 공동체적 신뢰가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한 마을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의 과거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그 앎이 일상의 인간 관계를 결정적으로 무겁게 만들었다.
박명림과 일부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농촌의 대규모 도시 이주의 한 결정적 동력이 이 마을 단위의 신뢰 파괴였다. 농업의 경제적 어려움과 도시 산업의 일자리도 중요한 동력이었지만, 또 다른 깊은 동력은 자기 마을의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였다. 한국전쟁 시기에 마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이 너무 무거워서,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을 자체를 떠나는 일이 한국 농촌의 한 결정적 현상이 되었다.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새로운 익명성 안에서 자기 과거를 새로 쓸 수 있었다. 자기 마을의 부역자 가족 또는 학살 가족 또는 의용군 가족이라는 정체성이 도시의 익명성 안에서 흐려졌다. 그 흐려짐이 한국 사회의 도시화의 한 깊은 동력이었다. 한국의 도시화가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 빠르고 결정적으로 진행된 결정적 배경 중 하나에 한국전쟁의 마을 단위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것이 박명림의 분석이다.
작가들의 자전적 글쓰기
가족과 마을 단위의 침묵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이후였다. 그 깨짐의 결정적 매개가 작가들의 자전적 글쓰기였다.
박완서가 가장 대표적인 작가다. 그녀가 1992년에 발표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1995년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가 이 자전적 글쓰기의 한 정점을 이뤘다. 두 소설 모두 그녀의 1945년부터 1953년 사이의 직접 경험에 기반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 경험을 글로 옮기기까지 약 40년이 걸렸다. 박완서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시기에 관해 쓸 수 있게 되기까지 나는 평생 살았다."

박완서 외에도 한국전쟁 세대 작가들의 자전적 글쓰기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김원일의 『노을』과 『마당 깊은 집』, 이문열의 『영웅시대』, 조정래의 『태백산맥』(분단 자체를 다룬 대하소설). 이 작품들이 한국 문학의 한 결정적 흐름을 형성했고, 한국 사회가 자기 한국전쟁 경험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마주하는 매개가 되었다.
이 작가들의 글쓰기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 한국전쟁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그 시기에 관해 본격적으로 쓸 수 있게 되기까지 30년에서 5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박완서가 40년, 황순원이 1960년 발표한 『나무들 비탈에 서다』조차 10년, 김원일이 약 30년, 조정래가 약 35년. 한 작가가 자기 어린 시절의 경험을 글로 옮길 수 있게 되기까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의 거리가 필요했다는 사실이 한국전쟁 트라우마의 깊이를 보여준다.
김동춘은 이 작가들의 글쓰기를 "공적 기억의 회복"이라고 표현한다. 한국 사회가 한국전쟁에 관해 가졌던 공식적 서사, 즉 반공의 관점에서 단순화된 서사 너머에, 그 사회를 살아낸 사람들의 실제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이 작가들의 자전적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한국 사회의 공적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한국전쟁 인식이 깊어진 결정적 배경에 이 작가들의 작업이 있다.
침묵의 그 후
한국전쟁의 침묵은 오늘날 어떻게 되었는가. 1990년대 이후 그 침묵의 일부는 깨졌다. 작가들의 자전적 글쓰기, 진실화해위의 활동, 이산가족 상봉의 시작, 그리고 일반적인 민주화의 흐름이 그 침묵을 일부 풀어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침묵은 새로운 형태로 작동한다. 1세대의 직접 경험자가 점점 사망해가면서, 한국전쟁이 점차 "할아버지의 기억"이 되어가고 있다. 2세대와 3세대에게 한국전쟁은 더 이상 자기 경험이 아니라 가족 안의 어떤 거리감 있는 역사가 되어간다. 이 거리감이 새로운 종류의 침묵을 만든다. 직접 경험자가 침묵할 때의 침묵과, 경험을 갖지 못한 세대가 무관심해질 때의 침묵은 다르다. 그러나 둘 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의 진실이 충분히 한국 사회의 의식에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다.
이 새로운 침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21세기 한국 사회의 과제다. 1세대의 직접 경험이 사라져가는 시점에서, 한국 사회가 자기 한국전쟁 경험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수할 것인가. 그 전수의 매개로 작가들의 글, 학자들의 연구, 진실화해위의 보고서,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 사회의 다양한 기억 작업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직접 경험의 무게는 결코 충분히 전수될 수 없다.
박완서의 한 문장
이 회를 박완서의 한 문장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 있다(원문을 정확히 인용하지는 않지만 그 취지를 옮긴다).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지 않고는 죽을 수 없었다. 내가 살아남은 자리에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그 사람들의 침묵을 위해, 나는 이 글을 쓴다.
이 한 문장이 한국전쟁 트라우마의 가장 깊은 자리를 보여준다. 살아남은 자의 책임.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의 침묵을 자기 글로 옮기는 일. 그 옮기는 일이 한 평생이 걸리는 작업이라는 것. 그러나 그 작업 없이는 끝낼 수 없는 한 삶이 있다는 것.

박완서 같은 작가들의 작업이 한국 사회가 자기 한국전쟁 경험과 마주하는 한 결정적 매개였다. 그러나 그 매개를 통해서도 다 전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1세대 한국인들이 평생 안고 살았던 침묵 자체였다. 그 침묵은 글로 옮겨질 때 침묵의 일부 모습을 잃는다. 침묵의 진정한 무게는 침묵 그 자체로만 보존된다. 그리고 그 침묵을 안고 살았던 1세대가 점점 사라져가면서, 그 무게의 일부도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이 한국전쟁이 한국 가족에 새긴 가장 깊은 흔적이다. 그리고 시리즈가 마지막 회 EP.24에서 다룰 한국전쟁의 의미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다시 만날 주제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시리즈의 명제가 가장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차원이 바로 이 가족과 침묵의 차원이다.
다음 회 예고
EP.24 끝나지 않은 전쟁, 우리에게 남은 것 시리즈의 마지막 회. 1949년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결정의 사슬이 어떻게 2026년 오늘의 한반도까지 이어지는가. 한국전쟁이 만든 분단 체제는 왜 70년이 넘게 지속되는가. 그리고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의 한 시대를 형성한 사회사적 사건이었다면, 그 사건의 의미를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시리즈가 처음 던졌던 "왜 지금 다시 한국전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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