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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끝나지 않은 전쟁

EP.20 거제도의 또 다른 전쟁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5.

1952년 5월 7일, 거제도 제76 포로수용소

1952년 5월 7일 수요일 오후. 경상남도 거제도. 제76 포로수용소의 정문 앞. 미 육군 준장 프랜시스 도드(Francis T. Dodd)가 포로 대표단과의 면담을 위해 수용소 정문에 도착했다. 그는 수용소장이자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령관이었다. 51세, 미 육군의 베테랑 장교.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과 중공군

 

면담의 의제는 표면적으로는 수용소 운영에 관한 포로들의 요구사항이었다. 도드는 그 정도의 면담은 일상적인 일로 여겼다. 그는 평소처럼 통역 한 명과 호위병 몇 명만 데리고 정문 앞에 섰다. 포로 대표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짧은 대화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수용소 안에서 포로 수십 명이 정문을 향해 뛰쳐나왔다. 그들은 도드를 둘러쌌고, 정문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호위병들은 발포할 수 없었다. 도드 본인을 다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 육군 준장이 자신이 사령관으로 있는 수용소에서 자기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 도드는 그 후 78시간 동안 제76 수용소 안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다. 미 육군 준장 한 사람이 한 수용소의 한 막사 안에서 자기가 책임자로 있는 포로들의 인질이 된 그 78시간. 한국전쟁사의 가장 기이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기이함은 한 사건의 이상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약 2년 동안 진행된 또 다른 전쟁의 한 압축적 장면이었다. 정전 협상이 판문점에서 교착되어 있던 그 2년 동안, 한반도 남쪽 끝의 한 섬에서는 누구도 본격적으로 보도하지 않은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제도라는 공간

먼저 거제도가 왜 포로수용소가 되었는가를 짚어보아야 한다.

1950년 가을부터 인민군 포로의 수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9월 인천상륙 직후부터 11월 청천강 진격 직전까지 약 두 달 사이, 미군과 한국군은 약 10만 명의 인민군 포로를 사로잡았다. 그 후 1950년 말부터 1951년 봄까지 중국군 개입 이후의 전투에서도 추가로 수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1951년 봄 시점에서 유엔군 측이 보유한 포로의 총수는 약 14만 명에 이르렀다. 그 후 1952년까지 그 수는 더 늘어 약 17만 명에 달했다.

이 거대한 포로 집단을 어디에 수용할 것인가가 큰 문제였다. 한반도 본토의 여러 곳에 분산 수용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본토에서 포로 수용소를 운영하는 것은 안전상 문제가 있었다. 미 군부는 한반도 남쪽 끝의 한 섬, 즉 거제도를 선택했다. 거제도는 부산에서 비교적 가까웠고, 본토와 분리되어 있어 포로의 탈출이 어려웠으며, 보급선도 부산을 통해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1951년 2월부터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섬의 북쪽 일대, 신현읍과 일운면을 중심으로 거대한 수용 시설이 들어섰다. 약 28개의 수용 구역(컴파운드)이 만들어졌고, 각 구역에 약 6,000명에서 8,000명의 포로가 수용되었다. 수용소 전체의 면적은 약 65평방킬로미터. 사실상 거제도의 북쪽 절반이 거대한 포로수용소 단지가 된 것이다.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거제도 주민들에게 이것은 큰 변화였다. 약 10만 명이 살던 작은 어촌 섬에 갑자기 약 17만 명의 외부 포로와 그들을 관리하는 미군과 한국군이 들어왔다. 섬의 인구가 두 배 이상 늘었고, 섬의 일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일부 주민들은 수용소 운영에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일부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을 계속했지만, 수용소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17만 명은 누구였는가

거제도에 수용된 17만 명의 포로는 누구였는가. 이 질문에 단순한 답은 없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두 진영의 군대 소속이었다. 인민군 포로가 약 13만에서 14만 명, 중국군 포로가 약 2만에서 2만 5천 명, 그리고 인민군에 편입된 남한 출신 의용군 또는 강제 동원자들이 약 1만에서 2만 명. 그러나 이 분류 자체가 매우 복잡했다.

가장 복잡한 집단이 의용군 출신이었다. 1950년 여름 점령기에 인민군에 강제 또는 반강제로 동원된 남한 청년들이다. EP.11에서 다룬 그 의용군들의 운명이 거제도에서 다음 장을 맞이했다. 그들 중 다수가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강제로 동원된 군대에 의해 자기 진영의 군대에 포로가 된 셈이었다. 그들 중 다수가 강하게 남한으로의 송환 또는 정착을 원했다.

중국군 포로도 단순한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국공내전 후기에 국민당군에 있다가 인민해방군에 흡수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정치적 충성도는 다양했다. 일부는 공산주의 신념이 강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거제도 수용 중 미군이 진행한 조사 결과 중국군 포로의 약 3분의 2가 자국 송환을 거부하고 타이완으로의 정착을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결과 자체가 EP.19에서 다룬 자유 송환 논쟁의 핵심 자료가 되었다.

인민군 정규 병사들 중에서도 송환 거부 의사를 표명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1945년 이후 북한 체제 안에서 자란 청년들이었지만, 그들 중 일부가 자국 체제에 대한 거부감을 표명한 것이다. 그들 중에는 남한 출신으로 1948년 이후 월북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이 다시 남한으로의 정착을 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거제도의 17만 포로는 매우 복잡한 집단이었다. 단일한 "공산군 포로"라는 범주로 그들을 묶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외적으로는 공산군 진영의 군대 소속이었고,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가 되었다.

친공과 반공의 분열

수용소 안에서 이 복잡한 집단이 빠르게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자국 또는 자기 진영으로의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과, 송환을 거부하고 남한 또는 타이완 정착을 원하는 포로들이었다.

이 분열은 단순한 정치적 의사 차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용소 안에서의 권력 투쟁의 문제였다. 친공 포로 측이 일부 수용 구역(컴파운드)을 사실상 장악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자기 진영 내부의 조직을 운영했다. 인민군 또는 중국군의 정치 위원 체계를 모방한 비공식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 조직 안에서 친공 포로들은 자기 진영의 이념적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반공 포로 측도 별도의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다른 수용 구역에서 자신들의 진영을 형성했다. 그 안에서 반공적 정치 활동, 즉 김일성과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학습회와 집회가 진행되었다. 한국 정부의 우익 청년단체와 연계된 활동도 있었다.

문제는 수용 구역 자체가 미군 행정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배정되었다는 점이다.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가 같은 구역에 섞여 수용된 경우도 있었다. 그 경우 두 진영 사이의 충돌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폭행, 협박, 그리고 실제 살인까지. 수용소 안에서 자기 진영의 이념을 강요하거나 다른 진영의 사람을 제거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1952. 5. 거제포로수용소 기간병들이 포로들에게 몸에 이를 구충하고자 DDT를 살포하고 있다.

 

박명림이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거제도 수용소 안에서 1951년 봄부터 1953년 여름까지 약 2년 사이에 발생한 포로 간 살인 사건은 적어도 수백 건에 이른다. 일부 추정으로는 1,000건을 넘는다. 사상자의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렵지만, 친공과 반공 사이의 갈등으로 죽은 포로의 수가 적어도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거제도의 또 다른 전쟁이었다. 38선 부근에서 한국군과 인민군이 격전을 벌이는 동안, 거제도에서는 인민군 포로끼리 그리고 중국군 포로끼리 또 다른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전쟁의 본질은 정전 협상에서 결정될 자신의 운명, 즉 송환될 것인가 송환되지 않을 것인가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었다.

도드 납치 사건의 의미

이런 배경 위에서 1952년 5월 7일의 도드 납치 사건을 다시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납치를 주도한 포로들은 제76 수용소의 친공 진영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미군 측에 자유 송환 정책 철회를 요구하기 위한 정치적 압력 행사. 둘째, 거제도 수용소 내부의 친공 진영의 우위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 행동.

도드는 78시간 동안 제76 수용소 안의 한 막사에 갇혀 있었다. 그 78시간 동안 그는 포로 대표들과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협상의 의제는 수용소 운영 개선, 친공 진영에 대한 미군의 강압 행위 중단, 그리고 무엇보다 미군이 자유 송환 정책의 모순을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일이었다.

5월 10일 토요일, 도드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 육군 준장 찰스 콜슨이 포로 측과 합의에 이르렀다. 콜슨은 미군 측이 수용소 운영에서 일부 잘못된 처우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로 했다. 이 합의에 따라 5월 11일 도드가 석방되었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장을 지낸 미 육군 프랜시스 T. 도드 준장.

그러나 이 사건의 후폭풍은 컸다. 미 육군 준장 한 사람이 자기 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미군에게 큰 충격이었다. 사건 직후 도드와 콜슨이 모두 해임되었고, 두 사람 모두 군 계급에서 강등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체에 대한 미군의 정책이 결정적으로 강경해졌다.

5월 중순부터 6월 사이 미군은 거제도 수용소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친공 진영이 장악하고 있던 일부 수용 구역에 무장 부대를 투입해 진영의 조직을 해체했다. 이 진압 과정에서 친공 포로 측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했고, 미군 측에서도 일부 사상자가 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거제도 수용소에 대한 미군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박명림은 이 사건을 "포로의 정치화의 정점"으로 평가한다. 군사적 의미의 포로가 아니라 정치적 자원으로서의 포로. 17만 명의 인민군과 중국군 포로가 단순한 군사적 자산이 아니라 정전 협상의 가장 큰 정치적 변수가 된 사실을 도드 납치 사건이 응축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자유 송환의 정치학

이 시점에서 EP.19에서 짧게 언급한 자유 송환 원칙의 의미를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측이 자유 송환 원칙을 제시한 1951년 가을 시점에서, 미군 정보 당국이 거제도 포로들을 대상으로 송환 의사를 비공식적으로 조사한 결과가 있다. 그 결과 약 17만 명의 포로 중 약 7만 명만이 자국 송환을 원하고, 약 10만 명은 송환을 거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결과가 미국 측이 자유 송환 원칙을 강하게 추진한 결정적 배경이었다.

그러나 이 조사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후대에 여러 논쟁이 있다. 한 가지 측면은 조사 자체의 정확성 문제다. 거제도 수용소 안의 친공과 반공 진영의 강한 압력 아래에서 포로들이 진정한 자기 의사를 표명할 수 있었는가의 문제. 친공 진영이 장악한 수용 구역에서는 송환 거부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웠고, 반공 진영이 장악한 구역에서는 송환 의사를 표명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조사 결과가 진정한 포로 개인의 의사라기보다 그들이 속한 진영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었다.

또 한 가지 측면은 미군 측의 정치적 의도 문제다. 미국이 자유 송환 원칙을 추진한 데에는 인도주의적 의도뿐 아니라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EP.19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유 송환 결과 다수의 공산군 포로가 자국 송환을 거부하면 그것은 공산 진영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된다. 미국 측은 이 정치적 이익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 의식이 자유 송환 추진의 한 동력이 되었다.

이 측면을 김동춘은 강하게 비판한다. 자유 송환 원칙이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적 명분을 가졌지만, 본질적으로는 한국전쟁을 정전시키는 것보다 공산 진영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히는 것을 더 우선시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협상이 1년 반 이상 교착되었고, 그 1년 반 동안 38선 부근에서 수십만 명이 죽었다. 자유 송환이 가져온 정치적 이익이 그 인명 손실의 무게를 넘는가의 윤리적 질문이 제기될 만하다.

이 비판은 일면 정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반박도 가능하다. 17만 명의 포로 중 다수가 진정으로 자국 송환을 거부했다면,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 송환하는 것이 더 큰 인도주의적 문제가 된다. 자유 송환 원칙이 정치적 의도와 인도주의적 명분 사이의 모호한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1953년 6월, 이승만의 단독 행동

자유 송환 문제가 협상 막바지에 한 번 더 큰 격변을 만들었다. 1953년 6월 18일 새벽, 이승만이 단독으로 거제도와 다른 수용소에 있던 약 2만 7천 명의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한 것이다.

반공포로 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 포로들이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이 행동은 미국과 유엔, 그리고 공산 진영을 모두 놀라게 했다. 이승만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자유 송환 원칙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고, 정전 자체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가 보기에 자유 송환 원칙이 모호한 형태로 협상에 포함되면 진정한 반공 포로들이 결국 자국으로 강제 송환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과 협의 없이 직접 행동을 통해 약 2만 7천 명을 사실상 한국 사회로 풀어버린 것이다.

이 일방적 석방은 협상을 일시적으로 흔들었다. 공산 진영 측은 이를 정전 자체를 무산시키려는 한국 측의 도발로 해석했다.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인민군과 중국군이 38선 부근에서 마지막 대규모 공세를 펼친 배경에도 이승만의 이 단독 행동에 대한 보복적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된다. 그 마지막 공세에서 양측 모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군 부대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미군과 다른 유엔군 부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협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미국 측이 이승만을 강하게 압박했고, 그 결과 이승만이 추가적인 단독 행동을 자제하기로 했다. 정전 협상은 7월 들어 다시 진행되었고, 7월 27일 정전협정의 체결로 이어진다. 그 자세한 과정은 EP.21에서 다룬다.

거제도의 그 후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운영도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8월부터 10월까지 약 3개월에 걸쳐 대규모 포로 교환이 진행되었다. 자국으로의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해 자국으로 돌아갔고,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중립국 송환위원회(인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 스위스 5개국 구성)의 관리 아래 약 3개월간 심사를 받았다. 그 후 송환 거부 의사를 최종 확인한 포로들은 한국, 타이완, 또는 중립국 인도로 정착했다.

최종 결과를 정리하면 이러했다. 자국으로의 송환을 선택한 포로는 약 7만 5천 명, 송환을 거부하고 다른 곳에 정착을 선택한 포로는 약 2만 1천 명. 그러나 이 숫자 안에 이승만이 1953년 6월에 일방적으로 석방한 약 2만 7천 명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실상 정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국 사회로 풀려난 상태였다. 이들을 포함하면 송환을 거부한 포로의 총수는 약 4만 8천 명에 이른다.

이 4만 8천 명의 그 후 인생은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한 단면을 형성했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 정착했지만, 그 정착이 결코 쉽지 않았다. "반공 포로 출신"이라는 정체성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자산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부담이었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자리 잡아갔는가, 그리고 그들의 자녀와 손자녀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는 한국 현대사의 흥미로운 한 갈래다. 시리즈는 이 측면을 EP.22~24의 "전쟁이 남긴 것"에서 일부 다룰 것이다.

거제도 자체는 포로수용소가 해체된 후 다시 어촌 섬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섬에 남은 흔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수용소 시설의 일부가 1980년대까지 남아 있었고, 일부는 오늘날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 되어 있다. 그 공원의 한 모퉁이에 도드 납치 사건을 기념하는 작은 표지석이 있다. 그러나 거제도의 그 2년 동안 일어난 또 다른 전쟁의 진실은 그 표지석으로 다 담아낼 수 없다.

오늘날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한국전쟁의 한 단면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의 가장 덜 알려진 단면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전쟁의 본질을 가장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은 표면적으로 두 진영의 군대가 싸운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더 복잡한 충돌이 있었다. 한 진영 안의 분열, 정치적 정체성을 둘러싼 내부 투쟁, 그리고 무엇보다 한 개인의 자유 의지가 거대한 진영 논리 안에서 어떻게 짓눌리는가의 문제. 거제도의 17만 포로가 그 문제의 가장 극명한 사례였다.

김동춘은 거제도 수용소의 이야기를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새긴 가장 깊은 흔적 중 하나로 본다. 그 안에서 진행된 친공과 반공의 충돌이 그 후 한국 사회의 정치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거제도에서 한 진영을 선택해야 했던 17만 명의 경험이, 그 후 한국 사회 전체가 모든 정치적 사안에서 친공과 반공의 양극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구조의 한 출발점이라는 분석이다.

이 평가의 일면 타당성은 거제도 출신 포로들 중 다수가 그 후 한국 사회의 반공 운동의 핵심 인력이 된 사실에서 확인된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 정치의 반공 담론을 형성한 인사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거제도 출신 또는 반공 포로 출신이었다. 그들의 개인적 경험이 한국 사회 전체의 정치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다음 회 예고

EP.21 1953년 7월, 한국의 서명은 없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열 시, 판문점.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그러나 그 협정문 위에 한국 정부의 서명은 없었다. 이승만은 끝까지 정전에 반대했고, 한국 측 대표의 서명을 거부했다. 협정문에는 유엔군 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인민군·중국군 측 대표 남일의 서명만이 있었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협정에서 한국의 자리가 없었던 그 7월 27일. 정전협정의 진실, 그리고 그 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협정이 만들어낸 한반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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