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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끝나지 않은 전쟁

EP.21 1953년 7월, 한국의 서명은 없었다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6.

1953년 7월 27일 오전 열 시, 판문점

1953년 7월 27일 월요일 오전 열 시. 판문점. 양측의 정전협상이 시작된 지 만 2년 17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 새로 지어진 회담장 안에는 두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다. 양측 대표가 각자의 탁자에서 협정문에 서명하는 형식이었다. 협정문은 영어, 중국어, 한국어 세 언어로 각각 인쇄되어 있었다. 정확히 18부의 서류였다.

마크 W. 클라크 극동사령관은 2년간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한국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오전 열 시 정각, 유엔군 측 수석대표 미 육군 중장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이 자기 탁자 앞에 앉았다. 그 맞은편 탁자 앞에는 인민군·중국군 측 대표 남일 대장이 앉았다. 두 사람 모두 정면을 응시한 채 서명을 시작했다. 18부의 서류에 각각 서명하는 일이 약 10분 정도 걸렸다. 그 사이 두 사람은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눈맞춤도 없었다.

서명이 끝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섰다. 그리고 회담장의 각자의 출구를 통해 동시에 밖으로 나갔다. 그 모든 과정에 그 어떤 의례적 인사도 없었고, 그 어떤 상호 인정의 표시도 없었다. 약 10분 만에 한국전쟁의 군사적 적대 행위를 종결시키는 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그 협정문 어디에도 한국 정부 대표의 서명은 없었다.

협정문의 서명자들

협정문에 실제로 서명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 명단이 한국전쟁의 본질을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협정문 본문에 서명한 두 사람. 유엔군 측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측 남일 대장. 그 두 사람의 서명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열 시 판문점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서명만으로 협정이 효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협정문은 각 진영의 최고 사령관의 서명을 별도로 요구했다. 그날 오후와 그 다음 날까지 추가 서명이 이뤄졌다. 유엔군 측 최고 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 육군 대장이 판문점 인근의 문산에서 그날 오후 한 시에 서명했다. 인민군 측 최고 사령관 김일성이 평양에서 그날 오후 열 시에 서명했다. 중국인민지원군 측 최고 사령관 펑더화이가 같은 날 평양에서 자정 가까운 시점에 서명했다.

이 네 사람의 서명이 정전협정의 법적 효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어떤 자리에도 한국 정부 대표의 자리는 없었다.

판문점, 정전회담 본회의장(1953. 7. 25.).

 

이 부재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표면적인 이유는 협상 구조 자체에 있었다. 한국전쟁의 정전협상은 처음부터 유엔군 측과 공산 진영 측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한국군은 유엔군 사령부의 작전 지휘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 대표가 별도로 협상에 참여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백선엽 같은 한국군 장교가 협상 초기에 동석했지만, 그것도 유엔군 측 대표단의 일원으로서였다. 한국 정부 자체가 독립적인 협상 당사자로 인정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표면적 이유 너머에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승만 본인이 정전에 끝까지 반대했고, 한국 측의 협정 서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반대

이승만의 정전 반대는 1951년 협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은 명확했다. 한국전쟁의 유일한 정당한 종결은 한반도의 군사적 통일이라는 것. 38선 부근에서의 정전은 분단의 영구화를 의미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 정부의 정치적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라는 것.

1951년 7월 협상이 시작된 직후부터 이승만은 미국에 강하게 항의했다. 그는 트루먼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고, 한국 주재 미국 대사 존 무초를 통해서도 반대 입장을 거듭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은 분명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결정적 부담을 지고 있는 전쟁이었고, 그 전쟁의 종결 방식은 미국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 한국의 의견은 협의의 대상이었지만 결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1953년에 들어서면서 이승만의 반대는 더 강해졌다. 협상이 결정적 진척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정전을 무산시키려 했다.

6월 18일 새벽의 반공 포로 일방 석방은 그 마지막 시도였다. EP.20에서 다룬 그 사건의 정치적 의도는 명확했다. 약 2만 7천 명의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풀어버림으로써 정전협상의 마지막 의제를 무너뜨리고 협상 전체를 좌초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이 강하게 압박했고, 결과적으로 협상은 무산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그 후에도 단념하지 않았다. 6월과 7월 사이 그는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한국군의 단독 행동 가능성이었다. 만약 정전협정이 체결되어도 한국군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독으로 북진할 수 있다는 위협. 이 위협은 외교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미국이 정전협정에 서명한 후 한국군이 단독으로 행동하면 미국의 외교적 정당성이 결정적으로 손상될 수 있었다.

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뒤 이승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6월 25일, 더 큰 회담

이런 갈등의 해결을 위해 1953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3주년이 되는 그날, 미국 국무부의 동아시아 차관보 월터 로버트슨이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이승만과 약 2주에 걸친 강도 높은 회담을 진행했다. 17회 이상의 면담이 이뤄졌다.

로버트슨의 임무는 한 가지였다. 한국이 정전협정에 정식 서명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것을 받아들이고 단독 행동을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가 협상의 핵심이었다.

7월 9일에서 11일 사이 양측이 일정한 합의에 이르렀다. 미국 측이 제공한 약속은 네 가지였다. 첫째,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체결. 정전 후에도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공식 동맹 조약이었다. 둘째, 정전 후 한국에 대한 대규모 경제 원조의 제공. 약 10억 달러 규모. 셋째, 한국군의 증강 지원. 한국군 약 20개 사단까지의 증강을 미국이 지원한다는 것. 넷째,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 회담의 개최 약속. 정전 후 일정 기간 내에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국제 정치 회담을 열겠다는 것.

이 네 가지 약속을 받고 이승만은 일부 양보했다. 한국이 정전협정에 정식 서명하지는 않지만, 그 협정의 효력을 사실상 수용하고 단독 행동을 자제하기로 한 것이다. 7월 12일 그가 발표한 성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협정의 군사적 효력을 인정하고 적대 행위를 중단할 것이다."

이것이 정전협정에 한국의 서명이 없게 된 외교적 배경이었다. 협정문 자체에는 한국이 서명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그 협정의 효력을 사실상 받아들였다. 미국은 그 대가로 한미동맹을 약속했다.

마지막 공세, 그리고 마지막 죽음

이승만과 미국 사이의 합의가 이뤄지는 동안에도 38선 부근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오히려 마지막 공세가 더 격렬해진 측면도 있었다.

7월 13일부터 19일 사이 인민군과 중국군이 38선 부근에서 마지막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강원도 김화 일대에 집중되었다. 이 공세의 의도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이승만의 단독 행동 위협에 대한 보복적 의사 표명. 둘째, 정전협정 체결 직전에 한 평방미터의 땅이라도 더 점령해 최종 분계선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일.

이 마지막 공세에서 한국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 한국군 제2군단 산하 여러 사단이 김화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다. 사상자가 한국군에서만 약 1만 5천 명. 중국군 측에서도 비슷한 사상자가 났다. 단 일주일 동안 약 3만 명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이 마지막 공세의 비극은 그 시점에 이미 정전 자체는 사실상 결정된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승만과 미국 사이의 협상이 7월 9일에서 11일 사이 마무리되었고, 그 이후로는 정전협정의 구체적 문구 정리와 서명 일정만 남아 있었다. 누구나 정전이 곧 체결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며칠 더의 시간 동안에도 38선 부근에서 3만 명이 더 죽거나 다친 것이다.

박명림이 인용하는 한 한국군 장교의 회고가 있다. 7월 24일 김화 부근에서 마지막 전투에 참여했던 한 중대장의 회고다. 그는 그날 자신의 중대원 80명 중 30명을 잃었다. 그 후 그는 자신에게 평생 묻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 "정전이 3일 후로 결정된 상태에서, 그 3일 동안 30명을 잃은 것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그 질문에 그는 평생 답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의미 없는 죽음이 한국전쟁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더 이상 어떤 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시점에서 진행된 마지막 공세, 그리고 그 안에서의 죽음. 한국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단면 중 하나가 그 마지막 며칠에 응축되어 있었다.

정전협정의 내용

정전협정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 핵심 조항들을 짚어보자.

협정문은 전체 5조 63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조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군사 분계선의 설정. 1953년 7월 27일 시점에서 양측 군대가 실제로 점령한 지역을 따라 분계선이 그어졌다. 그 결과 새로운 분계선은 38선과 거의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서쪽 지역에서는 38선보다 약간 남쪽에 분계선이 위치했고(개성 일대를 포함한 지역), 동쪽 지역에서는 38선보다 상당히 북쪽에 분계선이 위치했다(고성과 양양 일대를 포함한 지역). 결과적으로 한국 측이 동쪽에서 일부 영토를 얻었고, 북한 측이 서쪽에서 일부 영토를 얻었다.

둘째, 비무장지대(DMZ)의 설정. 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킬로미터씩, 총 4킬로미터 폭의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었다. 이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양측의 군사적 활동이 금지되며, 무기를 휴대한 인원의 출입도 제한된다.

셋째, 군사정전위원회의 설치. 정전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한 양측 공동 기구다. 양측에서 각각 5명씩 위원이 임명되며, 판문점에서 정기적으로 회의를 진행한다.

넷째,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설치. 정전 후 한반도에서의 외국 군사 인력 출입을 감독하기 위한 기구. 공산 진영 측에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유엔군 측에서 스웨덴과 스위스가 위원국으로 지정되었다.

다섯째, 포로 처리의 원칙. EP.20에서 다룬 내용 그대로다. 자국으로의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송환되고,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관리 아래 일정 기간 심사를 받은 후 정착지를 결정한다.

여섯째, 그리고 매우 중요한 조항. 협정 제60항. "정치적 회담을 통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권고한다." 정전 후 일정 기간 내에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정치 회담이 열려야 한다는 권고였다. 이 권고에 따라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반도 문제 정치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그 회담은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한반도의 정치적 통일에 관한 협상은 그 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결정적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정전협정이 가진 한계

정전협정이 가진 결정적 한계가 두 가지 있다.

첫째, 그것은 평화협정이 아니다. 정전협정은 적대 행위의 중단을 결정한 것이지,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법적으로 한국전쟁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종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한반도는 휴전 상태에 있을 뿐, 평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차이의 의미는 크다. 정전협정은 언제든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는 임시적 합의다. 실제로 북한은 정전협정의 일부 조항이 사실상 무효화되었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표명해왔다. 한국 사회에서도 정전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기적으로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그 평화협정의 체결은 그 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둘째, 한국의 서명 부재가 가진 의미. 협정문에 한국이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외교적으로 미묘한 결과를 만들었다. 한국 정부는 정전협정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다. 따라서 정전협정의 수정이나 폐기에 관한 협상에서 한국의 법적 지위가 모호하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풀려는 시도를 반복한 배경에는 이 정전협정 구조의 모호함이 있다. 협정의 법적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과 중국인 반면, 그 협정이 다루는 영토의 주체인 한국이 직접 당사자가 아닌 것이다.

이 두 한계가 그 후 70년 한반도 외교사의 핵심 변수가 되었다. 한반도의 평화 체제 구축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 그리고 한국이 자기 영토 문제의 협상에서 왜 항상 모호한 위치에 있는가의 결정적 배경이 1953년 7월 27일의 정전협정 그 자체에 있다.

그 협정 이후의 70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7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70년 동안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짧게 정리하기에는 한 권의 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전협정과의 연결 속에서 핵심 변화를 짚어볼 수는 있다.

첫째, 분단의 영구화. 정전협정은 임시적인 군사적 합의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그 임시적 합의가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반도의 사실상 영구적 질서가 되었다. 1954년 제네바 회담의 실패 이후 한반도 통일에 관한 협상은 한 번도 결정적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에는 누구도 이 분단이 70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둘째, 한미동맹의 형성. 정전협정 체결과 거의 동시에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1953년 10월 1일).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공식적으로 보장하는 동맹국이 되었고, 그 동맹은 그 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모든 차원에서 결정적 변수가 되었다. 1953년 7월의 정전협정이 만든 가장 큰 외교적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이 한미동맹의 형성이었다.

셋째, 두 사회의 결정적 단절. 정전협정 체결 직후 한반도의 남과 북은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두 사회로 발전해갔다. 가족 단위의 인적 교류, 경제적 교류, 문화적 교류가 모두 단절되었다. 1985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일부 이뤄지기 전까지 약 32년 동안 한반도의 가족들이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오늘날의 판문점

 

이 모든 결과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의 그 10분짜리 서명식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의 군사적 종결을 결정한 그 협정이 한반도의 그 후 70년을 결정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한 학습

정전협정의 그 후 한국 사회는 그 협정에 관한 어떤 학습을 했는가. 시리즈가 마지막으로 짚어두고 싶은 한 가지가 이것이다.

이승만의 정전 반대는 그 시점에는 정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한국이 협정의 정식 당사자가 되지 못한 사실은 그 후 한국의 외교적 자리에 미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국이 자기 영토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협정에 서명하지 못한 것이다.

이 사실의 의미를 김동춘은 한국 사회의 "외교적 종속성"의 한 출발점으로 본다. 한국전쟁 자체가 한국 정부의 결정 없이 시작되었듯이(EP.01~05에서 다룬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결정), 한국전쟁의 종결도 한국 정부의 결정 없이 이뤄진 것이다. 그 시작과 끝 모두에서 한국이 자기 주체적 자리를 갖지 못한 사실이 그 후 한국 외교의 한 결정적 한계를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 평가에도 반론이 가능하다. 1953년 7월 시점의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한국이 어떤 더 주체적인 입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인가의 질문이 제기된다. 이승만의 한미동맹 협상은 그 종속성 안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외교적 성과를 끌어낸 것일 수도 있다.

이 두 평가 사이에서 시리즈는 단정적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정전협정의 의미는 여러 차원에서 평가될 수 있고, 어느 한 차원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의 그 10분짜리 서명식이 한반도의 그 후 70년을 결정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정에 한국이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 이 두 사실이 한국 사회가 정전협정에서 학습해야 했던 가장 무거운 교훈이었다.

한 시대의 끝

1953년 7월 27일 오후 열 시. 협정문에 명시된 정전 발효 시각. 38선 부근의 모든 전선에서 양측 군대가 동시에 사격을 중단했다. 그 시각까지 사격을 계속한 부대는 마지막 순간에 한 발이라도 더 쏘려는 듯 격렬한 사격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히 열 시에 모든 소리가 멈췄다.

한 시대가 끝났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오후 열 시에 잠시 멈춘 한 시대. 그 사이에 약 100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 민간인이 죽었다. 약 50만 명에 이르는 한국군과 미군과 유엔군이 죽었다. 그 이상의 인민군과 중국군이 죽었다. 합계 약 300만 명에서 4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한반도 안팎에서 죽은 시대였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무엇이 결정되었는가. 한반도는 그 전쟁 시작 시점과 거의 같은 분단 상태로 돌아왔다. 38선이 사실상의 군사 분계선이 되었고, 두 정권이 각각의 영토에서 자신의 체제를 유지했다. 외형적으로는 1950년 6월 25일과 1953년 7월 27일 사이의 시간이 어떤 결정적 변화를 만들었는지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그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한반도의 사람들에게도, 두 정권의 정치 구조에도,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 질서에도. 그 변화의 의미를 시리즈는 마지막 세 회, EP.22에서 EP.24에 걸쳐 정리한다.

다음 회 예고

EP.22 반공국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새긴 가장 깊은 흔적은 반공국가의 형성이다. 1950년 6월 이전의 한국과 1953년 7월 이후의 한국이 얼마나 달랐는가. 그 사이에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회. 한국전쟁이 단지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근본 구조를 바꿔놓은 사회적 변형의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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