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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끝나지 않은 전쟁

EP.18 영하 이십 도의 후퇴, 1·4 후퇴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2.

1950년 12월 24일 새벽, 흥남 부두

1950년 12월 24일 일요일 새벽. 함경남도 흥남 부두. 영하 24도의 혹한 속에서 거대한 행렬이 부두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솜옷과 담요를 겹겹이 두르고 있었지만 그 추위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일부는 갓난아이를 등에 업거나 가슴에 안고 있었다. 일부는 노인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빠르지 못했다. 이미 며칠을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부두에는 미군 함정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날 부두로 향한 피난민의 수는 약 10만 명. 그러나 함정의 수용 능력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 한 척의 선박이 항구를 떠나면 다음 선박이 들어왔고, 그 사이 부두에는 끝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부두 인근에는 그 시각까지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수만 명 더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결국 함정에 오르지 못했다. 일부는 길에서, 일부는 부두 인근의 야외에서, 일부는 그 후 인근 산악 지대에서 그 겨울을 견디지 못했다.

미 제10군단의 흥남 철수 작전은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약 11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11일 동안 약 10만 5천 명의 미군과 한국군 병력, 그리고 9만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피난민이 함정으로 옮겨졌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민간인 피난민의 수는 9만 8천 명에 달했다. 12월 24일 마지막 함정이 흥남을 떠난 직후 미군 공병대는 부두 시설과 인근의 주요 보급 물자를 모두 폭파시켰다. 흥남이 다시 인민군의 손에 들어갈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흥남 철수는 한국전쟁사의 한 결정적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거대한 비극의 한 부분이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 북부 곳곳에서 비슷한 후퇴가 진행되고 있었다. 평양에서, 원산에서, 그리고 38선 부근의 수많은 마을에서. 그 모든 후퇴가 12월 한 달의 정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한 번 함락된다. 그러나 그 함락은 6월 28일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12월 평양, 그리고 그 거리들

12월 4일 월요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했다. 47일 동안의 한국군 평양 점령이 끝난 것이다. 평양에서 떠난 것은 군대만이 아니었다. 그 47일 동안 한국 정부의 임시 행정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이 있었던 시민들도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약 10만 명의 평양 시민이 한국군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들 중 다수는 평양에서 5년간 인민군 정권 아래 살았지만, 그 47일 동안 한국 정부 측에 협력했거나 협력한 것으로 의심될 만한 행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한국군의 후퇴는 곧 자신의 생존을 의미했다. 만약 남아 있으면 점령군에 의해 부역자로 처벌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떠나는 길을 택했다.

한겨울 끊어진 평양 대동강철교를 넘고 있는 피난민 행렬

 

이 흐름은 평양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 전역에서 일어났다. 47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반도 북부에서 형성된 일부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기억이 거대한 피난의 흐름을 만든 것이다. 박명림의 정리에 따르면, 1950년 12월부터 1951년 1월 사이 한반도 북부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피난민의 총수는 약 50만 명에서 100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전체를 통해 발생한 월남민의 다수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이 사람들의 그 후 인생을 시리즈는 후반부 EP.22~24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그들이 만든 새로운 사회 집단, 즉 "월남민" 또는 "이북 출신"이라는 정체성. 그것이 그 후 한국 사회의 정치 문화와 사회 구조를 어떻게 형성했는가. 그러나 이 회에서는 우선 그 12월의 추위 속에서 그들이 무엇을 견뎌야 했는가에 집중한다.

영하 이십 도의 길

1950년 12월의 한반도 북부는 사람의 기억에 남는 가장 혹독한 겨울 중 하나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평안북도와 함경남북도 일대의 그해 12월 평균 기온이 평년보다 5도 이상 낮았다. 영하 25도, 영하 30도까지 떨어진 날도 적지 않았다. 강풍이 자주 불었고, 폭설이 길을 막았다.

이 추위 속에서 거대한 피난 행렬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사리원과 개성을 거쳐 38선을 향했다. 함경남도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흥남이나 원산의 부두에서 함정에 올랐거나, 또는 산악 지대를 거쳐 강원도 방면으로 남하했다. 어느 길도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출발할 때 가져온 식량은 며칠 분이 전부였다. 길에서 더 구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마을마다 이미 비어 있었거나, 남은 주민들도 자기 식량을 지키기 위해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부 피난민들은 길에서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추위로 죽었다. 적절한 방한복이 없는 상태에서 야외에서 잠을 자는 일이 며칠 이어지면, 노인이나 어린아이는 견디기 어려웠다.

길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일행이 묻을 시간도 없었다. 그저 길가에 두고 다음 행렬이 계속 이동했다. 추위가 시신을 보존했지만, 그것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12월의 한반도 북부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그 길들은 사실상 거대한 야외 무덤이었다.

이 추위와 굶주림 속의 후퇴가 가장 집중적으로 묘사된 자료는 후대의 회고록과 자전적 소설들이다. 박완서, 황순원, 김원일, 그리고 수많은 월남민 출신 작가들이 자신의 경험 또는 가족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시기를 기록했다. 그들의 글에서 그 12월의 길이 한국 문학의 한 결정적 풍경이 되었다.

박완서의 두 번째 피난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은 1·4 후퇴 시기의 자기 가족 경험을 매우 상세히 기록한다. 그녀의 두 번째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가 그 시기를 중심에 둔 작품이다.

박완서의 가족은 1950년 6월 점령기에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이었다. EP.11과 EP.12에서 다룬 그 90일을 그녀의 가족은 견뎠다. 9월 수복 후에는 의용군 출신으로 의심받는 오빠 때문에 가족 전체가 사회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1950년 12월부터 1951년 1월 사이 그녀의 가족은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다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가능성이 보이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박완서의 회상에 따르면, 가족 회의에서 그녀의 어머니는 단호했다. 이번에는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6월의 실수, 즉 정부의 거짓 라디오 방송을 믿고 남았던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박완서의 어머니는 6월의 경험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정부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 자기 가족의 안전은 자기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

한강인도교 밑 임시다리 피난민

 

이 학습이 1·4 후퇴의 핵심 정서였다. 한국 시민들은 6월의 비극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 학습이 1·4 후퇴 시기의 거대한 자발적 피난 흐름을 만들었다. 정부가 이번에는 시민들에게 떠나라고 명시적으로 권고하지 않았는데도, 서울 시민들의 다수가 자발적으로 떠났다. 6월에는 정부의 거짓 안심을 믿고 남았던 사람들이, 12월에는 정부의 말과 무관하게 자기 판단으로 떠난 것이다.

박완서의 가족은 1951년 1월 초 서울을 떠나 한강을 건넜다. 한강은 그 시점 얼어 있었고 일부 구간은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그녀의 가족은 그 얼어붙은 한강을 건넌 수십만 명 중 한 가족이었다. 한강을 건넌 후 그들은 경기도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들은 여러 곳을 떠돌며 피난 생활을 했다. 가족의 인생에서 그 시기가 어떻게 깊이 새겨졌는가는 그녀의 자전적 소설 전체의 정서가 증언한다.

누가 어떻게 후퇴했는가

1·4 후퇴는 6월 28일의 후퇴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 차이의 의미를 짚어두어야 한다.

6월 28일의 후퇴는 정부의 결정이 시민들과 분리된 채 진행되었다. 정부와 군은 일찍 떠났고, 시민들은 거짓 안심 속에 갇혔으며, 한강 다리 폭파로 절단된 후 144만 명이 서울에 남겨졌다. EP.09에서 다룬 김동춘의 "도망친 자들이 남은 자들을 심판하는" 구조가 그 후퇴의 결정적 특징이었다.

1·4 후퇴는 정반대였다. 정부와 군의 후퇴가 시민들의 후퇴와 함께 진행되었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시민들이 정부보다 먼저 떠나기 시작했다. 12월 말부터 서울 시민들의 자발적 피난이 본격화되었다. 정부의 공식적인 서울 철수 결정은 1951년 1월 3일에야 내려졌고, 시민들의 후퇴는 그보다 며칠 또는 일주일 더 빨리 시작된 상태였다.

이 차이가 만들어진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6월의 학습. 시민들이 정부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둘째, 정부 측의 변화. 6월의 비극이 가져온 정치적 비용을 의식한 정부가 이번에는 시민들의 피난을 막지 않았다. 라디오 방송도 6월처럼 거짓 안심을 주는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12월 말부터 정부는 시민들에게 신중한 피난을 권고하는 메시지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 29일 대구역의 모습. 한 겨울임에도 피난민들이 화차 지붕에 모두 올라가 있다.

 

그러나 1·4 후퇴에도 비극은 있었다. 그 비극의 성격이 달랐다는 것일 뿐. 6월의 비극이 정부의 배신에서 비롯되었다면, 1·4 후퇴의 비극은 피난 그 자체의 가혹함에서 비롯되었다. 영하 20도의 추위, 길에서 얼어 죽은 사람들, 흥남 부두에서 함정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흩어지는 일.

가족이 흩어지는 일은 1·4 후퇴의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였다. 거대한 피난 행렬 속에서 한 가족이 함께 이동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노인이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다 일행과 떨어지는 일, 함정에 오르려다 가족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가 부두에 남는 일, 그리고 38선 부근에서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헤어지는 일. 이런 이별이 그 12월과 1월 사이 수만, 수십만 가족에서 일어났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그 후 평생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남긴 "이산가족"의 한 결정적 출발점이 1·4 후퇴였다.

1월 4일 목요일, 서울

1951년 1월 4일 목요일, 서울이 다시 함락되었다. 이번에는 6월 28일과 같은 갑작스러운 함락이 아니었다. 1월 초가 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의도된 후퇴를 진행했고, 시민들도 자발적 피난을 거의 마친 상태였다. 서울이 함락된 시점에 도시는 거의 비어 있었다.

이 두 번째 서울 함락 후 약 두 달 반 동안 서울은 다시 인민군과 중국군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6월의 첫 번째 점령기와 달리 이번에는 도시 인구가 거의 없었다. 점령 체제가 운영할 시민도, 동원할 사람도, 부역시킬 지식인도 없었다. 텅 빈 도시를 군대만이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1·4 후퇴 후 약 두 달 반이 지난 1951년 3월 14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했다. 두 번째 수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첫 번째 수복과 같은 환희가 없었다. 도시가 너무 많이 파괴되어 있었고, 시민들의 다수는 아직 피난지에 있었다.

박명림은 1·4 후퇴와 두 번째 서울 수복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한국전쟁이 일종의 "안정된 교착"으로 진입한 시점이 이때라는 것이다. 6월 25일부터 11월 25일까지 약 5개월 동안 한반도의 전선은 부산에서 압록강까지 거대하게 출렁였다. 그 후 1·4 후퇴까지의 약 5주 동안 다시 반대 방향의 거대한 출렁임이 있었다. 그러나 1951년 3월 두 번째 서울 수복 이후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 후 약 2년 4개월에 걸친 정전 협상이 시작된다. 한국전쟁이 새로운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흥남 부두의 한 가족

이 회를 마치며 흥남 부두의 한 가족 이야기로 돌아간다. 1950년 12월 24일 새벽의 그 부두에 있었던 한 가족이다.

이 가족의 이름과 정확한 사연은 흥남 철수의 수많은 증언 중 한 사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시기의 정서를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에 짧게 옮긴다. 함경남도 함흥에 살던 한 4인 가족, 부부와 두 어린 아이들. 12월 중순 그들은 한국군의 후퇴와 함께 함흥을 떠나 흥남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함정에 오를 수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들이 흥남에 도착한 것은 12월 22일이었다. 부두에는 이미 거대한 행렬이 있었다. 그들은 그 행렬의 가장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12월 23일 하루 종일 그들은 줄을 섰다. 그러나 행렬이 줄어드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24일 새벽이 되었을 때, 그들은 여전히 함정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날 마지막 함정이 떠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시점에 부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함정의 수용 능력은 한정되어 있었다. 가족 전체가 함께 탈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다. 부부는 두 아이를 먼저 함정에 태우기로 결정했다. 자신들은 그 다음에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선 아이들의 안전을 확보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이 미군 병사의 도움으로 함정에 올랐다. 그 직후 함정이 출발했다. 부부는 부두에 남았다. 마지막 함정이 흥남 부두를 떠난 시점에 그들은 부두 끝에서 멀어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부부의 그 후 운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비슷한 증언에 따르면, 부두에 남은 사람들 중 일부는 미군 공병대의 폭파 직전에 인근 산악 지대로 흩어졌고, 일부는 그 후 인민군과 중국군의 점령 아래 살아남았으며, 일부는 살아남지 못했다. 이 부부가 어느 경우에 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함정에 오른 두 아이들은 부산에 도착했다. 그 후 그들은 부산의 어느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들이 평생 가졌던 한 가지 기억은 흥남 부두의 그 새벽이었다. 부모가 자신들을 함정에 태우고 부두에서 손을 흔들던 그 마지막 장면. 그 장면이 그들의 인생 전체를 결정했다.

1950년 12월 흥남 부둣가로 모여든 피난민들

 

이런 이야기가 흥남 부두에서, 그리고 그 12월의 한반도 북부 곳곳에서 일어났다. 시리즈가 한 가족의 사례를 짧게 옮긴 것은 거시 사건의 무게를 한 인간의 얼굴로 옮겨오기 위해서다. 흥남 철수 9만 8천 명, 1·4 후퇴 시기의 월남민 50만에서 100만 명. 이 추상적 숫자는 사실 흥남 부두의 그 부부 같은 사례가 수만, 수십만 모인 것이다. 그 각각의 사례에 한 가족의 결정이 있었고, 한 어머니의 망설임이 있었으며, 한 아이의 평생을 결정한 새벽이 있었다.

한 단계의 끝

1·4 후퇴와 두 번째 서울 수복으로 한국전쟁의 첫 단계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1950년 6월부터 1951년 3월까지의 약 9개월. 그 9개월 동안 한반도의 전선은 두 차례에 걸쳐 거대하게 출렁였고, 두 차례에 걸쳐 서울이 점령되고 수복되었다. 약 100만 명의 인명 손실이 그 9개월에 집중되었다. 한국전쟁 전체 인명 손실의 다수가 이 시기에 발생했다.

1951년 3월 이후 한국전쟁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선다.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안정화되고, 정전 협상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협상은 곧 시작될 것 같으면서도 결국 2년 4개월을 끌게 된다. 그 2년 4개월 동안에도 38선 부근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거제도의 포로 수용소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졌으며, 한반도 후방에서는 다른 차원의 비극이 진행되었다.

시리즈는 그 2년 4개월의 의미를 다음 부에서 다룬다. EP.19에서 정전 협상의 시작과 그 교착의 본질을, EP.20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또 다른 전쟁을, EP.21에서 1953년 7월 27일의 정전협정과 그 후를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EP.22~24에서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남긴 것을 본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를 정리해두고 싶다. 한국전쟁의 가장 격렬한 군사적 단계는 1·4 후퇴와 함께 사실상 끝났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남긴 진짜 무게는 그 후 시작된다. 정전 협상의 교착, 포로 처리의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평생에 걸친 침묵과 회한. 그 모든 것이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쟁인 이유다.

다음 회 예고

EP.19 전선은 굳어졌으나, 협상은 끝나지 않았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정전 협상의 첫 회의가 열린다. 그러나 그 협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긴 시간을 끈다. 2년 4개월 동안 38선 부근의 비좁은 한 마을 판문점에서 협상은 진행되었지만, 같은 기간 38선 부근의 산악 지대에서는 격전이 계속되었다. 어느 한 고지를 두고 수천 명이 죽는 전투들. 협상은 왜 그렇게 오래 걸렸고, 그 사이 누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한국전쟁의 가장 무의미한 한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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