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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끝나지 않은 전쟁

EP.17 압록강을 건넌 사람들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6. 1.

1950년 10월 19일 밤, 안둥의 압록강 다리

1950년 10월 19일 목요일 밤. 만주 안둥(현 단둥). 압록강 다리 위에서 어둠을 가르며 거대한 행렬이 천천히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 제13병단 소속의 첫 부대였다. 그들은 단단한 군화 소리도 내지 않으려 무명천으로 군화를 감싼 채 걷고 있었다. 무전기는 모두 꺼져 있었다. 명령도 손짓과 짧은 속삭임으로만 전달되었다.

팔로군을 주축으로 한 중국인민지원군이 1950년 10월19일 항미원조전쟁 참전을 선언하고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다리를 건너는 부대는 제40군 소속이었다. 한반도 쪽으로 들어선 후 그들은 신의주 시내를 우회해 곧장 산악 지대로 향했다. 낮 동안에는 산림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어둠이 내리면 다시 행군을 계속하는 방식. 그 후 약 2주 동안 같은 패턴으로 이동이 이어졌다. 제38군, 제39군, 제42군, 제50군, 제66군. 약 25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1차 파병 병력이 압록강을 건넜다.

이 거대한 부대 이동을 미군 정찰기는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EP.16에서 다룬 정보 실패의 가장 결정적인 측면이 여기 있었다. 미군이 정찰기를 띄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미군 정찰기는 정기적으로 압록강 부근을 비행했다. 그러나 그 정찰의 결과가 정확히 해석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중국군의 위장과 야간 이동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펑더화이라는 인물

이 거대한 작전을 지휘한 사람이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였다.

펑더화이는 후난성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9세에 어머니를 잃고 노동 현장을 전전하다가 18세에 군에 입대했다. 1928년 그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그 해 평강 봉기를 일으켜 마오쩌둥의 부대에 합류했다. 그 후 22년 동안 그는 마오쩌둥과 함께 항일 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렀다.

그가 가장 유명해진 것은 1940년의 백단대전이었다. 일본군 보급선을 대규모로 공격한 이 작전에서 그는 약 22개 사단을 지휘했다. 국공내전 후기에는 서북야전군 사령관으로 산시성과 닝샤 지방을 점령해, 마오의 전국 통일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그는 인민해방군 부총사령관 자리에 있었다.

1950년 10월 마오가 한반도 파병을 결정했을 때, 첫 후보로 거론된 인물은 펑더화이가 아니라 임뱌오(林彪)였다. 동북지방 군 사령관이자 만주에서 작전 경험이 가장 풍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뱌오는 한반도 개입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미군과의 정면 충돌이 가져올 위험을 우려했고,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령관 자리를 거부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의 거부는 사실상 정치적 거부였다.

마오는 다음 후보로 펑더화이를 지목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의 부름에 즉시 응했다. 그가 받아들인 이유는 단순했다. 마오가 결정한 일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평생 신조였기 때문이다. 그는 1950년 10월 8일 베이징의 정치국 회의에 참석해 임명을 받은 직후 만주로 향했다. 52세의 그가 한반도 작전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1951년 한국 전쟁 전선의 펑더화이

30만 명은 어떻게 들어왔는가

압록강 도하의 핵심 미스터리는 이것이었다. 30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부대가 어떻게 미군의 정찰을 피해 한반도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가.

펑더화이가 적용한 작전 원칙은 네 가지였다.

첫째, 위장의 철저함. 모든 군복에서 인민해방군의 표시가 제거되었다. 부대 번호도 바꾸었다. 한반도에 들어선 모든 병사는 "중국인민지원군 제○군"의 일원으로 표시되었다. 이름의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의미는 컸다. 정부 차원의 정규군이 아니라 자발적 지원자들의 부대라는 외교적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야간 이동. 모든 부대 이동은 야간에만 진행되었다. 해가 지면 행군을 시작해 새벽 네 시경 행군을 중단했다. 그 후 해가 뜨기 전에 산림 속에 부대를 숨겼다. 낮 동안에는 부대원들이 산림 속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잤다. 화기 사용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취사도 불빛이 새 나가지 않도록 산림 속 깊은 곳에서 진행되었다.

셋째, 무전 통신 최소화. 부대 간 통신은 거의 모두 도보 전령에 의존했다. 무전기는 응급 상황에서만 짧게 사용되었다. 무전 신호의 방향이 미군 정찰에 잡힐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넷째, 분산된 도하. 25만 명에서 30만 명의 부대가 한 곳에서 도하한 것이 아니었다. 안둥, 장전, 만포진 등 압록강의 여러 도하 지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각 지점에서도 야간에 작은 부대 단위로 나뉘어 건넜다. 거대한 부대 이동의 시각적 흔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이 네 가지 원칙이 결합되어 정보 차단의 효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미군 정보 시스템의 한계가 없었다면 그렇게 결정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EP.16에서 다룬 윌러비의 정보 평가가 중국군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본 결과, 정찰의 우선순위가 그 방향이 아니었다. 펑더화이의 위장 작전과 미군의 정보 편향이 만나 결정적인 정보 차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왔는가

이 25만 명에서 30만 명의 부대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대부분이 4년에서 5년의 실전 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군과 싸웠고, 그 전에는 일본군과 싸웠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의 평균 연령은 25세 전후로 비교적 젊었지만, 군대 경력은 5년에서 10년에 이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부대의 출신 지역은 주로 동북 지역, 즉 만주와 그 인근이었다. 제13병단은 원래 중국 동북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던 부대였다. 그들 중 다수가 만주에서 자랐고 한반도의 지형과 기후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일부 부대에는 조선족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 정찰과 통역에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부대의 장비 상태는 미군에 비해 크게 열세였다. 그들의 무기는 주로 일본군에게서 빼앗은 38식 보병총, 그리고 소련에서 지원받은 일부 소총이었다. 자동화기는 부족했다. 야포의 수도 제한적이었고, 전차는 거의 없었으며, 항공기는 사실상 전무했다. 보급 체계도 매우 단순했다. 각 병사가 일주일치 식량(주로 가루로 빻은 보리)을 어깨에 메고 출발했고, 그 후의 보급은 노새와 도보 짐꾼에 의존했다.

이 화력과 보급의 열세를 펑더화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보완하려 했다. 첫째는 인원의 압도적 우위였다. 미군과 한국군이 청천강 부근에 약 13만 명의 병력을 배치한 시점에 중국군은 30만 이상의 병력을 그 일대에 집결시켰다. 둘째는 야간 작전과 산악 지형의 활용이었다. 화력 우위인 미군이 가장 약한 시간과 지형, 즉 야간과 험준한 산악 지역에서 결정적 공격을 가하는 전술이었다.

한국 전선으로 향하는 중국군이 군악대의 연주 속에 압록강을 줄지어 건너고 있다.

11월 1일, 운산의 첫 충돌

11월 1일 수요일, 평안북도 운산. 한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운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그들은 정체불명의 부대로부터 대규모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것이 중국군의 첫 본격적인 전투였다. 운산 전투에서 미 제1기병사단 제8연대 제3대대가 사실상 전멸했다. 약 800명의 부대원 중 600명 이상이 사망 또는 포로가 되었다. 한국군 제1사단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패배는 미군에게 충격이었다. 자신들이 갑자기 마주친 부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그제야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사로잡힌 포로들의 신문 결과 중국군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부 포로들의 군복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결정적 증거 앞에서도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여전히 평가를 미루었다. 윌러비는 운산의 중국군을 "소규모 자원자 부대"로 해석했다. 그가 11월 초에 작성한 정보 평가에서 한반도에 있는 중국군의 총 규모를 약 3만에서 5만 명 정도로 추정했다. 실제로 그 시점에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중국군이 약 25만 명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평가의 결과 미군과 한국군은 운산 전투 후에도 청천강을 향한 진격을 계속했다. 11월 중순에는 청천강 일대로 진격해 정전 후 분단선 협상에 유리한 지점을 확보하려 했다. 맥아더는 11월 24일 "성탄절까지 전쟁을 끝낼 것"이라는 자신감 가득한 성명을 발표했다. 미군이 "최후의 공세(Home for Christmas Offensive)"를 시작한 것이다.

이 공세는 펑더화이가 기다리고 있던 함정이었다.

11월 25일,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다

11월 25일 토요일 저녁부터 11월 26일 일요일 새벽 사이. 청천강 일대의 산악 지대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30만의 중국군이 동시에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공격의 범위와 강도는 미군과 한국군에게 완전한 충격이었다. 청천강 일대의 한국군 제2군단(제6, 7, 8사단)이 가장 먼저 무너졌다. 중국군 약 6개 사단이 한국군 제2군단을 측면과 후방에서 동시에 공격했다. 한국군 제2군단의 방어선이 사실상 와해되었고, 11월 27일부터 약 일주일에 걸쳐 한국군 제2군단의 다수가 흩어지거나 포로가 되었다.

같은 시기 미 제8군의 좌익을 형성하던 미 제2사단도 큰 피해를 입었다. 청천강 북쪽의 군우리 일대에서 미 제2사단이 중국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결정적인 손실을 입었다. 사단 병력의 약 30퍼센트인 5,000명 이상이 사망, 부상 또는 포로가 되었다. 11월 30일부터 12월 1일 사이의 군우리 전투는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입은 가장 큰 단일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동부 전선에서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 일부가 장진호 부근에서 포위되었다.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그들은 약 17일에 걸쳐 흥남까지 후퇴해야 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 사상자가 약 1만 명에 이르렀고, 그중 약 절반이 동상으로 인한 비전투 사상자였다.

1950년 10월30일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까지 진출한 미 해병대 1사단 7연대 병사들이 장갑 등 방한용품을 지급받는 모습. 장진호 전투는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극한의 추위 속에 치러졌다.

마오안잉의 마지막

이 시기 EP.05와 EP.15에서 언급한 마오안잉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마오안잉은 펑더화이의 사령부에서 통역 겸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어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 외교와 정보 업무에 활용되었다. 11월 24일 밤,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 있는 펑더화이의 사령부에서 그는 평소처럼 야간 근무를 하고 있었다.

11월 25일 새벽, 미 공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네이팜탄을 포함한 폭탄이 사령부 일대에 떨어졌다. 펑더화이를 포함한 다수의 사령부 인원들은 방공호로 피신했다. 그러나 마오안잉은 그 시각 사령부 건물 안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폭격 시 그가 미처 피신하지 못했다는 설, 그가 일부러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는 설 등이 있다.

폭격 후 발견된 그의 시신은 화염에 거의 완전히 타 있었다. 동행한 다른 참모진과 함께 그가 사령부 안에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28세였다.

펑더화이는 그 소식을 마오쩌둥에게 즉시 보고하지 않았다. 그는 며칠을 망설인 후 12월 초가 되어서야 베이징에 직접 전문을 보냈다. 마오쩌둥은 그 소식을 받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펑더화이에게 답신을 보내며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른다. 마오안잉은 다른 부대원들과 다르지 않다. 그를 그곳에 묻으라." 마오안잉의 시신은 그 후 한반도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인민지원군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일화의 의미는 두 가지다. 한쪽은 한 아버지의 비극이다. 다른 한쪽은 한 정치 지도자의 결단이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아들의 시신을 중국으로 가져오기를 거부했다. 그가 자신의 아들을 다른 부대원들과 같은 자리에 묻은 것은 그 후 중국 내부에서 한국전쟁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데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마오의 결정은 가족적 비극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자원이 되었다.

청천강에서 38선까지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중국군의 1차 대공세가 진행되었다. 미 제8군과 한국군은 청천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평양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4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했다. 12월 6일 평양이 다시 인민군과 중국군의 손에 들어갔다.

후퇴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2월 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 부근까지 후퇴했다. 1951년 1월 초 중국군과 인민군의 2차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1월 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되었다. 이른바 1·4 후퇴였다. 한국전쟁의 두 번째 서울 함락이었다.

10월 19일 한국군이 평양에 입성하던 그날 시작된 변화가 약 두 달 반 만에 한반도 전체를 다시 38선 부근으로 되돌려놓았다. 그 두 달 반 동안 미군과 한국군은 약 4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중국군과 인민군은 그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한반도 북쪽의 도시들이 다시 한 번 큰 폭격과 전투의 흔적을 입었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자유를 향한 배’에 승선하는 피란민들.

정보의 비대칭이라는 비극

펑더화이의 작전 성공과 미군 정보 시스템의 실패 사이의 비대칭이 이 시기의 결정적 변수였다. 약 30만의 부대를 한반도 안쪽으로 잠입시킬 수 있었던 것은 군사적 위장의 성공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군 측 정보 평가의 실패이기도 했다.

박명림은 이 비대칭을 "정보의 정치화의 결과"로 분석한다. 정보 자체는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찰기의 일부 보고는 정확했다. 사로잡힌 중국군 포로의 신문 결과도 명확했다. 저우언라이의 외교적 경고도 분명했다. 그러나 이 정보들이 도쿄 사령부의 정책적 우선순위와 어긋났기 때문에 일관되게 무시되었다.

이 정보 실패가 가져온 결과는 한국전쟁의 그 후 두 달 반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났지만, 그 영향은 그 후 70년 이상 이어졌다. 만약 미군이 10월 중순에 중국군 대규모 개입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청천강 진격을 자제했다면, 한국전쟁은 매우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1950년 10월의 정치적 모멘텀과 정보 편향 속에 묻혔다.

다음 회 예고

EP.18 영하 이십 도의 후퇴, 1·4 후퇴 1950년 12월부터 1951년 1월 초까지. 두 번째 서울 함락. 그러나 이번에는 6월의 그것과 달랐다. 시민들이 정부의 거짓에 속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와 함께 떠났다.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진행된 거대한 피난 행렬. 흥남 철수의 1만 4천 명,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한 수십만 명. 그리고 박완서가 자전적 소설에 기록한 두 번째 피난의 기억. 6월의 첫 번째 비극이 어떻게 두 번째 비극의 학습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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