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다섯 시. 인천 앞바다. 짙은 안개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230여 척의 함정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미 해군의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그리고 상륙함들. 그 함대 안에는 약 7만 5천 명의 병력이 타고 있었다. 미 제1해병사단, 제7보병사단, 그리고 한국 해병대 일부.

함대 한 가운데에는 기함 마운트 매킨리(USS Mount McKinley)호가 있었다. 그 함의 함교에서 70세의 한 노장이 안개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그의 인생 가장 큰 도박이 그 새벽 진행 중이었다.
조수 차이가 약 10미터에 이르는 인천 앞바다.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만조 때만 상륙이 가능한 곳. 그 만조의 시각이 새벽과 저녁 두 차례, 각각 약 세 시간뿐인 곳. 그 한정된 시간 안에 모든 부대를 상륙시켜야 했다. 만약 첫 부대가 상륙한 뒤 다음 만조를 기다리는 동안 인민군이 반격해온다면, 첫 부대는 고립될 위험에 처할 것이었다. 거의 모든 미군 군사 전문가가 이 작전에 반대했던 이유다.
새벽 여섯 시 삼십 분, 첫 상륙이 시작되었다. 인천 항구 입구의 작은 섬 월미도였다. 미 해병대 제5연대 제3대대 약 1,000명이 월미도에 상륙했다. 인민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약 한 시간 만에 월미도가 점령되었다. 도박의 첫 카드가 성공한 것이다.
맥아더라는 인물
이 도박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강행한 한 사람을 먼저 알아야 한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미국 군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 그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도 미군 장군이었다. 두 부자가 모두 의회 명예 훈장을 받은 유일한 사례가 그들이었다.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고, 1930년대에는 미군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35년부터 필리핀에서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일본군에 밀려 필리핀에서 호주로 철수하면서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I shall return)." 그는 정말 돌아왔다. 1944년 10월 필리핀 레이테 섬에 다시 상륙했다. 그리고 1945년 9월 2일 도쿄만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을 주재했다.

전후 그는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일본의 전후 재건을 총괄했다. 일본 헌법 제정, 토지 개혁, 재벌 해체, 그리고 천황제의 변형. 그가 도쿄에서 보낸 5년은 일본 현대사를 결정적으로 형성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도쿄의 미 극동군 사령관 자리에 있었다.
70세의 그는 자신이 한 번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큰 일이 한반도에서의 결정적 반격이었다.
낙동강에서의 두 달
인천상륙의 의미를 알려면 1950년 7월부터 9월 중순까지의 두 달을 먼저 봐야 한다.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7월 5일 오산 전투, 7월 20일 대전 함락, 7월 말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대부분이 인민군 손에 들어갔다. 8월 초에는 한반도 남단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점령되었다.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해 인민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초기에는 패배의 연속이었다.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7월 20일 대전에서 인민군에 포로로 잡힌 사건은 그 패배의 상징이 되었다. 일본에서 점령군 임무를 수행하던 미군 부대들은 본격적인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한반도에 투입된 것이었다.
8월 초가 되어서야 미군과 한국군은 낙동강 일대에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부산을 거점으로 한 약 240킬로미터 길이의 방어선이었다. 그 안쪽으로 약 20만의 미군과 한국군이 배치되었다. 그 바깥쪽에서는 약 30만의 인민군이 부산을 향해 압박해왔다. 8월 한 달 동안 낙동강 방어선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다부동, 영천, 마산 등에서 사단 또는 군단 규모의 전투가 연이어 일어났다. 사상자가 양측에서 수만 명씩 발생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결국 낙동강을 넘지 못했다. 한 달에 걸친 공세에도 부산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서 장담했던 "단기간 내 종결"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결과였다.
문제는 이 교착이 양측 모두에게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 방어선을 거점으로 북쪽으로 반격하기에는 인민군이 너무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정면 돌파로는 인민군 30만을 무너뜨리기 어려웠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이 인천이었다.
도박의 구상
인천상륙의 구상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초부터 맥아더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한반도 지도를 보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인민군이 남쪽으로 길게 늘어선 보급선이 인천에서 끊긴다면,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주력은 보급을 받지 못해 무너질 것이라는 것. 인천은 서울과 평양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의 핵심 지점이었다.
그러나 인천은 상륙 작전에 부적합한 곳이었다. 첫째, 조수 문제. 평균 조수 차이가 약 7미터, 사리 때는 10미터에 달했다. 만조 때만 상륙 함정이 항구 근처에 접근할 수 있었다. 둘째, 갯벌. 만조가 끝나면 광활한 갯벌이 드러나 함정의 활동이 불가능했다. 셋째, 항구 입구. 비좁고 굴곡진 항로가 함대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넷째, 월미도 같은 작은 섬이 항구를 막아서 사전 점령이 필요했다.
미 해군과 해병대의 작전 전문가들 거의 모두가 이 작전에 반대했다. 8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작전 회의에서, 합동참모본부 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까지 회의에 참석해 맥아더의 안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80분에 걸친 즉흥 연설로 회의를 설득했다.
맥아더 회고록에 따르면, 그날 그의 핵심 논리는 이러했다. 첫째, 인천은 모든 군사 전문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곳이다. 따라서 인민군도 그곳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다. 기습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둘째,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빠르게 점령하면 인민군의 보급선이 끊겨 낙동강 전선이 자동적으로 무너진다. 셋째, 군사적 모험은 위험할 때만 의미가 있다. 그가 인용한 말이 있었다. 영국 장군 제임스 울프가 1759년 캐나다 퀘벡 전투 직전에 한 말. "나는 후방에서 도박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도박이 가장 큰 승리를 가져온다."
맥아더는 결국 합참의 마지못한 동의를 얻어냈다. 작전은 1950년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그날이 다음 두 달간 인천 앞바다에서 만조 조건이 가장 좋은 날이었다.

그날의 진행
9월 15일 새벽 여섯 시 삼십 분, 월미도 상륙으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약 한 시간 만에 월미도가 점령되었다. 인민군은 이 작은 섬에 약 400명의 병력만 배치했고, 그 대부분이 작전 직전 며칠간의 함포 사격과 폭격으로 이미 무력화된 상태였다.
월미도 점령 후 함대는 다음 만조를 기다렸다. 그날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본격적인 상륙이 시작되었다. 미 해병대 제1연대와 제5연대가 인천 시내의 적색 해안과 청색 해안에 동시에 상륙했다. 인민군의 저항은 여전히 산발적이었다. 인천에 배치된 인민군 병력은 약 6,500명에 불과했고, 그들 중 다수는 갓 동원된 신병이었다.
밤 열한 시경, 인천이 사실상 점령되었다. 작전 첫날 미군 사상자는 사망 21명, 부상 174명에 불과했다. 인민군 사상자는 사망 약 1,400명, 포로 약 300명. 거의 모든 군사 전문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작전이 첫날 만에 결정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다음 며칠 동안 미군은 인천에서 서울 방향으로 진격했다. 9월 17일 김포 비행장이 탈환되었고, 9월 22일 한강에 도달했다. 9월 25일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그 사이 낙동강 전선에서도 미 제8군이 반격을 개시해 9월 23일부터 인민군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인천상륙으로부터 서울 수복까지 정확히 2주. 한 도박이 만든 결과였다.
맥아더의 광채와 그림자
이 성공은 맥아더에게 거의 신화적인 위상을 안겨주었다. 미국에서 그는 영웅이 되었고, 한국에서는 구원자로 받아들여졌다. 인천 자유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한국의 학교 교과서는 오랫동안 그를 한국의 은인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이 광채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인천상륙의 성공이 맥아더에게 너무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후 38선 북진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것도 단순한 38선 회복이 아니라, 압록강까지의 완전 점령이었다. 트루먼 대통령과 합참의 일부 인사들이 우려를 표명했지만, 인천에서 거의 모든 군사 전문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공시킨 그의 권위는 막대했다. 결국 그의 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 북진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안다. 10월 19일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 11월 말 청천강 일대의 대패, 12월 흥남 철수, 그리고 1951년 1월의 두 번째 서울 함락.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 어떤 의미에서는 인천의 성공이었다. 너무 큰 성공이 그 다음의 너무 큰 실패를 부른 사례. 이 측면을 시리즈는 EP.16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9월 28일, 서울 수복
서울 수복의 날, 9월 28일 화요일. 90일 전 같은 화요일에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고, 그 후 정확히 90일이 지난 후 같은 도시가 수복된 것이다.
수복 작전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9월 25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시가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인민군은 시가지의 주요 건물과 도로를 거점으로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다. 미군과 한국군은 시가전을 통해 도시를 한 블록씩 점령해갔다. 그 과정에서 서울의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 광화문, 종로, 명동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9월 28일 오후 두 시,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가 다시 게양되었다. 90일 만이었다. 그날 저녁 맥아더가 서울에 도착했고, 9월 29일 오전 중앙청에서 공식적인 서울 수복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이제 정부를 다시 인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은 한국전쟁 초기의 한 정점이었다. 그러나 그 정점 아래에는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수복이 가져온 또 다른 비극
서울 수복은 90일을 견딘 시민들에게 무엇을 가져왔는가. 표면적으로는 해방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의심과 처벌의 시작이었다.
수복 직후부터 부역자 색출이 시작되었다. 점령기에 인민위원회에 가담했거나, 학습회에 참석했거나, 의용군에 끌려갔다 돌아왔거나, 그 외 어떤 식으로든 점령 체제와 접점이 있었던 사람들이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동회와 통회 단위로 부역자 명단이 작성되었다. 그 명단을 따라 검거와 조사가 이뤄졌다.
EP.12에서 이미 언급한 유진오의 책 출간 동기가 여기 있었다. 그는 1950년 12월 『고난의 90일』을 빠르게 출간해 자신이 점령기에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를 공개적으로 기록했다. 자기 변호이자 자기 보호의 행위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책을 쓸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글을 모르거나, 사회적 지위가 없거나, 변호해줄 사람이 없는 시민들에게 부역자 의혹은 곧 처벌로 이어졌다.
수복 후 약 한 달 사이 서울에서만 약 5만 5천 명이 부역자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중 일부는 즉결 처분되었고,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며, 일부는 단순히 사회적 낙인을 받고 풀려났다. 정확한 처형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김동춘은 이 부역자 처벌을 EP.13에서 다룬 보도연맹원 학살의 대응물로 본다. 점령기 동안 한국 정부 측이 보도연맹원 학살을 자행했다면, 수복 후에는 부역자 처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두 폭력은 다른 시점에 다른 대상을 향했지만, 같은 구조의 변형이었다. 정치적 의심을 죽음으로 처리하는 구조.
90일의 의미
9월 28일 서울 수복으로 점령기 90일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90일이 한국 사회에 새긴 흔적은 그 후 한 세대 이상 이어졌다. 부역자 의혹, 의용군 출신 낙인, 월북 작가 금지,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평생에 걸친 침묵. 이 모든 것이 그 90일에서 시작되었다.
박완서가 자전적 소설에서 강조한 것도 같은 메시지였다. 그 90일은 90일이 아니라 50년이었다고. 그녀의 가족이 90일 동안 견뎌야 했던 것은 한정된 시간이었지만, 그 90일 동안 새겨진 낙인은 평생 그녀와 가족을 따라다녔다고. 한국전쟁의 비극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인생 전체에 걸쳐 계속된 것이라고.
이 시리즈가 한국전쟁을 단순한 전쟁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사로 다루려는 이유가 여기 있다.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의 90일, 그리고 그 후 인천상륙과 수복으로 이어진 두 달. 이 한정된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가 한국 사회의 그 후 한 세대 또는 두 세대를 결정적으로 형성했다.
이제 시리즈는 한국전쟁의 다음 국면으로 넘어간다. 9월 말 서울이 수복된 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까지 빠르게 진격했다. 그 38선에서 한 가지 결정적인 질문이 던져졌다. 38선에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북진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한국전쟁의 그 후 전체 향배를 결정했다.
다음 회 예고
EP.15 38선을 넘을 것인가, 10월의 선택 1950년 9월 말,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에 도달한다. 한 번 더 결정의 순간이 온다. 38선에서 멈출 것인가, 북진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인가. 이승만의 강력한 북진 의지, 맥아더의 군사적 자신감, 트루먼의 망설임. 그리고 그 망설임을 결국 결단으로 바꾼 변수들. 한국전쟁의 두 번째 결정적 분기점에서 무엇이 결정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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