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8일 오전, 미아리 고개를 넘어
1950년 6월 28일 화요일 오전 열한 시경, 미아리 고개. 비는 새벽 한강 다리 폭파 후에도 그쳤다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뚫고 첫 인민군 부대가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선두는 T-34 전차였다. 캐터필러가 빗물 고인 도로를 가르며 천천히 남쪽으로 내려왔다. 전차 뒤로 보병 부대가 따라왔다. 인민군 제3사단과 제4사단 소속, 제105 기갑여단의 전차들이었다.

미아리 고개를 넘은 부대는 돈암동을 지나 종로로 향했다. 정오 무렵 종로 거리에 첫 인민군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공포 때문이었다. 서울 시민들은 집 안에 숨어 창문 틈으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한강 다리가 끊겼다는 소식, 정부와 군이 떠났다는 소식이 그날 새벽부터 거리에서 거리로 번지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은 그 시각 중단된 상태였다.
유진오는 『고난의 90일』에서 그날 오전을 회상한다. 그는 자택에서 라디오를 켜보았으나 침묵이었다고 적었다. 거리에 나가지 않았지만 멀리서 들리는 소음, 그리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그는 사태의 진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한강 북쪽에 갇혔다는 것을. 그는 그날 일기에 짧게 적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손을 떠났다."
첫 일주일, 도시의 표면이 바뀌다
서울 점령 첫 며칠 동안 도시의 표면이 빠르게 바뀌었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깃발이었다. 6월 28일 오후부터 시내 주요 건물들에 인공기가 걸리기 시작했다. 중앙청, 서울시청, 종로 일대의 주요 관청 건물에 붉은 깃발이 게양되었다. 거리 곳곳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내걸렸다. 며칠 사이 도시의 시각적 풍경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다음으로 바뀐 것은 라디오였다. 6월 29일부터 KBS 송신탑에서 평양 방송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익숙한 KBS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평양 억양의 다른 목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방송 내용은 인민군의 "해방 작전" 진전 소식, 새 정치 체제의 강령 설명, 그리고 노동가요와 행진곡이었다.
세 번째 변화는 화폐였다. 7월 초부터 북한 원화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기존 한국 원화는 사용 금지 또는 제한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두 화폐가 한동안 혼용되었다. 시장에서 상인들은 둘 다 받았다. 그러나 공식적인 거래, 특히 인민위원회와 관련된 거래에서는 북한 원화만이 인정되었다.
네 번째 변화는 시간이었다. 북한은 한국과 같은 표준시를 쓰고 있었기에 시계의 시각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달력의 의미가 달라졌다. 7월 1일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었고, 8월 15일은 또 다른 의미로 기념되었다. 일요일은 더 이상 휴일이 아니었다.

인민위원회
도시의 표면적 변화 아래에서 진행된 더 결정적인 변화는 인민위원회의 설치였다.
서울시 인민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발족한 것은 6월 28일이었다. 위원장은 이승엽(李承燁). 남로당계 출신으로 박헌영의 측근이었다. 그 아래 부위원장, 서기장, 그리고 각 부서가 빠르게 조직되었다. 동시에 서울의 각 구별로 구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그 아래 동별, 통별, 반별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조직 구성의 속도가 인상적이다. 며칠 만에 도시 전체의 행정 체계가 새로 짜였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박명림은 이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인민군은 점령 작전을 시작하기 전부터 행정 인력을 함께 준비했다. 약 1만 명 규모의 행정 요원이 군과 함께 남하했다. 둘째, 남로당계 인사들 중 점령 전부터 서울에 잠복해 있던 인원들이 즉시 합류했다. 박헌영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서 약속한 "남한 내 봉기"의 실체가 일부 여기서 드러났다. 대중적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정한 조직적 기반은 존재했던 것이다.
각 동의 인민위원회는 즉시 동민 등록을 시작했다. 가족 구성, 직업, 재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출신 성분"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출신 성분이란 본인과 가족의 사회경제적 배경, 그리고 일제 시대와 해방 후의 행적을 의미했다. 노동자, 빈농 출신은 "기본 군중"으로 분류되었다. 지주, 자본가, 친일파,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 일한 사람들은 "복잡 군중" 또는 "적대 군중"으로 분류되었다.
이 분류가 그 후 모든 것을 결정했다. 식량 배급, 직업 배정, 그리고 의용군 동원 대상 여부까지. 한 사람의 운명이 출신 성분 조사에서 결정되었다.
살아남는 법
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144만 서울 시민이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유진오의 책은 이 질문에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첫 번째 답은 "보이지 않게 사는 것"이었다. 거리에 나가지 않고, 라디오 방송에도 응하지 않고, 인민위원회의 호출에도 가능한 한 늦게 응답하는 것. 많은 지식인과 중산층 시민이 이 전략을 택했다. 유진오 자신도 처음 며칠은 이렇게 행동했다.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면서 인민위원회는 동민 전수 조사를 시작했고, 누가 어느 집에 살고 있는지가 빠르게 파악되었다. 7월 첫 주가 지나면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보이지 않게 살려 했던 사람들도 결국 자신을 노출시켜야 했다.
두 번째 답은 "최소한의 협력"이었다. 호출이 오면 응하되, 가능한 한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 등록은 하되 적극적인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 강의나 학습회 참석은 하되 발언은 하지 않는 것. 많은 지식인이 이 좁은 회색지대를 걸으려 했다.
세 번째 답은 "적극적 협력"이었다. 새 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안전과 지위를 확보하는 것. 일부 지식인과 학생들이 이 길을 택했다. 그들의 동기는 다양했다. 진정한 신념에서, 기회주의적 계산에서, 또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에서. 동기와 무관하게 결과는 같았다. 그들은 부역자가 되었고, 9월 수복 후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네 번째 답은 "도피"였다. 한강 다리는 끊겼지만 다른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었다.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나룻배가 일부 운행되었고, 외곽의 다른 강 건너는 길도 있었다. 일부 시민들이 이런 방법으로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했다. 인민군 경비대에 발각되면 즉시 처형되기도 했다. 7월부터 한강 경비가 강화되면서 탈출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김규식과 정인보 같은 사람들
점령 첫 며칠에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한강 다리가 끊긴 시점에 한강 북쪽에 있던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인민군에 의해 체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김규식이었다. 임시정부 부주석 출신의 노년 정치인. 1948년 분단 정부 수립에 반대해 평양에 갔다 돌아온 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상태였다. 그가 한강 다리 폭파로 인해 남쪽으로 가지 못하고 자택에 갇혀 있었다. 7월 초 인민군이 그를 찾아왔다. 평양으로 함께 가자는 "요청"이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요청이었다.
7월 중순, 김규식은 다른 정치인들과 함께 북으로 끌려갔다. 그와 함께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안재홍, 조소앙, 정인보 등 한국 근대사의 거물들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평양에서, 일부는 평양에서 더 북쪽으로 끌려가는 도중 사망했다. 김규식은 만포진에서 1950년 12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인보도 같은 시기 북한 어딘가에서 사망했다. 그들 중 누구도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납북"은 점령기 90일이 만든 또 다른 비극이었다. 한강 다리가 폭파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남쪽으로 피난할 수 있었을 것인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다리가 끊긴 결과 그들이 평양으로 끌려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EP.09에서 다룬 "도망친 자들이 남은 자들을 심판하는" 구조의 또 다른 측면, 즉 도망친 자들이 남은 자들을 적의 손에 넘긴 셈이기도 했다.
의용군 동원
7월 중순부터 점령 체제가 시민들에게 강요한 새로운 과제가 시작되었다. 의용군 동원이었다.
원래 계획은 빠른 군사적 통일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서 장담한 것은 단기간 내 종결이었다. 그러나 7월 중순이 되면서 그 계획에 차질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해 충북 천안 일대에서 인민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인민군에 패배했지만, 후속 미군 부대들이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질 가능성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 정권은 남한 점령 지역에서 의용군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형식상 "자원"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 동원이었다. 각 동, 각 직장, 각 학교마다 할당량이 떨어졌다. 청년들이 줄지어 동원되었다. 7월부터 9월 사이 서울에서만 약 5만에서 8만 명의 청년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고 추정된다.
이 의용군들의 운명은 비참했다. 충분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전선에 투입되어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일부는 인민군 정규 부대에 편입되어 낙동강 전선까지 끌려갔다가, 9월 인천상륙 후의 후퇴 과정에서 죽거나 흩어졌다. 일부는 미군 또는 한국군에 포로로 잡혔다. 살아남아 남쪽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그 후 평생 "의용군 출신"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야 했다.
박완서는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자신의 오빠가 의용군으로 끌려간 일을 회상한다. 그녀의 오빠는 의용군에서 탈출해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후의 인생이 그 짧은 의용군 경력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망가졌다. 박완서의 가족이 겪은 일은 그 시기 서울의 수많은 가족들이 겪은 일의 한 사례였다.

도시의 두 얼굴
점령기 첫 한 달의 서울에는 두 얼굴이 공존했다.
한쪽 얼굴은 새 체제의 활기였다. 거리에 붉은 깃발이 걸리고, 광장에서 군중집회가 열리고, 평양 방송이 흘러나오고, 인민위원회가 분주히 움직였다. 표면적으로 도시는 "해방"된 상태였다. 신문(인민일보, 해방일보 등)이 그 활기를 매일 보도했다. 일부 시민들이 실제로 그 분위기에 동참했다.
다른 한쪽 얼굴은 침묵과 공포였다. 자택에 숨은 시민들, 출신 성분 조사에 떨고 있는 가족들, 의용군 동원에 끌려간 아들을 둔 어머니들. 그들의 표정은 거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144만 시민의 다수였다.
유진오는 이 두 얼굴을 동시에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고난의 90일』은 외부에 드러난 거리의 풍경과 자신의 내면에 갇힌 두려움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한계도 있다. 그가 본 것은 어디까지나 한 지식인의 시선이었다. 인민위원회에 적극 참여한 노동자들, 의용군으로 끌려가 죽은 청년들, 그리고 점령 체제에서 일정한 위치를 얻은 사람들의 시선은 그의 책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 시선들은 다른 자료들에서, 그리고 침묵 속에서 찾아야 한다.
90일이 시작되었다
서울 점령은 9월 28일 수복까지 정확히 90일 동안 계속되었다. 6월 28일에서 9월 28일까지. 유진오의 책 제목이 이 시간을 따왔다. 90일은 그 자체로는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그 90일 동안 서울에서 일어난 일은 그 후 한국 사회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다음 회에서는 이 90일을 살아낸 사람들의 구체적인 선택들을 들여다본다. 부역과 저항 사이의 회색지대를 어떻게 걸어갔는지. 그리고 그 선택들이 9월 수복 후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다음 회 예고
EP.12 부역과 저항 사이, 지식인들의 90일 점령기 90일을 한 사람의 시민이, 한 사람의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냈는가. 자발적 협력, 강요된 협력, 위장된 저항. 그 사이의 좁은 회색지대. 유진오 자신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을 다른 자료들과 교차시켜 본 진실. 박완서가 회상한 십대 소녀의 시선. 살아남은 자의 회한과 살아남지 못한 자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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