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8일, 새벽 두 시 삼십 분
1950년 6월 28일 화요일 새벽 두 시 삼십 분. 한강 인도교 위. 거센 빗줄기 속에서 굉음이 울렸다. 다리 중간 부분에서 세 차례 연속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한강 인도교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교각 사이가 무너져 내렸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인근 광장교(현 한강철교)와 다른 두 개 교량도 폭파되었다.

폭발의 순간 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퇴하는 한국군 병사들, 경찰관들, 그리고 무엇보다 피난을 가던 일반 시민들. 정확한 숫자는 오늘날까지 확정되지 않았다. 당시 정부 발표는 약 800명이었다. 학자들에 따라 500명에서 1,000명 사이로 추정한다. 다만 한 가지 비교적 분명한 기록이 있다. 종로경찰서 소속 경관 77명의 이름이 명단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후퇴 중에 다리를 건너다 폭발에 휘말렸다.
다리는 끊어졌고, 사람들은 강물에 떨어졌으며, 빗속의 한강은 시신과 살아남은 자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것이 새벽 두 시 삼십 분이었다.
누가 명령했는가
이 폭파의 명령권자가 누구였는가는 한국전쟁 초기 비극의 핵심 질문이다.
가장 직접적인 명령은 채병덕 참모총장의 입에서 나왔다. 6월 27일 저녁부터 28일 새벽 사이, 그는 한강 다리 폭파를 지시했다. 폭파 실행 책임은 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에게 떨어졌다. 1925년생, 당시 25세였다. 일본 육사 출신의 젊은 장교였다.
그러나 채병덕의 명령은 어디서 왔는가. 그 위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있었다. 신성모는 정부 차원의 결정을 채병덕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신성모의 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그 시각 대통령은 대전에 있었지만, 신성모는 대전에 있는 대통령과 통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명령의 사슬에서 누가 진짜 책임자인가. 박명림의 정리에 따르면, 폭파의 시점, 즉 28일 새벽 두 시 삼십 분이라는 결정은 채병덕이 내렸다. 그러나 그 폭파 자체의 정책 결정은 더 위에서 내려왔다는 것이 일관된 결론이다. 즉 폭파의 실행 시각만 채병덕이 결정했고, 폭파한다는 결정 자체는 정부 핵심부에서 내려진 것이다.
왜 그 시각이었는가
폭파 시점이 왜 새벽 두 시 삼십 분이었는가. 이것이 두 번째 결정적 질문이다.
명령권자들의 입장에서 본 이유는 분명했다. 인민군이 한강 이북에 도달하기 전에 다리를 끊어 그들의 진격을 늦춰야 한다는 것. 만약 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한강 이남까지 진출하면, 후방의 한국군 재편성과 미군 증원에 결정적 차질이 생긴다는 것. 군사적 논리로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시점이 너무 일렀다. 둘째, 다리 위에 사람이 있었다.
첫 번째 문제부터 보자. 폭파 시점에 인민군 선두 부대는 아직 한강 북안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미아리 고개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인민군이 실제로 한강에 도달한 것은 28일 오후였다. 즉 다리를 폭파하지 않고도 몇 시간은 더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몇 시간 동안 한강 북쪽에 갇혀 있던 한국군 부대 약 4만 4천 명과 셀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이 다리를 건널 수 있었을 것이다.
박명림은 이 폭파를 "조기 폭파"라고 표현한다. 군사적 필요성이 임박하기 전에 정치적 패닉에 의해 결정된 폭파라는 것이다. 채병덕이 그 시점을 선택한 데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정보의 부족이 있었다. 그는 미아리에서 들려오는 포성을 인민군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잘못 읽었다. 실제로는 한국군 후위 부대가 후퇴 작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정확한 전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는 최악을 가정했다.

다리 위의 사람들
두 번째 문제, 다리 위에 사람이 있었다는 점. 이것이 더 결정적이고 더 비극적이다.
6월 27일 밤부터 28일 새벽 사이, 한강 인도교 위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27일 자정을 넘긴 시점부터 시민들도 사태의 진실을 알아챘고,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하려는 행렬이 다리로 몰렸다. 후퇴하는 한국군 부대도 같은 다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날 밤 한강 인도교는 빗속에서 군인과 민간인이 뒤엉킨 거대한 행렬이었다.
폭파 명령을 내린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학자들의 결론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정황상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대로 폭파를 강행했는가.
여기서 한 가지 비극적인 디테일이 등장한다. 최창식 대령은 폭파 직전 다리 양쪽에 헌병을 배치해 진입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그 헌병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고, 빗속에서 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통제선을 넘어 다리로 몰려들었다. 폭파의 신호를 보낸 그 순간에도 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폭파 직전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상황이 있었다. 폭파 신호와 실제 폭발 사이의 시차 문제다. 도화선이 점화되고 폭약이 실제로 터지기까지는 짧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이용해 다리 위 사람들에게 대피 신호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다. 폭발이 일어났을 때 다리 위 사람들에게 대피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한강 북쪽의 144만 명
폭파의 또 다른 비극은 다리 위 사람들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더 거대한 비극은 그 폭파의 결과 한강 북쪽에 갇히게 된 사람들이었다.
1950년 6월 시점 서울의 인구는 약 144만 명이었다. 6월 25일부터 27일 사이 일부 시민들이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였다. 정부의 거짓 라디오 방송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이 피난을 결심하지 못한 상태였다. 27일 밤이 되어서야 사태를 깨달은 시민들이 한강 다리로 몰렸지만, 그 다리는 28일 새벽 두 시 삼십 분에 폭파되었다. 그 결과 144만 명 중 대다수가 한강 북쪽에 갇혔다.
이들이 곧 점령기 90일을 견뎌야 할 사람들이었다. 유진오가 『고난의 90일』에서 기록한 사람들. 부역과 저항 사이에서 좁은 회색지대를 걸어가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9월 28일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로 의심받아 처벌의 위험에 처했던 사람들.
김동춘은 『전쟁과 사회』에서 이 비대칭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다. 권력자들은 27일 새벽에 이미 떠났다. 그들의 가족들도 일찍 떠났다. 그리고 다리는 그들이 떠난 뒤에 폭파되어, 일반 시민 144만 명을 한강 북쪽에 봉인했다. 그 후 정부는 9월 수복 후에 한강 북쪽에 남아 있던 시민들을 부역자로 의심하고 처벌했다. 김동춘의 표현으로는, "도망친 자들이 남은 자들을 심판하는" 구조였다. 이것이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새긴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다.

최창식 대령의 비극
폭파의 책임이 누구에게 떨어졌는가. 이것이 이 비극의 또 다른 차원이다.
폭파 후 두 달이 지난 1950년 9월, 한국군은 인천상륙 작전을 거쳐 서울을 수복했다. 그러자 정부는 한강 인도교 폭파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책임 추궁은 명령의 사슬을 따라 올라가지 않았다. 사슬의 가장 아래쪽, 폭파를 직접 실행한 최창식 대령에게로 떨어졌다.
1950년 9월 21일, 최창식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죄목은 적전비행, 즉 적 앞에서 잘못된 군사 행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다리를 너무 일찍 폭파해 한국군 부대들이 한강 북쪽에 갇히게 했다는 것이 핵심 혐의였다. 그날 그는 즉시 처형되었다. 25세의 젊은 장교는 그렇게 죽었다.
이 군법회의의 절차에 대해서는 후대에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변호인의 충분한 변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명령권자였던 채병덕이나 신성모, 이승만에 대한 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채병덕은 그 시점에 이미 1950년 7월 27일 하동전투에서 전사한 상태였지만, 신성모와 이승만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책임 추궁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명령권자인 채병덕이 전사했고, 더 위의 책임자들은 추궁받지 않았다. 그 결과 폭파의 모든 책임이 최창식 대령 한 사람에게 떨어진 것이다.
1964년의 재심
이 비극의 다음 장이 14년 후에 펼쳐졌다. 1962년, 최창식의 미망인 옥정애 여사가 재심을 청구했다. 그녀는 14년 동안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었다. 마침내 1964년, 군 고등법원은 재심을 통해 최창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최창식의 폭파 실행은 상관 채병덕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개인의 판단 잘못으로 처벌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 둘째, 폭파 시점에 대해서도 충분한 군사적 판단이 있었으며,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1950년 9월의 사형 판결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결론이었다.

1964년의 무죄 판결은 한 가족의 14년에 걸친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사람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 즉 그러면 진짜 책임자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이 주어지지 않았다.
최창식 대령의 무죄가 확정된 그 시점에 신성모는 이미 사망(1960년 사망)했고, 이승만은 하와이에 망명 중이었다(1965년 망명지에서 사망).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책임의 부재가 책임의 면제는 아니다. 1964년의 판결은 한 사람의 명예를 회복했지만, 한강 다리 위에서 죽은 수백 명과 한강 북쪽에 갇혔던 144만 명에 대한 진짜 답을 주지는 못했다.
한 다리, 여러 의미
한강 인도교 폭파는 한국전쟁사에서 단일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의미가 응축된 상징이다.
첫째,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첫 번째 결정적 순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자기 자신만 보호하고 국민을 버린 순간이었다. 권력자들은 다리가 폭파되기 전에 떠났고, 시민들은 떠난 권력자들의 결정에 의해 다리 북쪽에 봉인되었다.
둘째, 그것은 정보의 비대칭이 어떻게 비극을 만드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정부 발표를 믿은 시민일수록 더 큰 비극에 노출되었다. 거짓 라디오 방송과 한강 다리 폭파는 같은 사건의 두 얼굴이었다.
셋째, 그것은 책임 추궁의 비대칭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명령의 사슬 가장 아래쪽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졌고, 그 위의 권력자들은 추궁받지 않았다. 1964년의 재심조차도 진짜 책임자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이 세 가지 비대칭은 한국전쟁이 만들어낸 한국 사회의 깊은 균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김동춘이 말한 "국가의 첫 배신"의 정점이 바로 이 폭파였다. 그리고 그 배신의 결과를 떠안은 사람들의 90일이 이제 곧 시작될 참이었다.
한강 남쪽, 그리고 한강 북쪽
다리가 폭파된 그 새벽 이후, 한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한국이 만들어졌다. 한강 남쪽에는 정부와 군, 그리고 일부 시민들이 있었다. 한강 북쪽에는 갇힌 144만 명이 있었다.
이 두 한국의 운명은 이제 갈라진다. 한강 남쪽의 한국은 후퇴를 계속하다가 낙동강 방어선에서 멈춰 서고, 인천상륙과 함께 반격에 나선다. 한강 북쪽에 갇힌 사람들은 인민군의 점령 아래 90일을 견뎌야 한다. 인민위원회의 호출, 의용군 동원, 부역과 저항 사이의 선택. 그 모든 것이 다음 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 90일을 따라가기 전에, 한 가지 더 다뤄야 할 차원이 있다. 같은 시각 워싱턴과 유엔에서 무엇이 결정되고 있었는가. 트루먼은 어떻게 움직였고, 안보리는 어떻게 결의했으며, 소련은 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한국전쟁의 국제적 차원이 이제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다음 회에서 워싱턴의 일주일을 따라간다.
다음 회 예고
EP.10 워싱턴의 일주일, 트루먼의 결정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저녁부터 7월 1일 토요일까지. 워싱턴은 일주일 동안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결정을 내렸다. 트루먼의 즉각적 강경 대응, 두 차례의 유엔 안보리 결의, 그리고 미군 지상 부대 파병 결정. 그 일주일 동안 소련은 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스탈린의 의도적 방관인가 외교적 실수인가.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보이지 않는 셈법을 따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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