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인디펜던스의 한 저녁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저녁, 미국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집에서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66세의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떨어진 이곳을 사랑했다. 미주리의 평원, 익숙한 동네, 그리고 결혼 후 줄곧 살아온 그 집의 친밀한 공기를. 그날 저녁 그는 아내 베스, 딸 마거릿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서재에서 신문을 펼친 시각이 저녁 일곱 시 반경이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저녁 아홉 시 이십 분경이었다.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었다. 애치슨은 짧고 분명하게 보고했다. 한반도에서 북한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작했다는 것. 사태가 매우 심각해 보인다는 것. 트루먼은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그를 만류했다. 토요일 밤 비행기는 위험할 수 있으며, 다음 날 아침 첫 비행기로 오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 자신이 유엔과 군부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후 트루먼은 잠시 서재에 머물렀다. 그가 그 시각 무엇을 생각했는가는 후대 그의 회고록에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30년대 일본의 만주 침공,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 히틀러의 라인란트 진주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 모든 침공들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막아야 한다. 그것이 그날 밤 그의 결정이었다.
"그 망할 놈들을 막아야 한다"
밤 열 시경 트루먼은 다시 애치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후대에 자주 인용되는 그 발언을 했다. "딘,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망할 놈들을 막아야 합니다." 영어 원문은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이었다. 미주리 농촌 출신 대통령의 직설적 표현이었다.
이 발언이 갖는 의미는 단순한 어조 이상이었다. 그것은 트루먼이 사태 발생 24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이미 강경 개입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군사 보좌관들과 국무부의 일부 인사들조차 며칠간의 검토를 권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거의 본능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 결단의 빠름은 한국전쟁의 향배를 결정짓는 첫 번째 변수가 된다. 만약 트루먼이 며칠 또는 일주일을 더 검토했다면, 그 사이 인민군은 부산까지 진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미군이 개입할 교두보 자체가 없어진다. 트루먼의 24시간 결단이 그 후 모든 미국의 대응을 가능하게 한 출발점이었다.
6월 25일 일요일, 블레어 하우스의 첫 회의
6월 25일 일요일 오후 두 시 십오 분, 트루먼이 워싱턴 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곧장 블레어 하우스로 향했다. 백악관 본관이 보수 중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은 임시로 블레어 하우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일곱 시 사십오 분, 블레어 하우스의 식당에서 첫 비상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14명이었다. 국무장관 애치슨, 국방장관 루이스 존슨, 합동참모본부 의장 오마 브래들리, 육군참모총장 J. 로턴 콜린스, 해군과 공군의 참모총장들, 그리고 국무부와 국방부의 고위 관료들. 회의는 식사를 곁들이며 약 세 시간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세 가지였다. 첫째, 한국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 원조를 확대한다. 둘째, 미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한다. 셋째, 일본에 주둔한 미 극동공군에 한국군 지원을 위한 작전을 허가한다.
이 결정 중 두 번째, 즉 타이완 해협으로의 제7함대 파견은 EP.05에서 언급한 마오쩌둥의 우려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미국은 동시에 두 곳에 군사력을 투입한 것이다. 한반도와 타이완. 마오의 타이완 침공 계획은 이로써 사실상 무산되었다. 5월 베이징에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마오가 우려했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 것이다.
회의가 끝난 시각이 그날 밤 열한 시였다. 트루먼은 회의를 마치며 한 가지를 더 지시했다. 즉시 유엔 안보리를 소집하라는 것이었다. 외교적 정당성 확보가 군사적 대응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그의 판단이었다.
유엔 안보리, 첫 번째 결의
6월 25일 일요일 오후, 미국이 요청한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가 뉴욕에서 소집되었다. 사실 이것은 트루먼이 워싱턴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애치슨이 트루먼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토요일 밤부터 진행한 외교 작업의 결과였다.
회의가 열린 시각 안보리 회의실에는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의 자리였다. 소련은 1950년 1월부터 안보리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이유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안보리 대표권 인정 문제였다. 안보리에는 여전히 타이완으로 쫓겨간 장제스 정부가 중국 대표권을 갖고 있었다. 소련은 이에 항의하며 1월 13일부터 모든 안보리 회의에 불참하고 있었다.

그날 안보리에 제출된 결의안은 짧고 분명했다. 북한의 남침을 "평화의 침해(breach of peace)"로 규정하고, 즉시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 표결은 만장일치 가까운 압도적 통과였다. 9개국 찬성, 0개국 반대. 유고슬라비아 1개국 기권. 만약 소련 대표가 있었다면 거부권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가 없었기에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결의였다. 그러나 이 결의는 군사적 조치를 포함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 결의의 몫이었다.
6월 26일 월요일과 27일 화요일
워싱턴에서 6월 26일 월요일과 27일 화요일은 강도 높은 결정의 이틀이었다.
월요일 저녁, 두 번째 블레어 하우스 회의가 열렸다. 첫 회의 후 24시간 만이었다. 그 사이 한반도에서는 의정부가 함락되었고, 한국 정부의 절박한 지원 요청이 워싱턴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승만이 무초 대사를 통해, 그리고 도쿄의 맥아더를 통해 미국에 직접 지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월요일 회의에서 트루먼은 더 강한 조치를 결심했다. 미 극동공군과 해군이 38선 이남 한반도에서 직접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 원조 확대가 아니었다. 미군의 직접 참전이었다. 다만 그 시점에서는 공중과 해상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 결정은 6월 27일 화요일 정오에 공식 발표되었다. 트루먼의 성명은 짧고 단호했다. 북한의 침공이 평화에 대한 무력 공격임이 분명해졌고, 미국은 유엔의 결의를 지지하기 위해 한국에 공중과 해상 지원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화요일 저녁, 유엔 안보리에서 두 번째 결의안이 표결되었다. 이번 결의안은 첫 번째보다 훨씬 강했다. 회원국들이 "북한의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한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회원국들의 군사적 개입을 유엔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결의였다.
소련 대표는 여전히 자리에 없었다. 결의안은 7개국 찬성, 1개국 반대(유고슬라비아), 2개국 기권(이집트, 인도)으로 통과되었다. 한국 시각으로는 6월 28일 새벽이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새벽 두 시 삼십 분과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6월 30일 금요일, 지상군 파병 결정
화요일의 결정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며칠 만에 분명해졌다. 한국 시각으로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었고, 한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미 공군과 해군의 지원만으로는 인민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다는 보고가 도쿄에서 워싱턴으로 들어왔다.
6월 30일 금요일 새벽 다섯 시, 트루먼은 다시 결단의 자리에 섰다. 워싱턴 시각 새벽 다섯 시는 한반도 시각 같은 날 저녁 일곱 시였다. 그 시각 한국에서는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새벽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미 지상군의 한반도 파병이었다. 일본에 주둔 중인 미 제24사단을 우선 한반도에 투입한다는 것. 이것이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마지막 결정적 결단이었다. 이 결정 이후 미군은 본격적으로 한반도 지상전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약 3만 6천 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약 10만 명이 부상하며, 8천여 명이 실종 또는 포로가 된다. 한 주말의 결단이 결과적으로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인명 손실 중 하나로 이어졌다.

한 주의 결정들
6월 24일 토요일 저녁부터 6월 30일 금요일 새벽까지. 만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미국은 한국전쟁의 모든 핵심 결정을 내렸다. 군사 지원 확대, 미 제7함대의 타이완 해협 파견, 두 차례 유엔 안보리 결의, 미 공군과 해군의 직접 참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상군 파병.
이 결정들의 빠름은 후대에 여러 해석을 낳았다. 일부는 트루먼의 결단력을 높게 평가한다. 망설이지 않고 즉각 대응함으로써 한반도 전체가 인민군의 손에 들어가는 사태를 막았다는 것. 다른 일부는 그 결단이 너무 빠르고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고 본다. 미군 지상군의 한반도 파병이 만든 장기적 결과, 즉 미국이 동아시아 안보의 직접 보증인이 된 변화는 그 일주일 동안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트루먼의 빠른 결단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미국이 한국전쟁을 "냉전의 시험대"로 활용했다고 본다. 한국의 운명 자체보다는, 전 세계 차원에서 소련의 팽창에 강력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의도가 결단의 핵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그 신호의 무대였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박명림은 이 해석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한다. 그는 트루먼의 결단이 분명히 세계 차원의 냉전 논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결과적으로 한국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 결정이었다는 점도 강조한다. 의도와 결과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의 부재라는 미스터리
이 일주일의 모든 결정을 가능하게 한 한 가지 결정적 조건이 있었다.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부재였다.
EP.08에서 짧게 언급한 이 미스터리를 이제 본격적으로 살펴볼 시점이다. 스탈린은 왜 안보리 보이콧을 풀고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표면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소련은 1월부터 안보리를 보이콧하고 있었고, 그 보이콧의 명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 문제였다.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시점에서 갑자기 안보리에 복귀하는 것은 이 명분과 모순되는 행동이었다. 명분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려면 보이콧을 지속해야 했다.
그러나 이 표면적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부권 행사 한 번을 위해 일시적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다시 보이콧을 재개할 수도 있었다. 소련 외교의 노련함을 고려하면 그 정도의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여러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가설은 단순한 외교적 실수였다는 것이다. 안보리 복귀 결정을 내릴 시간이 부족했고, 모스크바와 뉴욕 사이의 통신이 충분히 빠르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6월 27일까지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단순한 시간 부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둘째 가설은 의도적 방관이었다는 것이다. 캐서린 웨더스비를 비롯한 학자들이 공개된 소련 문서를 분석한 결과,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충돌하기를 원했다는 정황이 발견된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군사적으로 충돌하면, 두 나라 사이의 화해 가능성은 차단되고, 중국은 더욱 소련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이 스탈린의 큰 그림이었다는 해석이다.
박명림과 와다 하루키도 대체로 이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스탈린의 1950년 봄 결정이 만든 큰 그림의 일부로, 6월의 안보리 부재 또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김일성에게 청신호를 보냈지만, 책임을 마오에게 분산시켰고, 미국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중국을 한반도 전쟁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모든 것이 같은 전략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1950년 6월 마지막 주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모스크바의 한 노인이 짠 거대한 시나리오의 한 부분이었던 셈이다. 김일성도, 마오도, 트루먼도, 그리고 무엇보다 한반도의 평범한 사람들도, 그 시나리오 속의 등장인물이었다.

일주일의 무게
6월 24일 토요일 저녁의 그 전화 한 통에서 시작해 6월 30일 금요일 새벽의 지상군 파병 결정에 이르기까지. 한 주 동안 워싱턴에서 결정된 일들은 한국전쟁의 전체 향배를 결정지었다.
만약 그 주에 트루먼이 망설였다면, 한반도는 빠르게 인민군의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서 약속한 "단기간 내 통일"이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 후 한반도의 운명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만약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의 이름을 빌린 군사 개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이 단독으로 개입했을 수도 있지만, 그 정당성과 규모는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만약 마오가 5월 베이징에서 김일성에게 동의하지 않았다면, 작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만약"들이 한 주에 집중되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결정들의 결과를 한반도의 사람들이 그 후 3년 동안 견뎌야 했다. 시리즈 1부는 여기서 마무리된다. 이제 2부는 점령된 서울로 들어간다. 한강 다리 북쪽에 갇힌 144만 명의 90일이 이제 시작된다.
다음 회 예고
EP.11 붉은 깃발이 걸린 도시 1950년 6월 28일 오전,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한다. 그 후 며칠 사이 도시 전체가 바뀐다. 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거리에 붉은 깃발이 걸리고, 라디오에서는 평양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한 도시가 며칠 만에 어떻게 다른 정치 체제로 바뀌는가. 유진오 『고난의 90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자리, 점령기 첫 일주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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