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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끝나지 않은 전쟁

EP.07 일요일 새벽 네 시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3.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38선 전역에 걸쳐 새벽 네 시 정각, 동쪽 끝 동해안부터 서쪽 끝 옹진반도까지 거의 동시에 포성이 울렸다. 인민군의 122밀리 곡사포와 76밀리 야포가 38선 남쪽의 한국군 진지를 향해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그 포격은 약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 사이 인민군 보병들이 안개와 빗줄기를 뚫고 38선을 넘었다.

서울로 처음 진입한 북한군 3, 4사단의 시가행진. 사진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가장 강력한 공세는 서부 전선이었다. 인민군 제1군단 휘하 제1, 6사단이 개성과 옹진반도 방면으로, 제3, 4사단이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했다. 의정부 축선에는 T-34 전차로 구성된 제105 기갑여단이 선두에 섰다. 동부 전선에서는 제2군단의 제2, 7사단과 제5사단이 춘천과 강릉 방면을 공격했다. 총 7개 보병 사단과 1개 기갑여단, 약 9만 명의 병력이 동시에 움직였다.
이에 맞선 한국군 4개 사단은 38선을 따라 길게 늘어진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새벽 그 진지에 있던 병사는 평시 편제의 절반 정도였다. 토요일에 내려진 휴가 명령 때문이었다. 일부 진지에서는 부소대장이나 위관급 장교 한 명이 수십 명 단위의 병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벽 다섯 시쯤 무전기를 통해 후방 사단 본부에 첫 보고를 올렸다. "북한군이 대규모로 남침 중이다." 그 보고가 서울 육군본부에 도달한 것은 오전 일곱 시경이었다.

채병덕은 어디 있었는가

전날 토요일 저녁, 채병덕 참모총장은 육군본부 장교 클럽에서 열린 환영회에 참석했다. 미군 군사고문단의 새로 부임한 인원들을 환영하는 자리였다. 자정 무렵까지 술이 돌았다. 채병덕은 늦은 시각에 사저로 돌아갔다.
일요일 새벽, 그가 첫 보고를 받은 것은 잠자리에서였다. 보고를 받자마자 그는 일어나 육군본부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첫 반응은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또 38선 충돌이겠지." 1948년부터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경험적 기준이었다.
그러나 보고가 계속 들어오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8시경에는 옹진반도가 사실상 함락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9시경에는 개성이 점령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10시가 되었을 때, 의정부 방면에서 T-34 전차 부대가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채병덕은 그제야 사태의 규모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대응은 여전히 늦었다. 그는 후방의 사단들, 즉 대전과 광주, 부산에 배치된 부대들에게 즉각 서울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철도와 도로 사정으로 인해 이 부대들이 실제로 전선에 투입되기까지는 몇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인민군의 T-34 전차

경무대의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일요일 아침 평소처럼 일어났다. 그는 일요일 아침을 한가하게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의 일기에 따르면, 그날 아침 이승만은 평소처럼 산책을 했고, 마당의 정원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프란체스카의 기록은 후대에 논란이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너무 평온한 묘사가 정치적 수사일 가능성을 지적한다. 그러나 정황상 이승만이 새벽의 사태를 즉시 알지는 못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에 도착해 이승만에게 첫 보고를 한 것은 오전 10시 30분경이었다. 그는 38선 전역에서 인민군의 대규모 공격이 진행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승만은 보고를 듣고 짧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 국군이 충분히 막아낼 것이오." 그것이 75세 대통령의 첫 반응이었다.
그러나 점심 무렵부터 상황은 분명해졌다. 의정부 방면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T-34 전차에 한국군의 대전차 무기가 무력하다는 사실, 그리고 후방 사단들의 증원이 늦어진다는 사실. 모든 정보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사태는 통상적인 38선 충돌이 아니었다.
오후 두 시경, 이승만은 처음으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연락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그 시점에서도 그는 아직 미국에 직접 지원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다. 사태 파악과 협의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다음 며칠 동안 그의 태도는 빠르게 바뀐다.

라디오는 무엇을 말했는가

서울의 일반 시민들이 처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것은 일요일 아침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그 첫 방송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전하지 않았다.
오전 11시, KBS 라디오는 첫 공식 발표를 내보냈다. "38선 일대에서 북한 괴뢰군의 도발이 있었으나, 국군이 이를 격퇴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그날 오후 내내 반복되었다. 점점 강도가 더해졌다. 오후의 한 방송에서는 "국군이 해주를 점령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사실이 아니었다.
이 방송들의 거짓이 누구의 결정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후대에 여러 해석이 있다. 일부는 정부 차원의 의도적 거짓이었다고 본다. 패닉과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은 정보의 혼선이 만들어낸 결과였다고 본다. 일선의 정확한 상황이 서울 정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데다, 정부 내에서도 사태를 인정하기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진오는 『고난의 90일』에서 이 첫 24시간의 라디오 방송에 대해 짧게 회상한다. 그는 일요일 오후 자택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처음에는 안심했다고 한다. "국군이 격퇴 중"이라는 보도를 그는 그대로 믿었다. 그가 사태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은 그날 밤늦게 거리에 나가 본 광경, 그리고 다음 날부터 들려오는 포성 때문이었다. 한 지식인이 라디오를 통해 받아들인 첫 정보가 어떻게 그의 판단을 결정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는가. 점령기 90일의 비극은 그 첫 24시간의 거짓 방송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도쿄, 그리고 워싱턴

같은 시각 도쿄. 일요일 새벽 한반도 시각으로 네 시는 도쿄 시각으로 같은 네 시였다. 그러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일요일 휴일 편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첫 공식 보고가 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오전 아홉 시 반경이었다.
당직 장교는 보고를 받고 즉시 상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맥아더 본인이 보고를 받은 것은 오전 11시경이었다. 그는 사령부 관저에서 보고를 듣고 짧게 답했다고 한다. "또 변경 충돌이로군." 채병덕과 비슷한 첫 반응이었다.
워싱턴은 더 늦었다. 한반도와 워싱턴의 시차는 14시간. 한국 시각 일요일 새벽 네 시는 워싱턴 시각 토요일 오후 두 시였다. 그러나 첫 정확한 보고가 워싱턴 국무부에 도달한 것은 토요일 저녁이었다. 한반도 주재 미국 대사 존 무초가 보낸 전문이 토요일 오후 9시 26분 워싱턴에서 수신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 시간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의 자택에 있었다.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내는 중이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에게 전화로 보고한 것은 토요일 밤 10시경이었다. 트루먼의 첫 반응은 짧고 명료했다. "딘,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망할 놈들을 막아야 합니다(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후대에 자주 인용되는 그의 발언이다.
이 트루먼의 즉각적이고 단호한 반응이 결국 한국전쟁의 향배를 결정짓는다. 다음 회에서 살펴볼 일이지만, 트루먼이 그 토요일 밤 즉시 강경한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면, 며칠 후의 유엔 안보리 결의와 미군 참전은 같은 속도로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들이 흩어지기 시작하다

그날 오후, 서울 시민들 중 일부는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정부 발표는 여전히 "격퇴 중"이었지만,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달랐다. 의정부가 위험하다, 도봉산 쪽에서 포성이 들린다, 미아리 고개로 피난민이 내려오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
특히 정부와 군의 고위 관계자 가족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외무부 고위 관리의 가족이 일요일 저녁 부산행 기차표를 구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군 일부 장교 가족도 그날 밤 또는 다음 날 새벽 서울을 빠져나갔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국군이 격퇴 중"이라고 안심시키면서, 정부 핵심 인사들 가족은 먼저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비대칭이 한국전쟁 초기의 비극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김동춘은 『전쟁과 사회』에서 이 비대칭을 "국가의 첫 배신"이라고 표현했다. 국가가 국민에게 거짓 안심을 주는 동안,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이 첫 배신이 며칠 후 한강 다리 폭파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1950년대 신촌 이화여자대학교 입구.

의정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새벽 사이, 의정부 전선이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한국군 제7사단은 T-34 전차 부대의 돌파를 막지 못했다. 대전차 무기가 부족했고, 있는 것도 효과가 없었다. 한국군의 주력 대전차 무기였던 미국제 2.36인치 바주카포는 T-34의 두꺼운 장갑을 뚫지 못했다. 병사들이 폭탄을 들고 전차에 직접 뛰어들어 자폭하는 일이 의정부 부근에서 여러 차례 발생했다.
자정 무렵, 의정부가 함락되었다. 서울까지 직선거리로 20킬로미터 남짓이었다. 인민군 선두 부대는 이 속도라면 24시간 안에 서울 외곽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한국군 수뇌부에 처음으로 진정한 공포가 찾아왔다. 그러나 서울 시민들은 여전히 라디오를 통해 "국군이 격퇴 중"이라는 메시지만 듣고 있었다.
월요일 새벽 한 시, 채병덕은 이승만에게 직접 보고했다. 의정부가 무너졌고, 서울 사수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 이승만은 그 보고를 받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서울을 지킬 것인가, 떠날 것인가. 만약 떠난다면, 언제, 어떻게, 그리고 시민들에게는 무엇을 알릴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다음 24시간 동안 만들어진다. 그 답의 결과가 한강 다리 폭파였고, 점령기 90일이었고, 그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일요일 새벽 네 시에 시작된 사건이, 어떻게 화요일 새벽 두 시 반의 한강 다리 폭파로 이어졌는가. 그 72시간을 다음 회에서 따라가본다.

다음 회 예고

EP.08 대통령은 이미 떠나고 있었다 6월 26일 월요일과 27일 화요일. 이 48시간 동안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라디오는 여전히 "대통령이 서울을 지키고 있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그 시각 이승만의 특별열차는 이미 대전을 향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카의 일기, 그리고 다른 증언들이 충돌하는 지점. 권력은 어떻게 도시를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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