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5월 13일, 베이징 서쪽 외곽
1950년 5월 13일 오후, 베이징 서쪽 외곽의 한 비행장에 소련 항공기 한 대가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들은 평양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베이징으로 향한 길이었다. 사실 그들은 13일이 아니라 이미 4월 말에 베이징을 한 번 방문했었다. 그러나 그 첫 방문은 모스크바의 최종 승인을 받기 전이었고, 마오에게 자세한 계획을 전달하지는 않았다.

이번 방문은 달랐다. 김일성의 손에는 스탈린의 청신호가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청신호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마오 동지의 최종 동의를 얻을 것." 김일성이 베이징 비행장에 발을 디딘 순간, 그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러 온 것이었다.
마오는 그를 맞으러 나오지 않았다. 저우언라이 총리가 비행장에 있었다. 외교 의전상 결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환대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차에 올라 베이징 시내의 한 영빈관으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 마오와의 첫 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마오의 분노
그날 저녁, 중난하이의 마오 집무실. 마오는 김일성을 맞이했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회담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1990년대 이후 공개된 중국 측 자료와 소련 측 자료를 교차해 보면 비교적 분명히 재구성할 수 있다.
마오의 첫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스탈린 동지와 무엇을 합의했는가."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한 합의의 개요를 설명했다. 군사적 통일 계획, 그리고 스탈린이 청신호를 켰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 청신호에 "마오 동지의 동의"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는 점도 솔직히 말했다.
마오는 화를 냈다. 화이팅과 첸지안의 연구가 인용하는 중국 측 회고에 따르면, 마오는 그날 밤 측근들에게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우리와 의논 없이 이런 큰 결정을 미리 해놓고, 우리에게 마지막에 동의만 하라고 한다." 사회주의 진영의 형님 노릇을 하는 스탈린이 동아시아의 동생인 자신을 무시했다는 불쾌감이 컸다.
그러나 마오의 분노에는 더 실질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적어도 세 가지였다.

첫째 이유, 타이완 침공 계획
마오에게는 자신만의 군사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타이완 침공이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마오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장제스가 도망간 타이완을 점령해 내전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1949년 가을부터 푸젠성 연안에 약 30만 명의 부대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1950년 여름이나 늦어도 가을에 타이완 침공을 단행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사실상 무산되거나 무기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시선이 한반도로 쏠리면 다행이지만, 만약 미국이 한반도와 타이완 양쪽에 모두 개입하기로 결정한다면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실제로 1950년 6월 27일,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 트루먼은 미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했다. 이로써 마오의 타이완 침공 계획은 완전히 좌절된다.
5월 13일의 마오는 아직 이 결과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전쟁이 자신의 타이완 계획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우려할 수 있었다. 김일성에게 "왜 하필 지금인가"라는 질문이 입에서 나올 만했다.
둘째 이유, 신생국가의 부담
마오에게는 또 다른 짐이 있었다. 갓 출범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모든 것이 부족했다. 4년간의 내전으로 산업은 무너졌고, 화폐는 통제 불능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으며, 농촌은 토지개혁의 한복판에 있었다. 마오는 1950년부터 본격적인 경제 재건과 사회 개조에 들어갈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전쟁, 그것도 자국 영토 바깥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만약 미군이 한반도에 개입하고 중국이 어떤 식으로든 휘말리게 된다면, 이제 막 시작한 국가 건설은 큰 차질을 빚을 것이었다. 마오는 이 위험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셋째 이유, 스탈린의 술수에 대한 직감
마오가 가장 불쾌하게 여긴 것은 스탈린의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스탈린이 왜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동의를 요구하는가. 그것은 정치적 책임을 분산시키려는 술수가 아닌가. 마오는 이를 직감했다.
스탈린의 1950년 5월 14일 전문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김일성이 베이징에 도착한 다음 날, 스탈린은 마오에게 직접 전문을 보냈다. 그 전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 동지들과의 협의에서, 필리포프(스탈린의 가명)와 그의 친구들은 국제정세 변화에 비추어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인들의 제안에 동의했다. 다만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중국과 조선 동지들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하며, 만약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결정은 새로운 토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
이 전문의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다. 책임을 마오에게 넘긴 것이다. 마오가 동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 만약 작전이 실패하면, 스탈린은 "나는 마오와 김일성이 공동으로 결정한 것을 지지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마오는 이 전문을 받고 그 의미를 정확히 읽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신이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거절하면 사회주의 형제국가 사이의 균열이 공개될 것이고, 그것은 신생 중국에게 외교적 부담이 될 것이었다. 스탈린은 마오를 코너로 몰아넣었다.
닷새의 회담
5월 13일부터 18일까지, 김일성과 마오는 모두 합쳐 다섯 차례 회담했다. 첫 회담은 김일성이 도착한 그날 저녁, 마지막 회담은 5월 18일 밤이었다. 그 사이에 마오는 정치국 동지들과도 별도로 논의를 진행했다.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가오강 등이 참여했다.

마오가 끈질기게 던진 질문은 두 가지였다. 첫째, 정말로 신속하게 끝날 수 있는가. 둘째, 미국이 개입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김일성과 박헌영은 같은 답을 반복했다. 군사적으로 단기간에 종결될 것이며, 남한 내 봉기가 호응할 것이며, 미국이 결심하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다. 박헌영은 모스크바에서 했던 약속을 베이징에서도 반복했다. "20만 남로당원이 일제히 봉기할 것이다."
마오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말했다. 중국 내전에서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 빨리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미국의 군사력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은 자신감을 굽히지 않았다.
마지막 회담에서 마오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김일성에게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만약 미군이 참전하면 중국이 군대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동지들의 작전을 우리는 지지한다. 그러나 미국이 들어오면 중국이 도울 것이다. 압록강을 미군이 넘는 것은 우리가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마오의 답이었다.
운명의 한 약속
마오의 이 약속은 그 자리에서는 단지 동의의 조건처럼 보였을 것이다.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김일성과 박헌영은 낮게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전이 빠르게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고, 미국은 결심할 시간조차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다섯 달 후 그 약속이 실현된다는 것을. 1950년 10월 19일, 펑더화이가 이끄는 중국인민지원군 약 25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들어선다. 그 후 3년에 걸쳐 약 100만 명에서 130만 명의 중국군이 한반도에서 싸우게 된다. 중국 측 공식 발표로 18만 명이 전사한다(서방 추정으로는 40만 명에 이른다). 마오의 장남 마오안잉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 동창군에서 미 공군의 폭격으로 28세에 전사한다.
1950년 5월 18일 베이징의 회담장에서, 마오와 김일성 누구도 이 미래를 정확히 그리지 못했다. 마오의 약속은 그 순간에는 외교적 수사의 일부였다. 그러나 그 수사가 다섯 달 후 현실이 되었을 때, 그것은 100만 명을 움직이는 결정이 되어 있었다.
동의의 진짜 의미
마오는 왜 결국 동의했는가. 분노했고 회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명림은 이를 "사회주의 진영의 위계 안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스탈린이 마지노선을 설정한 이상, 마오에게 남은 선택지는 좁았다. 거절하면 진영의 결속이 흔들리고, 동의하면 부담을 짊어진다. 마오는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그는 동의하면서도 자신의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다. "미군 참전 시 중국 개입"이라는 조건은 그 통제권의 표현이었다.
첸지안의 연구는 또 다른 측면을 지적한다. 마오에게는 김일성에 대한 의리도 있었다. 만주에서의 항일투쟁 시절부터 이어진 인연, 그리고 1949년 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부대를 북한에 보낸 일. 이 모든 것이 김일성과 마오 사이에 일정한 신뢰의 끈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오는 김일성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더 큰 변수가 있었을 것이다. 신생 중국이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아야 했다는 점이다. 스탈린의 결정에 동의함으로써 마오는 자신이 스탈린의 신뢰할 만한 파트너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국제적 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닷새가 끝나고
5월 18일 밤, 마지막 회담이 끝났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이제 모든 것이 쥐어져 있었다. 스탈린의 청신호, 그리고 마오의 동의. 작전의 모든 외부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다음 날 그들은 베이징을 떠나 평양으로 돌아갔다. 출발 전 마오는 짧은 환송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마오는 김일성에게 한 가지를 더 당부했다고 한다. "신중하라." 결정은 내려졌지만, 마오는 끝까지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김일성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1년 1개월 전 모스크바에서 거절당했던 그가, 이제 모든 동의를 손에 쥐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모든 책임을 진 사람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무대 뒤에 있고, 마오는 조건부 후원자이며, 자기 자신이 칼끝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결정이 평양에 도착하다
5월 말, 김일성은 평양에 돌아왔다. 그 시점부터 6월 25일까지 한 달이 남아 있었다. 그 한 달 동안 북한은 마지막 준비에 들어갔다. 부대 배치, 작전 계획 점검, 보안 유지, 그리고 결정적인 일자의 선택.
같은 한 달 동안 38선 이남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서울 정부는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모르고 있었을까. 미군 정보기관은 어떤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38선 일대의 평범한 사람들, 농민들과 군인들과 그곳을 오가던 사람들은 그 봄을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크렘린과 중난하이에서 내려진 결정이 38선의 봄 풍경 위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봄 그곳을 살던 사람들 누구도 그 결정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다음 회에서 그 38선의 봄을 따라가본다.
다음 회 예고
EP.06 38선의 봄, 보이지 않던 그림자 1950년 봄의 38선 일대. 잦은 충돌과 흘러나오는 정보, 그러나 서울 정부의 안이한 대응. 채병덕 참모총장의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발언. 미군 정보기관의 보고서가 책상 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사실. 그리고 38선 마을 사람들의 일상. 보이지 않던 그림자가 어떻게 점점 짙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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