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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끝나지 않은 전쟁

EP.02 마오의 승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18.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1949년 10월 1일 오후 세 시, 베이징 천안문 성루. 마오쩌둥이 마이크 앞에 섰다. 그의 후난성 사투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수립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식

 
광장에는 30만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붉은 깃발이 가을 바람에 펄럭였다. 4년의 내전,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27년부터 22년의 무장투쟁이 그 한 문장에 응축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이미 광저우로 후퇴 중이었고, 12월에는 타이완으로 쫓겨갈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 장면을 가장 주의 깊게 지켜본 사람은 광장에 없었다. 그는 평양에 있었다. 김일성. 그리고 거기서 1,200킬로미터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또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스탈린. 두 사람 모두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마오의 승리가 한반도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평양의 셈법

김일성에게 마오의 승리는 단순한 동맹국의 출현 이상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청원에 결정적인 무기를 더해주는 사건이었다.
1949년 봄에 거절당했을 때, 스탈린이 든 이유 중 하나는 군사력 부족이었다. 북한군은 아직 남침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러나 마오의 승리는 이 조건을 바꿀 가능성을 열었다. 만주의 산과 평원에서 4년간 국민당군과 싸웠던 조선인 부대들, 그들이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곳에 있게 된 것이다.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 따르면, 중국 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부대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 동북민주연군과 그 후신인 제4야전군 산하의 조선인 사단들, 특히 156사단(이후 북한군 제5사단의 모체), 164사단(제6사단의 모체), 166사단(제12사단의 모체)이 핵심이었다. 이들은 모두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해방 후에는 중국 내전에 참전한 실전 경험을 가진 정예였다.
1949년 7월, 김일성은 중국 측에 공식 요청을 보냈다. 인민해방군에 속한 조선인 부대를 북한으로 이송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오는 동의했다. 7월부터 9월 사이, 약 1만 4천 명에서 1만 8천 명에 이르는 156사단과 164사단 병력이 무기를 들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북한군 제5사단과 제6사단으로 재편되었다.

1949년 8월 26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란저우 중산교를 점령한 모습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진짜 대규모 이동은 마오의 승리 선포 직후에 시작된다.

1950년 1월부터 4월까지, 압록강을 건넌 사람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병사들의 귀환은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1950년 1월 8일, 김일성의 특사 김광협이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는 마오에게 새로운 요청을 전했다. 인민해방군에 분산되어 있는 조선인 병사들을 사단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도 이송해달라는 것. 마오는 다시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1950년 1월부터 4월 사이, 또 한 차례의 대규모 이동이 이뤄졌다. 제4야전군 산하 166사단 1만 4천여 명, 그리고 다른 부대들에 분산되어 있던 조선인 병사들 약 1만 2천 명, 합쳐서 2만 6천여 명이 추가로 북으로 돌아왔다. 박명림의 추산을 종합하면 1949년 여름부터 1950년 4월까지 약 5만에서 7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 병사들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이동한 셈이다.
이 숫자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병력의 양이 아니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그들의 질이었다. 와다 하루키는 『한국전쟁』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1950년 6월 25일 시점에서 북한군 보병 사단 10개 중 3개 사단(제5, 6, 12사단)이 전적으로 중국 출신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다른 사단들에도 상당수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즉 북한군 전체 보병 전력의 약 3분의 1이 4년간의 실전 경험을 가진 부대였던 것이다.
남한군과 비교해보자. 1950년 6월의 한국군은 8개 사단 약 9만 5천 명. 그러나 대부분이 신병이었고, 전차는 한 대도 없었다. 항공기는 연락기 22대가 전부였다. 반면 북한군은 10개 보병 사단 13만 5천 명에 더해 T-34 전차 242대, 야크 전투기와 일류신 폭격기 약 2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격차가 1950년 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셈법이 바뀐다

이제 스탈린의 시각으로 돌아가 보자. 1949년 봄에 거절했던 그가 왜 1950년 1월에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는가.
이유는 여러 겹이다. 박명림이 지적한 첫째 이유, 미군의 철수. 1949년 6월 29일, 미군 마지막 전투부대가 한반도를 떠났다. 군사고문단 500여 명만 남았다. 둘째, 소련의 핵실험 성공. 1949년 8월 29일의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미국의 핵 독점이 깨진 이상,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모험이 핵전쟁으로 비화할 위험이 줄어들었다고 스탈린은 판단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셋째 이유가 있다. 마오의 승리 자체가 만든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공산주의 국가의 출현은 스탈린에게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진영의 확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잠재적 경쟁자의 등장이었다.
이 미묘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1949년 12월에서 1950년 2월 사이 모스크바에서 벌어졌다. 마오쩌둥이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체결된 것이 1950년 2월 14일의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었다.

1949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의 70번째 생일 기념식에서 스탈린 옆에 서 있는 마오쩌둥. 그들 뒤편에는 소련 원수 니콜라이 불가닌이 있다. 스탈린의 오른쪽에는 동독의 발터 울브리히트가, 가장자리에는 몽골의 윰자긴 체덴발이 있다.

 
이 두 달간의 협상은 결코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마오는 12월 16일 모스크바에 도착했지만 스탈린은 그를 의도적으로 방치했다. 며칠씩 회담이 없었다. 마오는 자신이 모스크바에서 "냉대받고 있다"고 측근에게 토로했다. 양측 사이의 핵심 쟁점은 만주에서의 소련 이권이었다. 다롄 항구, 뤼순 군항, 창춘 철도. 스탈린은 이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마오는 되찾고 싶었다.
이 줄다리기 속에서 스탈린은 한반도 카드를 발견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중국은 만주의 안보 때문에 더더욱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마오의 시선이 동쪽 한반도로 향하는 동안, 마오가 그토록 원하던 타이완 침공은 미뤄지게 된다. 그러면 중국과 미국 사이의 직접 충돌, 그것이 가져올 미중 화해의 가능성, 그 모든 것이 차단된다.
미국 학자 캐서린 웨더스비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공개된 소련 문서를 분석한 결과, 스탈린의 1950년 1월 30일 답신이 이 협상의 마무리 시점과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오의 승리는 스탈린에게 새로운 카드를 쥐여주었고, 스탈린은 그 카드를 김일성을 통해 사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평양에 도착한 두 가지

마오의 승리는 평양에 두 가지를 동시에 보냈다. 하나는 5만에서 7만 명의 실전 경험 병사들. 다른 하나는 더 미묘한 것, 즉 스탈린의 계산을 바꿔놓은 국제정치적 지렛대였다.
김일성은 이 둘을 모두 사용할 줄 알았다. 그는 군사적으로는 압록강을 건너온 병사들로 부대를 재편했고, 정치적으로는 스탈린에게 마오를 거론하며 압박을 가했다. "스탈린 동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마오 동지에게 가겠다"는 1950년 1월 19일의 발언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국제 질서를 정확히 읽은 자의 협상 카드였다.
유진오는 『고난의 90일』에서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진주한 인민군 부대를 묘사하면서, 그들이 "잘 훈련된, 패기 있는 군대"였다고 기록했다. 1950년 12월의 그 글에서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우리는 안다. 4년간 만주의 산하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다시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 정예부대를 격파했던 사람들. 그들이 서울 거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얼굴, 김광협

이 EP를 마무리하기 전에, 한 사람을 짧게 언급해두고 싶다. 김광협(金光俠)이라는 인물이다. 1915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일본군 무관학교를 거쳐,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하고, 해방 후에는 중국 인민해방군 동북민주연군에서 활동했다. 그가 1950년 1월 베이징에서 마오를 만나 조선인 병사 이송을 협의한 김일성의 특사였다.
김광협의 이력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축소판이다. 식민지, 만주의 항일투쟁, 해방, 중국 내전 참전, 그리고 다시 한반도. 그가 1950년 1월 베이징에서 마오와 마주 앉았을 때, 그의 뒤에는 수만 명의 동지들이 있었다. 일본군과 싸웠고, 국민당군과 싸웠고, 이제 곧 또 다른 적과 싸우게 될 사람들. 그들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통일된 조국이라는 약속? 또 한 번의 내전? 우리는 그들의 내면을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이 1950년 6월 그 새벽에, 38선의 가장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결정의 사슬은 이제 두 번 휘었다

지난 회에서 우리는 1949년 봄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이 한 번 거절당했다는 것을 보았다. 이번 회에서는 그 거절이 어떻게 풀려가기 시작했는지를 따라갔다. 마오의 승리가 첫 번째 매듭을 풀었다. 군사력의 격차가 메워졌고, 스탈린의 계산이 바뀌었다.
그러나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스탈린은 1950년 1월 30일의 답신에서 "직접 만나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만 했을 뿐, 청신호를 켠 것은 아니었다. 진짜 결정의 순간은 그해 4월 모스크바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그 결정의 직전에, 워싱턴에서 한 연설이 있었다.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한반도의 운명을 두고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는 그 문장. 다음 회에서 살펴볼 일이다.

다음 회 예고

EP.03 애치슨 라인, 1950년 1월 12일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강연을 한다.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으로 이어진다. 한반도와 타이완은 그 선 바깥에 있다. 이 한 문장이 정말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청신호를 보낸 것인가. 아니면 후대가 만들어낸 신화에 가까운가. 그날의 워싱턴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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