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7일 새벽 세 시, 경무대
1950년 6월 27일 화요일 새벽 세 시. 서울 종로구 경무대(현 청와대) 침실. 75세의 이승만 대통령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그를 깨운 것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급한 보고차 대기 중이라는 전갈이었다.

응접실에서 신성모는 짧게 보고했다. 의정부가 무너졌고, 인민군 선두 부대가 도봉산 일대까지 접근했다는 것. 서울이 24시간 내에 함락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따라서 대통령은 즉시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것. 신성모의 보고에 이어 같은 자리에 있던 조병옥 내무장관, 김백일 정보국장 등도 같은 의견을 냈다. 모두 한 방향을 가리켰다. 떠나야 한다.
이승만은 처음에 거부했다. 그는 서울을 떠나는 것은 대통령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시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신성모와 측근들이 거듭 설득했다. 대통령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한국 정부 자체가 무너진다는 논리였다. 무엇보다 통신과 지휘를 위해서는 안전한 후방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벽 네 시경, 이승만은 결정을 내렸다. 떠나기로 한 것이다. 행선지는 일단 대구로 정했다가 대전으로 바뀌었다. 출발 시각은 새벽 네 시 반. 경무대에서 서울역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뒤 특별열차에 오르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의 기록
이 새벽의 풍경에 대해 우리가 가진 가장 가까운 기록은 프란체스카 도너 리의 일기다. 그녀는 1950년 6월 25일부터 영문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 일기가 2010년 『6·25와 이승만』으로 출간되었다.
프란체스카의 기록에 따르면, 6월 27일 새벽 그녀는 남편이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녀가 일기에 적은 바에 따르면, 이승만은 떠나는 것을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이는 서울 시민들을 두고 떠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다"는 표현이 일기에 나온다. 출발 직전 그는 정원의 나무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고 한다.
이 기록은 그러나 후대에 논란이 되었다. 박명림을 비롯한 학자들은 프란체스카의 일기가 갖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정치적으로 편집된 텍스트라는 점을 지적한다. 2010년 출간된 한국어판은 기파랑 출판사의 편집을 거쳤고,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진 보수 진영의 흐름 속에서 정리된 책이다. 영문 원본과 출간본 사이의 차이, 그리고 어떤 부분이 강조되고 어떤 부분이 축소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런 한계를 인지하고서 읽을 때, 프란체스카의 기록은 여전히 가치 있는 증언이다. 특히 권력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본 풍경, 즉 한 대통령이 어떤 감정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행동했는가의 디테일은 다른 어떤 자료에서도 얻기 어려운 정보를 담고 있다.

새벽 네 시 반, 서울역
6월 27일 새벽 네 시 반, 서울역. 특별열차 한 편이 대기하고 있었다. 객차 다섯 량 정도의 단출한 편성이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그리고 측근 몇 명이 그 열차에 올랐다.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다. 보안과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그 시각 이미 다른 사람들도 서울역에서 떠나고 있었다. 정부와 군의 고위 관계자 가족들, 일부 부유한 시민들이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 사이에 부산행 기차표를 구입해 떠난 상태였다. 27일 새벽에는 더 많은 사람이 역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점차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별열차는 새벽 네 시 반에서 다섯 시 사이에 서울역을 떠났다. 대전을 향해 남쪽으로 달렸다. 그 시각 서울 중심부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유 배달원이 골목을 돌고, 일부 신문 가판대가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누구도 대통령이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승만이 대전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전 8시 반경이었다. 충남도지사 관저가 임시 거처로 정해졌다. 그 시점에서 이승만은 정부의 핵심 인사들을 대전으로 모이도록 명령했다. 즉 정부 자체가 대전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을 사수하겠다"
문제는 그날 정오부터 시작되었다. KBS 라디오가 정오 뉴스 시간에 이승만의 담화를 방송한 것이다. 그 담화의 내용이 후대에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방송된 담화의 핵심 문장들은 다음과 같았다. "정부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다.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 국군이 적을 격퇴하고 있다." 이 담화는 27일 정오부터 그날 저녁까지 여러 차례 반복 방송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이승만은 그 시점에 이미 대전에 있었다. 그가 직접 방송 스튜디오에서 담화를 발표한 것이 아니라, 미리 녹음된 음성 또는 대독된 텍스트가 방송된 것이었다. 이 사실 자체가 후대에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당시 라디오 방송의 내용이 정확히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누구의 지시였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 논쟁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승만 본인이 그 방송을 직접 듣고 정정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그 방송 내용을 알고 묵인했는지, 아니면 측근들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는지는 자료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박명림은 이를 "정부의 의도적 기만"으로 본다. 프란체스카의 일기와 후대의 자유당계 자료들은 "정부 내 의사소통의 혼선"으로 설명하려 한다. 김동춘은 의도와 혼선의 구분이 결과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결과만 놓고 보면, 144만 서울 시민이 대통령이 서울에 있다고 믿는 동안 대통령은 떠나 있었고, 그 결과 수많은 시민들이 피난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

유진오, 그리고 그날의 결정들
유진오는 『고난의 90일』에서 6월 27일의 자신을 회상한다. 그는 그날 오후에도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었고, "정부가 서울을 사수한다"는 발표를 그대로 믿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솔직하게 적고 있다. 그날 오후까지도 그는 피난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고. 라디오 방송이 안심을 주었고, 자기 같은 학자가 갑자기 떠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거리에서 들리는 포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미아리 고개에서 한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제야 그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한강 다리로 향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리는 곧 폭파될 운명이었다.
유진오의 회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것이다. 그는 라디오 방송을 믿었던 자신의 판단을 후회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묻는다. 정부가 거짓을 말한 그 시간 동안, 자신은 정부를 의심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는가. 한 시민이, 한 지식인이, 정부 발표를 의심하고 행동할 수 있는 정보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는가. 이 질문이 그의 글에 깔려 있다.
이 질문에 김동춘은 『전쟁과 사회』에서 한 가지 답을 내놓는다.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는 시민이 정부 발표를 의심하지 않아도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1950년의 한국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정부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은 시민일수록 더 큰 비극에 노출되었다. 이것이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새긴 첫 번째 깊은 상처라고 김동춘은 본다.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같은 시각 대전에서
이승만이 대전에 도착한 그날 오후, 그는 한 가지 결정적인 외교적 움직임을 시작했다. 미국에 직접 군사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도쿄의 무초 대사와 맥아더에게 거듭 메시지를 보냈고, 워싱턴에도 직접 호소했다.
이 외교적 노력 자체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중요한 결단이었다. 6월 25일 한국 시각 새벽 네 시에 시작된 사태는 워싱턴 시각으로 토요일 오후였고, 트루먼은 그날 밤 강경 대응을 결심했다. 6월 26일과 27일 사이 유엔 안보리에서 두 차례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한반도에 대한 군사 지원을 결의한 두 번째 결의안은 6월 27일 워싱턴 시각으로 통과되었다. 한국 시각으로는 6월 28일 새벽이었다.
이 안보리 결의가 가능했던 한 가지 결정적 이유가 있다. 소련의 부재였다. 당시 소련은 유엔 안보리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을 인정하지 않는 데 항의해 안보리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보리 회의에 소련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고, 그 결과 거부권이 행사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전쟁사의 큰 미스터리 중 하나다. 스탈린은 왜 안보리 보이콧을 풀고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만약 소련이 거부권을 썼다면 유엔군 파병 결의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한국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스탈린의 의도적 방관이었다고 본다. 미국과 중국을 한반도에서 충돌시킴으로써 자신의 전략적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단순한 외교적 실수였다고 본다. 이 미스터리는 여전히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27일 저녁, 서울의 풍경
대통령이 떠난 27일 화요일 저녁, 서울의 풍경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믿고 평소처럼 저녁을 준비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사태의 진실을 알아챈 사람들이 피난 짐을 싸기 시작했다.
화신백화점 인근의 종로, 명동 일대에서는 일부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았다. 그러나 광화문 일대의 정부 청사들은 평소처럼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 청사들은 이미 빈 껍데기였다. 핵심 인사들은 대부분 대전으로 이동한 뒤였다.
미아리 고개 방면에서는 포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한국군 일부 부대들은 의정부에서 후퇴해 미아리 일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T-34 전차를 막을 수단이 거의 없었다. 자정 무렵 미아리 고개에서도 격전이 시작되었다.

서울 시민들이 마침내 사태의 진실을 깨달은 것은 자정을 전후한 시각이었다. 가까이서 들리는 포성, 거리로 쏟아져 나온 피난민들의 행렬, 그리고 끊어진 통신. 그제야 사람들은 알았다. 너무 늦게 알았다. 한강 다리는 두세 시간 후 폭파될 운명이었다.
결정의 무게
6월 27일이라는 하루를 정리해본다.
새벽 세 시에서 네 시 사이, 경무대에서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새벽 네 시 반, 특별열차가 서울역을 떠난다. 같은 시각 서울 시민들은 잠들어 있다. 오전 여덟 시 반, 대통령이 대전에 도착한다. 정오, 라디오는 "정부가 서울을 사수한다"는 담화를 방송한다. 그 시점 대통령은 이미 대전에 있다. 오후 내내 외교적 노력이 진행되는 한편 라디오는 계속 거짓 안심을 방송한다. 자정 무렵, 미아리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시민들이 비로소 진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 24시간 동안 권력은 자신의 안전을 먼저 확보했고, 그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또는 결과적으로 반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김동춘이 말한 "국가의 첫 배신"이 이 24시간에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비극의 정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6월 28일 새벽 두 시 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다. 그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다리 북쪽에 갇힌 144만 시민의 운명. 이 시리즈가 1부에서 처음 언급했던 그 장면의 진실에, 다음 회에서 마침내 도달한다.
다음 회 예고
EP.09 한강 다리, 새벽 두 시 삼십 분 6월 28일 화요일 새벽 두 시 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다. 다리 위에는 후퇴하는 군인과 경찰, 그리고 피난민이 뒤엉켜 있었다. 폭파 명령은 누가 내렸고, 누가 책임을 졌으며, 누가 진짜 책임자였는가. 최창식 대령의 비극과 1964년의 재심. 한국전쟁의 가장 상징적인 한 장면을 정면으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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