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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끝나지 않은 전쟁

EP.12 부역과 저항 사이, 지식인들의 90일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7.

한 통의 호출장

1950년 7월 어느 날, 서울 종로구의 한 자택. 50대 후반의 한 학자가 우편함을 열었다.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로구 인민위원회의 호출장이었다. 며칠 후 모 시각, 모 장소로 출두할 것. 인민군 점령 당국이 주최하는 "지식인 학습회"에 참석할 것. 결석 시 책임을 묻겠다는 문구가 끝에 적혀 있었다.

폐허가 된 서울역

 
그 학자가 누구였는지 정확한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비슷한 호출장이 그 무렵 서울의 수백 명 지식인에게 동시에 발송되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 작가, 언론인, 변호사, 의사,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 일했던 관료들. 인민군 점령 체제가 가장 먼저 파악하고자 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새 체제에 협력할 수 있는 자원이자, 동시에 잠재적 위협이기도 했다.
호출장을 받은 사람은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가야 하는가, 가지 말아야 하는가.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결정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의 시간은 며칠밖에 없었다.

유진오의 첫 선택

유진오는 『고난의 90일』에서 자신이 받은 비슷한 호출장에 대해 회상한다. 그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였고, 대한민국 초대 법제처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1948년 헌법 초안 작성에 깊이 관여한 사람. 인민군 점령 당국에게 그는 거물급 부역 대상이었다.
호출장을 받은 그의 첫 반응은 거부였다. 그는 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며칠 사이 마음이 흔들렸다. 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가족은. 그리고 결국 끝없이 숨을 수 있을까.
그가 결국 택한 길은 "최소한의 협력"이었다. 호출에는 응하되, 적극적으로 발언하지 않는 것. 학습회에 참석은 하되 강의는 거부하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자리를 빠져나오는 것. 그는 이 좁은 길을 90일 동안 걸으려 했다.
이 선택의 의미를 그는 책 속에서 솔직하게 묻는다. 이것이 저항이었는가, 협력이었는가. 그 자신도 답을 명확히 내리지 못한다. 응한 것 자체가 협력이라고 본다면 그는 부역자였다. 그러나 적극적 협력을 거부한 것이 저항이라고 본다면 그는 저항자였다. 그 사이의 좁은 회색지대, 그것이 그가 90일 동안 살아낸 자리였다.

세 가지 길

유진오의 책과 다른 자료들을 종합하면, 점령기 90일을 살아낸 지식인들이 택한 길은 대체로 세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 길은 적극적 협력이었다. 학습회의 강사로 나서고, 새 체제의 강령을 자신의 글로 옹호하고, 인민위원회의 직위를 받아 활동하는 것. 이 길을 택한 지식인의 수는 비교적 적었지만, 그 영향력은 컸다. 대표적인 인물이 홍명희(1888~1968)였다.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이자 『임꺽정』의 저자였던 그는 점령 전부터 사실상 북한 정권에 가까워져 있었고, 6월 28일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새 체제에 합류했다.
또 다른 사례가 이태준(1904~?)이었다. 식민지 시대 한국 단편소설의 한 정점을 이룬 작가. 그는 해방 후 좌익으로 기울었고 1946년 월북했다. 따라서 그는 1950년 6월 시점에는 이미 북한에 있었지만, 점령기 서울로 다시 내려와 활동했다. 그의 후배 작가들 중 일부가 그의 영향으로 새 체제에 합류했다.
두 번째 길은 최소한의 협력이었다. 유진오의 길이었다. 호출에는 응하되 적극적 활동은 거부하는 것. 학습회에 참석은 하되 발언은 하지 않는 것. 이 길을 택한 사람이 다수였다. 그러나 이 길은 외적으로는 첫 번째 길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9월 수복 후 부역자 처벌 과정에서 이 둘이 같은 범주로 묶이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세 번째 길은 도피와 잠적이었다. 호출장을 받고도 응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숨거나, 신분을 숨기고 사는 것. 이 길은 위험했다. 발각되면 즉시 체포 또는 처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이 이 길을 택했고, 90일을 견뎌냈다.
각각의 길에 모두 인간적 비극과 도덕적 모호함이 있었다. 어느 길이 옳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김동춘은 『전쟁과 사회』에서 이를 "강제된 선택의 윤리"라고 표현한다. 정상적인 자유 의지가 작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려진 선택을 평시의 윤리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팔에 총상을 입은 아이가 할머니 품에 안겨 숨을 거두기 직전의 모습이다. 출처 : 천지일보(https://www.newscj.com)

 

한 사례, 정지용

이 시기 지식인들이 처한 비극의 한 사례로 정지용(鄭芝溶)을 들 수 있다. 한국 현대시의 정점을 이룬 시인.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의 그 시인이다.
1950년 6월 시점에 정지용은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다. 그는 해방 후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 어느 쪽에도 깊이 가담하지 않았다. 그저 시를 쓰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그의 그런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점령기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자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인민위원회의 호출에 응했다는 기록도 있고, 거부했다는 기록도 있다. 9월 수복 직전 또는 직후에 그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 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그를 데리고 갔다는 설, 자발적으로 따라갔다는 설, 후퇴 중 사망했다는 설. 정확한 진실은 오늘날까지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운명의 후속편이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의 행방불명 이후 한국에서는 그의 시가 사실상 금기시되었다.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집 출간이 금지되었다. 1988년 해금되기까지 거의 40년 동안 한국의 독자들은 정지용의 시를 공식적으로 읽을 수 없었다. 한 시인의 작품 전체가 점령기 90일 어느 시점의 행적 또는 행적 의혹 때문에 한 세대 가까이 한국 문학사에서 지워진 것이다.
정지용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태준, 박태원, 백석, 김기림, 이용악 등 한국 근대문학을 만든 작가들 다수가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그들이 점령기에 무엇을 했고 그 후 어디로 갔는가가 그들의 문학을 한국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이 격리가 풀린 것이 1988년 7월의 "월북 작가 해금 조치"였다. 그러나 이미 40년이 지나간 뒤였다. 그 40년 동안 한국 문학과 한국 독자가 잃은 것은 측량하기 어렵다.

박완서의 시선

같은 90일을 다른 시선으로 본 사람이 있다. 박완서(1931~2011)다. 1950년 6월 그녀는 19세의 서울대 국문학과 1학년 학생이었다.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그녀는 그 시기 자신과 가족이 겪은 일을 기록했다.
박완서의 시선이 유진오의 시선과 다른 것은 두 가지다. 첫째, 그녀는 거물 지식인이 아니라 평범한 가족의 한 사람이었다. 호출장이 그녀의 가족에게는 오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의 오빠가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그녀의 가족이 겪은 비극은 권력의 호출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무차별적 동원 때문이었다. 둘째, 그녀의 회상은 50년 가까이 지난 후에 쓰였다. 사건 직후의 격앙된 어조 대신 한 노년의 작가가 자신의 십대를 차분하게 되돌아보는 시선이 있다.
박완서가 그린 1950년 여름 서울은 추상적인 정치사가 아니라 한 가족의 부엌과 마당과 골목길이었다. 식량이 떨어져 가는 부엌, 의용군에 끌려간 오빠를 기다리는 어머니, 그리고 점점 빈집이 늘어가는 동네의 골목길. 그녀의 묘사 속에서 점령기 서울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한 도시의 일상이 무너지는 매일이었다.
특히 그녀가 기록한 한 장면이 인상적이다. 7월의 어느 날, 동네의 한 이웃집 아주머니가 인민위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평소 박완서 가족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직책을 맡은 후 그 아주머니의 태도가 달라졌다. 박완서 가족의 출신 성분을 조사하러 직접 왔다. 친근한 이웃이 갑자기 권력의 대리인이 된 것이다. 박완서는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을 짧지만 강렬하게 묘사한다. 이웃이 곧 감시자가 되는 풍경. 그것이 점령기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1950년 서울의 한 골목

한 학생의 운명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에는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등장한다. 그녀의 오빠 박종서의 의용군 동원과 그 후의 운명이다.
박종서는 1950년 7월 어느 날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박완서는 그 장면을 매우 상세히 묘사한다. 동회에서 청년들을 모은다는 소집령이 떨어지고, 가족들이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오빠가 끌려가는 장면. 어머니가 무너지는 장면. 그 후 며칠 동안 어머니가 매일 동회 앞에서 오빠의 소식을 기다리는 장면.
박종서는 의용군에서 탈출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었다. 9월 수복 후 그는 "의용군 출신"으로 의심받았다. 그가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갔는지, 강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것인지를 증명해야 했다. 그 증명은 결코 완벽하게 이뤄질 수 없었다. 그 후 그의 인생 전체가 이 의혹의 그림자 아래 있었다.
박완서는 책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적는다. 점령기 90일 동안 가족이 견뎌야 했던 것은 사실 그 90일 자체가 아니라, 그 90일이 그 후 평생에 걸쳐 남긴 그림자였다고. 그 그림자가 부역자 또는 의용군 의혹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을 따라다녔다고. 한국전쟁이 한 가족에게 새긴 상처가 90일에 그치지 않고 40년, 50년 이어진다는 것을 그녀는 자기 가족의 경험으로 증언한다.

9월 수복, 또 다른 시작

9월 28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90일이 끝났다. 그러나 그 90일을 살아낸 시민들에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수복 직후 시작된 것이 부역자 처벌 절차였다. 점령기에 새 체제에 협력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색출하고 조사하고 처벌하는 일. 그 대상에는 적극 협력자뿐 아니라, 유진오 같은 "최소한의 협력"을 한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까지.
처벌의 강도는 다양했다. 사형 또는 장기 수감에 처해진 사람도 있었고, 단순히 사회적 낙인만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낙인이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 사람이 "부역자" 또는 "의용군 출신"으로 한 번 분류되면, 그 분류가 그의 인생 전체와 그 가족 전체를 따라다녔다. 자녀의 결혼, 취업, 군 입대에 영향을 미쳤다.
이 부역자 처벌의 비대칭을 김동춘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강 다리 폭파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울에 갇혔던 사람들이 점령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행동들을, 일찍 피난을 떠나 안전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심판하는 구조. "도망친 자들이 남은 자들을 심판하는" 그 구조가 9월 수복 후에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진오는 『고난의 90일』의 마지막 장에서 이 문제를 짧게 언급한다. 그는 자신이 90일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그 살아남음이 곧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한다. 그가 책을 빠르게 출간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점령기에 무엇을 했는지를 스스로 기록함으로써 의혹을 미리 차단하려 한 것. 1950년 12월의 이 출간 자체가 그가 90일을 살아남은 자의 또 다른 생존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살아남은 자의 회한

이 회를 마치며 한 가지를 더 짚어두고 싶다. 점령기 90일을 살아남은 자들이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것에 관해서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한쪽에서는 그것이 안도였다. 죽지 않고 가족을 지켰고 자기 자신을 지켰다는 사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이 회한이었다. 자신이 살아남은 자리에 누군가 죽었다는 것.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한 결과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수 있다는 것. 자신이 적극 저항하지 못한 그 자리에 누군가가 저항하다 죽었다는 것.
유진오의 책에 깔린 정서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의심한다. 책의 어조가 일관되게 비극적인 이유다. 살아남은 자의 변명이라는 비판이 그의 책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것은 일면 정당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변명 안에 깔린 회한과 자기 의심도 보아야 한다. 그것이 점령기 90일이 한 지식인의 내면에 새긴 흔적이다.

서울에서 시가전 에 참여하는 미 해병대

 
박완서가 자전적 소설을 쓴 것이 1990년대 초반이었다는 사실, 즉 사건으로부터 40년 이상이 지난 후였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그 40년 동안 그녀는 그 시기를 쓰지 않았다. 쓰려 했지만 쓸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의 회한이 너무 깊어서, 그것을 글로 옮길 수 있을 만큼 거리가 확보되기까지 한 세대 이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점령기 90일이 한국 사회에 새긴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다. 살아남은 자들의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이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이어진 사실. 그 침묵 속에서 진실의 일부가 잃어버려졌다. 우리가 오늘 그 90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더 많은 것이 침묵 속에 묻혀 있다.

다음 회 예고

EP.13 후방의 또 다른 비극, 보도연맹 점령기 90일에 가려진 또 다른 비극이 있었다. 후퇴하는 한국 정부의 손에 자행된 국가폭력. 1949년에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의 명단을 따라 1950년 여름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학살. 보도연맹은 무엇이었고, 누가 그 명단에 올랐으며, 후퇴 길에 무엇이 벌어졌는가. 한국 정부 측에서 자행된 가장 거대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 김동춘과 한성훈의 연구가 밝혀낸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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