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충북 영동의 한 골짜기
1950년 7월 어느 날, 충북 영동군의 한 골짜기. 그날 새벽 인근 마을의 한 30대 남자가 자택에서 끌려 나왔다. 경찰관 두 명이 그를 데려갔다. 가족에게는 "잠깐 조사할 일이 있다"는 말만 했다. 같은 시각 인근 다른 마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십 명의 남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집에서 끌려 나왔다.

그들은 영동의 한 골짜기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들은 줄지어 세워졌다. 그리고 총격이 시작되었다. 그날 그 골짜기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사이로 추정된다. 시신은 그 자리에 묻혔다. 어떤 시신은 골짜기 아래 개울로 떨어졌다. 가족들은 한참 후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같은 일이 그 7월과 8월 사이 한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한국 정부와 군경이 후퇴하면서 자행한 학살이었다. 그 이름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었다.
보도연맹이란 무엇이었는가
보도연맹의 정확한 명칭은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다. 1949년 6월 5일 한국 정부가 결성한 조직이었다. "보도(保導)"는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뜻이다. 한국 정부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좌익 사상을 가졌거나 좌익 단체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전향시키고 보호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후, 한국 정부는 좌익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좌익을 처벌할 수는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 해방 후 인민위원회나 남로당 또는 그 외곽 조직에 한 번이라도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모두 감옥에 가둘 수도,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었다. 그 절충안이 보도연맹이었다.
가입은 형식상 자발적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강제였다. 좌익 관련 이력이 있다고 판단된 사람에게 가입을 권유했고, 거부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겠다는 압박을 가했다. 가입을 하면 좌익 활동을 그만두기로 "전향 선서"를 해야 했고, 정기적으로 사상 교육을 받아야 했다.
문제는 그 명단의 작성 방식이었다. 각 지역의 경찰서가 명단 작성을 담당했다. 그러나 명단의 정확성을 검증할 수 있는 체계는 없었다. 좌익 관련 이력이 분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지 가난한 농촌 청년이라 무료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가입한 사람도 있었다. 친척이나 친구의 권유로 가입한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경찰의 가입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무작위로 명단에 올라간 사람도 있었다.
한성훈의 연구에 따르면, 1949년 말까지 보도연맹의 가입자 수는 30만 명을 넘었다. 일부 추산으로는 4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당시 한국 인구를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그리고 그 30만에서 40만 명의 명단이 1950년 6월 시점에 각 지역 경찰서에 보관되어 있었다.
6월 25일 이후, 명단이 살상 도구가 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국군과 정부가 후퇴를 시작하면서, 그 명단이 갑자기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보도연맹원들이 점령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이 정부와 군 내부에서 빠르게 퍼졌다. 그들이 점령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에 합류하거나, 후방에서 빨치산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이 우려를 실제 정책으로 만든 결정이 어디서 내려졌는가는 오늘날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6월 말부터 7월 초 사이, 한국 정부 또는 군의 최고위층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을 지시한 것은 분명하다. 예비검속이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미리 검거한다는 뜻이었다. 즉 점령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만으로 그들을 사전에 검거한다는 것이었다.

7월 초부터 한국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보도연맹원 검거가 시작되었다. 각 경찰서는 보관하고 있던 명단을 꺼냈고, 명단의 이름을 따라 검거가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사상 점검을 위한 일시 구금"이라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곧 그 의미가 달라졌다.
전선이 빠르게 남하하면서 검거된 사람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이송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정부와 군의 판단은 점차 잔혹해졌다. 후방으로 이송할 수 없는 검거자들을 그 자리에서 처리한다는 결정이었다. "처리"의 구체적인 의미는 처형이었다.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약 한 달 반 사이, 한국 전역에서 보도연맹원 학살이 자행되었다. 골짜기에서, 폐광에서, 강가에서, 바다에서. 일부 학살은 군이 직접 수행했고, 일부는 경찰이, 일부는 우익 청년단체가 가담했다. 학살의 형태와 규모는 지역마다 달랐지만, 그 본질은 같았다. 명단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학살의 규모
정확한 사망자 수는 오늘날까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 정부는 이 학살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축소했고, 진상 조사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2005년 한국 정부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진실화해위는 2010년까지 활동하면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보도연맹원 학살의 희생자가 적어도 수만 명, 많게는 10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었다.
한성훈은 자신의 연구에서 이 추산의 의미를 강조한다. 한국전쟁 전체 기간 한국군과 유엔군이 입은 사망자 수가 약 5만 명, 한국 측 민간인 사망자 총수가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100만 명 중 상당수가 폭격이나 전투 중 사망이지만,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학살 또는 처형으로 사망한 것으로 본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보도연맹원 학살이다.

지역별로 보면 가장 큰 학살이 일어난 곳 중 하나가 경상남도 일대였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면서, 그 후방인 경남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이 집중적으로 검거되었다. 김해, 마산, 진주, 통영, 거제 등지에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일부 희생자들은 바다로 끌려가 수장되었다. 거제 앞바다, 통영 앞바다, 마산 앞바다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
또 다른 큰 학살이 일어난 곳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였다. 청주, 대전, 영동, 무주, 광주, 순천, 여수 등지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특히 대전형무소에서는 7월 초 약 1,800명에서 7,000명 사이의 수감자가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숫자는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미군 측 자료에 따르면 적어도 2,0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미군의 기록과 침묵
이 학살의 일부는 미군에 의해 목격되고 기록되었다. 특히 대전형무소 학살은 미군 장교들이 현장 또는 인근에서 목격했고, 일부 사진까지 남겼다. 이 사진들은 2000년대에 들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통해 공개되었다.
미국 측 기록의 존재는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낸다. 미군 지휘부는 한국 측의 학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막거나 공개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일부 미군 장교들이 우려를 표명했지만, 그 우려가 정책 차원의 조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미군의 우선순위는 인민군의 진격을 막는 것이었고, 한국 정부의 후방 작전에 개입하는 것은 그 우선순위와 충돌하는 일로 여겨졌다.
이 침묵의 결과 학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한국 내부에서는 정부의 통제 아래 입을 다물어야 했고, 외부에서는 미군이 알고도 외면했다. 그 결과 1990년대까지 보도연맹원 학살은 한국 사회의 거대한 침묵 속에 묻혀 있었다.
한 가족의 사례
추상적 숫자가 아니라 한 가족의 사례로 이 학살의 의미를 보자. 한성훈과 진실화해위가 정리한 무수한 증언 중 한 사례다.
경남 거창의 한 농가. 30대 후반의 남자가 1945년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 잠깐 가담했다가 빠졌다. 1949년 보도연맹이 결성되면서 그는 가입 권유를 받았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경찰의 압박이 계속되자 결국 가입했다. 그 후 그는 농사일에 전념했고,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 했다.
1950년 7월 중순 어느 날 새벽, 그가 자택에서 끌려갔다. 아내와 세 명의 아이가 있었다. 아내는 그가 어디로 끌려가는지 물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며칠 후 그녀는 인근 골짜기에서 학살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남편이 거기 있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시신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시신은 한자리에 묻혔고, 그 자리는 출입이 금지되었다.
아내는 그 후 50년 가까이 남편의 죽음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빨갱이 가족"으로 분류될 위험 때문이었다. 아이들도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자랐다. 아버지가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가족은 그 후 평생 사회적 낙인 속에서 살았다. 아이들의 결혼, 취업, 군 입대에 모두 그 그림자가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에 들어 진실화해위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 가족은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2007년경 진실화해위는 그 가족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보도연맹 학살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그러나 그 통보가 도착한 시점에 어머니는 이미 70대 노인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도 50대가 되어 있었다. 진실의 확인이 너무 늦게 왔다.
이런 가족이 한국 전역에 수만, 어쩌면 수십만이 있었다. 한성훈의 연구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차원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한 거대한 침묵의 토대였다. 그 침묵 위에서 한국 현대사가 형성되었다.
김동춘의 분석
김동춘은 『전쟁과 사회』에서 보도연맹원 학살을 한국전쟁이 만들어낸 국가폭력의 가장 결정적인 사례로 분석한다. 그의 분석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학살의 합리화 구조. 보도연맹원 학살은 명백한 국가범죄였지만, 그 시점의 한국 정부는 그것을 "전시 비상조치"로 합리화했다. 점령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사전에 처리한다는 논리. 그러나 이 논리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보도연맹 명단 자체의 부정확성, 즉 명단에 오른 사람들 중 다수가 실제로는 좌익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 다른 하나는 가능성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의 윤리적 문제. 김동춘은 이 합리화 구조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적대성이 어떻게 폭력으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라고 본다.
둘째, 학살의 비대칭성. 점령기 90일 동안 인민군 점령 체제도 부역자 처벌과 정치적 살인을 자행했다. 그러나 그 규모와 체계성은 한국 정부 측의 보도연맹 학살에 비교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사는 오랫동안 점령군 측의 폭력만 부각시키고 한국 정부 측의 폭력은 침묵 속에 묻어왔다. 이 비대칭이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을 일그러뜨렸다는 것이 김동춘의 진단이다.
셋째, 학살의 후속 효과. 보도연맹 학살은 단지 수십만 명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가족들이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낙인, 그리고 그 낙인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한국 사회의 정치 문화를 결정적으로 변형시켰다. 한국 사회의 강력한 반공주의, 그리고 정치적 적대성을 죽음으로 처리하려는 경향성의 한 뿌리가 여기 있다고 김동춘은 본다.

진실화해위의 활동, 그리고 그 한계
2005년에서 2010년 사이 진실화해위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수행했다.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해서도 수십 건의 직권 조사와 수천 건의 신청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수만 명의 희생자가 공식 확인되었고, 정부 차원의 사과와 일부 배상이 이뤄졌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의 활동에도 한계가 있었다. 첫째, 시간의 문제. 사건으로부터 50년 이상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 조사였기에 직접 증언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일부 학살은 증인이 모두 사망해 진실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둘째, 자료의 문제. 학살을 자행한 측의 공식 문서가 의도적으로 폐기 또는 은폐된 경우가 많았다. 셋째, 책임자 처벌의 문제. 학살을 명령하고 실행한 책임자들에 대한 형사 처벌은 사실상 이뤄지지 못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이미 사망했거나, 시효 문제로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진실화해위는 2010년에 1차 활동을 마쳤다가 2020년 2기 위원회로 재출범했다. 2기 위원회는 진실 규명을 못한 사건들을 다시 다루고 있지만, 이 글을 쓰는 2026년 5월 현재 그 활동도 점점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한국 사회가 보도연맹 학살의 진실을 완전히 규명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학계와 시민사회의 우려다.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이 회를 마치며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같은 1950년 여름에, 서울에서는 점령군의 부역자 처벌이 자행되었고, 후방에서는 한국 정부의 보도연맹원 학살이 자행되었다. 두 폭력은 서로를 정당화했다. 점령군은 "남한 정권이 더 많이 죽였다"고 했고, 한국 정부는 "점령군이 부역자를 처벌했다"고 했다. 두 폭력의 비대칭과 대칭은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형성했는가.
김동춘이 던지는 답은 명료하다. 두 폭력 모두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한국 사회는 그중 한쪽 폭력만 기억하고 다른 한쪽을 침묵 속에 묻었다. 이 선택적 기억이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자기 기만이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리고 그 자기 기만이 한국 사회가 평화로운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오래도록 막아왔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 회를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직시하기 어려운 사건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직시 없이는 한국전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1950년 여름, 점령된 서울에서도, 그리고 후퇴하는 남쪽 길에서도, 한반도 전체가 거대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 비극의 어느 한 면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시리즈가 일관되게 유지하려는 자세다.
다음 회 예고
EP.14 9월 15일, 인천 앞바다의 도박 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 맥아더 장군의 가장 큰 도박이 시작된다. 조수 차이가 10미터에 이르는 인천 앞바다에서 대규모 상륙 작전을 감행하는 일. 거의 모든 군사 전문가가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강행했다. 그리고 그 도박이 성공한다. 인민군의 보급선이 끊어지고,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다. 그러나 그 수복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90일 점령기를 견딘 사람들을 기다린 것은 무엇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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