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20. 콩시에르주리에서 단두대까지
"그분께서는 마지막까지 한 왕비셨다. 그분이 입으신 옷의 색깔이 바뀌었고, 그분의 머리에서 보석이 사라졌으며, 그분의 곁에서 시녀가 한 명씩 떠났다. 그러나 그분의 위엄은 마지막까지 그분의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빼앗으려 했지만, 결국 그것은 그분이 가장 깊이 가지고 떠난 한 가지였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탕플 탑, 1792년 8월 13일
1792년 8월 13일 저녁, 한 왕정 가족이 마차에 올랐다. 그들은 의회 옆의 푀양 수도원에서 약 3일을 보낸 뒤, 자신들의 새로운 거처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새로운 거처가 탕플 탑이었다.
탕플 탑은 파리 동쪽의 한 거대한 중세 요새였다. 12세기 후반 성전 기사단(Templiers)이 자신들의 본부로 지은 건물이었고,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4세기 초 성전 기사단이 해산된 뒤로 그 건물은 여러 차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한 왕정의 사촌 가문인 콩티(Conti) 가문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1789년 혁명 이후 그 건물은 한 시대의 새로운 권한 아래에 들어갔고, 1792년 8월 한 왕정 가족의 감옥으로 결정되었다.
탕플 탑의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한 큰 본관 건물과 그 옆에 솟아 있는 한 거대한 사각형 탑이 있었다. 그 탑은 4층 높이였고, 두께가 약 4미터에 달하는 돌벽을 가지고 있었다. 그 탑이 한 왕정 가족의 실제 거처가 되었다. 그들은 그 탑의 한 층씩을 사용했고, 모든 출입구는 한 명씩의 시민군에 의해 경비되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자신의 거처를 그 탑의 한 층에 가졌다. 그곳에는 그의 침실, 작은 서재, 그리고 식사 공간이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한 층에 자신의 거처를 가졌다. 그곳에는 그녀의 침실, 사적 공간, 그리고 자녀들의 방이 함께 있었다.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가 그녀의 거처에 함께 있었다.
이 거처가 한 왕정 가족이 보낸 마지막 가족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약 4개월 반을 함께 보냈다. 1792년 8월 13일부터 1793년 1월 21일까지였다.
한 가족의 마지막 일상
탕플 탑에서의 일상은 튀일리궁의 일상과는 또 다른 종류였다. 그것은 분명한 감옥의 일상이었지만, 동시에 한 가족이 가장 가까이 모인 시간이기도 했다.
매일의 일과는 비교적 단순했다. 아침 9시 무렵 한 가족이 함께 모여 아침 식사를 했다. 그 후 한 왕은 자신의 아들 루이 샤를에게 짧은 수업을 직접 했다. 그가 가르친 과목은 지리, 역사, 그리고 라틴어였다. 그는 평생 자신이 받은 교육의 가장 좋은 부분을 자신의 아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그 시간이 그가 아버지로서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딸 마리 테레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딸에게 자신이 어릴 때 빈에서 배운 자수의 기법을 가르쳤다. 또한 그녀는 딸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작은 하프시코드 한 대가 그들의 거처에 옮겨져 있었고, 두 사람은 함께 짧은 곡을 연주했다. 마담 엘리자베트는 매일 한 가족과 함께 짧은 기도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한 가족의 영적 지지자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았다.
오후에는 가족이 함께 한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함께 카드 게임을 하거나, 함께 짧은 책을 읽거나, 함께 작은 정원에서 걸었다. 그 정원은 탕플 탑의 한 작은 안마당이었고, 약 50미터 정도의 짧은 산책로가 있었다. 그곳에서 한 가족은 매일 짧은 시간을 함께 걸었다. 그들 주위로는 항상 시민군이 함께 있었지만, 한 가족은 가능한 한 자신들의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하려 노력했다.
저녁에는 한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식사 후에 그들은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낸 뒤, 각자의 거처로 향했다. 어린 루이 샤를은 어머니의 침실 옆 방에서 잠을 잤다. 마리 테레즈도 어머니 가까이에 있는 방에서 잠을 잤다. 한 가족이 그토록 가까이 모인 시기는 한 왕정의 평생에서 거의 없었다.
이 일상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한 가지였다. 그것은 한 가족이 자신들이 더 이상 한 왕정이 아니라 단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한 왕정의 모든 공식 자리가 사라졌고, 그 자리가 사라진 자리에 단순한 가족으로서의 자리가 남았다. 그 단순한 가족의 자리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1793년 1월, 한 왕의 처형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가 처음 모인 그날, 왕정 자체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 후의 약 4개월 동안, 의회는 한 왕에 대한 재판 여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의 핵심은 한 가지였다. 한 왕정이 폐위된 뒤에도, 한 옛 왕을 재판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일부는 한 옛 왕이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부는 한 옛 왕이 자신의 백성에 대한 가장 큰 범죄, 즉 외국과의 음모를 저질렀으므로 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1792년 11월 한 가지 결정적인 발견으로 끝났다. 그 발견이 바로 EP.17에서 짧게 언급한 튀일리궁의 비밀 금고였다. 루이 16세가 평생 가까이 두었던 자물쇠 장인 프랑수아 가맹이 한 가지 결정을 내리고, 튀일리궁의 한 벽 안에 숨겨진 비밀 금고에 대해 혁명 정부에 알린 것이다. 그 금고 안에는 한 왕정의 가장 민감한 비밀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외국 군주들과 주고받은 편지, 외국에 보낸 자금의 기록, 그리고 한 왕정 회복을 위한 비밀 음모의 기록들.
이 문서들이 발견된 뒤, 한 왕에 대한 재판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결말이 되었다. 1792년 12월 11일, 한 왕에 대한 재판이 국민공회에서 시작되었다. 루이 16세는 자신의 변호인 두 사람과 함께 의회에 출석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그가 부인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했다. 비밀 금고에서 발견된 문서들이 너무도 분명한 증거였다.
재판은 약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1793년 1월 15일, 국민공회는 한 왕의 유죄 여부에 대해 투표했다. 결과는 거의 만장일치였다. 정확히는 707명의 의원 가운데 693명이 한 왕의 유죄에 동의했다. 그 다음 날인 1월 16일과 17일, 국민공회는 한 왕에 대한 형벌을 두고 투표했다. 이 투표는 훨씬 더 격렬한 것이었다. 한 표의 차이로 결과가 결정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최종 결과는 387명이 사형에 찬성, 334명이 사형에 반대였다. 53표의 차이로 한 왕의 사형이 결정된 것이었다.
이 결정 가운데 한 가지 인상적인 사실이 있었다. 한 왕정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Duc d'Orléans)이 그 투표에 참여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한 시대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필립 에갈리테(Philippe Égalité)', 즉 '평등의 필립'으로 바꾸고 국민공회의 의원이 되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사촌인 한 왕에 대한 사형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었다. 이 한 표가 가족 관계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가장 단호한 사례였다.
1월 20일 저녁, 한 가족의 마지막 식사
루이 16세가 자신의 사형 판결을 알게 된 것은 1793년 1월 20일 아침이었다. 그날 그는 한 가지 요청을 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과 한 번 더 짧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저녁 8시 무렵, 한 가족이 한 마지막 식사를 함께 했다. 그 식사 자리에는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테레즈, 어린 루이 샤를, 그리고 마담 엘리자베트가 있었다. 그것은 한 가족이 함께 한 마지막 식사였다.
그 식사의 풍경에 대해서는 마리 테레즈의 후일 회상록과 다른 동시대 증언들이 짧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자리에서 누구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음식은 거의 손대지 못했다. 한 왕은 자신의 자녀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자녀들에게 자신이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분명히 했다. 자신을 죽인 사람들에 대한 어떤 종류의 복수의 마음도 가지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짧게 말했다. "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결코 추구하지 말아라." 이 부탁은 한 가지 분명한 신앙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 한 가족이 잠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약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왕이 자신의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작별의 자리에서 한참 동안 자신의 남편을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은 1770년 5월 베르사유에서 처음 결혼했고, 그 후 약 22년 8개월을 함께 살았다. 그 22년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사람으로 변해 갔다. 처음의 어색한 정략결혼이 점차 깊은 동반자 관계로 자라났고, 한 시대의 위기를 함께 견디면서 그 관계는 한 가지 깊은 결속으로 굳어졌다. 그 결속이 그날 밤 그 작별의 자리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났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날 밤 무엇을 말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마리 테레즈의 회상록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 짧은 한 마디를 했다고 한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만나러 올게요." 이 한 마디는 한 가지 마지막 작은 희망의 표현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자신의 아들 루이 샤를을 한참 동안 안았다. 어린 루이 샤를은 그때 7세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다음 날 아침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무엇인가 매우 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한 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짧게 한 마디 했다. "용감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어머니의 곁에 있어야 한다." 어린 아들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의 작별이 한 가족이 한 왕을 마지막으로 본 시기였다. 본래 한 왕은 다음 날 아침 가족과 한 번 더 만날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가 너무 일찍 처형 장소로 옮겨지면서, 그 마지막 만남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월 21일 아침, 콩코르드 광장
1793년 1월 21일 아침 8시 무렵, 한 왕은 자신의 거처에서 마차에 올랐다. 그 마차는 그를 처형 장소로 데려갔다. 처형 장소는 한때 루이 15세 광장이라 불렸던 곳, 즉 EP.03에서 본 한 결혼 축하 폭죽 비극의 그 광장이었다. 1789년 이후 그곳의 이름은 '혁명 광장(Place de la Révolution)'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곳을 콩코르드 광장이라고 부른다.
그 광장 한가운데에는 한 거대한 단두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단두대 주위에는 약 2만 명의 시민이 모여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 광장에서 약 23년 전 한 어린 왕세자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폭죽을 보러 왔던 그 사람들의 자녀들이거나, 그들 자신이기도 했다. 한 시대의 시작을 알린 한 광장이, 한 시대의 한 결말을 받아들이는 자리가 된 것이다.
루이 16세는 마차에서 내려, 단두대로 향했다. 그는 단호한 발걸음으로 걸었다. 그가 단두대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한 가지 짧은 발언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말을 하기를 원했다. 그가 시작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 동시대 기록에 적혀 있다. "나는 무고히 죽는다. 나의 죽음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용서한다. 그리고 나는 신께 기도한다, 내가 흘릴 피가 결코 프랑스 위에 떨어지지 않기를."
이 마지막 말의 정확한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마지막 발언을 끝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처형 책임자가 그 발언을 중간에 끊었고, 즉시 북소리로 그의 목소리를 덮었다. 한 왕의 마지막 말은 그 북소리 안에 묻혔다.
아침 10시 22분 무렵,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졌다. 한 왕의 처형이 그렇게 끝났다. 그가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날 아침 마리 앙투아네트는 탕플 탑의 자신의 거처에서 그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남편이 그날 처형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그가 언제 처형되는지는 그녀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 시간을 자신의 거처에서 자녀들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처형이 끝난 뒤, 그 소식이 탕플 탑에 전해진 것은 약 한 시간 뒤였다. 한 시민군의 한 사람이 그녀의 거처에 짧게 들어와, 그 사실을 알렸다. 그가 사용한 표현은 매우 단호했다. "전직 왕이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한 마디를 들은 직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자녀를 한꺼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짧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이제 나는 너희들만을 위해 살아 있다."
이 한 마디가 그날 이후 그녀의 마지막 약 9개월의 일상을 결정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가운데 살아남은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남은 시간을 바칠 결심을 했다.
1793년 7월의 분리
남편의 죽음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상은 한 가지 분명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것은 점차 더 좁아진다는 방향이었다.
먼저 한 가족의 단순한 일상조차 점차 어려워졌다. 그녀는 더 이상 자녀들에게 직접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고, 그들과 함께 정원에서 산책할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한 시민군의 감시는 점차 더 엄격해졌고,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 보고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1793년 7월 3일에 일어났다. 그날 한 시민군의 한 사람이 그녀의 거처에 짧게 도착했다. 그는 한 가지 명령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 루이 샤를을 어머니의 거처에서 분리한다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의 정치적 배경은 분명했다. 한 왕정이 폐위된 뒤에도, 어린 루이 샤를은 한 왕정 회복 운동의 잠재적 상징이었다. 그가 어머니의 곁에 자라고 있는 한, 그는 한 왕정의 문화 안에서 자라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은 그를 어머니로부터 분리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 분리의 풍경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평생 겪은 가장 깊은 고통 가운데 하나였다. 마리 테레즈의 회상록에 따르면, 그날 어머니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한참 동안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그녀는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시민군이 그녀에게 아이를 넘기라고 요구했을 때, 그녀는 짧게 거부했다. "그러지 마세요. 그를 두고 가세요." 그러나 그녀의 거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시민군에게 넘겨야 했다. 그녀가 그를 마지막으로 안은 그 순간, 어린 루이 샤를은 어머니에게 짧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어머니, 곧 다시 만나러 올게요." 그는 그 짧은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어린 루이 샤를은 탕플 탑의 다른 한 층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는 시민군 출신의 한 사람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앙투안 시몽(Antoine Simon)이었다. 그는 직업이 구두 수선공이었고,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루이 샤를에게 한 시대의 새로운 가치를 가르치는 책임을 받았다.
이 분리가 어린 아들에게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EP.11에서 짧게 다룬 바 있다. 그는 어머니가 처형된 뒤 약 1년 8개월을 더 살았고, 1795년 6월 8일 10세의 나이로 탕플 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시간은 어머니의 곁에서 떨어진 채, 한 시민군의 보호 아래에서 점차 더 깊은 외로움 속에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 후의 일상은 매일 자신의 어린 아들의 소리를 듣기 위한 시간들로 채워졌다. 그녀는 탕플 탑의 작은 창문 가까이에 매일 가서, 아래층에서 들리는 어린 아들의 발소리, 어린 아들의 짧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이 그녀가 아들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연결이었다.

8월 2일, 콩시에르주리로
1793년 8월 1일 밤 11시 무렵, 한 명령이 탕플 탑에 도착했다. 그 명령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른 한 감옥으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그 다른 감옥이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였다.
콩시에르주리는 파리의 한 옛 왕정의 건물이었다. 그것은 시테 섬(Île de la Cité)의 한 부분으로, 본래 14세기까지 한 왕정의 거처였다. 한 왕정이 루브르궁으로 옮겨간 뒤로 그곳은 한 사법 기관의 건물이 되었고, 그 안에 한 감옥이 함께 있었다. 18세기 후반의 콩시에르주리는 한 시대의 가장 단호한 정치 범죄자들이 거치는 마지막 감옥이었다. 그곳에서 한 수감자가 옮겨진다는 사실은, 그가 곧 재판을 받고 처형될 운명이라는 사실의 거의 확실한 신호였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주리로 옮겨진 그 시각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거처에서 짧게 자신의 소지품을 챙긴 뒤, 한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자신의 딸 마리 테레즈와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짧은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작별이 그녀가 가족 가운데 살아있는 사람들과 한 마지막 인사였다. 그녀는 더 이상 두 사람을 보지 못한다.
마리 테레즈의 회상록에 따르면, 어머니는 그날 밤 자신에게 짧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너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너의 동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마리 테레즈는 그 부탁을 평생 지켰다. 그녀는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혁명을 살아남은 사람이 되었고, EP.11에서 본 것처럼 1851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가족의 기억을 지켰다.
콩시에르주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받은 거처는 매우 단순한 한 작은 방이었다. 그 방의 크기는 약 4미터 × 3미터 정도였고, 그 안에는 한 작은 침대, 한 작은 책상, 그리고 한 작은 의자만이 있었다. 창문은 매우 작았고, 그곳에서는 한 좁은 안마당이 보일 뿐이었다. 그곳이 그녀가 평생 마지막으로 머문 공간이었다.
10월 14일, 재판
콩시에르주리에서의 약 두 달 반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의 같은 일과를 반복했다. 짧은 기도, 짧은 독서, 짧은 자수. 그녀에게 허락된 자원은 매우 적었다.
그녀의 자수에 대한 한 가지 작은 일화가 전해진다. 그녀는 그 두 달 반 동안, 자신에게 허락된 작은 천 조각으로 한 작은 자수 한 점을 만들었다. 그 자수에 그녀는 자신의 가족의 머리글자를 새겼다. 'L'은 루이 16세, 'M.A.'는 자신의 머리글자, 그리고 'M.T.'와 'L.C.'는 자녀들의 머리글자였다. 이 작은 자수는 후일 그녀가 처형된 뒤 발견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그 작은 자수가 그녀의 마지막 사적 시간 안에서 가장 분명한 흔적이다.
1793년 10월 14일 아침,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 재판은 한 시대의 가장 단호한 정치 재판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에 대한 혐의는 매우 광범위했다. 외국과의 비밀 서신, 외국 군대에 대한 군사 정보 전달, 한 왕정 회복을 위한 음모. 이 모든 혐의가 그녀에 대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정치적 혐의에 더해, 한 가지 매우 끔찍한 혐의가 추가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어린 아들 루이 샤를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혐의였다. 이 혐의는 모든 면에서 사실무근이었다. 그것은 검찰 측이 한 어머니의 도덕적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종류의 비방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혐의에 대해 짧게 답했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한 답이 후일 가장 자주 인용되는 그녀의 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저는 그런 비난에 답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로서, 저는 모든 어머니에게 호소합니다. 한 어머니에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를 그들에게 묻겠습니다."
이 한 마디는 그 재판장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꾸었다. 그 자리에 모인 시민들 가운데 일부, 특히 여자들이 깊은 침묵에 잠겼다. 한 어머니의 가장 깊은 호소 앞에서, 그 끔찍한 혐의의 무게가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재판의 최종 결과를 바꾸지 못했다.
재판은 약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10월 15일 밤 늦은 시각, 재판부가 자신들의 결론에 도달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든 정치적 혐의에 대해 유죄로 판결되었다. 형벌은 사형이었다. 처형 시각은 다음 날 정오로 결정되었다.
재판부가 자신의 판결을 읽었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가지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짧게 일어나,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가는 짧은 길을 걸었다. 그녀가 그 시점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날 밤 그녀가 자신의 감방에서 한 마지막 한 가지 일이 있었다.
10월 16일 새벽, 마지막 편지
1793년 10월 16일 새벽 4시 30분 무렵,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자신의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였다. 그 편지가 그녀가 평생 쓴 마지막 글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한 시대의 가장 깊은 사적 문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녀는 그 편지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한 모든 사랑을 분명히 적었다.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깊은 부탁, 자신의 시누이에 대한 감사, 자신의 죽은 남편에 대한 마지막 사랑. 이 모든 것이 그 편지 안에 담겨 있었다.
그녀가 그 편지에서 자신의 자녀들에 대해 적은 한 부분이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녀는 자신의 두 자녀가 결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마음을 가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1월 20일 밤 자신의 가족에게 한 같은 부탁을 자신도 반복했다. "내 자녀들이 결코 우리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추구하지 않기를 바라요.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요."
이 부탁은 한 가지 분명한 신앙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깊은 유산이었다. 한 가족이 받은 모든 비극이 그 후의 새로운 비극을 만들어내지 않기를 원하는 한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
이 편지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직후, 그녀의 감방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결코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은 그 편지를 한 감춰진 자리에 보관했고, 그 후 약 21년 동안 그것은 사라진 채로 남아 있었다. 그 편지가 다시 발견된 것은 1814년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의 일이었다. 그때 마담 엘리자베트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녀는 자신의 올케에게서 온 마지막 편지를 받지 못한 채 1794년 5월 자신의 처형을 맞이했다. 한 시대의 가장 깊은 사적 메시지가 끝내 그 수신인에게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한 시대의 비극을 한 가지 더 깊게 만든다.
정오의 광장
1793년 10월 16일 정오, 한 마차가 콩시에르주리의 정문을 떠났다. 그러나 그것은 한 왕이 1월 21일에 탔던 종류의 마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단순한 짐마차였다. 그 짐마차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올라 있었다.
이 차이가 한 가지 분명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 왕은 자신의 처형 자리로 향할 때 한 왕정의 마차에 올랐다. 그것은 한 옛 왕정의 마지막 시각적 권위였다. 그러나 한 왕비는 그런 마차에 오를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한 일반 죄수와 같은 짐마차에 올라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짐마차에서 거의 약 한 시간을 보냈다. 콩시에르주리에서 혁명 광장까지의 거리는 약 1.5킬로미터 정도였지만, 그 짐마차는 의도적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은 그녀의 마지막 길이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에게 보이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 짐마차는 파리의 거리들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녀가 그 짐마차에 앉아 있던 그 풍경은 한 시대의 가장 상징적인 풍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그날 입은 옷은 단순한 흰 드레스였다. 그녀의 머리는 짧게 잘려 있었다. 처형 직전 사형 집행인이 자신의 작업의 편의를 위해 그녀의 긴 머리를 자른 것이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어떤 장식도 없었다. 그녀가 평생 입은 가장 단순한 옷차림이었다.
이 풍경을 한 화가가 그날 직접 보고 짧은 스케치 한 장을 남겼다. 그 화가의 이름이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였다. 그는 한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였고, EP.12에서 본 것처럼 비제 르 브룅의 가족 초상화의 구도에 대한 조언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한때 한 왕정의 가까운 측근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1793년에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가 그날 한 작은 카페의 창가에 앉아, 자신의 짐마차가 지나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빠르게 스케치한 것이다.
이 스케치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것은 한 작은 종이 위의 단순한 펜화이지만,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시각적 증언 가운데 하나다. 그 스케치 속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곧게 앉아 있고, 그녀의 표정은 매우 단호하다. 그녀의 두 손은 등 뒤로 묶여 있지만, 그녀의 자세에는 어떤 굴복의 흔적도 없다. 한 시대의 가장 격렬한 정치적 변화 가운데 한 사람의 위엄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그 스케치는 한 가지 가장 분명한 답이다.
오후 12시 15분 무렵, 짐마차가 혁명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짐마차에서 내려, 단두대로 향했다. 그녀가 단두대의 계단을 오르던 그 짧은 시간에 한 가지 작은 일이 있었다. 그녀의 발이 사형 집행인의 발을 짧게 밟은 것이다. 그녀는 즉시 짧게 한 마디 했다. "용서하세요. 일부러 한 일이 아닙니다."
이 한 마디가 그녀가 평생 한 마지막 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것이 한 사형 집행인에 대한 예의의 말이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평생의 가장 깊은 한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옆에 있는 한 사람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대했다. 그 사형 집행인의 이름은 샤를 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이었다. 그는 자신의 평생 동안 약 3,000명을 처형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적었다. 자신이 처형한 모든 사람 가운데 마리 앙투아네트만큼 마지막까지 자신을 존중한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오후 12시 15분에서 12시 30분 사이의 어느 짧은 순간,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이 그렇게 끝났다. 그녀가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날 혁명 광장에 모인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그녀의 머리가 사형 집행인의 손에 들려 군중에게 보여졌을 때 한 짧은 침묵을 묘사한 기록이 있다. 그 침묵은 한 왕의 처형 때의 환호와는 완전히 달랐다. 군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 풍경을 그저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후일 여러 해석이 있었다. 한 해석은 그 침묵이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의 단호한 승리에 대한 압도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그 침묵이 한 어머니에 대한 깊은 인간적 인식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해석이 옳든, 그날 그 광장의 침묵은 한 시대의 가장 깊은 한 가지 순간이었다.
한 시녀의 평생의 약속
마리 앙투아네트가 세상을 떠난 그 시각, 마담 캉팡은 파리 외곽의 자신의 거처에 있었다. 그녀는 그 시각 한 작은 책을 읽고 있었다고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 짧게 적었다. 그날 오후 늦게, 한 친척이 그녀의 거처에 도착해 짧게 그 소식을 알렸다. 캉팡은 그 소식을 들은 직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고 그녀의 회고록은 적는다.
그녀는 그날 한 가지 결심을 다시 떠올렸다. 그것은 한 왕비가 자신의 마지막 만남에서 자신에게 한 부탁이었다. "당신은 살아남아야 해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적어야 해요." 캉팡은 그 부탁을 자신의 평생의 가장 깊은 의무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부탁을 즉시 실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1793년 가을의 프랑스는 한 시대의 가장 단호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 있었고, 한 왕정의 측근이 그 왕정에 대한 어떤 종류의 호의적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캉팡은 자신의 평생의 가장 깊은 약속을 잠시 미루어야 했다. 그녀는 먼저 자신의 일상을 다시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그녀는 1794년 가을, 즉 한 시대의 공포 정치가 끝나가던 시기에 한 작은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자신의 학교를 여는 것이었다. 그녀는 파리 외곽의 생제르맹앙레에 한 여자 기숙학교를 열었다. 그 학교는 그녀가 자신의 평생의 가장 자랑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녀는 그곳에서 약 13년 동안 자신의 학교를 운영하면서, 약 100명에서 200명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매년 가르쳤다. 그 학교가 후일 매우 성공한 학교가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갔다.
나폴레옹 시기에 캉팡의 자리는 더 커졌다. 나폴레옹의 두 자매 폴린과 카롤린이 그녀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나폴레옹은 그 결과에 매우 만족했다. 1807년 그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한 새로운 큰 학교를 만들고, 그 책임자로 캉팡을 임명한다는 결정이었다. 그 새 학교가 에쿠앙(Écouen)의 한 학교, 즉 「레지옹 도뇌르 교육 기관(Maison d'éducation de la Légion d'honneur)」이었다. 그 학교는 한 시대의 군인들의 딸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였고, 캉팡은 그곳에서 약 6년 동안 책임자로 있었다.
나폴레옹이 1814년 첫 번째로 퇴위한 뒤, 캉팡의 자리도 끝났다. 그녀는 자신의 평생의 마지막 몇 년을 비교적 조용한 일상 속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평생의 가장 깊은 의무를 실현하기로 결심했다. 1820년 무렵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회고록을 완성한 것은 1822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회고록의 출간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녀는 1822년 3월 16일,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회고록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직후, 1823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그 회고록의 제목이 「마담 캉팡 회고록: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사적 생활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 회고록이 출간된 이후의 약 200년 동안, 그것은 한 시대를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1차 사료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후대의 모든 역사가들이 그것을 읽었고, 후대의 모든 전기 작가들이 그것을 인용했다.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풍경들이 그 회고록 안에서 가장 가까운 시선으로 묘사되어 있고, 한 시대의 가장 사적인 순간들이 그 회고록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 회고록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한 가지였다. 그것은 한 친구가 자신의 가장 사랑한 한 친구에 대한 평생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풍경이었다. 1792년의 한 짧은 마지막 만남에서 시작된 약속이, 약 30년의 침묵과 인내 끝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 책 안에서 한 왕비는 한 시대의 상징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것이 캉팡의 평생의 가장 깊은 성취였다.
한 시대가 남긴 질문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한 여자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거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을 때, 그녀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의 질문이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질문들을 던졌다. 여론이 한 사람을 향해 일제히 돌아섰을 때, 그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적이 되어갈 때, 인간은 무엇으로 버티는가.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가는 순간에도, 한 사람의 품위는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가.
이 20회의 시리즈를 따라온 그 모든 풍경 안에서,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한 가지 답에 다가갔다. 그 답은 한 가지 단순한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답이고, 한 시대의 모든 결정적인 순간들 안에서 조금씩 모양을 드러낸 답이다.
먼저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정치적 자리를 잘 이해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 시대의 흐름을 읽는 정치적 감각을 가지지 못했고,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그 흐름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끝내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의 이런 한계가 1789년부터 1793년까지의 한 가족의 운명을 한 가지 비극적 방향으로 끌고 가는 데 분명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또 한 가지도 분명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사적 자리에서는 한 가지 깊은 인간적 위엄을 끝까지 유지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깊은 사랑,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 자신의 가족에 대한 마지막 헌신. 이 모든 것이 그녀를 한 인간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분명한 자원이다. 그녀가 평생 받은 모든 정치적 비난이 그 자원을 결코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사실, 즉 한 정치적 한계와 한 인간적 위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한 사람의 평생을 단순한 결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이유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시대의 사치스러운 왕비도 아니고, 한 시대의 무고한 희생자도 아니다. 그녀는 한 시대의 모든 모순을 자신의 한 평생 안에 담은 한 인간이었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깊은 유산은, 어떤 인간도 단순한 상징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그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다.
캉팡이 자신의 평생을 바쳐 적은 회고록의 가장 깊은 메시지가 바로 그 진실이다. 그녀가 평생 모신 한 사람에 대한 가장 진실한 묘사를 남기는 일이, 그녀의 마지막 의무였다. 그 의무를 그녀는 끝까지 지켰다. 그 결과 우리는 약 2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한 왕비를 한 인간으로 만날 수 있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시간을 매우 깊은 슬픔과 존경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녀의 회고록은 그 마지막 풍경의 모든 세부 사항을 자신이 직접 본 기록으로 적은 것은 아니다. 1792년 8월 10일 이후 캉팡은 한 왕비를 다시 만나지 못했고, 1793년의 모든 풍경은 그녀가 후일 다른 증언들을 종합해 적은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회고록의 마지막 부분은 그녀 자신의 직접 경험보다는 후일의 종합적인 재구성에 가깝다. 후대의 역사가들, 특히 안토니아 프레이저, 캐롤라인 웨버, 그리고 영국의 사이먼 샤마와 같은 연구자들은 1793년의 마지막 풍경에 대한 더 정밀한 분석을 제공한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시간이 한 정치적 재판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적 위엄의 가장 분명한 증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재판은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분명히 만들기 위한 의식적 과정이었다. 그녀의 처형은 그 정당성의 가장 단호한 시각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정치적 의도 앞에서도, 그녀가 보인 마지막 자세는 한 시대의 어떤 정치적 설계로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한 가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것이 한 인간의 위엄이었다. 다비드의 그 짧은 스케치 안의 한 여자, 그 짐마차에 곧게 앉아 있는 그 단순한 흰 드레스의 한 여자. 그 한 여자가 한 시대의 모든 정치적 의도 너머에서, 한 가지 인간적 사실을 우리에게 남겼다. 한 시대의 가장 격렬한 변화 가운데에서도, 한 사람의 마지막 위엄은 끝내 그 사람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생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깊은 유산이다. 캉팡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사실을 한 가지 분명한 문장으로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평생을 바쳐 적은 그 회고록의 모든 장이, 그 사실에 대한 한 가지 깊은 증언이다. 한 친구가 자신의 가장 사랑한 한 친구에 대한 약속을 끝까지 지킨 그 평생의 풍경 안에서, 한 인간의 위엄은 한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도달했다. 그것이 이 시리즈가 따라간 모든 풍경의 가장 깊은 결말이다.
시리즈를 마치며
20회에 걸쳐 우리는 한 어린 신부의 빈으로부터의 출발에서 시작해, 한 왕비의 마지막 단두대까지의 길을 따라왔다. 그 길 위에는 한 시대의 가장 화려한 풍경과 가장 비극적인 풍경이 함께 있었다. 베르사유 거울의 방의 가장 빛나는 순간, 프티 트리아농의 가장 평온한 오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바스티유 함락의 가장 결정적인 새벽, 그리고 콩시에르주리의 가장 좁은 마지막 방. 이 모든 풍경 안에서 한 사람의 평생이 펼쳐졌다.
이 시리즈가 따라간 가장 가까운 시선은 한 시녀의 시선이었다. 마담 캉팡, 18년 동안 한 왕비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던 한 평민 출신의 여자. 그녀가 평생을 바쳐 적은 회고록이 이 시리즈의 모든 장의 가장 깊은 뼈대가 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가진 한계와 그녀의 시선이 가진 깊이를 우리는 함께 따라왔다. 한 친구가 자신의 가장 사랑한 한 친구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는가의 질문, 그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이 우리가 이 시리즈를 통해 가장 가까이 만난 한 가지였다.
이 시리즈를 끝맺으면서, 한 가지 작은 부탁을 남기고 싶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올릴 때, 그녀를 한 가지 단순한 이미지로 환원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는 사치스러운 왕비도 아니고, 무고한 희생자도 아니다. 그녀는 한 시대의 모든 모순을 자신의 평생 안에 담은 한 인간이었다. 그 인간을 한 인간으로 만나려는 노력 안에, 우리가 한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길이 열려 있다.
이 시리즈를 함께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풍경들이 여러분의 사적 시간 안에 어떤 흔적을 남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흔적이 한 시대를 넘어, 우리의 일상에 한 가지 작은 빛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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