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8. 바렌 도주 사건 (1791)
"그분께서는 마차에 오르시기 전, 잠시 자신의 침실에 서서 한참 동안 그 방을 바라보셨다. 그분께서 무엇을 생각하셨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다만 그분의 표정에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미 결심하신 뒤였고, 그 결심을 누구도 돌릴 수 없었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한 가지 결심이 자라기까지
바렌 도주 시도는 한 번의 결심으로 만들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 1년 반에 걸쳐 천천히 자라난 한 가지 길고 복잡한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뿌리는 1789년 10월 6일 한 왕정이 베르사유를 떠나 튀일리궁으로 옮겨온 그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튀일리궁에 도착한 직후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상의 포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의 무게가 얼마나 깊은지를 그들이 점차 이해해 가는 동안, 한 가지 결정적인 질문이 그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탈출할 것인가.
처음에는 후자의 선택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한 왕정은 자신의 자리를 받아들이고 한 시대의 새로운 흐름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하는 듯했다. 1789년 10월부터 1790년 봄까지의 약 6개월 동안, 한 왕정은 표면적으로 의회의 결정에 대부분 동의했다. 가톨릭 교회 재산의 국유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수용, 새로운 행정 구조의 도입. 이 모든 결정들이 한 왕정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1790년 7월의 「성직자 시민 헌법」이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법은 프랑스의 모든 가톨릭 성직자가 로마 교황이 아니라 프랑스 국가에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루이 16세는 이 법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싶어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이 그에게 거의 없었다. 그는 결국 1790년 8월 그 법을 마지못해 승인했다. 그러나 그 승인은 그의 양심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는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어떤 형태의 공격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791년 부활절 무렵, 한 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루이 16세와 한 왕정 가족이 부활절을 베르사유 인근의 생클루 성에서 보내고자 했을 때, 국민군이 그들의 마차를 막은 것이다. 1791년 4월 18일, 한 왕정의 마차가 튀일리궁 정문을 떠나려 했지만, 약 두 시간 동안 군중과 국민군에 의해 막혀 있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와야 했다. 한 왕이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부활절조차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날 분명히 드러났다.
이 사건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루이 16세는 그날 이후로 도주 결심을 굳혔다. 만약 그가 자신의 영적 일상조차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면, 그는 한 왕정의 어떤 의미 있는 자리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한 계획의 설계자
도주 계획의 가장 중요한 설계자는 페르센 백작이었다. 스웨덴 출신의 한 귀족,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랜 친구이자 가장 충성스러운 외국 동맹. 그는 1791년 봄부터 이 계획의 거의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준비했다.
페르센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한 왕정의 가족이 한밤중에 튀일리궁을 비밀리에 떠난다. 그들은 평민의 옷차림을 한 채, 한 거대한 마차에 올라 프랑스 동부로 향한다. 목적지는 룩셈부르크 국경에 가까운 작은 도시 몽메디였다. 그곳에는 한 왕정에 충성스러운 부이예(Bouillé) 후작 휘하의 약 1만 명의 군대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었다. 부이예 후작은 한 왕정의 가장 충성스러운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그가 몽메디로 한 왕정을 안전하게 인도할 책임을 맡았다.
몽메디에 도착한 뒤의 계획은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가능성은 그곳에서 한 왕정이 한 시대의 흐름에 맞선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부이예 후작의 군대와 함께 한 왕정은 의회에 새로운 협상 조건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한 왕정은 「성직자 시민 헌법」의 폐지, 일부 의회 결정의 무효화, 그리고 한 왕의 더 큰 권한 회복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좀 더 극단적이었다. 만약 의회가 이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한 왕정은 외국 군대, 특히 오스트리아 군대의 직접 개입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레오폴드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있었고,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위해 군사적 개입을 할 의향이 분명히 있었다.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이 한 왕정의 진정한 의도였는지에 대해서는 그 후 200년이 넘게 의견이 분분하다. 루이 16세 자신은 후일 자신이 외국의 군사적 개입을 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의회와의 새로운 협상 자리를 만들고자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오빠와 주고받은 비밀 서신들을 보면, 그녀는 분명히 외국 군대의 개입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의도가 완전히 같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가능성은, 루이 16세는 좀 더 온건한 결말을 원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좀 더 단호한 결말을 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한 가지에는 동의했다. 튀일리궁에 머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페르센은 이 계획을 위한 모든 실무를 직접 준비했다. 그는 거대한 한 마차를 주문 제작했다. 베를리(berline)라 불리는 종류의 호화 마차였다. 이 마차는 한 왕정 가족 6명이 함께 탈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긴 여정에 필요한 모든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페르센은 또한 도주 경로를 직접 답사했고, 도중에 기다리고 있을 군 호위대의 배치도 부이예 후작과 함께 조율했다.
이 모든 준비가 약 두 달에 걸쳐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페르센은 거의 매일 튀일리궁을 방문해 마리 앙투아네트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계획의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한 왕정의 다른 인물들 가운데에는 도주 계획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캉팡 자신도 회고록에서 자신이 이 계획을 정확히 언제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은 어조로 묘사한다. 그녀는 한 왕비의 일상에서 무엇인가 큰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그것의 정확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6월 20일 밤, 튀일리궁의 마지막 풍경
1791년 6월 20일은 월요일이었다. 한 왕정 가족은 그날 평소와 같은 일과를 보냈다. 아침 식사, 오전의 자녀 교육, 점심 식사, 오후의 산책, 저녁 식사. 그 어떤 일과도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외부에 알리지 않도록 평소처럼 진행되었다.
저녁 식사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사적 살롱에서 평소처럼 자수를 놓았다. 루이 16세는 자신의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자녀들은 마담 투르젤의 보호 아래 잠자리에 들었다. 자녀들에게는 그날 밤 곧 일어날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너무 어린 그들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밤 10시 30분 무렵, 한 왕정의 모든 가족이 침실로 향한 듯 보이는 시간이었다. 튀일리궁의 일상에서 그 시각 이후의 일은 일반적으로 잠으로 채워졌다. 시종들도 자신들의 거처로 물러갔다. 한 왕정의 일과는 그날 밤 표면적으로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 정상의 표면 아래에서 한 가지 결정적인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밤 11시경, 자녀들이 다시 깨워졌다. 마담 투르젤은 어린 루이 샤를을 안고 자신의 거처에서 빠져나왔다. 어린 왕세자는 그날 밤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 짧게 한 질문을 했다. "왜 옷을 입어야 해요?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마담 투르젤은 짧게 답했다. "우리는 짧은 여행을 가는 거예요." 어린 왕세자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다시 잠이 든 채로 옮겨졌다.
마리 테레즈는 그날 밤 12세였다. 그녀는 좀 더 분명한 의식으로 그 밤을 보냈다. 그녀가 후일 쓴 회상록에 따르면, 그녀는 한밤중에 깨워졌을 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그녀의 침대 가까이 와서 짧게 한 마디 했다. "용감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해야 한다." 마리 테레즈는 침착하게 옷을 입었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거처를 빠져나왔다.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은 그날 밤 평민 여자의 옷차림으로 변장했다. 회색의 단순한 드레스, 작은 망토, 그리고 시녀의 모자. 그녀가 이런 옷차림을 한 것은 그녀의 평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가방 하나만이 들려 있었다. 그 안에 가장 필요한 몇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루이 16세도 평민 남자의 옷차림이었다. 회색의 코트, 작은 가발이 없는 모자. 그는 자신의 평소 차림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그 옷차림으로 자신의 침실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는 한 마디 짧게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 정말로 나인가." 그가 평생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종류의 옷이었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시기 자신은 그 자리에 없었다고 인정한다. 그녀는 도주 계획의 가장 사적인 부분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그날 밤 튀일리궁에 머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후일 다른 시녀들의 증언을 종합해 짧게 묘사한 그날 밤의 풍경은 매우 인상적이다. 한 왕비가 자신의 침실에서 한참 동안 그 방을 바라본 그 순간이 회고록 안에 짧게 남아 있다. 그녀가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캉팡의 묘사는 위에 인용한 그 문장이다.

한밤의 마차
자정 무렵, 한 왕정 가족은 차례로 튀일리궁의 한 작은 출입구를 통해 빠져나왔다. 그 출입구는 평소 거의 사용되지 않는 종류였고, 그날 밤 그 출입구의 경비병은 매우 가벼웠다. 페르센이 자신의 작은 마차로 그들을 한 명씩 다른 장소로 옮겼다. 그 다른 장소는 파리 외곽의 한 약속된 자리였다. 그곳에 페르센이 미리 준비해 둔 거대한 베를린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2시경, 한 왕정 가족 전체가 그 거대한 마차에 올랐다. 그 마차에는 다음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두 자녀 마리 테레즈와 루이 샤를,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 가정교사 마담 투르젤. 모두 합쳐 여섯 명이었다. 페르센 자신은 그 마차의 마부석에 올라, 새벽까지 마차를 직접 몰았다.
마차의 짐 안에는 한 왕정의 사적인 물건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보석 일부, 한 왕정의 비밀 서신 일부, 그리고 약간의 현금. 또한 그 마차는 매우 호화로운 마차였다. 그것이 평민의 마차로 보이기에는 너무도 분명히 한 왕정의 물건이었다. 이 사실은 후일 도주 실패의 한 가지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새벽 4시경, 페르센은 파리 동쪽의 본디(Bondy)에서 마차를 멈췄다. 그곳에서 그는 마부직을 한 왕정의 다른 측근에게 넘겼다. 그가 직접 한 왕정을 몽메디까지 호위하지 않은 것은 한 왕정 자신의 결정이었다. 루이 16세는 외국인이 한 왕의 도주를 직접 주도했다는 인상을 후일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따라서 페르센은 그날 새벽 본디에서 한 왕정과 작별했다. 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차 창문을 통해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넨 그 순간이, 두 사람이 평생 마주한 마지막 자유로운 순간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6월 21일, 동쪽으로 가는 하루
6월 21일 아침, 마차는 동쪽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첫 번째 큰 도시는 모(Meaux)였고, 그 다음이 샬롱쉬르마른(Châlons-sur-Marne)이었다. 마차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마차가 너무 무거웠다. 거대한 베를린 마차, 여섯 명의 승객, 그리고 적지 않은 짐. 이 모든 무게 때문에 마차의 속도가 페르센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느렸다. 본래 계획에 따르면, 한 왕정은 6월 21일 저녁까지 몽메디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 속도로 보면, 그날 저녁까지 도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 지연은 한 가지 결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부이예 후작이 마차를 호위하기 위해 준비한 군 호위대들이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지만, 마차가 도착하지 않았다. 군 호위대들은 한 시간씩 기다리다가 마침내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한 작은 마을에서 무장한 군대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은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일부 호위대들은 결국 자신들의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 결과 마차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약속된 호위대가 없었다.
마차의 또 한 가지 문제는 그 자체의 외관이었다. 본래 평민의 마차로 위장할 계획이었지만, 그 거대한 베를린 마차는 누가 보아도 한 귀족의 마차였다. 도중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마차를 호기심에 가득 차서 바라보았다. 일부 사람들은 그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 마차는 생트므누(Sainte-Menehould)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마차의 말이 교체되어야 했다. 말 교체 과정에서 마차가 약 한 시간 정도 시내에 머물러야 했다. 이 한 시간이 한 왕정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시간이 된다.
생트므누의 한 우편 마구간 책임자가 마차 안의 한 인물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장 밥티스트 드루에(Jean-Baptiste Drouet)였다. 그는 우편 마구간 책임자였고, 동시에 자신의 마을에서 비교적 적극적인 혁명 지지자였다. 그는 한 왕정의 모든 가족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한 왕정의 얼굴을 어떻게 그토록 잘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 설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베르사유에서 잠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그는 한 왕정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이나 인쇄물을 통해 그들의 얼굴을 익혔다고 한다. 어떤 경로였든, 그는 그날 마차 안의 한 인물이 루이 16세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드루에는 즉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한 가지 결정적인 행동을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타고, 마차가 떠난 직후 다른 길을 통해 마차를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분명했다. 마차가 다음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그곳의 관리들에게 알려, 마차를 멈추도록 하는 것이었다.

바렌의 한밤
드루에는 약 한 시간 동안의 격렬한 말달리기 끝에 다음 도시에 도착했다. 그 도시의 이름이 바렌이었다. 정확히는 바렌앙아르곤(Varennes-en-Argonne). 그것은 약 1,600명의 주민이 사는 매우 작은 도시였다.
드루에가 바렌에 도착한 것은 1791년 6월 21일 밤 11시 무렵이었다. 그는 즉시 바렌의 시장 장 밥티스트 소스(Jean-Baptiste Sauce)를 찾아갔다. 소스는 자신의 가게 한 잡화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바렌의 시장이기도 했다. 드루에는 그에게 짧게 보고했다. 한 왕정 가족이 곧 바렌에 도착할 마차를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마차를 멈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스는 처음에는 드루에의 말을 의심했다. 한 왕정 가족이 자신의 작은 도시에 한밤중에 도착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드루에의 단호한 태도와 그가 본 마차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그를 점차 설득해 갔다. 소스는 결국 바렌의 국민군 일부를 동원해 도시의 출입구에 대기시키기로 결정했다.
자정 무렵, 마차가 바렌에 도착했다. 마차의 마부는 도시의 한 좁은 길에서 잠시 멈춰야 했다. 그곳에서 국민군이 마차를 둘러쌌다. 그들은 마차 안의 승객들에게 짧게 신원을 묻기 시작했다.
이 순간 한 왕정 가족이 가지고 있던 위조 여권이 한 가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여권에 따르면, 그들은 러시아의 코르프 남작 부인 일행이었고, 한 가정교사와 그녀의 자녀들이라는 신분이었다. 만약 이 여권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면, 마차는 바렌을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스는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차 안의 승객들을 자신의 잡화점으로 일시 안내했다. 더 자세한 확인을 위해서였다. 한 왕정 가족이 거부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그들은 결국 마차에서 내려, 소스의 작은 잡화점 위층의 작은 거실로 안내되었다.
한 작은 잡화점에서의 인식
소스의 잡화점 위층 거실에서 한 시간 가까이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한 왕정 가족은 여전히 자신들이 러시아 남작 부인 일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옷차림, 그들의 태도, 그들의 말투. 모든 것이 그들이 평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한 사람이 도착하면서 만들어졌다. 그의 이름은 자크 데테(Jacques Destez)였다. 그는 바렌의 한 시민이었고, 한때 베르사유의 한 행사에서 루이 16세를 직접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잡화점 거실에 들어와 한 왕정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짧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폐하."
이 한 단어가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루이 16세는 부인하려 했지만, 그 부인의 어조 자체가 이미 답이었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직접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프랑스의 왕이라고 말했고, 자신의 가족이 함께 있다고 인정했다. 그 순간 작은 거실의 분위기가 한꺼번에 바뀌었다. 한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한 평범한 잡화점의 위층 거실에 서 있다는 사실 앞에서,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한순간 압도되었다.
루이 16세는 그 자리에서 한 가지 짧은 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지 한 시대의 가장 위험한 분위기로부터 자신의 가족을 잠시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바렌의 시민들에게 자신이 몽메디까지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소스는 한참 동안 망설였다. 그는 한 왕에 대한 깊은 본능적 존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한 왕정 가족이 자신의 잡화점에 머문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시대의 새로운 권위에 의해 임명된 시장이었고, 그 권위에 충성해야 했다.
이 시간 동안 바렌 외부에서는 한 가지 새로운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드루에가 짧은 시간 동안 인근 도시들에 한 왕정의 도주 사실을 알린 것이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바렌에는 약 1만 명 가까운 시민군이 모여 있었다. 한 왕정의 도주를 막기 위해 모인 거대한 무리였다. 만약 부이예 후작의 군대가 그 시각에 바렌에 도착했다면, 한 왕정은 여전히 자신의 도주를 완성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이예 후작의 군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일부 호위대는 너무 늦게 출발했고, 일부는 다른 길로 가다가 길을 잃었다.
새벽 2시 무렵, 두 사람의 의회 위원이 파리에서 바렌에 도착했다. 그들의 이름은 페티옹(Pétion)과 라투르모부르(La Tour-Maubourg)였다. 그들은 의회의 정식 권한으로 한 왕정 가족을 파리로 즉시 송환하라는 명령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명령 앞에서 루이 16세의 모든 변명은 무력해졌다. 그는 결국 자신의 도주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한 왕정 가족은 다시 한 거대한 마차에 올랐다. 이번에는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향하는 마차였다. 그들은 파리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길의 풍경
파리로 돌아가는 길은 동쪽으로 가던 길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그 길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 길의 모든 마을과 도시에서 시민들이 한 왕정의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시선은 두 가지 종류였다. 한 종류는 깊은 침묵이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시민들이 거의 한 마디 말도 없이 마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침묵 안에는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인식이 담겨 있었다. 또 한 종류는 격렬한 적대였다. 일부 마을에서는 시민들이 마차를 향해 짧은 야유를 보냈고, 일부는 마차의 창문을 향해 작은 돌을 던지기도 했다. 가장 격렬한 풍경은 마차 옆에서 한 사람이 살해되는 장면이었다. 한 왕정의 측근 한 사람이 마차 가까이에서 시민들을 향해 부적절한 발언을 했고, 그 결과 그는 즉석에서 시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마차 안의 풍경도 무거웠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도주 동안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루이 16세도 마찬가지였다. 두 자녀는 어머니의 무릎에 안긴 채 잠들거나 깨어났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마담 엘리자베트는 짧은 기도를 자주 올렸다. 그 모든 풍경 안에서 한 가족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분명했다.
마차가 파리에 가까워질 무렵, 한 가지 결정적인 결정이 의회에 의해 내려졌다. 한 왕정 가족이 파리에 도착할 때 시민들이 그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이었다. 의회는 한 가지 분명한 지시를 내렸다. 모든 시민은 침묵으로 한 왕정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수도, 야유도, 어떤 종류의 반응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지시였다. 모자를 쓴 채로 한 왕을 바라보지 말라는 지시도 함께 있었다. 그것은 한 왕에 대한 가장 분명한 모욕의 표현이었다. 한 왕정이 자신의 백성에게서 더 이상 어떤 존경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이었다.
1791년 6월 25일 저녁, 마차는 마침내 튀일리궁에 도착했다. 마차가 정문 앞에 멈췄을 때, 그 주위에 모인 시민들은 의회의 지시 그대로 깊은 침묵 속에 한 왕정을 바라보았다. 한 시민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 한 시민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의 무게는 어떤 야유보다도 더 깊었다.
한 왕정 가족은 마차에서 내려,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거처는 더 이상 같은 거처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튀일리궁의 모든 출입구에는 새로운 경비가 배치되었고, 한 왕정의 모든 움직임은 더 엄격한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이 다시 사적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은 한 가지도 남지 않았다.
도주가 남긴 결정적 흔적
바렌 도주의 가장 깊은 결과는 한 시대의 정치적 풍경에 남긴 결정적 흔적이었다. 그것은 한 왕정과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 사이의 신뢰가 영원히 무너졌다는 사실이었다.
1789년 7월 이후 약 2년 동안, 한 왕정과 의회 사이에는 한 가지 표면적인 협력이 유지되어 왔다. 의회는 한 왕정의 권위를 일부 인정했고, 한 왕정은 의회의 결정을 일부 승인했다. 이 협력은 표면적이었지만, 그것이 한 시대의 정치적 안정의 한 가지 기반이었다. 그러나 바렌 도주는 이 협력의 모든 기반을 무너뜨렸다.
한 왕이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비밀리에 도망치려 했다는 사실. 한 왕이 외국 군대의 직접 개입을 검토했다는 사실. 한 왕이 자신이 표면적으로 승인한 법들을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 이 모든 사실이 도주 시도와 함께 분명히 드러났다. 그 결과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은 한 왕정에 대한 어떤 종류의 신뢰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한 왕정 자신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도주가 실패한 직후, 의회는 한 왕정의 거의 모든 정치적 권한을 잠시 정지시켰다. 약 두 달 동안 한 왕정은 사실상의 폐위 상태에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 1791년 9월 새로운 헌법이 완성된 뒤에야, 한 왕정은 다시 표면적인 권한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 권한은 이전의 권한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그것은 한 시대의 흐름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상 형식적인 권한이었다.
한 시대의 풍자도 한 가지 결정적인 변화를 보였다. 도주 시도 이전까지의 풍자는 한 왕비를 주요 표적으로 했고, 한 왕은 비교적 동정의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도주 시도 이후의 풍자는 한 왕정 전체를, 특히 한 왕 자신을 분명한 적으로 보았다. "왕은 자신의 백성을 배신한 자다." 이 한 줄의 결론이 그 후의 모든 풍자의 가장 깊은 배경이 된다. 1792년 8월의 튀일리궁 함락, 1793년 1월의 루이 16세 처형. 이 두 사건의 한 가지 결정적인 정치적 배경이 바로 1791년 6월의 바렌 도주였다.
캉팡과의 마지막 비밀 서신
도주 시도 직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시대의 가장 무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사적 일상은 거의 모든 자유를 잃었고, 그녀의 정치적 자원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한 가지 마지막 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외국과의 비밀 서신이었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시기 자신이 한 왕비와 비밀 서신의 전달에 관여했음을 짧게 인정한다. 그녀는 정확히 어떤 종류의 서신을 누구에게 전달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적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회고록의 한 부분에서 짧게 인용한 한 왕비의 한 마디가 인상적이다. "당신이 가져갈 이 편지가 나의 마지막 희망이에요." 이 한 마디는 도주 실패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캉팡 자신은 1791년 가을 이후 한 왕비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점차 멀어진다. 그녀의 자리는 새로운 시녀들로 대체되었고, 그녀는 자신의 거처로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왕비를 마지막으로 본 시기에 대해서는 회고록에서 분명히 적지 않는다. 그러나 1792년 8월 10일 튀일리궁이 함락되기 전, 두 사람이 서로 마지막 작별을 나눈 어떤 순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캉팡의 회고록은 그 마지막 만남에 대해 한 가지 짧은 묘사를 남긴다. 한 왕비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짧은 한 마디를 했다. "당신은 살아남아야 해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적어야 해요." 이 한 마디가 캉팡이 후일 자신의 회고록을 쓰게 된 가장 깊은 동기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회고록 곳곳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깊은 의무로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바렌 도주 시도를 한 왕정의 마지막 큰 결단으로 묘사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그것은 한 가족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선택한 자연스러운 결정이었고, 그 결정의 실패는 한 시대의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 특히 미슐레, 알베르 마티에즈, 그리고 영국의 사이먼 샤마와 같은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매우 다른 각도에서 본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바렌 도주가 단순한 한 가족의 도주가 아니라 한 시대의 정치적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는 매우 정치적인 시도였다는 사실이다. 한 왕정은 몽메디에서 의회와의 새로운 협상을 시도하려 했지만, 그 협상의 무기는 부이예 후작의 군대였다. 그리고 그 군대의 배후에는 외국 군대의 직접 개입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바렌 도주는 한 왕정이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질서를 사실상 거부한 결정적인 행위였다. 도주 실패 이후 한 시대가 한 왕정을 점차 더 단호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분노의 결과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고 그들은 분석한다. 또한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치적 주도성을 새롭게 평가한다. 캉팡의 회고록과 일부 다른 옛 사료들은 이 도주를 한 왕의 결정으로 묘사하지만, 좀 더 정밀한 분석은 이 도주의 거의 모든 세부 사항을 한 왕비와 페르센이 직접 설계했음을 보여준다. 한 왕비는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결단의 주체였다. 그녀를 단순한 사치스러운 왕비로 보는 시각은, 이 시기의 그녀의 실제 활동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캉팡은 이런 정치적 주도성의 깊이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그녀의 묘사는 한 가족의 사적 풍경에 더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가 회고록에서 한 왕비의 표정과 결심을 자주 짚는 그 묘사들 안에, 이 깊은 정치적 변화에 대한 한 가지 직감이 분명히 들어 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결단으로 끌어안으려 한 시도가, 결국 한 시대의 더 큰 흐름 앞에서 무너졌다는 사실. 그것이 바렌 도주의 가장 깊은 의미다.
다음 회 예고
1792년 8월 10일은 화요일이었다. 그날 아침 일찍부터 튀일리궁 주변에는 거대한 군중이 모이고 있었다. 그 군중의 한가운데에는 약 2만 명의 무장한 시민과 약 5,000명의 외부에서 온 의용군이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한 가지였다. 한 왕정을 폐위시키는 것이었다. 그날 튀일리궁 안에서는 한 왕비가 자신의 자녀들 곁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그날 직접 겪은 풍경, 그리고 캉팡 자신이 직접 겪은 풍경. 다음 회에서는 1792년 8월 10일, 한 왕정이 자신의 마지막 공식 거처를 잃은 그날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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