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6. 1789년 10월, 베르사유를 떠나며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7.

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6. 1789년 10월, 베르사유를 떠나며

"그분께서는 그날 새벽 자신의 침실에서 작은 신발 한 켤레만을 손에 쥐고 도망치셔야 했다. 그 신발은 한 왕비의 신발이라기보다는, 한 어머니의 사적 공간에서 가장 가까이 두던 작은 물건에 가까웠다. 한 시대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가고 있는지를, 나는 그 작은 신발 한 켤레 안에서 분명히 보았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바스티유의 날 새벽 (18세기)

10월의 빵 값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 이후의 몇 달은 표면적으로는 비교적 평온해 보였다. 루이 16세는 파리로 가서 새로운 삼색기 휘장을 자신의 모자에 달았고, 새로 임명된 자크 네케르는 다시 한 왕정의 재정을 맡았다.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는 베르사유에서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만들기 시작했고, 8월 26일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표면 아래에서, 한 시대의 가장 깊은 문제 가운데 하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빵의 문제였다. 1788년 7월의 우박과 그 후의 흉작 때문에, 1789년 여름과 가을의 빵 값은 한 시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수준으로 올라 있었다. 7월의 정치적 변화도, 8월의 인권 선언도, 이 한 가지 일상의 문제를 풀어내지 못했다.

파리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빵에 쓰는 돈은 일상 지출의 약 50퍼센트를 차지했다. 평소에 약 8수(sous)이던 4파운드 빵 한 덩이가 1789년 10월 무렵에는 약 14수에서 16수에 이르렀다. 그 동안 임금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 매일 일해서 벌어 오는 돈으로는, 더 이상 가족 모두의 빵을 살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굶주리는 일이 늘어났고, 빵집 앞에서는 매일 새벽부터 긴 줄이 형성되었다. 그 줄 안에서 작은 다툼과 큰 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이 문제는 한 가지 분명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빵 값이 오르는 동안 베르사유의 왕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한 왕정의 화려함과 그들 자신의 굶주림은 점점 더 단순한 대비로 굳어가고 있었다. 베르사유는 빵으로 가득 차 있고, 파리는 굶주리고 있다. 이 단순한 그림이 한 시대의 분노의 가장 직접적인 원천이 되었다.


한 만찬, 그리고 한 모자 휘장

1789년 10월 1일, 베르사유에서 한 가지 작은 만찬이 열렸다. 그날 베르사유에는 새로운 군대가 도착해 있었다. 한 왕실 근위연대인 플랑드르 연대(Régiment de Flandre)였다. 이 연대는 한 왕정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베르사유로 불러들인 부대였다. 7월 14일 이후 한 왕정은 자신의 안전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잘 알고 있었고, 충성스러운 군대를 가까이 두려 했다.

이 새 부대의 도착을 환영하기 위해, 베르사유의 다른 한 부대인 왕실 근위대(Gardes du corps)가 그들을 위한 만찬을 열었다. 만찬은 베르사유 궁의 오페라 극장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는 약 200명의 장교가 모였고, 그들의 식탁에는 풍성한 음식과 와인이 차려졌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 만찬의 풍경 자체가 한 가지 시각적 도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베르사유의 누구도 충분히 의식하지 못했다.

만찬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한 가지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어린 왕세자 루이 샤를이 만찬장에 잠시 등장한 것이다. 본래 그들은 그 자리에 길게 머물 계획이 없었다. 다만 새 부대의 도착을 환영하는 짧은 인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등장이 만찬장 분위기를 폭발적인 환호로 바꾸었다.

장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왕과 한 왕비를 향해 환호했다. 어떤 장교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고, 어떤 장교는 자신의 모자에서 한 가지 물건을 떼어내 바닥에 내던졌다. 그 물건이 바로 삼색기 휘장이었다. 7월 17일 루이 16세 자신이 파리에서 자신의 모자에 단 그 휘장. 그 휘장이 그날 만찬장 바닥에 던져졌고, 일부 장교는 그것을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새로운 휘장을 모자에 달았다. 그것은 흰색 휘장, 즉 부르봉 가문의 색만으로 된 휘장이었다. 또 일부 장교는 검은색 휘장을 달았는데, 그것은 한 시대의 보수적 전통의 색이었다.

이 풍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곧 분명해진다. 한 왕실 근위대가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상징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7월 14일 이후의 새로운 질서에 충성하지 않으며, 한 왕정의 옛 권위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풍경 안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그리고 어린 왕세자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이 정치적 선언이 한 왕정의 직접 후의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 만찬에 대한 소식은 다음 날부터 파리에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식은 사실에 약간의 과장을 더해 전해졌다. 베르사유의 왕실 근위대가 새 휘장을 짓밟았다는 사실은 그대로 전해졌지만, 그것에 더해 한 왕비가 직접 그 모자에서 휘장을 떼어내 던졌다는 식의 풍자가 만들어졌다. 이 풍자는 사실이 아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만찬에 짧게 등장했을 뿐, 어떤 휘장도 직접 짓밟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날 이후의 사건들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10월 5일 새벽, 한 시장의 풍경

10월 5일 새벽, 파리 중앙시장(Les Halles)에서 한 가지 작은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장의 한 여자가 빵집 앞에 빵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에게 외쳤다. 베르사유로 가서 직접 빵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외침이 어떻게 그토록 빨리 한 시대의 운동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다. 한 가지는 자연스러운 분노의 표현이라는 설명이다. 빵 값의 문제와 베르사유의 만찬에 대한 풍자가 결합되어, 한 시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가 표면으로 분출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설명은 정치적 조직화에 무게를 둔다. 한 시대의 일부 정치적 인물들, 특히 오를레앙 공작과 그 측근들이 이 행진을 조직했거나, 적어도 그것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추정이다. 이 두 가지 설명 가운데 어느 한쪽만이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두 가지가 동시에 작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새벽 약 6,000명의 여자들이 파리 시청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시청에서 무기를 요구했고, 일부 무기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베르사유를 향해 출발했다.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의 거리는 약 20킬로미터.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길은 진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군중은 멈추지 않았다.

행진하는 동안 그들에게는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했다. 노동자, 장인, 일부 부르주아 남자들도 함께 갔다. 일부 국민군 병사도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합류했다. 행진의 규모는 점점 더 커져, 베르사유에 도착할 무렵에는 약 1만 명에서 2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날 오후 늦게 라파예트 장군이 이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는 국민군의 사령관이었고,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군사적 권위를 쥔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행진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행진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약 1만 5,000명의 국민군을 이끌고 자신도 베르사유로 출발한 것이다. 그가 이 결정을 내린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행진을 통제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후일 설명했지만, 그의 도착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는 그 자신도 분명히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10월 5일 저녁, 베르사유의 분위기

군중이 베르사유에 도착하기 시작한 것은 10월 5일 저녁 무렵이었다. 그들은 비에 젖은 채로, 진흙에 덮인 채로 한 왕정의 가장 화려한 거처 앞에 도착했다. 이 풍경 자체가 한 가지 결정적인 시각적 대조였다. 베르사유 궁의 거대한 정원, 그 안의 분수와 조각상들, 그리고 그 앞에 쓰러져 있는 수천 명의 굶주린 여자들.

루이 16세는 그날 사냥을 나가 있었다. 그는 행진 소식을 사냥 도중에 들었고, 즉시 베르사유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베르사유에 도착할 무렵, 군중은 이미 궁의 정문 앞에 모여 있었다.

루이 16세는 즉시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가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머무를 것인가. 그의 일부 신하들, 특히 보수적인 인물들은 즉시 떠나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들의 계산은 분명했다. 한 왕정이 베르사유에 머무는 한, 그것은 곧 군중의 통제에 들어갈 것이다. 떠나야 한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 특히 자유주의적 입장의 인물들은 머물러야 한다고 권유했다. 한 왕이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도망친다는 사실은 한 왕정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루이 16세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평소처럼 망설였다. 그가 망설이는 동안,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만약 그가 그날 저녁 일찍 도망쳤더라면, 1789년 10월의 풍경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망설였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더 이상 도망갈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져 있었다. 군중이 베르사유의 모든 출구를 사실상 봉쇄한 상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날 저녁은 어떠했는가. 캉팡의 회고록은 이 부분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다. 그녀는 행진 소식을 들은 직후 자녀들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녀들이 안전한지 확인한 뒤, 자신의 사적 살롱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시녀들과 함께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캉팡은 그날 저녁 마리 앙투아네트의 한 마디를 회고록에 짧게 인용한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는 떠나지 않을 거예요. 왕이 머무신다면, 나도 머물러요." 이 한 마디 안에, 그녀가 평생 보여준 한 가지 분명한 태도가 담겨 있다. 그녀는 위기 앞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든, 그날 저녁 그녀는 한 왕의 아내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로 결심한 한 여자였다.

라파예트가 그의 군대와 함께 베르사유에 도착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그는 루이 16세에게 짧은 면담을 요청했다. 그 면담에서 그는 한 왕정의 안전을 자신의 군대가 보장할 수 있다고 약속했다. 그는 군중이 평화롭게 해산할 것이며, 한 왕정에 어떤 위해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루이 16세는 그의 약속을 믿고, 그날 밤늦게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라파예트 자신도 새벽 두 시 무렵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베르사유의 출입구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고, 새벽이 오기까지는 큰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판단은 그날 밤 그가 내린 가장 큰 실수 가운데 하나가 된다.


10월 6일 새벽, 침입

10월 6일 새벽 5시경, 군중의 한 무리가 베르사유 궁의 한 작은 출입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라파예트의 부하들이 충분히 경비하고 있지 않은 출구였다. 그 출구로 한 작은 무리가 들어갔고, 곧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들어왔다.

이 무리가 어떻게 그토록 정확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추정은, 그들 가운데 베르사유의 내부 구조를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또 다른 추정은, 군중이 단순히 가장 화려한 복도를 따라간 결과가 자연스럽게 왕비의 침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군중이 왕비의 거처에 접근하는 동안, 두 명의 왕실 근위병이 그들을 막으려 했다. 그들의 이름은 미오미니(Miomini)와 바리쿠르(Varicourt)였다. 두 사람은 군중과 격렬한 몸싸움 끝에 살해되었다. 그들의 머리는 곧 잘려 창에 꽂혔다. 베르사유의 한 복도에 두 명의 충성스러운 근위병의 시신이 남겨졌고, 그들의 머리는 군중과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 살해의 소리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 근처에 있던 한 시녀에게 들렸다. 그녀의 이름은 마담 투르젤(Madame de Tourzel)이었다. 그녀는 폴리냐크 부인이 망명한 뒤 새로 임명된 자녀들의 가정교사였다. 그녀는 즉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짧은 외침이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다. "왕비님, 일어나세요. 그들이 오고 있어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그 외침을 들은 즉시 깨어났다. 그녀는 평소 잠자리에서 입는 옷차림 그대로, 즉 잠옷 한 벌만 입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잡은 것은 한 가지였다. 자신의 두 신발이었다. 그녀는 그 신발을 손에 쥔 채, 자신의 시녀와 함께 비밀 통로를 통해 도망쳤다.

이 비밀 통로는 베르사유 궁의 여러 비밀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왕비의 침실에서 곧장 왕의 침실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통로를 통해 남편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자신의 침실을 떠난 지 약 5분 뒤, 군중이 그 침실에 도착했다. 그들은 비어 있는 침대를 발견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 침대를 검과 도구로 짓밟았다. 그 자리에 한 왕비가 있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서는 그 후 200년이 넘게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그 5분의 차이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날 목숨을 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발코니에서의 두 장면

루이 16세의 침실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시녀, 그리고 곧 도착한 자녀들이 함께 모였다. 한 가족이 한 방에 모인 그 순간은 그 자체로 한 가지 풍경이었다. 한 왕정의 모든 사적인 가족이 한 방에 모인 가운데, 그 방 밖에서는 군중이 점점 더 큰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군중의 함성에는 한 가지 분명한 요구가 있었다. 그들은 한 왕이 발코니에 나와 자신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한 가지 결정적인 요구를 했다. 한 왕정이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라파예트와 짧게 의논한 뒤, 발코니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발코니에 모습을 보였을 때, 군중은 한순간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 뒤에 환호가 이어졌다. 한 왕이 자신들의 요구에 응했다는 사실에 대한 환호였다. 루이 16세는 짧게 한 마디 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이 파리로 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이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항복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군중의 요구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또 한 사람을 발코니에서 보고 싶어 했다. 그들의 외침은 분명했다. "왕비! 왕비! 발코니로!"

이 외침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족에게 전해졌을 때, 그 방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군중이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박수로 그녀를 맞이할 수도 있었고, 그녀에게 총을 쏠 수도 있었다. 그날 새벽의 살해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분명히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러나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두 자녀, 즉 마리 테레즈와 어린 루이 샤를의 손을 잡고 발코니로 향했다. 그녀가 자녀들과 함께 발코니에 나타났을 때, 군중 안에서 한 가지 분명한 외침이 들렸다. "아이들은 안 돼! 왕비만 혼자 나와!"

이 외침은 매우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군중이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녀들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녀 혼자만이 자신들 앞에 서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녀들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발코니에 섰다. 그녀가 그 자리에 혼자 선 그 순간은, 그녀가 평생 보여준 가장 용기 있는 순간 가운데 하나로 후일 기록된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며, 군중과 직접 마주했다.

그녀가 발코니에 선 짧은 순간 동안, 군중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있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한 사람이 그녀에게 총을 겨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또 일부 증언에 따르면, 군중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어 그녀에게 짧은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라파예트가 그 자리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것이 한 왕정의 권위에 대한 마지막 시각적 인사였다.

이 짧은 발코니 장면이 끝난 뒤, 한 가지 결정이 분명해졌다. 한 왕정은 베르사유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중이 요구한 것이고, 한 왕이 약속한 것이며, 라파예트가 보장한 것이었다. 그 결정은 그날 오후에 곧 실행에 옮겨졌다.


베르사유를 떠나는 마차

10월 6일 오후 1시 무렵, 한 왕정의 거대한 마차 행렬이 베르사유 궁의 정문에서 출발했다. 그 행렬은 한 시대의 가장 이상한 풍경 가운데 하나였다. 가장 앞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두 자녀가 탄 마차가 있었다. 그 옆에는 마담 엘리자베트(왕의 여동생)와 다른 왕실 가족이 탄 마차들이 따랐다. 그 행렬 주위에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군이 호위했다.

그러나 이 호위는 한 왕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왕정을 사실상 호송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호송의 분위기는 그날 행진해 온 군중의 외침과 노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한 가지 외침을 반복했다. "우리는 빵집 주인, 빵집 주인의 아내,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작은 아이를 데려간다."

이 외침의 의미는 분명했다. 한 왕이 베르사유에서 빵을 독점하고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따라서 한 왕을 파리로 데려가면, 빵의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 믿음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날 그 풍경 안에서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신호였다.

마차 행렬은 베르사유에서 파리까지 약 6시간이 걸렸다. 보통은 약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군중의 행진 속도에 맞춰야 했고, 도중에 여러 차례 멈춰야 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군중 가운데 일부는 그날 새벽 살해된 두 근위병의 머리를 창에 꽂은 채 마차 옆에서 함께 행진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풍경을 직접 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마차 창 너머에서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는지는, 그녀의 평생의 가장 깊은 기억 가운데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저녁 7시 무렵, 마차 행렬은 마침내 파리 시청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짧은 의식이 있었다. 시장 바이가 한 왕을 환영했고, 라파예트가 한 왕정의 새로운 거처에 대한 안내를 했다. 그날 밤 한 왕정은 튀일리궁(Palais des Tuileries)으로 옮겨졌다.


튀일리궁의 첫 밤

튀일리궁은 한 왕정의 옛 거처 가운데 하나였다. 16세기 후반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가 짓기 시작한 이 궁은, 17세기 후반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긴 뒤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따라서 1789년 10월 6일 한 왕정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 궁은 거의 폐가에 가까운 상태였다.

벽지는 빛바랜 상태였고, 가구는 거의 없었으며, 일부 방의 천장에는 비가 새는 흔적이 있었다. 침실의 침구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날 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아들 루이 샤를을 자신의 침대 옆에 두고 잠을 청해야 했다. 어린 왕세자가 자신의 침실을 갖기 위해서는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캉팡의 회고록은 그날 밤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짧지만 깊이 묘사한다. 그녀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새벽에 그녀의 침실에서 들리던 군중의 외침이 그녀의 귓가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녀들의 잠든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고, 가끔씩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그날 밤 캉팡에게 짧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를 결코 다시 베르사유로 보내지 않을 거예요." 이 한 마디는 그녀의 가장 정확한 직감이었다. 그날 베르사유를 떠난 한 왕정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1789년 10월 6일은 한 왕정과 한 시대의 가장 화려한 거처가 영원히 분리된 날이었다.

이 분리의 무게를 그날 한 왕정의 누가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것을 매우 깊이 느꼈다. 그녀가 19세에 처음 베르사유에 도착한 이래 평생을 보낸 거처가, 그날 그녀에게서 떠나갔다. 그녀가 첫 자녀를 낳은 방,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살롱,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편지들을 읽던 그 작은 책상. 이 모든 사적 공간이 그날 밤 그녀의 손에서 영원히 떠나갔다.

베르사유 궁 자체는 그 후로도 오래 남아 있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그것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한 왕정이 살아 있던 시간은 1789년 10월 6일 그날 끝났다. 그 후 베르사유는 한 시대의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한 시대의 여러 풍경이 겹친 하루

1789년 10월 5일과 6일의 두 날은 한 가지 결정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정치적 변화가 한 가족의 사적인 공포로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온 풍경이었다.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의 그날, 한 왕정은 한 시대의 변화를 보고서로 접했다. 그것은 멀리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10월 6일 새벽, 한 왕비의 침실 앞에서 한 근위병이 살해되었다. 그 살해의 소리는 한 왕비의 잠을 깨웠고,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자신의 신발 한 켤레만을 손에 쥔 채 도망쳐야 했다. 한 시대의 변화는 더 이상 멀리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왕정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직접 침범한 것이었다.

이 침범 이후의 한 왕정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거처를 통제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동선을 결정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그날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생을 사실상의 포로 상태에서 보내게 된다. 1791년 6월의 바렌 도주 시도, 1792년 8월의 튀일리궁 함락, 1793년 10월의 처형. 이 모든 사건들의 한 가지 직접적인 출발점이 1789년 10월 6일 새벽이었다.

캉팡 자신은 이 시기 이후 베르사유와 분리되어 갔다. 그녀는 한동안 한 왕정과 함께 튀일리궁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점차 그녀의 자리도 줄어들었다. 1792년 8월 이후 그녀는 도피해 자신의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한 왕정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점차 멀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회고록에서 1789년 10월 6일 새벽의 풍경은 가장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본 가장 두려운 새벽이었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1789년 10월 5일과 6일의 사건을 매우 자세히, 그리고 깊은 정서적 무게로 기록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이 두 날은 한 왕정의 가장 가까운 사적 공간이 군중에 의해 침범당한 순간이었고, 그것은 한 시대의 모든 정상적인 질서가 무너진 풍경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 특히 조르주 르페브르, 알베르 소불, 그리고 영국의 사이먼 샤마와 같은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좀 더 구조적인 각도에서 본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베르사유 행진이 단순한 빵 폭동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치적 권력 이동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는 사실이다. 행진의 군중은 빵을 요구했지만, 그들의 진짜 정치적 요구는 한 왕정이 자신들의 통제 아래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왕정이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한 왕정이 더 이상 자신의 거처를 자기 의지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의 가장 분명한 신호였다. 그 후의 모든 정치적 사건들은 이 결정적인 권력 이동의 결과로 흘러간다. 또한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건에서 여성의 역할에 주목한다. 1789년 10월 5일과 6일의 행진은 한 시대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 가운데 하나로서 거의 전적으로 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것은 18세기 후반 유럽의 다른 어떤 정치적 사건과도 다른 풍경이었다. 빵의 문제가 가정의 일상에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문제였고, 그 문제를 직접 짊어진 사람들이 바로 여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이 행진의 한 가지 결정적인 배경이었다. 캉팡은 이런 구조적, 사회사적 분석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회고록에서 그날 새벽 한 왕비가 자신의 신발 한 켤레만을 손에 쥔 채 도망쳐야 했다는 그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은, 한 시대의 가장 깊은 변화가 가장 사적인 풍경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증언 가운데 하나다. 한 왕비의 한 켤레 신발이, 한 시대의 모든 변화를 압축한 작은 상징이 된다.


다음 회 예고

1789년 10월 6일 한 왕정이 도착한 튀일리궁은, 그 후 거의 3년 동안 한 왕정의 마지막 공식 거처가 된다. 그곳에서의 일상은 베르사유의 일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 왕정은 더 이상 자신의 동선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었고, 자신의 측근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으며, 자신의 미래를 자유롭게 설계할 수 없었다. 튀일리궁의 모든 문에는 국민군이 배치되어 있었고, 한 왕정의 모든 움직임이 의회의 감시 아래에 놓여 있었다. 한 왕정은 사실상의 포로였다. 그러나 그 포로 상태 속에서도 한 가족의 일상은 이어졌다. 자녀들은 자라고 있었고, 한 왕비는 자신의 일과를 어떻게든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한 왕은 자신의 자물쇠 작업실에서 여전히 도구를 만지고 있었다. 다음 회에서는 튀일리궁의 그 좁아진 일상, 한 가족이 사실상의 포로로서 보낸 시간을 따라가 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