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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5. 1789년 7월: 바스티유 함락의 그날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6.

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5. 1789년 7월: 바스티유 함락의 그날

"왕께서는 그날 밤늦게 사냥에서 돌아오셨다. 그분께 한 신하가 파리에서 일어난 일을 짧게 보고했을 때, 왕께서는 잠시 침묵하신 뒤 한 마디 물으셨다. '봉기인가?' 그 신하의 답은 단호했다. '폐하, 봉기가 아닙니다. 혁명입니다.' 그 짧은 두 마디 사이에, 한 시대 전체가 갈라지고 있었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1789년 바스티유 감옥

7월의 첫 번째 잘못

1789년 7월의 베르사유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크 네케르의 해임이었다.

지난 회에서 본 것처럼, 네케르는 1788년 8월 임명된 이후 일반 시민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재무총감이었다. 그는 삼부회 소집을 권유한 인물이었고, 그가 한 왕정의 재정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베르사유의 분위기는 달랐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시동생 아르투아 백작, 그리고 일부 보수적인 신하들은 네케르를 점점 더 깊이 불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네케르는 한 왕정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인물이었다. 그가 제3신분의 주장에 너무도 우호적이며, 한 시대의 흐름을 한 왕정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1789년 7월 11일, 루이 16세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는 네케르를 해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네케르에게 즉시 프랑스를 떠나 다시 자신의 출신지 스위스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은 매우 비밀스럽게 전달되었다. 일반 시민들이 이 해임 소식을 알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 가지 않았다. 7월 12일 아침, 파리에 그 소식이 전해졌다. 그 순간부터 한 시대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7월 12일, 팔레 루아얄의 외침

네케르 해임 소식이 파리에 도달한 직후, 한 젊은 변호사가 팔레 루아얄(Palais-Royal)의 정원에서 한 카페의 탁자 위에 올라섰다. 그의 이름은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이었다. 그는 곧 한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만, 그날 그는 그저 무명의 한 젊은이였다.

데물랭은 손에 권총을 들고 군중에게 외쳤다. 그의 말은 짧지만 강렬했다. 네케르가 해임되었고, 이것은 한 왕정이 곧 시민들을 학살할 신호라는 것이었다. 베르사유에 모인 외국인 용병들이 곧 파리로 진격해 자유를 외친 모든 시민들을 도살할 것이라고 그는 외쳤다. 따라서 시민들도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데물랭이 외친 외국인 용병들의 위험은 완전히 허구는 아니었다. 1789년 7월 초, 루이 16세는 베르사유와 파리 사이에 약 2만 명의 군대를 배치한 상태였다. 그 군대의 상당 부분이 스위스나 독일에서 온 외국인 용병들이었다. 왕은 이 군대를 어떤 식으로든 사용할 의도가 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할 것인지는 그 자신도 분명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시민들의 시선에서, 그 군대의 존재는 분명한 위협으로 보였다.

데물랭의 외침을 들은 군중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날 오후부터 파리의 거리에는 무기를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기점을 약탈했고, 군 창고를 습격했으며,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도구를 무기로 삼았다. 7월 13일 하루 동안 파리에는 약 4만 명의 시민군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이 시민군은 곧 '국민군(Garde nationale)'이라 불리게 된다.

7월 13일 밤, 파리 시청에서는 임시 위원회가 구성되어 도시의 통제를 사실상 떠맡았다. 한 왕정의 행정 기구는 그날 밤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한 시대의 가장 큰 도시가 24시간 만에 다른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


바스티유 감옥 동쪽 정면, 1790년

7월 14일 아침, 한 가지 결정

7월 14일 아침, 파리의 시민군에는 한 가지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무기와 화약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손에 든 도구들은 대부분 효과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진짜 무기가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그 무기를 사용할 화약이 필요했다.

화약이 어디에 있는가. 그날 아침 파리의 시민들 사이에서 그 답은 분명했다. 바스티유에 있다는 것이었다.

바스티유는 파리 동쪽 끝의 거대한 요새였다. 1370년대에 건설된 이 요새는 8개의 둥근 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두께가 약 3미터에 달하는 돌벽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본래 영국과의 백년전쟁 동안 파리의 방어를 위해 지어진 군사 시설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그것은 점차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 왕의 직접 명령으로 사람을 가둘 수 있는 감옥이 된 것이었다.

이 감옥의 가장 특이한 점은 그 수감 방식에 있었다. 일반 감옥과 달리, 바스티유에는 정상적인 재판 절차 없이 사람을 가둘 수 있었다. 한 왕이 발급하는 '레트르 드 카셰(lettre de cachet)'라는 비밀 영장이 있으면, 어떤 사람이든 그 안에 갇힐 수 있었다. 그 영장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으로 기소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바스티유는 18세기 후반에 한 왕정의 자의적 권력을 상징하는 가장 분명한 건물이 되어 있었다.

볼테르, 디드로, 사드 후작 같은 인물들이 한때 그 안에 갇혔다. 그 사실들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바스티유는 단순한 군사 시설이나 단순한 감옥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치적 상징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정확히 들어 있는지는 사람들이 잘 몰랐다. 그러나 그 무엇이든 그것을 풀어주고, 그 자체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한 가지 정서적 압력이 1789년 7월 14일 아침의 파리에 분명히 있었다.


정오의 협상, 오후의 전투

7월 14일 정오 무렵, 약 600명에서 1,000명 사이의 시민군이 바스티유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첫 번째 요구는 평화로운 것이었다. 그들은 단지 화약을 달라고 했다. 바스티유 안에는 약 250통의 화약이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가 알려져 있었고, 그것이 시민군의 가장 큰 목표였다.

바스티유의 사령관은 베르나르 르네 조르당 드 로네(Bernard René Jourdan de Launay) 후작이었다. 그는 약 80명의 퇴역 군인과 약 30명의 스위스 용병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병력은 매우 작았지만, 바스티유의 두꺼운 벽과 그 위의 대포들은 강력한 방어 자원이었다.

로네는 협상에 응했다. 그는 시민군의 대표 두 사람을 바스티유 안으로 초대해, 함께 점심을 먹으며 협상을 이어갔다. 그의 협상 자세는 비교적 부드러웠다. 그는 화약을 일부 넘겨줄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협상은 너무도 오래 끌었다. 정오에 시작된 회담이 오후 늦게까지 이어지면서, 바스티유 앞의 군중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오후 1시 30분 무렵, 군중 가운데 한 그룹이 바스티유의 첫 번째 도개교를 점령했다. 그들은 그 도개교의 사슬을 끊었고, 첫 번째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의도된 공격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시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정적이었다. 도개교가 떨어졌을 때 군중이 비명을 질렀고, 바스티유의 수비병들은 그것을 공격의 시작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발포 명령을 받고 군중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이 첫 발포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때까지 비교적 평화로운 시위에 가까웠던 풍경이, 그 순간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되었다. 시민군은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다고 믿었다. 도개교를 일부러 내려놓고 군중을 안으로 들인 뒤 사격한 것이라고 그들은 해석했다. 이 해석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이 후일 밝혀지지만, 그날의 순간에는 그것이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전투는 오후 내내 이어졌다. 시민군 쪽에서는 약 100명이 사망했고, 73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바스티유 쪽의 사상자는 단 한 명이었다. 두꺼운 벽 뒤의 수비병들에게 바스티유 앞의 군중을 향한 사격은 거의 일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방적 우위는 한 가지 결정적인 변수 앞에서 무너졌다. 오후 3시 무렵, 시민군에 합류한 한 그룹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바스티유 근처의 한 군 막사에서 이탈한 정규군 병사들이었고, 그들과 함께 다섯 대의 대포가 시민군 쪽에 합류했다.

대포들이 바스티유의 정문을 겨누기 시작했을 때, 로네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가 만약 끝까지 저항한다면, 바스티유는 결국 함락될 것이고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이 군중에게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가 만약 항복한다면, 적어도 자신과 부하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오후 5시 30분 무렵, 그는 한 통의 짧은 항복 편지를 도개교를 통해 시민군에게 전달했다. 그 편지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바스티유 안의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시민군의 대표 한 사람이 그 조건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 수락이 군중 전체에게 전달되지는 않았다. 도개교가 내려졌고, 군중은 바스티유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안에 있던 7명

군중이 바스티유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한 가지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 갇혀 있던 수감자가 단 7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7명의 면면도 한 시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첫 번째 그룹은 위조 행위로 갇힌 일반 범죄자 네 사람이었다. 두 번째 그룹은 정신 이상자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후일 즉시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마지막 한 사람은 가족의 요청으로 갇힌 한 귀족 청년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너무 방탕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해, 한 왕의 비밀 영장으로 그를 바스티유에 가두는 일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 7명 가운데에는 시민군이 기대한 정치적 수감자가 없었다. 볼테르도 사드 후작도 그날 그곳에 없었다. 한 시대의 가장 큰 정치적 상징으로 여겨졌던 한 요새가, 실제로는 거의 비어 있는 건물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날의 정치적 의미를 작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한 가지 결정적인 점을 부각시켰다. 한 왕정의 가장 강력한 자의적 권력의 상징이 사실은 그토록 큰 자원을 동원할 만한 실제 기능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상징이었고, 그 상징이 그날 무너졌다.

군중은 7명의 수감자를 자유롭게 풀어주었고, 어떤 사람들의 어깨 위에 올려 거리를 행진했다. 그 풍경은 곧 한 시대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날의 다른 한 가지 풍경은 훨씬 더 어두웠다. 사령관 로네는 자신과 부하들의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군중은 그를 거리로 끌고 나갔다. 그가 파리 시청으로 향하는 도중에, 그는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훼손되었고,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파리 거리를 돌았다. 같은 운명을 그의 부관 한 사람과 파리의 한 행정관도 겪었다. 그날 시민군은 분명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승리는 동시에 한 가지 어두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 시대가 단순한 자유의 시대가 아니라, 동시에 폭력의 시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베르사유에서는 무엇이 보였는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베르사유에서는 무엇이 보였는가. 캉팡의 회고록은 이 점을 비교적 자세히 다룬다.

7월 14일 아침, 베르사유의 일상은 평소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그날 사냥을 나갔다. 사냥은 그의 거의 매일의 일과였고, 7월 14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그날 사냥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일기에 짧게 적었다. 그의 일기는 18세기 후반 프랑스 왕의 사적 기록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자료다. 그날의 일기에는 한 가지 짧은 단어만 적혀 있었다. "리앙(Rien)." 우리말로 옮기면 "아무 일도 없음"이라는 뜻이다.

이 한 단어는 그 후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용문이 되었다. 한 왕정이 그토록 결정적인 날에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었는가, 라는 비판의 근거로 거의 매번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인용은 사실 약간의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루이 16세의 일기에서 "리앙"이라는 단어는 정치적 무관심을 뜻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 일지의 표현이었다. 그날 사냥에서 잡은 짐승이 없다는 의미였다. 이 일기는 사실 사냥 기록을 위한 일기였고, 그가 정치적 사건들을 그 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보충 설명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1789년 7월 14일 그날 루이 16세는 파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가 받은 보고서들은 단편적이었고, 그것들의 의미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보 체계가 그에게는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날도 비교적 일상적이었다. 그녀는 오전에 자녀들과 시간을 보냈고, 오후에는 자신의 사적 살롱에서 시녀들과 함께 있었다. 그녀가 파리의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한 신하가 그녀에게 짧게 보고했다. 파리에서 큰 봉기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보고를 들은 직후 곧 남편을 찾아갔다.

캉팡의 회고록은 그날 밤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짧게 묘사한다. 그녀는 매우 차분해 보였지만, 동시에 매우 창백했다고 한다. 그녀가 캉팡에게 짧게 한 말이 회고록에 인용되어 있다. "이것은 작은 봉기가 아닌 것 같아요."


한 신하의 한 마디

7월 14일 밤늦게, 한 신하가 베르사유에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La Rochefoucauld-Liancourt) 공작이었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바스티유의 함락 소식을 가지고 베르사유에 직접 도착했다.

그는 곧장 루이 16세의 침실로 향했다. 왕은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는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소식을 새벽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왕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깨어난 루이 16세는 그의 보고를 들었다. 바스티유가 함락되었다. 사령관 로네가 살해되었다. 파리의 모든 무기 저장소가 시민군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결정적인 사실, 정규군 일부가 시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이 모든 보고를 들은 뒤, 루이 16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는 짧게 한 마디 물었다고 한다.

"그것은 봉기인가?(C'est donc une révolte?)"

이 질문에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는 짧게 답했다.

"아닙니다, 폐하. 그것은 혁명입니다.(Non, Sire, c'est une révolution.)"

이 두 마디는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짧은 대화로 남았다. 그것이 정확히 그날 밤에 오간 대화 그대로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이 대화는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자신의 후일 회상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고, 그 정확한 표현이 그대로 기록된 다른 1차 사료는 없다. 그러나 이 대화가 한 가지 진실을 압축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 왕정과 한 시대 사이의 거리, 한 왕이 자신의 시대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기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사실이 그 두 마디 안에 담겨 있다.

루이 16세에게 '봉기(révolte)'와 '혁명(révolution)'은 분명히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봉기는 한 시대의 일반적인 일상 가운데 일부였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작은 봉기는 거의 매년 일어났다. 흉작이 있는 해, 빵 값이 오르는 해, 새로운 세금이 도입되는 해. 그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일부 지역에서 작은 폭동이 일어났고, 그것들은 곧 진압되었다. 그것이 봉기였다. 그러나 혁명은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정치 질서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한 왕정이 자신의 옛 방식으로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였다.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의 한 마디는 루이 16세에게 그 사실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린 순간이었다. 그날 밤 이후, 루이 16세는 점차 자신이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이해해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이해는 항상 한 발 늦었다. 그가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하는 동안 다음 사실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고, 그 다음 사실을 이해하는 동안 또 그 다음 사실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 시대의 흐름이 그의 이해를 끊임없이 앞질러 가는 풍경이 그 후 몇 년 동안 이어진다.


그다음 며칠

7월 15일 아침, 루이 16세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자신이 직접 파리로 가지는 않았지만, 베르사유 인근의 의회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짧은 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이 시민들의 의지를 존중한다고 말했고, 군대를 파리 주변에서 철수시킬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한 그는 네케르를 다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7월 11일 그를 해임한 지 단 4일 만의 일이었다.

이 발표는 의회에서 큰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 환호의 의미는 한 왕의 권위에 대한 환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흐름이 한 왕의 결정을 강제했다는 사실에 대한 환호였다. 루이 16세는 7월 11일의 결정을 자신의 의지로 내렸지만, 7월 15일의 결정은 자신의 의지로 내렸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는 한 시대의 흐름에 굴복한 것이었다.

7월 17일, 루이 16세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그는 파리로 직접 갔다. 그는 시청에서 새로 임명된 파리 시장 장 실뱅 바이(Jean Sylvain Bailly)를 만났고, 새로운 국민군의 사령관 라파예트를 만났다. 시청 앞에서 바이는 그에게 한 가지 작은 물건을 건넸다. 그것은 새로운 모자 휘장이었다. 빨간색과 파란색의 휘장이었다. 이 두 색은 파리 시의 전통적인 색이었다.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부르봉 가문의 색인 흰색이었다. 빨강, 파랑, 흰색. 세 색이 결합된 그 휘장이 곧 한 시대의 가장 상징적인 표지가 된다.

루이 16세는 그 휘장을 자신의 모자에 직접 달았다. 그 순간 시청 앞의 군중이 환호했다. 한 왕이 한 시대의 새로운 상징을 자신의 모자에 단다는 사실은, 그가 그 시대를 받아들였다는 가장 분명한 시각적 신호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날 파리에 동행하지 않았다. 그녀는 베르사유에 남았다. 캉팡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녀는 그날 거의 한 시간 동안 창가에 서서 베르사유의 정원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회고록에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날의 그녀가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한 시대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자리가 그 굴복과 함께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폴리냐크 가문의 망명

7월 16일과 17일 사이, 베르사유에서는 또 한 가지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장 가까운 친구 폴리냐크 공작부인에게 망명을 권유한 것이다. 이 결정의 자세한 내용은 EP.08 폴리냐크 공작부인 회차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친구가 곧 정치적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했고, 즉시 프랑스를 떠나기를 권유했다.

폴리냐크 부인은 처음에는 거부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호했다. 7월 17일 새벽, 폴리냐크 가문의 마차가 평민 옷을 입고 일반 여행자처럼 위장한 채 베르사유를 떠났다. 그들은 며칠 뒤 스위스에 도착했고, 그 후 오스트리아령으로 이동했다.

이 망명은 한 가지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 왕정의 가까운 측근들이 더 이상 베르사유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의 인정이었다. 폴리냐크 가문 외에도 그 시기 베르사유를 떠난 인물들은 적지 않다. 아르투아 백작은 7월 17일 가족과 함께 토리노로 망명했다. 콩데 공작과 그의 가문도 같은 시기에 망명했다. 라 모트 후작 부부, 베르사유의 여러 보수적 신하들이 한 명씩 자신들의 거처를 정리하고 국경 너머로 향했다.

이 망명들은 후일 한 시대의 가장 큰 정치적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망명한 귀족들, 즉 '에미그레(émigrés)'들은 망명지에서 한 왕정의 회복을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고, 외국 군주들에게 프랑스를 침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1792년 이후의 외국과의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이 만들어낸 공포 정치의 한 가지 직접적인 배경이 바로 이 1789년 7월의 망명들이었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망명들을 매우 무거운 어조로 기록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이 망명들은 한 왕정의 가장 가까운 동맹들이 한 왕정을 버리고 떠난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떠나라고 권유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사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지만, 동시에 한 왕정의 정치적 자원이 한 명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의 표현이기도 했다.


한 시대의 시작과 끝

1789년 7월 14일은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날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 오늘날 프랑스의 국경일이 바로 이 날이다. 7월 14일은 한 시대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끝이기도 했다.

그것은 무엇의 시작이었는가. 새로운 정치 질서의 시작이었다. 한 시대의 절대 왕정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 한 시대의 시민들이 직접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자격이 필요하다면 무력으로도 주장될 수 있다는 사실. 이 세 가지 결정적인 신호가 그날 분명히 던져졌다. 그 후 한 세기 동안의 유럽 정치사가 그 신호에 답하는 과정이 된다.

그것은 무엇의 끝이었는가. 한 왕정의 절대적 권위의 끝이었다. 1789년 7월 14일 이전까지의 프랑스 왕은 자신의 권위가 신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고, 그 믿음은 한 시대의 일반적인 신뢰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7월 14일 이후, 그 믿음은 더 이상 한 시대의 일반적인 신뢰를 받지 못했다. 한 왕이 자신의 권위만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대는 그날 끝났다. 그 후의 모든 결정은 한 시대의 흐름과의 끊임없는 협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했고, 그 협상에서 한 왕은 점점 더 약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변화의 의미를 그날 어디까지 이해했는가. 캉팡의 회고록을 보면, 그녀의 이해는 부분적이었다. 그녀는 한 가지 분명한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직감이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정확한 방향, 그 변화가 결국 어떤 결말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그녀는 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는 방식을 평생 배워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대응은 적응이 아니라 저항이었고, 그 저항이 그 후 그녀의 운명을 점점 더 어두운 방향으로 끌고 가게 된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1789년 7월 14일을 한 시대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그 사건의 정치적 의미보다는, 그것이 베르사유의 일상에 어떻게 다가왔는지에 더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기록에서 7월 14일과 그 며칠은 베르사유 안의 정서적 풍경, 즉 한 왕과 한 왕비가 느낀 충격과 두려움을 중심으로 묘사된다. 후대의 정치사학자들, 특히 조르주 르페브르, 알베르 소불, 그리고 영국의 사이먼 샤마와 같은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좀 더 구조적인 각도에서 본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바스티유 함락이 단순한 한 요새의 함락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치 질서가 한 시민군의 손으로 무너진 첫 번째 사례라는 사실이다. 그 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의 유럽 전체에서, 시민군의 무력 봉기가 한 정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모델이 반복적으로 적용된다.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1871년 파리 코뮌. 이 모든 사건들의 한 가지 원형이 바로 1789년 7월 14일이었다. 또한 일부 역사가들은 그날 군중의 폭력이 한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과 동시에 한 시대의 새로운 위험을 함께 보여주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령관 로네의 살해, 그의 머리를 창에 꽂은 행진. 이런 풍경은 한 시대의 자유에 대한 환호가 동시에 다른 종류의 잔혹함을 동반할 수 있다는 사실의 첫 번째 신호였다. 그리고 그 잔혹함은 1792년 9월 학살, 1793년에서 1794년의 공포 정치를 통해 점점 더 분명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캉팡은 이런 구조적 분석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회고록에서 그날 베르사유의 침묵, 한 왕과 한 왕비의 창백한 얼굴, 그리고 며칠 안에 이루어진 친구들의 망명을 묘사한 짧은 문장들 안에,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직감이 분명히 담겨 있다. 그 직감의 깊이가 바로 그녀의 회고록이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읽힐 가치를 갖는 한 가지 이유다.


다음 회 예고

1789년 10월의 어느 비 오는 새벽, 베르사유 궁의 정문 앞에 거대한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 약 20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온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빵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빵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한 가지 더 결정적인 것을 요구했다. 한 왕과 한 왕비가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가장 두려운 밤 가운데 하나를 보냈다. 다음 회에서는 1789년 10월 베르사유 행진의 그날, 한 왕정이 자신의 가장 오래된 거처를 떠나야 했던 순간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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