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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4. 1788년, 재정 파탄과 삼부회 소집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5.

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4. 1788년, 재정 파탄과 삼부회 소집

"왕께서는 점점 더 자주 회의실에서 침묵하셨다. 그분 앞에 놓인 보고서들은 모두 같은 결론을 향해 있었다. 더 이상 돈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왕비께서는 그 보고서들을 직접 보시기보다는, 회의 후 왕의 모습을 통해 그 무게를 짐작하셨다. 그분께서 왕의 어깨를 손으로 살며시 짚으시는 그 작은 동작 안에, 한 시대의 가장 깊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샤를 알렉산드르 드 칼론(1734-1802)

한 왕정의 회계장부

1786년의 어느 무렵, 재무총감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Charles Alexandre de Calonne)은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그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프랑스 왕실의 회계장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검토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그 결심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어딘가에 자신이 모르는 숨겨진 자원이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식으로든 적자를 줄일 길이 있을 것이라고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회계장부를 끝까지 검토한 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정반대였다. 숨겨진 자원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그동안 추정해 온 것보다 상황은 훨씬 더 나빴다.

칼론이 1786년 8월 루이 16세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프랑스 왕실의 예상 적자는 약 1억 1,200만 리브르였다. 같은 해 왕실의 총수입은 약 4억 7,500만 리브르였으므로, 적자가 총수입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더구나 이 적자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미 1770년대 후반부터 누적되어 온 부채는 약 22억 리브르에 이르렀고, 그 부채의 이자만으로도 매년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고 있었다. 한 시대의 회계장부가 정확히 무너지고 있었다.

칼론의 보고서는 한 가지 충격을 동반했다. 그는 왕에게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이 적자를 메꿔 왔는지를 설명했다. 답은 단순했다. 새로운 빚으로 옛 빚의 이자를 갚아 왔다는 것이었다. 한 시대의 가장 부유한 왕정이라고 알려진 프랑스 왕정이, 사실은 매년 새로운 빚으로 옛 빚을 막아 가며 겨우 운영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직시한 순간, 칼론도 루이 16세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적자의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여러 누적된 문제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적자의 뿌리

프랑스 왕정의 재정 위기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옷값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구조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7년 전쟁(1756~1763)의 누적 비용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과 싸웠고, 결국 패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캐나다와 인도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막대한 전쟁 비용은 빚으로 남았다. 1760년대 후반부터 1770년대 초반까지, 이 빚을 갚기 위한 노력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모두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음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5~1783)의 지원 비용이 있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미국 편에 섰다. 표면적인 이유는 자유와 독립에 대한 지원이었지만, 실제 동기는 영국에 대한 복수였다. 7년 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한 프랑스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 지원은 외교적으로는 성공이었다. 미국이 독립했고, 영국은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재앙이었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쟁에 쓴 비용은 약 13억 리브르로 추정된다. 이 비용 전체가 빚으로 충당되었고, 그 이자가 매년 막대한 부담이 되어 왔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원인은 세제 구조의 모순이었다. 18세기 프랑스에는 세 가지 신분(état)이 있었다. 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은 귀족, 제3신분은 그 외의 모든 사람, 즉 농민, 노동자, 상인, 부르주아 등이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제1신분과 제2신분이 대부분의 세금에서 면제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즉 프랑스의 가장 부유한 두 계층이 거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모든 세금 부담은 가장 가난한 제3신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 세제 구조는 한 가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제3신분이 부담할 수 있는 세금의 양은 무한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미 견딜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신호는 1770년대 후반부터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가난한 지방에서 수확이 좋지 않은 해에는 농민들이 굶주리는 일이 늘어났고, 그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두려 하면 곧 봉기가 일어났다. 더 이상 평민에게서 짜낼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가지 길은 분명했다.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것. 칼론이 1786년 보고서에서 결국 그 결론에 도달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다른 모든 길은 이미 막혀 있었다.


명사회의의 좌절

1786년 가을, 칼론은 자신의 개혁안을 정리했다. 그 개혁안의 핵심은 한 가지였다. 토지 보유자라면 누구든, 그 신분에 관계없이, 토지의 가치에 비례하는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귀족과 성직자에 대한 면세 특권의 폐지였다.

칼론은 이 개혁안을 의회에 직접 제출할 수는 없었다. 의회들은 분명히 이 안을 거부할 것이었다. 의회들 자체가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한 가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왕에게 '명사회의(Assemblée des Notables)'를 소집할 것을 권유했다. 명사회의는 왕이 직접 임명한 귀족, 성직자, 그리고 일부 부르주아 대표로 구성되는 임시 회의체였다. 1626년 이후 약 160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은 회의체였다.

칼론의 계산은 이러했다. 명사회의의 구성원들은 왕이 직접 임명하므로, 의회보다는 더 우호적일 것이다. 그들이 이 개혁안을 승인하면, 그것을 근거로 왕은 의회의 반대를 우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산은 빗나갔다. 1787년 2월 명사회의가 베르사유에서 소집되었을 때, 그 분위기는 칼론이 기대한 것과 완전히 달랐다. 명사회의의 구성원들은 거의 모두 귀족과 성직자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면세 특권을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칼론의 개혁안을 격렬히 비판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칼론 자신이 그동안 왕실의 재정을 어떻게 운영해 왔는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매년 새로운 빚으로 옛 빚을 갚아 온 그의 운영 방식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명사회의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라파예트(La Fayette) 후작이었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미국 편으로 싸운 영웅이었고,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귀족이었다. 그는 한 가지 결정적인 주장을 했다. 만약 새로운 세금을 도입해야 한다면, 그것을 결정할 자격이 있는 것은 명사회의가 아니라 진정한 국민 대표 기구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기구의 이름을 짧게 언급했다. '삼부회(États généraux)'였다.

이 한 단어가 그 후 한 시대의 운명을 결정하는 단어가 된다.


자크 네케르

삼부회라는 이름

삼부회는 프랑스 왕정의 가장 오래된 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1302년 필리프 4세 시대에 처음 소집되었으며, 왕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세 신분의 대표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회의체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절대 왕정이 강화되면서 삼부회는 점차 소집되지 않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1614년의 일이었다. 즉 1787년 시점에서 173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제도였다.

이 오래된 제도가 다시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한 가지 분명한 신호였다. 그것은 한 왕정이 더 이상 자신의 절대적 권위만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의 인정이었다. 라파예트가 명사회의에서 삼부회의 이름을 꺼낸 그 순간, 그는 단순히 한 가지 절차적 제안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시대의 정치 질서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던진 것이었다.

명사회의는 결국 칼론의 개혁안을 거부했다. 1787년 5월, 칼론은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16세는 새로운 재무총감을 찾아야 했다. 그가 임명한 인물은 로메니 드 브리엔(Loménie de Brienne) 추기경이었다. 브리엔은 한때 명사회의에서 칼론의 가장 큰 비판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새로운 재무총감이 되었다는 사실은 칼론에 대한 패배 선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브리엔이 자신의 자리에 앉은 뒤, 그는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칼론이 정확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면세 특권을 폐지하지 않으면 재정 위기를 해결할 수 없었다. 브리엔은 칼론과 거의 같은 개혁안을 들고 의회에 갔다. 그러나 의회는 이번에도 그것을 거부했다. 더구나 의회는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새로운 세금을 도입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기구는 의회 자신이 아니라 삼부회뿐이라는 것이었다.


네케르의 귀환

1788년 8월, 루이 16세는 또 한 번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브리엔을 해임하고, 새로운 재무총감으로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를 임명했다. 네케르의 임명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네케르는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개신교도였다. 그는 프랑스의 귀족이 아니었고,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한때 그는 1776년부터 1781년까지 프랑스 왕실의 재무 총감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 시기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재무 총감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지 않고도 왕실의 재정을 어느 정도 안정시키려 노력했고, 그 노력은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1781년 그는 한 가지 결정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는 왕실의 재정 보고서를 출간한 것이었다. '르 콩트 랑뒤 오 루아(Compte rendu au roi)'라는 이름의 이 보고서는 프랑스 왕실의 회계장부를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한 문서였다.

이 보고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 왕정의 가장 비밀스러운 문서가 일반에게 공개된다는 사실 자체가 한 시대의 새로운 시도였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한 가지 결정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매우 낙관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었다. 네케르는 보고서에서 왕실의 재정이 거의 균형 상태에 있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그 묘사는 일부 비용 항목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결과였다. 후일 칼론이 회계장부를 다시 검토했을 때, 그는 네케르의 1781년 보고서가 약 4,600만 리브르의 적자를 숨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1788년의 일반 시민들에게 이런 회계의 세부 사항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기억한 것은 네케르가 한때 왕실 재정을 잘 운영한 인물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파리의 거리에는 거의 환호에 가까운 반응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네케르를 한 시대의 구원자로 여겼다.

네케르 자신은 이 기대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임명 직후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 첫째, 그는 의회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그는 의회의 권위를 인정했고, 의회가 반대해 온 새로운 세제 안을 일단 보류했다. 둘째, 그는 한 가지 결정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는 삼부회 소집을 공식적으로 권유한 것이다.

루이 16세는 이 권유를 받아들였다. 1788년 8월 8일, 그는 삼부회를 1789년 5월 1일에 소집한다고 공식 선포했다. 173년 동안 잠들어 있던 한 제도가 마침내 다시 깨어나기로 한 것이다.


한 시대가 기다린 한 가지 질문

삼부회 소집이 결정된 1788년 가을부터 그것이 실제로 열린 1789년 5월까지의 약 9개월 동안, 프랑스 사회는 거의 들끓고 있었다. 그 들끓음의 한가운데에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삼부회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1614년의 마지막 삼부회는 세 신분이 각각 같은 수의 대표를 가졌다. 그리고 투표는 신분별로 이루어졌다. 즉 세 신분 가운데 두 신분이 찬성하면 한 결정이 통과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분명히 제1신분과 제2신분에게 유리했다. 두 신분이 함께 행동하면, 제3신분이 무엇을 주장하든 그것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1788년 가을, 한 가지 결정적인 주장이 등장했다. 제3신분의 대표 수를 다른 두 신분의 합과 같게 늘려야 하며, 투표는 신분별이 아니라 개인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의 가장 유명한 표현이 1788년 11월에 출간된 한 짧은 책이었다. 시에예스(Sieyès) 신부가 쓴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다.

시에예스의 책은 짧은 세 가지 질문으로 시작했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다. 제3신분이 지금까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3신분이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이 되기를 원한다. 이 세 가지 짧은 문장은 곧 한 시대의 가장 강력한 구호가 되었다.

이 책의 주장은 단순했다. 프랑스의 진정한 국민은 제3신분이라는 것이었다. 제1신분과 제2신분은 면세 특권과 같은 기득권을 가진 작은 집단에 불과했다. 그들이 국민을 대표할 수 없으며, 국민을 대표하는 것은 제3신분뿐이라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새로 열릴 삼부회에서 제3신분이 다른 두 신분의 합과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이 주장은 곧 전국으로 퍼졌다. 1788년 12월, 루이 16세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제3신분의 대표 수를 두 배로 늘리는 것에 동의했다. 즉 제3신분 대표는 약 600명, 제1신분과 제2신분 대표는 각각 약 300명씩이 되는 구조였다. 그러나 그는 투표 방식에 대해서는 결정을 미뤘다. 신분별 투표인지, 개인별 투표인지의 문제는 삼부회가 개회한 뒤 결정될 일이었다.

이 결정은 사실상 시한폭탄과 같았다. 만약 신분별 투표라면 제3신분의 대표 수가 두 배가 된 것은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한 신분이 한 표였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별 투표라면 제3신분이 사실상의 다수가 되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으로 결정되는가가 한 시대의 운명을 갈라놓을 문제였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그 결정을 미뤘다.


베르사유의 풍경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베르사유 안에서는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는가. 캉팡의 회고록은 이 시기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짧지만 분명하게 기록한다.

먼저 그녀는 자녀들에 대한 깊은 걱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1788년부터 큰아들 루이 조제프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고, 호흡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여러 차례 그의 방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그녀가 이 시기 겪고 있던 가장 깊은 슬픔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정치적 위기의 무게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응은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치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한 왕정의 재정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을 정서적으로 지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신뢰하는 인물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정도였다.

이 시기 그녀의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은 인사 결정에 있었다. 그녀는 칼론의 사임에 동의했고, 브리엔의 임명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네케르의 임명에는 반대했다. 그녀는 네케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한때 한 왕정의 회계장부를 공개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결코 잊지 않았다. 그러나 1788년 8월의 상황에서, 그녀의 반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네케르는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임명되었다.

이 사실은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17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사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러나 1788년의 위기 속에서, 그 영향력은 분명히 줄어들고 있었다. 왕도, 신하들도, 한 왕정의 위기 앞에서 그녀의 사적 호의보다는 정치적 현실을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의 한 짧은 말을 인용한다. "나는 점점 더 작아져요. 한때 내가 가졌던 영향력의 절반도 이제는 없어요." 이 말은 한 가지 솔직한 자각을 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막을 길은 그녀에게 보이지 않았다.


루앙의 세느강

1788년 여름의 우박

한 가지 자연 현상이 이 시기의 위기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1788년 7월 13일, 프랑스 북부의 여러 지방에 거대한 우박이 내렸다. 이 우박은 단순한 우박이 아니었다. 동시대 기록들에 따르면, 일부 우박덩어리는 닭의 알 크기였고, 그것이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떨어졌다. 그 결과 그 지역의 밀밭이 거의 전부 파괴되었다.

이 우박은 한 가지 결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1788년의 수확이 거의 0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곧 빵 값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1788년 가을부터 1789년 봄까지, 파리의 빵 값은 약 두 배에 가까운 수준으로 올랐다. 일반 노동자의 가정에서 빵 값이 일상 지출의 약 50퍼센트를 차지하던 시대였다. 빵 값이 두 배가 된다는 것은, 그 가정의 일상 지출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을 거의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빵 값의 폭등은 정치적 위기와 직접적으로 결합되었다.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이 굶주리는 동안, 베르사유의 왕비가 여전히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사실 그 시점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제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 무렵 그녀는 큰아들의 병상 옆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화려한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들의 분노 앞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기억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1780년대 초반의 그 화려한 왕비였고, 그 기억이 1788년 겨울의 굶주림과 결합되었을 때 그 결과는 매우 강력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1788년에서 178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18세기 후반의 가장 추운 겨울 가운데 하나였다. 센강이 얼어붙었고, 파리의 일부 가난한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추위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빵을 살 돈도 없고, 난방을 위한 나무를 살 돈도 없는 가정들이 늘어났다. 한 시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1788년에서 1789년으로 넘어가는 그 몇 달은 견디기 거의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이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 곧 열릴 삼부회 앞에서 한 시대의 분노를 결정적으로 굳혀가고 있었다.


진정서, 한 나라의 목소리

삼부회가 개회되기 전, 한 가지 절차가 진행되어야 했다. 그것은 '진정서(cahiers de doléances)'의 작성이었다. 프랑스의 모든 지방, 모든 도시, 모든 마을이 자신들이 삼부회에 제출할 진정서를 직접 작성하는 절차였다. 이 진정서들에는 그 지역 사람들이 한 왕정에 대해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개혁을 원하는지가 적혔다.

1789년 봄, 약 6만 개의 진정서가 프랑스 전국에서 작성되었다. 이 진정서들은 한 가지 놀라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 안에 담긴 목소리들은 거의 일치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서들의 거의 모든 내용은 한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면세 특권의 폐지, 세제 개혁, 그리고 한 시대의 정치 구조 자체의 변화에 대한 요구였다.

이 진정서들은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사회의 대다수가 이미 한 시대의 옛 구조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가 아니었다. 진정서를 작성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부유한 부르주아, 변호사, 공증인, 상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사회적 자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 한 왕정의 옛 구조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한 것이었다.

이 진정서들의 무게를 베르사유는 충분히 이해했는가. 캉팡의 회고록을 보면, 그 이해는 매우 부분적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진정서들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것들의 내용을 직접 읽어보았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루이 16세는 좀 더 많은 진정서를 읽었지만, 그가 그것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 시대의 가장 깊은 목소리가 종이 위에 분명히 적혀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왕과 왕비의 사적 공간에까지 도달했는지는 의문이다.


1789년 5월 5일

마침내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의 거대한 메뉘 플레지르(Hôtel des Menus-Plaisirs) 홀에서 삼부회가 개회되었다. 그곳에는 약 1,200명의 대표가 모여 있었다. 제1신분 약 300명, 제2신분 약 300명, 그리고 제3신분 약 600명이었다.

이 풍경은 그 자체로 한 시대를 압축한 모습이었다. 제1신분 대표들은 검은색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제2신분 대표들은 깃털 모자를 쓴 화려한 귀족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제3신분 대표들은 단조로운 검은색 정장에 단정한 흰색 옷깃을 한 단순한 차림이었다. 이 옷차림의 차이는 일부러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베르사유의 의전 관리들이 각 신분의 옷차림을 분명히 구별되도록 지정한 결과였다.

왕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앉았다. 그녀는 그날 흰색과 은색의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흰 깃털 장식을 했다.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캉팡이 회고록에서 짧게 기록한 바에 따르면 그날 그녀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다고 한다.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날 그녀가 두려워한 무언가가, 그 후의 모든 일을 통해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개회식에서 루이 16세는 짧은 연설을 했다. 그는 한 시대의 위기를 짧게 언급했고, 삼부회의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한 가지 결정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도 일반적이고, 너무도 모호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 시대가 어떤 구체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는지, 그가 그 개혁을 위해 무엇을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의 연설은 곧 실망을 만들어냈다.

이어서 네케르가 일어나 더 긴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너무도 길었고, 너무도 회계의 세부 사항에 집중되어 있었다. 약 세 시간 동안 그는 숫자와 표를 나열했고, 그 사이에 한 시대의 가장 큰 정치적 질문들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신분별 투표인지 개인별 투표인지의 결정적인 질문도, 그날 명확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두 연설이 끝났을 때, 삼부회의 분위기는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173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한 시대의 가장 큰 회의가, 그 첫날부터 한 가지 결정적인 실망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한 달의 교착

5월 5일 개회식 이후 약 한 달 동안, 삼부회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한 달의 거의 모든 시간이 한 가지 절차적 문제에 묶여 있었다. 그것이 바로 투표 방식의 문제였다. 신분별 투표인가, 개인별 투표인가.

제3신분 대표들은 개인별 투표를 주장했다. 그것만이 자신들의 두 배 늘어난 대표 수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제1신분과 제2신분의 대표들은 신분별 투표를 주장했다. 그것이 1614년 마지막 삼부회의 전통이라는 것이었다. 이 두 주장은 평행선을 그렸고, 어떤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교착 상태에서 루이 16세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양쪽의 주장 모두에 일정한 정당성이 있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고, 어느 한쪽에 단호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 태도는 그의 평소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망설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망설임은 1789년 5월의 상황에서 결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가 결정을 미루는 동안, 제3신분 대표들은 자신들의 답을 직접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6월 17일, 제3신분 대표들은 한 가지 결정적인 행동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제3신분'이 아니라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 국민의 진정한 대표이며, 다른 두 신분의 대표들도 자신들에게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은 한 시대의 정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선언이었다. 한 왕정이 소집한 자문 기구가, 스스로를 한 나라의 입법 기구로 선언한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이 선언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두고 망설였다. 그가 며칠 동안 망설이는 사이, 또 다른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6월 20일, 제3신분 대표들이 평소처럼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왕실이 회의장을 '수리'한다는 명분으로 일시적으로 폐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3신분 대표들에게 이것은 분명한 정치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근처의 한 실내 테니스장(Salle du Jeu de Paume)으로 함께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한 가지 맹세를 했다. 프랑스를 위한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결코 흩어지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이것이 '테니스장의 맹세(Serment du Jeu de Paume)'다. 한 실내 테니스장에서, 약 600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손을 들고 외친 그 짧은 맹세는 곧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가 된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1788년의 재정 위기와 1789년 5월 삼부회 개회까지의 시간을 비교적 짧게 다룬다. 그녀의 관심은 정치적 사건들의 세부 사항보다는, 그 사건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어떤 정서적 무게로 다가왔는지에 더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회고록에서 이 시기는 한 어머니가 큰아들의 병상 옆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주로 묘사된다. 그러나 후대의 정치사학자들, 특히 윌리엄 도일이나 사이먼 샤마, 그리고 프랑수아 퓌레 같은 연구자들은 이 시기를 한 시대의 정치 구조가 결정적으로 변화하는 단계로 본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1788년에서 1789년 5월까지의 그 9개월이 한 왕정이 자신의 옛 구조 안에서 위기를 해결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 시간이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칼론이나 브리엔의 개혁안이 명사회의에서 통과되었더라면, 만약 루이 16세가 삼부회 개회 직후 단호한 결정으로 투표 방식을 정했더라면, 한 시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성이 잇따른 망설임과 잘못된 결정 속에서 사라졌다. 캉팡은 이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충분히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회고록에서 거듭 짚는 한 가지 통찰이 있다. 그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 시대의 정치 구조가 변하는 동안, 그녀는 그 변화의 정확한 방향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자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 직감은 그녀를 점점 더 깊은 두려움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1789년 7월의 사건들로 이어지는 한 가지 보이지 않는 흐름이 된다.


다음 회 예고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한 거대한 요새가 군중에게 함락되었다. 그 요새의 이름은 바스티유였다. 그것은 한 왕정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였고, 동시에 한 왕정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날 밤 베르사유에서는 무엇이 보였고, 무엇이 보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한 왕의 일기에 적힌 짧은 한 단어, "아무 일도 없음(Rien)"이라는 그 단어는 정말로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날에 대한 그의 실제 인식이었는가. 다음 회에서는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의 그날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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