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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3.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1785)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3.

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3.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1785)

"그것은 가장 이상한 사건이었다. 왕비께서는 한 줄의 다이아몬드도 보지 못하셨고, 한 문장의 편지도 쓰지 않으셨고, 한 번의 만남도 가지지 않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끝내 그분께서 그 모든 것에 관여하셨다고 믿었다. 진실보다 더 강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분명히 알게 되었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여왕의 목걸이, 마리 앙투아네트

한 추기경이 체포되던 날

1785년 8월 15일은 가톨릭의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그날 베르사유 궁의 거울의 방에서는 큰 미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추기경 로앙(Cardinal de Rohan)은 그날의 미사를 집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권세 있는 가문 가운데 하나인 로앙 가문의 일원이었고, 스트라스부르의 대주교이자 왕실의 자선관(Grand Aumônier de France)이라는 매우 권위 있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날 오전, 그가 미사복을 갖춰 입고 거울의 방으로 향하려는 순간, 왕의 한 시종이 그에게 다가왔다. 시종은 짧게 말했다. "왕께서 추기경님을 어전 회의실로 부르십니다." 추기경은 그 부름에 응했다.

어전 회의실에는 루이 16세가 있었다. 그의 곁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었다. 그리고 재무총감 칼론(Calonne)과 옥새상서 미로메닐(Miromesnil)이 함께 있었다. 그 자리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루이 16세는 추기경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한 보석상이 거대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추기경에게 넘겼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그리고 그 목걸이가 왕비의 부탁으로 받은 것이라고 추기경이 말했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추기경은 답을 망설였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이 한 추기경으로서 곧 큰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달았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자신이 왕비의 직접적인 편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 중개인을 통해 왕비의 부탁을 전달받았다고 답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자리에서 단호히 부인했다. 그녀는 그런 편지를 쓴 적이 없으며, 그런 중개인을 보낸 적도 없다고 했다.

루이 16세는 즉시 결정을 내렸다. 추기경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바스티유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는 미사복 차림 그대로 베르사유의 한 복도를 통해 끌려갔다. 그 모습을 본 베르사유의 신하들과 시녀들 사이에 깊은 충격이 번졌다. 프랑스의 한 추기경이, 그것도 로앙 가문의 일원이, 미사를 집전하기 직전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풍경을 바꾸어 놓을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충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로 이어진 1년 동안의 재판과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드러난 한 사기극의 전모는, 한 왕정의 평판을 결정적으로 흔드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한 점의 보석이 만들어지기까지

이 사건의 출발점은 한 점의 보석이었다. 1772년경, 파리의 보석상 두 사람, 샤를 오귀스트 베메르(Charles Auguste Boehmer)와 폴 바상주(Paul Bassenge)는 한 가지 야심 찬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루이 15세의 정부 마담 뒤바리에게 팔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 목걸이는 약 650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졌다. 무게는 약 2,840 캐럿. 디자인은 다중의 다이아몬드 줄이 가슴 앞에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방식이었다. 위쪽에 첫 번째 줄, 그 아래에 두 번째 줄, 그 아래에 세 번째 줄. 그리고 그 줄들 사이에 거대한 술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그 풍성함은 그 시대의 어떤 목걸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총 가격은 약 160만 리브르였다. 이것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각할 수 있는 거의 가장 비싼 금액이었다. 평범한 노동자의 약 2,500년 치 임금에 해당했고, 한 중산층 가문의 모든 재산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이 한 점의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베메르와 바상주는 자신들의 모든 자본을 투입했고, 추가로 막대한 빚도 졌다. 그들은 이 목걸이가 팔리지 않으면 자신들의 모든 사업이 파산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고, 마담 뒤바리는 베르사유에서 추방되었다. 목걸이는 주인을 잃었다. 베메르와 바상주는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가장 자연스러운 후보는 새로운 왕비였다. 두 보석상은 1778년경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르사유에 여러 번 가서 목걸이를 그녀 앞에 펼쳐 놓았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번 거절했다. 그녀가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그녀는 이미 충분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고, 더 이상 새 보석을 살 생각이 없었다. 둘째, 그 목걸이의 가격이 너무도 컸다. 1778년의 거절 때 그녀가 한 짧은 말이 후일 전해진다. "그 돈으로 우리는 새 함선을 건조할 수 있을 거예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던 시기, 프랑스 해군은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거절은 한 번이 아니었다. 1781년에도, 1783년에도, 그리고 1784년에도 두 보석상은 같은 시도를 했다. 매번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절했다. 그녀는 사치를 좋아한 왕비였지만, 이 한 점의 목걸이만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이 가진 가격의 무게가 그녀에게도 분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1784년 말, 두 보석상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이미 막대한 이자를 매달 갚고 있었고, 목걸이가 팔리지 않으면 곧 파산할 처지였다. 그들은 마지막 시도로 한 사람을 통해 다시 왕비에게 접근하려 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잔 드 라 모트(Jeanne de la Motte)였다.


한 사기꾼 여자의 등장

잔 드 라 모트의 본명은 잔 드 생레미(Jeanne de Saint-Rémy)였다. 그녀의 출생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동반한다. 그녀는 프랑스의 옛 왕가 발루아(Valois) 왕가의 한 사생아 후손이었다. 발루아 왕가는 1589년 단절된 뒤 부르봉 왕가로 왕위가 이어졌고, 그 후 발루아의 후손들은 점차 가난과 망각 속으로 흩어졌다.

잔의 가족도 그러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의 거지 같은 상황에서 세상을 떠났고, 어린 잔은 한때 파리의 거리에서 구걸을 해야 했다. 그녀가 일곱 살 무렵, 한 부유한 부인이 그녀와 그녀의 자매들을 발견했다. 그 부인은 그들의 발루아 혈통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들을 자신의 후원 아래에 두었다. 잔은 그 후 한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어느 정도의 사회적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780년, 그녀는 한 가난한 귀족 남자 니콜라 드 라 모트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곧 자신들을 '라 모트 발루아 백작 부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백작' 호칭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잔이 발루아의 한 사생아 후손이라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백작이라는 작위를 정당화하지는 않았다.

잔의 야심은 베르사유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발루아 혈통을 활용해 베르사유의 후의를 얻으려 했다. 1782년경, 그녀는 베르사유에 처음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발루아 왕가의 후손으로서 정당한 연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베르사유의 관리들은 그녀의 주장을 일부 인정해, 매년 작은 연금을 그녀에게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금액은 그녀가 원하는 화려한 삶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개발했다. 그녀는 베르사유의 권세 있는 인물들에게 접근해, 자신이 왕비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거짓말은 정교했고, 그녀의 발루아 혈통이 그 거짓말에 신뢰성을 더해 주었다. 베르사유의 일부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었다. 그녀는 그 신뢰를 활용해, 한 사람씩 자신의 사기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장 큰 표적이 바로 추기경 로앙이었다.


한 추기경의 야심

추기경 로앙은 매우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분명히 큰 야심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야심을 펼칠 만한 정치적 감각은 부족했다. 그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을 좋아했으며, 자신의 자선관 직책의 봉급만으로는 그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늘 깊은 빚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약점은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관계에 있었다. 1772년경, 그는 빈에 프랑스 대사로 파견되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가까운 관계를 가졌다. 그는 빈에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 나아가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다소 무례한 농담을 사적인 자리에서 한 적이 있었고, 그 농담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귀에까지 들어가 버렸다.

이 일을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편지로 전했다. 그 결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추기경 로앙을 결코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베르사유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는 그를 차갑게 대했다. 한 마디도 직접 건네지 않았고, 그와의 만남을 가능한 한 피했다.

이 차가운 관계가 추기경에게는 깊은 좌절이었다. 그는 자신의 야심을 펼치기 위해서는 왕비의 호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매년 그녀의 호의를 회복하려 노력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결코 바뀌지 않았다. 1784년 무렵, 그는 왕비의 호의를 얻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가장 큰 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었다.

이런 추기경의 약점을 잔 드 라 모트는 정확히 알아챘다. 그녀는 1784년 어느 무렵부터 추기경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 가지 거짓말을 시작했다. 자신이 왕비와 매우 친밀한 사이이며, 왕비가 사실은 추기경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거짓말이었다. 다만 베르사유의 정치적 사정상 그녀가 그것을 공개적으로 보일 수 없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추기경은 이 거짓말을 믿었다. 그가 그것을 믿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너무도 원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가장 쉽게 믿는다.


잔 드 라 모트의 초상화

위조된 편지들

1784년 가을, 잔 드 라 모트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그녀는 추기경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 편지들은 모두 그녀의 남편 니콜라 드 라 모트, 그리고 한 위조 전문가 레토 드 빌레트(Rétaux de Villette)가 만들어낸 위조품이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그것을 진짜라고 믿었다.

이 편지들의 내용은 점점 더 친밀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의의 표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사적인 우정에 가까운 어조가 되었다. 추기경은 매번 이 편지들을 받을 때마다 깊이 감격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왕비의 호의가 마침내 자신에게 오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

1784년 8월 11일, 잔은 한 가지 결정적인 사기를 시도했다. 그녀는 추기경에게 베르사유의 정원에서 왕비와 직접 만날 수 있는 비밀 약속을 잡아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자리에 나타날 가짜 왕비가 필요했다.

잔은 파리의 한 길거리에서 한 젊은 여자를 찾았다. 그녀의 이름은 니콜 르게이(Nicole Leguay)였다.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약간 닮은 외모를 가진, 그리 부유하지 않은 한 평민 여자였다. 잔은 그녀에게 한 가지 짧은 역할을 제안했다. 베르사유의 비너스의 숲(Bosquet de Vénus)에서, 어두운 밤에 한 추기경을 만나 짧은 인사를 건네는 역할이었다. 니콜 르게이는 그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동의했다.

그날 밤, 비너스의 숲에서 추기경 로앙은 자신이 평생 기다려 온 순간을 맞이했다. 어두운 정원의 한 길에서, 한 여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흰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어둠 속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추기경에게 짧은 장미 한 송이를 건네며 한 마디를 했다고 한다. "당신은 지난 일이 잊혀졌다는 사실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곧 자리를 떠났다. 추기경은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이 본 그 여자가 진짜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그날 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며칠 동안 평소처럼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호의가 마침내 자신에게 도달했다고 그는 확신했다.

이 한 번의 만남이 그 후의 모든 사기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추기경은 이제 잔 드 라 모트를 완전히 신뢰했다. 그녀가 무엇을 요구하든, 그는 그것이 왕비의 부탁이라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점의 목걸이가 사기에 휘말리다

1785년 1월, 두 보석상 베메르와 바상주는 거의 마지막 절망 속에 있었다. 그들은 목걸이를 팔지 못하면 곧 파산할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잔 드 라 모트가 그들에게 접근해, 자신이 왕비를 대신해 그 목걸이를 사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잔의 제안은 정교했다. 그녀에 따르면, 왕비는 그 목걸이를 정말로는 갖고 싶어 했지만, 가격이 너무 높아 직접 사는 모습을 남편에게 보일 수 없었다. 따라서 한 중개인을 통해 비밀리에 사고자 했다. 그 중개인이 바로 추기경 로앙이었다. 추기경이 목걸이의 대금을 분할 지불로 책임지고, 왕비는 그것을 받아 사적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두 보석상은 이 제안을 듣고 신중하게 검토했다. 그들은 추기경 로앙을 직접 만나 그가 정말로 이 거래의 책임자인지 확인했다. 추기경은 자신이 왕비의 부탁으로 이 일을 맡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는 보석상들에게 왕비의 친필이라고 주장하는 한 편지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 편지에는 "마리 앙투아네트 드 프랑스(Marie Antoinette de France)"라는 서명이 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이 있다. 진짜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코 "드 프랑스(de France)"라는 표현으로 서명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왕비는 자신의 이름만으로 서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드 프랑스"라는 표현은 프랑스 왕가의 자녀들이 사용하는 것이었지, 왕비 자신은 사용하지 않았다. 만약 보석상들이 베르사유의 관례를 좀 더 자세히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 편지가 위조라는 사실을 즉시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고, 추기경이 보여주는 편지를 진짜라고 믿어버렸다.

1785년 2월 1일, 두 보석상은 목걸이를 추기경 로앙에게 건넸다. 거래는 분할 지불 방식이었다. 첫 번째 지불은 같은 해 8월 1일에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고, 그 뒤로 약 6개월마다 추가 지불이 예정되어 있었다. 추기경은 목걸이를 받은 직후, 그것을 즉시 잔 드 라 모트에게 전달했다. 그녀가 왕비에게 그것을 가져다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 드 라 모트는 그것을 결코 왕비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과 위조 전문가 레토 드 빌레트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목걸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이아몬드들을 하나씩 떼어 내었고, 작은 묶음으로 분류해서 다른 나라의 보석상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니콜라 드 라 모트는 일부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영국으로 갔다. 그는 런던에서 그것들을 매우 헐값에 팔았다. 평생을 들여 만들어진 한 점의 위대한 목걸이는 그렇게 흩어졌다. 약 1년 동안 잔과 그녀의 일당은 다이아몬드를 팔아 막대한 돈을 손에 넣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화려한 마차, 새 집, 옷, 가구를 사들였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부는 베르사유에서 곧 작은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지불일

1785년 8월 1일은 첫 번째 지불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베메르와 바상주는 돈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추기경에게 정중히 문의했다. 추기경은 잔 드 라 모트에게 다시 문의했다. 잔은 한 가지 새로운 거짓말을 만들어내려 했지만, 더 이상 그것을 유지하기 어려운 단계에 와 있었다.

8월 9일, 한 보석상 베메르는 마침내 결심하고 직접 행동에 나섰다. 그는 베르사유로 가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면담은 거부되었다. 대신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인 마담 캉팡에게 한 통의 짧은 편지를 전달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이 있었다. "왕비께서 받으신 그 가장 아름다운 보석에 대한 약정을 마침내 마무리 지을 수 있어 우리는 행복합니다."

마담 캉팡은 이 편지를 즉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편지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보석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캉팡에게 베메르를 즉시 부르라고 명령했다.

이 면담에서 모든 진실이 한꺼번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베메르는 자신이 추기경 로앙에게 거대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넘겼고, 그것이 왕비의 부탁이었다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점차 분노에 빠졌다. 그녀는 어떤 부탁도 한 적이 없었고, 어떤 편지도 쓴 적이 없었으며, 어떤 중개인도 보낸 적이 없었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면담의 장면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메르의 설명을 들은 직후,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녀는 마침내 한 마디 짧게 말했다. "이것은 가장 끔찍한 일이에요. 나는 결백한데,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믿지 않을 거예요."

이 한 마디는 그녀의 직감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날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결백이 결코 충분히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직감하고 있었다.


바스티유 습격 장면

그리고 8월 15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즉시 루이 16세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다. 루이 16세는 며칠 동안 신중히 조사했고, 마침내 8월 15일 추기경 로앙을 어전 회의실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우리가 회의 처음에 본 장면, 즉 미사복 차림의 추기경이 베르사유 복도를 통해 바스티유로 끌려가는 풍경이 만들어졌다.

루이 16세의 이 결정은 후일 많은 역사가들에게 비판받았다. 그가 추기경을 좀 더 조용히 처리하지 않고, 그토록 공개적인 방식으로 체포한 것이 한 가지 큰 실수였다는 평가다. 만약 그가 추기경을 비공식적으로 만나, 사적으로 그의 사임과 침묵을 요구했더라면, 사건은 그토록 큰 규모로 폭발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추기경을 공개적으로 처벌하기로 했고, 그 결정은 곧 이 사건을 한 시대의 가장 큰 정치적 스캔들로 만들었다.

그의 결정의 배경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분노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자신이 결백한 사기 사건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깊이 분노했고, 그 분노를 공개적인 처벌을 통해 풀고자 했다. 그녀는 추기경이 어떻게 그토록 어리석게 한 사기꾼 여자의 말을 믿었는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그토록 가볍게 사용했는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추기경을 공개적으로 재판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결정의 결과는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년의 재판

추기경 로앙은 자신의 재판 방식을 직접 선택할 권리를 행사했다. 그는 왕의 직접 재판이 아니라, 파리 고등법원의 재판을 받기로 선택했다. 이것은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 왕의 직접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파리 고등법원의 재판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모든 증언이 기록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추기경의 이 선택은 분명히 정치적이었다. 그는 공개 재판을 통해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의 진상을 모든 시민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다.

재판은 1785년 가을부터 1786년 5월 31일까지 약 9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그동안 파리는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매주 새로운 증언과 새로운 폭로가 나왔고, 그것들은 즉시 풍자 팸플릿으로 만들어져 거리에서 팔렸다. 일반 시민들은 이 사건의 진행을 매우 자세히 따라갔다. 한 시대의 가장 큰 스캔들이 매주 새로운 장면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드러났다. 추기경 로앙은 분명히 잔 드 라 모트에게 속았다. 그는 그녀가 보여준 편지들이 위조라는 사실을 몰랐고, 비너스의 숲에서 만난 여자가 진짜 왕비가 아니라는 사실도 몰랐다. 잔 드 라 모트와 그녀의 일당은 의도적이고 정교한 사기를 저지른 범죄자였다.

이 사실들 앞에서, 파리 고등법원은 1786년 5월 31일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추기경 로앙은 무죄. 그는 사기에 속았을 뿐, 의도적으로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판결이었다. 잔 드 라 모트는 유죄. 그녀는 채찍질 형과 'V'(voleuse, 도둑) 자 낙인의 형을 받고, 종신형으로 살프페트리에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의 남편 니콜라 드 라 모트는 결석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영국으로 도망간 뒤였으므로, 실제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위조 전문가 레토 드 빌레트는 추방형. 비너스의 숲에서 가짜 왕비 역할을 한 니콜 르게이는 무죄.

이 판결은 한 가지 의미를 분명히 했다. 법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백했다. 그녀는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도 이 사기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추기경 로앙도 결백했다. 그는 사기의 피해자였지, 가해자가 아니었다.

이 판결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깊은 충격이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추기경 로앙의 처벌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죄로 풀려난다는 사실은, 곧 한 시대의 분위기가 그녀에게 등을 돌렸음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풍자의 폭발

재판이 진행되는 9개월 동안, 그리고 그 후의 몇 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풍자는 거의 폭발적인 수준으로 늘어났다. 그녀가 결백하다는 법원의 판결은 거의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믿은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가장 흔한 풍자는 다음과 같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말로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원했다. 그녀는 추기경에게 그것을 사 오라고 부탁했고, 그것을 받은 뒤 비밀리에 다이아몬드들을 해체해 자신의 다른 보석에 사용했다. 그리고 사건이 폭로되자,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추기경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는 것이다. 잔 드 라 모트는 한 가짜 희생자였다. 진짜 사기꾼은 왕비 자신이었다.

이 풍자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그 시대의 법적 기록만 검토해도 분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실의 검토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국 사실이 아니더라도 한 시대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충분한 힘을 가졌다.

또 다른 풍자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추기경 로앙이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였다는 풍자였다. 비너스의 숲에서의 만남은 가짜였지만, 사람들은 그 만남이 진짜였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만남의 의미를 자신들의 상상으로 채웠다. 한 추기경과 한 왕비가 어두운 정원에서 비밀스럽게 만났다는 이야기는, 모든 종류의 익명 팸플릿에 가장 좋은 소재가 되었다.

이 풍자들의 무게는 점점 더 커졌다. 1786년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베르사유 바깥의 어디로든 외출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짧은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파리의 오페라극장에 가면, 박수 대신 침묵이 그녀를 맞이했다. 한때 가장 사랑받던 왕비는, 이제 가장 미움받는 왕비가 되어 있었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변화를 깊은 슬픔으로 기록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한 시대의 적대감이 결정적으로 굳어진 사건이었다. 그 이전까지의 풍자는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이 일반 시민들의 일상에 그토록 깊이 자리 잡은 것은 이 사건 이후의 일이었다.


한 시대의 분위기가 결정되다

이 사건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에 있다. 한 시대의 분위기가 결정되면, 그 분위기 안에서는 사실 자체가 더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785년 이전에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난은 있었다. 그러나 그 비난은 아직 한 가지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녀의 옷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 그녀가 폴리냐크 가문에 너무 많은 호의를 보낸다는 것, 그녀가 베르사유의 의식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 이런 비판들은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고, 따라서 어느 정도의 변호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이후, 비난의 성격이 바뀌었다. 이제 비난은 어떤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가지 일반적인 분위기, 즉 "왕비는 어떤 식으로든 죄가 있다"라는 분위기였다. 그녀의 결백을 보여주는 어떤 증거가 나와도, 그 증거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그녀는 정말로 결백한 것이 아니라, 결백해 보이도록 모든 것을 정교하게 꾸민 것이다." 이런 식의 해석 앞에서는 어떤 변호도 무력했다.

이 분위기는 한 사람의 평판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치적 신뢰에 대한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백하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졌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결백한데도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면, 한 왕정 안에서는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한 추기경이 한 사기꾼 여자의 말을 그토록 쉽게 믿을 수 있다면, 그 추기경을 길러낸 한 왕정의 도덕적 수준은 어떠한가. 한 왕비의 이름이 그토록 쉽게 위조될 수 있다면, 한 왕정의 권위는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한 왕정의 전체적인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단순한 사기 사건을 넘어 한 시대의 정치적 사건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한 왕정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한 가지 분명한 의문 부호를 던졌다. 그리고 그 의문 부호가 한번 던져진 뒤로는, 그것을 다시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후일 나폴레옹은 이 사건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왕비의 죽음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1793년 그녀가 처형되었을 때, 그녀를 단두대로 보낸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히 1789년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그 정치적 사건들이 그토록 잔혹한 결말로 이어진 한 가지 배경에는, 1785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이후 만들어진 한 시대의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그녀를 죄인으로 보고 있었다. 단두대는 단지 그 시선을 한 가지 결말로 옮긴 도구였을 뿐이다.


잔 드 라 모트의 그 후

이 사건의 또 한 가지 흥미로운 후일담은 잔 드 라 모트의 운명이다. 그녀는 살프페트리에르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1787년 6월 어느 날 감옥에서 탈출했다. 그녀의 탈출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한 가지 설은 그녀가 감옥 안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누구였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탈출 후 그녀는 영국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 회고록에서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자신이 사실은 매우 친밀한 사이였으며,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모든 진실은 왕비가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회고록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곧 프랑스로 흘러 들어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새로운 풍자의 자료가 되었다.

잔 드 라 모트는 1791년 8월 23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한 창문에서 떨어진 결과였다. 그녀가 자살했는지, 사고였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분명한 결론이 없다. 한 시대의 가장 큰 사기를 저지른 한 여자가, 그토록 모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한 가지 작은 풍경이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마리 앙투아네트의 완전한 결백에 대한 증언으로 다룬다. 그녀의 시선에서, 왕비는 한 점의 다이아몬드도 보지 못했고, 한 문장의 편지도 쓰지 않았으며, 한 번의 만남도 가지지 않았다. 이 점은 후대 역사가들의 거의 일치된 평가이기도 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법적으로도, 역사적 사실로도, 이 사건에 대해 결백하다. 그러나 후대의 일부 역사가들은 캉팡이 다루지 않은 한 가지 차원을 추가한다. 그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백이 그녀를 정치적 비난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다. 한 사람의 사실적 결백이 그 사람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상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한 시대의 분위기가 이미 사실의 영역을 떠나 정치적 상징의 영역으로 이동한 결과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한 시대의 정치적 상징으로 굳혔다. 그녀는 더 이상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한 왕정의 모든 문제점을 압축한 한 가지 상징이 되었다. 한번 상징이 된 사람은 자신의 결백으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다. 상징은 사실 너머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캉팡은 이 차원을 충분히 분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회고록에서 거듭 표현한 안타까움, 즉 "왕비는 결백한데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라는 그 안타까움 안에, 이 차원에 대한 직감적 이해가 분명히 들어 있다. 한 시대를 통제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분위기이며, 그 분위기가 한번 굳어지면 어떤 사실도 그것을 흔들 수 없다. 이것이 1785년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아간 시간의 진실이다.


다음 회 예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진행되던 1785년과 1786년 사이, 베르사유의 회계실에서는 또 다른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프랑스 왕실의 재정이 점점 더 통제할 수 없는 적자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무총감 칼론은 1786년 한 가지 결정적인 개혁안을 내놓았다.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부과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곧 명사회의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그 좌절은 한 왕정의 무능을 보여주는 마지막 신호가 되었다. 다음 회에서는 1786년부터 1789년 5월 삼부회 개회까지, 한 왕정의 재정이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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