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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0. 1778년, 첫 출산의 굴욕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0.

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0. 1778년, 첫 출산의 굴욕

"왕비께서 마침내 신음을 흘리시며 '아이가 나오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방 안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 군중은 너무도 많고 너무도 거칠어, 그 흐름이 왕비의 침대를 거의 무너뜨릴 정도였다. 굴뚝 청소부들과 거리의 짐꾼들조차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후일 사람들은 말했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18세기 프랑스 왕실 출산실의 풍경

한 관습의 무게

18세기 프랑스 왕실에는 한 가지 분명한 관습이 있었다. 왕비의 출산은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관습의 뿌리는 깊고 멀다. 중세 유럽의 여러 왕실에서, 왕비가 낳은 아이가 진짜 왕비의 아이인지를 의심하는 시선이 늘 존재했다. 만약 아이가 죽은 채로 태어나거나, 약한 모습으로 태어나면, 누군가 다른 건강한 아이로 바꾸어 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는 정반대로, 왕비가 임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여자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심들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흔들 수 있었다.

따라서 왕실은 한 가지 답을 만들었다. 출산의 모든 과정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왕비가 산통을 시작하면, 왕실의 신하들과 가까운 친척들, 그리고 일부 외부 인사들까지 출산이 이루어지는 방에 들어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그래야만 아이가 정말로 왕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의심 없이 확인될 수 있었다.

이 관습이 출산하는 여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가장 사적이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위험한 한 시간이 수십 명의 낯선 시선 앞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더구나 18세기의 의학 수준에서 출산은 단순한 자연의 과정이 아니라 실제로 죽음에 가까운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그 위험과 고통의 순간이 곧 공적인 의식이 되어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첫 출산을 앞두고 있던 1778년 12월, 그녀는 이 관습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고모들과 시녀들이 그녀에게 이 관습을 자세히 설명했고,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지를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그 자리에 놓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임신, 그리고 9개월의 시선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 임신은 1778년 봄에 확인되었다. 결혼한 지 8년 만이었다. 이 소식이 베르사유에 알려지자, 궁정의 분위기는 즉시 달라졌다. 풍자 시들은 한동안 잠잠해졌고, 시고모들조차 며느리에게 좀 더 친절해졌다. 빈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답장이 도착하기까지의 그 보름 동안을, 평생 가장 길게 느낀 시간 가운데 하나라고 후일 회고했다.

그러나 임신의 9개월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임신 초기부터 심각한 입덧을 겪었고, 한동안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또한 그녀는 잠을 깊이 자지 못했다. 임신 후기에는 다리가 부어 걷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캉팡은 이 시기의 왕비를 회고록에서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왕비는 종종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놀라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녀는 작은 발길질이 처음 느껴졌을 때, 그것을 캉팡에게 알리며 거의 환희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8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자신이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일 새롭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두려워했다. 18세기의 산모 사망률은 결코 낮지 않았다. 평민 여성의 경우 출산 한 번에 약 1퍼센트의 사망률이 있었고, 합병증을 겪을 가능성은 그보다 훨씬 높았다. 더구나 왕실의 산모들이라고 해서 사망률이 낮지는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할머니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여러 아이를 낳으며 여러 번 생명의 위험을 겪었고, 다른 유럽 왕실에서도 산모가 출산 중 또는 직후에 사망한 경우는 결코 드물지 않았다.

빈의 어머니는 거의 매주 편지를 보냈다. 임신한 딸에게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어떻게 운동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자야 하는지.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이 16명의 아이를 낳은 산모였기 때문에, 그녀의 조언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의 편지를 모두 진지하게 읽었고, 그 조언의 상당 부분을 따랐다.


베르사유 왕비의 침실

12월 18일 밤, 산통의 시작

1778년 12월 18일 저녁,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소처럼 가벼운 저녁 식사를 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 그녀는 가벼운 불편함을 느꼈다. 시녀들은 즉시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산통이 시작되었음을 확인했다.

베르사유의 관습대로, 즉시 모든 사람들에게 알림이 보내졌다. 왕실 가족, 가까운 신하들, 그리고 베르사유에 머물고 있던 모든 외교관들. 이 사람들은 모두 출산실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거나, 적어도 출산실 가까이에서 대기할 자격이 있었다. 베르사유의 복도들에는 한밤중인데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출산실은 베르사유 본궁의 왕비 침실이었다. 그 방은 본래 화려했지만, 출산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침대가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그 침대는 의도적으로 방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모든 방향에서 보일 수 있도록.

산통은 처음에는 천천히 진행되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 몇 시간 동안 비교적 차분했다고 한다. 그녀는 시녀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가끔씩 캉팡에게 손을 내밀어 잡았다. 캉팡은 그 손이 너무도 차가웠다고 기록한다. 두려움의 차가움이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다. 산통은 점점 더 깊어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더 이상 차분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고, 의사들의 손이 그녀의 몸을 거듭 살피러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이 수십 개의 시선 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2월 19일 아침, 그 방의 풍경

12월 19일 아침 11시 30분경, 마침내 출산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이가 나오고 있다"라고 말한 그 순간, 방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순간의 풍경을 매우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그녀에 따르면, 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수는 도저히 셀 수 없었다. 왕족, 귀족, 외교관, 시종, 신하들. 그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침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일부는 침대 위에까지 올라갈 정도였다. 누군가는 침대의 기둥에 매달려 더 잘 보려고 했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기도 했다.

당시 베르사유에서 떠돌던 이야기에 따르면, 심지어 베르사유 본궁의 굴뚝 청소부 한 사람과 거리의 짐꾼 두 사람까지 그 방에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캉팡은 이 부분을 회고록에서 다소 조심스럽게 인용하지만, 그 풍경이 얼마나 통제되지 않은 상황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본래 출산실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정해져 있었지만,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그 통제선이 무너졌다.

방 안의 공기는 끔찍했다. 12월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의 열기가 방을 가득 채웠다. 양초들이 산소를 더 빼앗아갔다. 산모와 의사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던 시녀들은 거의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 그녀는 출산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수십 개의 시선 앞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신음 소리, 그녀의 표정, 그녀의 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 방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마침내 11시 45분경, 아이가 태어났다. 그 순간 방 안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의 성별이었다.


딸이라는 사실

방 안에서 마침내 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Madame)이십니다."

이 한 마디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첫 아이는 딸이었다. 프랑스 왕가의 살리카 법(Loi salique)에 따르면, 여자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첫 아이는 후계자가 아니었다. 8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태어난 아이가 후계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베르사유의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실망이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즉시 가라앉았다. 환호도 박수도 없었다. 그저 의무적인 짧은 인사들과,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만 있었다. 후계자가 태어났다면, 베르사유 전체에서 종이 울리고 폭죽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딸의 출생은 그런 축하를 동반하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은 이 사실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캉팡의 회고록은 그녀의 첫 반응을 짧게 기록한다. 의사가 아이의 성별을 알린 직후, 왕비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고 한다. "가엾은 작은 아이야. 너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실망했구나. 그러나 너는 내 것이고, 더 적게 사랑받지 않을 거란다."

이 짧은 문장은 그 후 여러 곳에서 인용되어 왔다. 그것이 정확히 그녀가 한 말 그대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캉팡이 회고록을 쓴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약 40년 뒤의 일이고, 그녀가 그 정확한 표현을 기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말의 정신, 즉 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보낸 그 첫 약속의 정신은 진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후 평생 자신의 첫 딸 마리 테레즈를 깊이 사랑했고, 그 사랑은 그녀의 자녀들 가운데 가장 변함없는 것이었다.


어린 마리 테레즈를 안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어머니의 위기

그러나 이 첫 출산은 단순히 성별에 대한 실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더 큰 위기가 곧 다가왔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방 안에 모인 군중과 부족한 공기, 그리고 출산의 고통이 모두 겹친 결과였다. 그녀는 갑자기 의식을 잃었고, 얼굴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의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가장 먼저 상황을 알아챘다. 그는 왕비가 호흡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즉시 외쳤다고 한다. "공기! 따뜻한 물! 그녀가 죽는다!"

이 순간 방 안에서 한 가지 결정적인 행동이 있었다. 베르사유의 한 신하, 정확한 신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지만 라 보뇌프(La Bonneuf)라는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방의 한쪽 창문으로 달려가, 그것을 망치로 부수기 시작했다. 12월의 추운 날씨였지만, 그는 창문을 깨야만 신선한 공기가 방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창문이 깨지자 차가운 12월의 공기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의사들은 즉시 왕비의 몸에 따뜻한 물을 부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시 사혈(瀉血)을 시도했다. 18세기 의학에서 사혈은 거의 모든 위급 상황에 사용된 표준 처치였다. 의사는 왕비의 발에서 피를 뽑기 시작했다.

이 모든 처치가 효과를 보았는지, 마리 앙투아네트는 곧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 회복은 분명히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캉팡의 회고록에 따르면, 의식을 되찾은 그녀가 처음 한 말은 "아이가 어디 있나요?"였다. 자신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이 위기는 베르사유의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만약 그 신하가 창문을 깨는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의사들의 처치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날 죽었을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의 출산이 그토록 많은 시선과 그토록 부족한 공기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산모를 죽음의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 그날 분명히 드러났다.


한 어머니의 시작

회복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첫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첫 만남을 가졌다. 베르사유의 관습대로 아이는 즉시 가정교사에게 맡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관습을 일부 수정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자주 보고 싶어 했고, 가능한 한 자신이 직접 돌보고 싶어 했다.

이 결정은 베르사유의 일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본래 왕실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직접 돌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이의 양육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가정교사와 유모, 시녀들이 모든 일을 맡았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아이를 안았고, 직접 아이의 우는 소리에 반응했으며, 직접 아이의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양육 방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 가지는 분명히 그녀 자신의 어머니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한 명에게도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들의 교육에 직접 관여했고, 매일 그들의 진도를 보고받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그 양육의 방식이 자신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또 한 가지 원인은 그 무렵 유럽 전체에 퍼지고 있던 새로운 양육 사상이었다. 1762년 장 자크 루소는 『에밀』을 출간했다. 이 책은 자녀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부모의 따뜻한 관여 속에서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1770년대 후반의 유럽 상류층 어머니들 사이에서 루소의 사상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어머니가 직접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일조차 한 시대의 새로운 유행이 되어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직접 모유를 먹이지는 않았다. 왕실의 관습이 그 정도까지는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자녀들과 가까이 지내려 노력했다. 마리 테레즈가 자라면서, 그녀는 종종 딸을 자신의 침실로 데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장면들을 자주 묘사한다. 화려한 베르사유의 의식에서 멀리 떨어진 한 어머니의 사적 공간, 그 안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


관습의 변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 출산이 거의 그녀의 생명을 빼앗을 뻔한 사건이 된 뒤, 베르사유의 관습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781년 그녀가 둘째 아이, 즉 후계자 루이 조제프를 낳을 때는 출산실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분명히 제한되었다. 1785년 셋째 아이 루이 샤를을 낳을 때, 1786년 넷째 아이 소피를 낳을 때도 같은 제한이 적용되었다.

이것은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한 시대의 관습이 한 여자의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통해 바뀐 사례였다. 마리 앙투아네트 이후의 프랑스 왕비들은 더 이상 그토록 많은 시선 앞에서 출산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789년 혁명 이후 왕정 자체가 무너지면서, 이 공개 출산의 관습은 영원히 사라졌다.

캉팡은 이 변화를 회고록에서 짧게 언급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1778년의 그 끔찍한 출산은 한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한 여자의 고통이 한 시대의 잔인한 관습을 흔들었다는 의미였다. 모든 변화가 그렇듯, 이 변화도 한 사람의 희생에 가까운 경험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1778년 12월의 출산을 매우 생생하게 기록한다. 그러나 후대의 의학사 연구자들은 그녀의 기록 가운데 일부를 보충적으로 검토한다. 특히 출산실에 굴뚝 청소부와 거리의 짐꾼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캉팡이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후일의 전언을 옮긴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 풍경은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왕정 옹호 진영의 동정적 서사에서 자주 강조되었고, 따라서 그 풍경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과장인지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 18세기 프랑스 왕실의 공개 출산 관습은 실제로 매우 가혹한 것이었고, 산모를 죽음에 가까운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종류였다. 둘째,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 출산은 실제로 그녀의 생명을 위협한 사건이었고, 그 이후 왕실의 관습이 분명히 바뀌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어떤 기록의 세부적 진실성과 무관하게, 한 시대의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 여자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가장 사적인 순간을 견뎌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견딤이 결국 한 가지 작은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사실. 그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에서 거의 유일하게 분명한 '변화의 흔적'이기도 하다.

 


다음 회 예고

1778년 첫 딸 마리 테레즈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세 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1781년 후계자 루이 조제프, 1785년 둘째 아들 루이 샤를, 그리고 1786년 막내딸 소피.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된 한 여자에게, 어머니라는 자리는 어떤 의미였는가. 그리고 그 어머니의 자리가 공적 이미지와 얼마나 달랐는지를, 캉팡은 가장 가까이서 보았다. 다음 회에서는 베르사유 본궁의 화려한 의식 너머에 있던 한 어머니의 사적 공간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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