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08. 폴리냐크 공작부인: 위험한 우정
"왕비께서는 그분을 사랑하셨다. 깊이,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종종 분별없이 사랑하셨다. 폴리냐크 공작부인은 왕비의 마음을 차지한 단 한 사람이었고, 그 마음의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의 가문 전체를 위해 가장 많은 것을 얻어냈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한 무도회의 만남
1775년 겨울, 베르사유의 한 무도회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여자를 보았다. 검은 머리에 어딘가 차분한 인상의 그 여자는 무도회의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지 않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오히려 어린 왕비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의 이름은 욜랑드 마르틴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 결혼 후의 이름으로는 폴리냐크 백작부인이었다. 1749년에 태어났으므로, 1775년 당시 26세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여섯 살 위였다. 그녀의 가문은 프랑스 남부의 오래된 귀족 가문이었지만, 결코 부유하지는 않았다. 결혼한 남편 쥘 드 폴리냐크 또한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두 사람의 재정 상태는 베르사유 궁정의 다른 귀족들에 비해 매우 모자랐다.
그날 무도회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냐크 부인을 자신에게 소개해 달라고 청했다. 짧은 인사가 오갔다. 캉팡의 회고록에 따르면, 왕비는 새 친구에게 곧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왜 베르사유에 더 자주 오지 않느냐고. 폴리냐크 부인의 대답은 솔직했다. 자신의 가문이 이곳에서 머물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솔직한 대답이 어린 왕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베르사유에서 그녀가 매일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왕비에게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가식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한 여자는 자신의 가난을 그대로 말했다. 어떤 청탁도 하지 않았고, 어떤 호의도 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말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냐크 부인을 자신의 가까운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우정은 14년 동안 이어진다. 1789년 혁명이 일어나 폴리냐크 부인이 프랑스를 떠나야 했을 때까지.
자연스러움이라는 매력
폴리냐크 부인의 매력은 무엇이었는가. 회고록과 동시대 기록들을 모아 보면, 그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그녀는 베르사유의 다른 귀족 부인들이 흔히 보였던 가식과 과장이 거의 없었다. 차분한 목소리, 자연스러운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그녀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시켰다.
캉팡은 회고록에서 이 점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폴리냐크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 앞에서 다른 시녀들처럼 끊임없이 무릎을 굽히고 인사하지 않았다. 그녀는 왕비의 응접실에서 종종 한쪽 소파에 편안히 앉아 있었고, 책을 펼쳐 읽거나 자수를 놓곤 했다. 그녀가 왕비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왕비가 무언가를 묻거나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녀는 솔직한 의견을 짧고 분명하게 말했다.
이런 태도가 왕비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매일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릎 꿇고 가식적인 미소를 보내는 환경에서, 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행동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거대한 매력이었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냐크 부인 곁에서 평범한 한 여자가 될 수 있었다. 화려한 의식의 주인공이 아니라, 친구와 책을 함께 읽는 한 사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또한 폴리냐크 부인은 외모도 아름다웠다. 동시대 기록들은 그녀의 차분한 우아함을 여러 곳에서 묘사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베르사유의 다른 귀족 부인들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되지 않은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옷차림 속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 그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티 트리아농에서 추구하던 미학과도 닮아 있었다. 어쩌면 두 여자의 우정은, 한 시대의 새로운 미적 감각을 함께 공유한 사람들의 우정이기도 했다.
한 가문이 베르사유로 들어오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냐크 부인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폴리냐크 가문 전체가 베르사유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775년 처음 무도회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이 가문은, 1780년대 중반에 이르면 프랑스 최고의 부유한 가문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변화의 거의 모든 부분은 왕비의 호의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폴리냐크 부인 본인의 지위가 올라갔다. 1780년, 그녀의 가문은 공작 작위를 받았다. 이제 그녀는 폴리냐크 백작부인이 아니라 폴리냐크 공작부인이 되었다. 같은 해, 그녀는 왕세자 시절부터 미래의 왕세자녀를 위해 마련된 가정교사직, 즉 '왕가 자녀들의 가정교사(Gouvernante des Enfants de France)'라는 매우 권위 있는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 자리는 왕비의 자녀들의 양육을 책임지는 직책이었고, 동시에 매년 막대한 봉급이 따르는 자리였다.
다음으로 폴리냐크 부인의 남편이 혜택을 받았다. 그는 우편국 총감(Surintendant des Postes)이라는 자리를 얻었다. 이것은 본래 그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지만, 왕비의 영향력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의 연봉만으로도 한 귀족 가문이 풍족하게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폴리냐크 부인의 시누이, 즉 남편의 누이인 다이안 드 폴리냐크도 베르사유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왕비의 여동생 격인 마담 엘리자베트의 시녀가 되었다. 그 외에도 폴리냐크 가문의 친척과 인척들이 차례로 베르사유의 여러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 모든 자리들에는 막대한 봉급이 따랐다. 캉팡의 회고록과 다른 동시대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폴리냐크 가문이 1780년대 중반 베르사유에서 받은 봉급과 연금, 기타 수당을 모두 합치면 연간 약 50만 리브르에 달했다는 추정이 있다. 이것은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한 가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액수 가운데 하나였다.
더구나 이런 봉급 외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냐크 가문에 사적인 선물을 자주 보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석, 마차, 시골 별장을 선물했다. 한번은 폴리냐크 가문의 한 친척이 빚을 지자, 왕비는 그 빚을 자신의 사적 자금으로 갚아 주기도 했다.

캉팡이 본 위험
캉팡은 폴리냐크 가문에 대한 왕비의 후의를 회고록에서 비교적 분명한 어조로 비판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이것은 우정이라기보다 한 가문에 대한 일방적인 부의 이전이었다. 그리고 그 부의 이전은 결국 한 왕비의 평판을 결정적으로 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캉팡이 우려한 것은 폴리냐크 부인이 정말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랑하는가, 라는 점이었다. 캉팡이 가까이서 본 폴리냐크 부인은 차분하고 똑똑한 여자였지만, 동시에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왕비의 호의를 자신의 가문을 위해 효율적으로 활용했고, 그 활용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캉팡의 회고록에는 폴리냐크 부인이 왕비에게 새로운 청탁을 하는 장면들이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다. 자신의 친척에게 어떤 자리를, 자신의 친구에게 어떤 연금을. 왕비는 거의 모든 청탁을 들어주었다.
또한 폴리냐크 부인의 주변에는 그녀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베젠발 남작(Baron de Besenval)이었다. 그는 스위스 출신의 군인이자 정신가로, 폴리냐크 부인의 살롱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의 정치적 야심은 컸고, 그는 폴리냐크 부인을 통해 왕비에게 영향을 미치려 노력했다. 또 다른 인물로는 베스기에 후작과 코아니 공작 등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폴리냐크 살롱(coterie polignac)'이라 불리는 정치적 집단을 형성했다.
이 살롱이 왕비의 정치적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어떤 연구자들은 그 영향이 결정적이었다고 보고, 어떤 연구자들은 그 영향이 과장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살롱의 존재가 베르사유 안에서 깊은 적대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폴리냐크 살롱에 끼지 못한 다른 귀족들, 특히 더 오래된 명문 가문 출신의 귀족들은 새로 부상한 이 신흥 집단에 대해 깊은 불쾌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 불쾌감은 곧 왕비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캉팡은 회고록에서 여러 번 왕비에게 폴리냐크 부인과의 우정을 좀 더 신중하게 다루라고 조언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사랑했고, 그 사랑을 누구에게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가정교사의 자리
폴리냐크 부인이 왕비의 자녀들의 가정교사가 된 것은 1782년의 일이었다. 본래 이 자리는 1780년 그녀에게 약속되었지만, 그 무렵 가정교사 자리에는 이미 게멘에 공주(Princesse de Guéménée)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가문이 파산하면서 게멘에 공주가 자리를 떠나게 되었고, 그 자리가 폴리냐크 부인에게 넘어갔다.
이 임명은 베르사유 안에서 깊은 충격을 주었다. 왕가 자녀들의 가정교사는 본래 가장 오래된 명문 가문에서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비교적 신흥 가문인 폴리냐크 가문의 여자가 이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더구나 폴리냐크 부인은 양육에 대한 어떤 특별한 자격이나 경험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자격은 단 하나, 왕비의 친구라는 사실이었다.
캉팡은 이 임명을 회고록에서 깊은 우려로 기록한다. 그녀가 본 폴리냐크 부인은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한 나라 왕가의 자녀들을 책임지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양육보다 사교 생활에 더 큰 관심을 두었고, 자신의 직무를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째 딸인 마리 테레즈와 큰아들 루이 조제프는 실질적으로 폴리냐크 부인의 시누이인 다이안 드 폴리냐크와 다른 보조 시녀들의 손에 양육되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친구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자녀들의 양육에 대한 그녀의 신뢰는 친구 본인에 대한 신뢰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흐리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랑은 그런 흐림이 분명히 있었다.
적자 부인이라는 이름의 뿌리
1780년대 중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난은 '적자 부인(Madame Déficit)'이라는 별명으로 응축되어 있었다. 이 별명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정치적 분노가 한 사람의 이름에 압축된 결과였다. 그리고 그 분노의 한 가지 큰 원인이 바로 폴리냐크 가문에 대한 왕비의 후의였다.
파리의 시민들이 보기에, 폴리냐크 가문의 부상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왕비는 한 친구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국가의 재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비난이 완전히 공정한가에 대해서는 다시 따져 볼 여지가 있다. 폴리냐크 가문이 받은 봉급과 연금은 분명히 컸지만, 그것이 프랑스 전체의 재정 적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했다. 진짜 재정 위기의 원인은 미국 독립 전쟁 지원 비용, 누적된 부채, 면세 특권에 따른 세제 구조 등이었다.
그러나 추상적인 재정 문제는 한 사람의 이름만큼 강력한 분노의 표적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한 사람의 친구가 왕실의 돈으로 부유해진다는 구체적인 이야기에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곧 왕비 자신에게 향했다.
특히 1786년경부터 프랑스의 재정 위기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이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재무총감 칼론은 그해 새로운 세제 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이 개혁안은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부과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명사회의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그 좌절은 곧 왕정의 무능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왜 왕정은 자신의 친구들에게는 막대한 봉급을 주면서, 평범한 백성에게는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폴리냐크 가문은 한 시대의 분노가 향하는 가장 분명한 표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가문을 가장 가까이서 보호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분노가 그녀에게 향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1789년 7월, 친구의 도피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가 함락된 직후, 베르사유의 분위기는 급격히 바뀌었다. 왕정의 권위는 빠르게 약해지고 있었고, 혁명 세력의 적대가 누구를 향할지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 적대의 표적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폴리냐크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알려져 있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한 죄목이 되었다.
7월 16일 밤,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즉시 프랑스를 떠나라고 권유했다. 베르사유에 남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이었다. 폴리냐크 부인은 처음에는 거부했다. 그녀는 친구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호했다. 친구의 안전이 자신의 곁에 친구를 두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캉팡은 이 마지막 만남을 회고록에서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두 여자는 짧지만 깊은 작별을 나누었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친구에게 한 통의 편지를 건넸다. 그 편지의 내용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14년 우정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7월 17일 새벽, 폴리냐크 가문의 마차가 베르사유를 떠났다. 그들은 평민의 옷을 입고, 일반 여행자처럼 위장했다. 마차는 프랑스 동쪽 국경으로 향했고, 며칠 뒤 그들은 스위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오스트리아령으로 이동했고, 마침내 우크라이나의 한 작은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친구가 안전하게 망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캉팡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녀는 마침내 짧게 말했다. "이제 그분은 살아있을 거예요. 그것만이 중요해요."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망명, 그리고 마지막 소식
폴리냐크 가문은 망명 생활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식을 끊임없이 받아보았다. 1790년, 1791년, 1792년. 베르사유에서 시작된 혁명은 점점 더 폭력적인 방향으로 흘러갔고, 왕실 가족은 점점 더 깊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1793년 10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우크라이나의 폴리냐크 가문에 도착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폴리냐크 공작부인의 반응은 회고록과 다른 기록들에 짧게 전해진다. 그녀는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고, 점차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두 달 뒤인 1793년 12월 5일, 폴리냐크 공작부인은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44세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동시대 기록들은 그녀가 친구의 처형 소식으로 인한 슬픔으로 무너졌다고 전한다.
이 사실은 한 가지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정말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랑했는가, 라는 질문. 캉팡이 회고록에서 거듭 의심한 그 질문 말이다. 폴리냐크 부인이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분명히 왕비의 호의를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해 영리하게 활용했다. 그러나 친구가 죽고 두 달 만에 자신도 따라 무너졌다는 사실은, 그 우정 속에 무언가 진심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으려 할 수 있다. 마음의 두 가지 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폴리냐크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랑했고, 동시에 그녀를 통해 자신의 가문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진실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친구를 사랑했고, 알면서도 그 사랑을 멈추지 못했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폴리냐크 공작부인에 대해 분명히 비판적인 어조를 유지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이 친구는 왕비를 위험에 빠뜨린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 특히 안토니아 프레이저와 캐롤라인 웨버는 이 관계를 좀 더 균형 있게 본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왕실의 후의 시스템 자체가 이런 종류의 부의 집중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구조였다는 사실이다. 한 명의 왕이나 왕비의 호의가 한 가문의 부를 결정할 수 있는 시대에, 그 호의를 얻은 사람과 그 가문이 부유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폴리냐크 가문이 받은 봉급과 연금은 분명히 컸지만, 그것은 비슷한 위치에 있던 다른 총신 가문들이 받았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비난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냐크 가문에 집중된 데에는, 두 사람이 여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우정이 깊었다는 사실도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여자들의 우정에 대한 사회적 의심, 그리고 그 우정에 정치적 부패의 의미를 덧씌우는 풍자의 전통이 이 시대 프랑스에는 분명히 존재했다. 캉팡은 이 차원을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한 우정을 단순한 정치적 부패로 환원하지 않으려면, 두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인간적인 결을 함께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다음 회 예고
폴리냐크 부인이 1789년 7월 망명을 떠난 뒤,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에는 또 한 사람의 친구가 남았다. 람발 공주, 마리 루이즈 테레즈 드 사부아 카리냥.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왕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친구의 망명을 권유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람발 공주에게는 같은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그리고 1792년 9월, 람발 공주는 파리의 한 감옥 앞에서 군중에게 갈가리 찢겨 죽음을 맞이한다. 한 우정이 끝까지 충실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장 끔찍한 비극이 되었는가. 다음 회에서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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