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7. 튀일리궁의 포로들
"그분께서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일어나셨고, 같은 시각에 자녀들을 만나셨으며, 같은 시각에 자수를 시작하셨다. 베르사유의 일과를 그대로 옮겨오려 노력하셨지만, 튀일리궁 안에서 그것은 같은 일과가 될 수 없었다. 한 왕비의 일과가 어디서 끝나고 한 포로의 일과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그분 자신께서도 더 이상 분명히 알지 못하셨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한 거처의 모양
튀일리궁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모순을 보여주는 건물이었다. 그것은 1564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짓기 시작한 르네상스풍의 궁전이었고, 17세기와 18세기에 여러 차례 확장되었다. 길이 약 266미터의 가늘고 긴 형태로, 한쪽 끝은 루브르궁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 끝은 튀일리 정원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본래 한 왕정의 한 가지 공식 거처였지만, 168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옮겨간 뒤로는 거의 빈 채로 남아 있었다.
1789년 10월 6일 한 왕정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 건물의 상태는 거의 폐가에 가까웠다. 약 100년 동안 한 왕정이 사용하지 않은 건물이었다. 일부 방의 벽지는 빛바래 있었고, 일부 천장에는 비가 새는 흔적이 있었다. 가구는 거의 없었고, 침구도 충분하지 않았다. 한 왕정이 그곳에 머무는 동안 사용할 모든 가구와 비품이 베르사유에서 차례로 옮겨져 와야 했다.
이 옮겨오는 과정 자체가 한 가지 풍경을 만들었다. 베르사유에서 튀일리궁으로 향하는 마차의 행렬이 그 후 몇 주 동안 끊이지 않았다. 마차에는 침대, 책상, 거울, 도자기, 그림, 그리고 한 왕정의 일상에 필요한 모든 작은 물건들이 실려 있었다. 그 마차들이 파리 거리를 지날 때마다 시민들은 그 풍경을 보았다. 한 왕정의 거처가 통째로 옮겨지고 있다는 시각적 풍경이, 그 자체로 한 시대의 변화를 압축한 인상이었다.
튀일리궁의 새로운 거주자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루이 16세는 1층의 한 방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에는 그의 침실, 작은 서재, 그리고 그의 평생 취미인 자물쇠 작업실이 포함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층의 다른 한 방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에는 그녀의 침실, 사적 살롱, 그리고 작은 자수 작업실이 포함되었다. 어린 자녀들 마리 테레즈와 루이 샤를은 어머니의 거처 가까이에 자신들의 방을 가졌다.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는 또 다른 한 방에 거처를 두었다.
이 배치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를 만들었다. 베르사유에서 한 왕과 한 왕비는 서로 다른 건물의 다른 층에 있는 거대한 거처에서 생활했고,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는 여러 시종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튀일리궁의 좁은 공간에서는 모든 가족이 한 층의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었다. 그것은 한 가족이 가장 가까이 모인 시기였고, 동시에 한 가족이 가장 함께 갇힌 시기였다.
매일의 일과를 다시 짓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튀일리궁에서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한 가지 일상의 회복이었다. 그녀는 베르사유에서 18년 동안 따라온 일과를 가능한 한 그대로 옮겨오려 했다. 그것이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다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녀는 느꼈다.
그녀의 일과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아침 9시에 일어나 짧은 기도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그 후 시녀들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 가벼운 아침 식사를 했다. 오전 10시 무렵 자녀들의 방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녀들과 약 한 시간 동안 시간을 보냈다. 마리 테레즈가 어머니 앞에서 자신의 학습 진도를 짧게 보였고, 어린 루이 샤를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짧은 이야기를 들었다.
오전 11시 무렵 그녀는 자신의 사적 살롱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두 명의 가까운 시녀와 함께 자수를 놓거나 책을 읽었다. 가끔 외부에서 한 사람이 그녀를 방문했다. 그 방문자들은 점점 줄어가고 있었지만, 일부 가까운 친구들은 여전히 튀일리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람발 공주가 가장 자주 그녀를 방문했다.
오후 1시 무렵 가족 식사가 있었다. 이 식사 자리에는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두 자녀, 시누이 엘리자베트, 그리고 가끔 다른 왕실 가족이 함께 했다. 이 식사 자리는 베르사유의 한 왕정 공식 식사와는 완전히 달랐다. 베르사유에서는 한 왕의 식사조차 공개 의식이었고, 약 100명에서 200명의 신하와 시녀들이 그 자리를 함께 했다. 그러나 튀일리궁에서는 한 가족만이 한 식탁에 앉았다. 그것은 한 왕정의 가장 사적인 식사 자리였고, 동시에 한 왕정의 모든 공식 의식이 사라진 자리이기도 했다.
오후 시간에 그녀는 다시 자녀들과 짧은 시간을 보냈고, 그 후 자신의 사적 살롱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이 함께 작은 음악회를 가지거나, 카드 게임을 하거나, 짧은 독서 시간을 가졌다. 밤 11시 무렵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다.
이 일과 안에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베르사유에서 그녀의 모든 일과는 자신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튀일리궁에서 그녀의 일과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자신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그녀가 일어나는 시각, 자녀들을 만나는 시각, 식사하는 시각, 잠자리에 드는 시각. 이 모든 것이 표면상으로는 그녀의 일과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한 왕정 외부의 요인들이 그녀의 일과를 결정하고 있었다.
가장 분명한 결정 요인은 국민군의 일과였다. 튀일리궁의 모든 출입구에는 국민군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의 일과가 한 왕정의 일과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한 왕정이 식사하는 시각, 한 왕정이 정원에 산책 나가는 시각, 한 왕정이 외부 방문자를 받는 시각. 이 모든 시각이 국민군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정원의 두 가지 풍경
마리 앙투아네트가 튀일리궁에서 가장 자주 시간을 보낸 사적 공간 가운데 하나는 튀일리 정원이었다. 그것은 베르사유 정원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원이었다.
베르사유 정원은 한 왕정의 사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한 왕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일반 시민들은 거의 출입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한 왕비는 자신이 원하는 누구와 함께 산책할 수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튀일리 정원은 달랐다. 그것은 17세기부터 일반 시민들에게 부분적으로 열려 있던 공공 공간이었다. 1789년 10월 한 왕정이 튀일리궁에 도착한 뒤에도, 그 정원의 공공 사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정원에 산책을 나가면, 그곳에는 항상 일반 시민들이 함께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그녀를 멀리서 관찰했고, 일부는 그녀에게 야유를 보냈으며, 일부는 그녀의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자신들의 요구를 외쳤다.
이 풍경이 그녀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왔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 왕비가 자신의 정원에서 산책하는 일조차 더 이상 사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걸음이 평가되었고, 그녀의 모든 표정이 해석되었으며, 그녀의 모든 옷차림이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캉팡의 회고록은 한 가지 작은 일화를 짧게 기록한다. 1790년 초의 어느 날, 마리 앙투아네트가 정원에서 어린 루이 샤를과 함께 산책하고 있었다. 한 시민 여자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짧게 외쳤다.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세요. 우리가 그를 더 잘 길러낼 수 있어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외침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어린 아들의 손을 더 꼭 잡고, 천천히 자신의 산책을 이어갔다. 그날 그녀가 정원에서 시녀에게 짧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나의 정원도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에요."
이 짧은 한 마디는 그녀의 새로운 일상의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녀의 모든 공간이, 그녀의 모든 시간이, 그녀의 모든 자리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흐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자물쇠 작업실의 한 남자
튀일리궁의 가장 인상적인 한 공간은 루이 16세의 자물쇠 작업실이었다. 그는 평생 자물쇠 만들기를 좋아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의 가장 큰 사적 취미였고, 그가 가장 평온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영역이었다. 베르사유에서도 그는 한 작은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매일 한두 시간씩 자물쇠를 만들거나 분해했다. 그를 가르친 자물쇠 장인 프랑수아 가맹(François Gamain)이 정기적으로 베르사유를 방문해 그와 함께 작업했다.
튀일리궁에 도착한 뒤, 그는 즉시 자신의 자물쇠 작업실을 옮기게 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옛 일상 가운데 가장 먼저 회복한 부분이었다. 새로운 작업실은 그의 침실과 가까운 한 작은 방에 마련되었다. 그곳에는 그의 도구들, 작업대, 그리고 진행 중인 여러 자물쇠 작품들이 옮겨졌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작업실의 풍경을 짧게 묘사한다. 한 왕정이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는 시기에도, 루이 16세는 매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그는 손에 망치를 들고 작은 금속 조각을 두드렸고, 정교한 톱니바퀴를 조립했다. 그가 그 작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의 얼굴에서 한 시대의 위기가 잠시 사라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고 캉팡은 적는다.
이 모습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해석은 비판적이다. 한 왕정의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한 왕이 자물쇠 만들기에 시간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무책임함의 표현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한 왕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정치적 흐름 앞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영역으로 돌아간 것일 수 있다. 한 작은 자물쇠는 그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것이었고, 한 시대의 흐름과는 달리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그가 그 작업실에서 보낸 시간은 한 시대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그만의 사적 도피였을 수 있다.
이 자물쇠 작업실은 후일 한 가지 결정적인 사건의 무대가 된다. 1792년 5월, 그가 평생 가까이 두었던 자물쇠 장인 프랑수아 가맹이 어떤 동기에서인지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는 튀일리궁의 한 벽 안에 숨겨진 비밀 금고에 대해 혁명 정부에 알린 것이다. 그 금고 안에는 루이 16세가 보관하던 비밀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그 서류들 가운데에는 외국 군주들과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한 왕정의 회복을 위한 비밀 음모의 기록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발견은 후일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된다. 한 왕이 자신의 사적 영역으로 여긴 그 자물쇠 작업실이,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약점이 된 셈이다.
새로운 정치적 일상
한 왕정의 정치적 일상도 튀일리궁에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이전까지 한 왕정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의회에 통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789년 10월 이후 한 왕정의 결정 권한은 점차 의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이동의 가장 분명한 사례는 1789년 11월 2일의 결정이었다. 그날 의회는 한 가지 결정적인 법을 통과시켰다. 가톨릭 교회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한다는 법이었다. 이 결정은 한 시대의 가장 큰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다. 가톨릭 교회의 재산은 프랑스 전체 부동산의 약 10퍼센트에 해당하는 거대한 자원이었고, 그것을 국유화하면 한 시대의 부채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이 법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어떤 형태의 공격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가 이 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은 거의 없었다. 그는 결국 그 법을 승인했다.
이런 종류의 결정들이 그 후 몇 년 동안 이어졌다. 1790년 7월 12일의 「성직자 시민 헌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 1790년 6월 19일의 귀족 작위 폐지, 1791년 6월 22일의 노동조합 금지법(르 샤플리에법). 이 모든 법들이 의회에서 결정되었고, 한 왕정은 그것들을 사후에 승인했다.
특히 「성직자 시민 헌법」은 한 왕정에 깊은 양심의 갈등을 만들어냈다. 이 법은 프랑스의 모든 가톨릭 성직자가 로마의 교황이 아니라 프랑스 국가에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루이 16세는 이 법을 1790년 8월 마지못해 승인했지만, 그의 양심은 그 후 평생 그 결정으로 인해 깊이 흔들렸다. 그는 1791년 부활절 무렵 자신의 영적 자문 사제로부터 이 법이 한 왕의 영혼을 위태롭게 한다는 경고를 들었고, 그 경고는 그가 그 후의 결정들을 내릴 때 한 가지 무거운 배경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 시기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전까지 정치적 결정에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자신이 신뢰하는 인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튀일리궁의 좁아진 일상 속에서, 그녀는 점점 더 직접적인 정치적 행위자가 되어 갔다. 그녀는 외국 군주들, 특히 자신의 오빠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2세와 비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한 왕정의 회복을 위한 외교적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비밀 서신들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 왕정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출신 가문인 합스부르크의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한 어머니의 노력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위협이었다. 후일 이 비밀 서신들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은 그녀에 대한 재판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된다.
캉팡은 회고록에서 이 비밀 서신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녀가 그것들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회고록 곳곳에 흩어진 짧은 언급들로 보아, 그녀는 한 왕비가 외국과의 어떤 종류의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한 가족의 점점 좁아지는 자유
튀일리궁의 일상이 한 가지 분명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분명해졌다. 그 방향은 한 가족의 자유가 점차 좁아진다는 방향이었다.
처음 1789년 10월 한 왕정이 도착했을 때, 그들의 자유는 비교적 넓었다. 그들은 튀일리궁의 거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고, 외부 방문자도 비교적 자유롭게 받을 수 있었다. 정원에 산책 나가는 것도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가끔 짧은 외출도 가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자유는 점차 줄어들었다. 1790년 봄, 한 왕정의 외부 방문자에 대한 제한이 강화되었다. 1790년 가을, 한 왕정이 사용할 수 있는 거처의 일부 공간이 줄어들었다. 1791년 초, 한 왕정의 외출은 사실상 금지되었다. 1791년 봄, 한 왕정이 부활절을 베르사유 인근의 생클루(Saint-Cloud) 성에서 보내고자 했을 때, 국민군은 그것을 막았다. 한 가족이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부활절조차 보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점점 좁아지는 자유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모두에게 깊은 좌절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다. 루이 16세는 이 상황을 비교적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자물쇠 작업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자신의 사적 일과를 가능한 한 평온하게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가 한 시대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그의 매일의 일기에서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일기는 계속해서 사냥의 결과와 날씨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달랐다. 그녀는 점차 더 능동적인 정치적 행위자가 되어 갔다. 그녀는 비밀 서신을 통해 외국 군주들과 연락했고, 한 왕정의 회복을 위한 다양한 계획을 검토했다. 1790년 후반부터 그녀와 루이 16세는 한 가지 결정적인 결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튀일리궁을 비밀리에 떠나, 충성스러운 군대가 있는 프랑스 동부의 한 도시로 도피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1791년 6월의 바렌 도주 시도로 이어진다. 그것은 다음 회의 주제다.
자녀 교육의 작은 풍경
마리 앙투아네트가 튀일리궁에서 가장 큰 위안을 얻은 한 가지 영역은 자녀 교육이었다. 폴리냐크 부인이 1789년 7월 망명한 뒤, 자녀들의 가정교사는 마담 투르젤로 교체되어 있었다. 마담 투르젤은 폴리냐크 부인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었으며, 자녀 교육에 대한 분명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임명 자체가 한 왕정의 새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신호였다.
마담 투르젤은 마리 테레즈와 루이 샤를의 교육 계획을 다시 짰다. 마리 테레즈는 이미 11세였고, 그녀의 교육은 좀 더 진지한 학문적 내용을 포함하게 되었다. 역사, 종교, 외국어, 음악, 미술. 이 모든 영역의 수업이 매일의 일과에 포함되었다. 루이 샤를은 4세에서 6세 사이의 어린아이였고, 그의 교육은 좀 더 기본적인 것에서 시작되었다. 알파벳 배우기, 짧은 기도문 외우기, 그리고 작은 책의 그림을 보며 단어를 익히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자녀 교육에 매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그녀는 매일 자녀들의 학습 진도를 점검했고, 가끔 직접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녀가 특히 깊은 관심을 둔 영역은 음악이었다. 그녀 자신이 어린 시절 빈에서 매우 진지한 음악 교육을 받았고, 그 영향이 자녀들에게도 이어지기를 원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직접 노래를 가르쳤고, 자신의 하프시코드 앞에 그들을 앉혔다.
이 음악 시간은 튀일리궁의 일상 가운데 가장 평온한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캉팡의 회고록은 한 장면을 짧게 묘사한다. 1790년 초의 어느 오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녀들과 함께 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깊이 떨렸지만, 자녀들의 목소리는 맑았다. 노래의 가사는 작은 새가 자신의 둥지로 돌아가는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서 캉팡은 한 가지 풍경을 보았다. 한 어머니와 두 아이가 한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는 그 풍경 자체가, 한 시대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잠시 보호받고 있는 한 가지 작은 섬 같았다는 것이다.
이 작은 섬은 그러나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1791년 봄 이후, 자녀 교육의 일상조차 점차 외부의 압력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부 의회 의원들은 한 왕정의 자녀 교육이 너무 보수적이며, 한 시대의 새로운 가치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어린 루이 샤를이 자신의 어머니와 너무 가까이 자라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어떤 비판은 더 노골적이었다. 한 왕정의 자녀들이 결국 한 시대의 새로운 시민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비판들의 무게가 어떠했는지를 마리 앙투아네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자녀 교육에 대한 모든 결정조차 한 시대의 정치적 평가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녀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일조차, 그것이 어떻게 외부에 비칠지를 고려해야 했다.
변해 가는 우정들
튀일리궁의 새로운 일상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간관계도 점차 변해 갔다. 그녀의 가까운 친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망명했다. 폴리냐크 가문, 아르투아 백작 부부, 콩데 가문. 베르사유의 가장 화려한 시기에 그녀와 함께 했던 거의 모든 인물들이 1789년 7월 이후 한 명씩 프랑스를 떠나 있었다.
그녀의 곁에 남은 사람은 매우 적었다. 가장 먼저 람발 공주가 남았다. 그녀는 1789년 가을에 잠시 영국으로 갔다가 1791년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 후 1792년 8월까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에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EP.09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그녀 외에는 시누이 엘리자베트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한 왕정의 가장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고, 한 왕정의 모든 위기 속에서 깊은 정서적 지지자였다.
캉팡 자신도 이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1789년 10월 베르사유에서 튀일리궁으로 함께 이동했고, 그 후 약 3년 동안 한 왕비의 시녀로서 거의 매일을 함께 했다. 그녀의 회고록의 가장 풍부한 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대한 묘사다. 그녀는 한 왕비의 가장 사적인 일과에 가장 깊이 관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한 왕비의 모든 정서적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다.
새로운 인간관계도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페르센 백작(Comte Axel von Fersen)이었다. 그는 스웨덴 출신의 귀족이었고, 1770년대 후반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와 알고 지내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후 200년이 넘게 의견이 분분하다. 그들이 단순한 친구였다는 견해와, 그들이 깊은 연인 관계였다는 견해가 모두 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일부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매우 친밀한 어조를 보이지만, 그 정확한 성격은 오늘날까지도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페르센이 한 왕정의 가장 충성스러운 외국 동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791년 6월의 바렌 도주 시도를 직접 조직한 인물이었고, 그 후에도 한 왕정의 회복을 위한 다양한 외교적 노력에 깊이 관여했다. 그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든, 그의 행동은 그가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캉팡은 회고록에서 페르센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어조를 유지한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으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어떤 직접적인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그녀가 이런 침묵을 지킨 이유는 분명하다. 그녀가 회고록을 쓴 1820년대의 프랑스는 부르봉 왕정 복고 시기였고, 한 왕비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분위기가 강한 시기였다. 그 분위기 속에서 페르센과의 관계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묘사도 한 왕비의 명예에 해를 입힐 수 있었다. 따라서 캉팡은 그 영역에 대해 침묵을 선택했다.
한 가족이 함께 모인 시간
튀일리궁의 일상에서 한 가지 분명히 새로워진 것이 있었다. 한 가족이 그 어느 때보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베르사유에서 한 왕과 한 왕비는 사실상 두 개의 분리된 궁정을 운영했다. 한 왕에게는 자신의 시종들, 자신의 의식, 자신의 사적 공간이 있었고, 한 왕비에게도 같은 것들이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시간은 정해진 식사 자리나 공식 의식뿐이었고, 그 외의 시간에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은 매우 적었다.
튀일리궁에서 이 분리가 사라졌다. 두 사람은 같은 층의 가까운 거처에 살았고, 같은 식탁에서 매일의 식사를 함께 했으며, 가끔은 사적인 산책도 함께 했다. 자녀들도 두 부모와 거의 매일 시간을 보냈다. 한 가족 전체가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이, 한 왕정의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가장 풍부해졌다는 사실은 한 가지 작은 역설이었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점을 짧게 짚는다. 그녀의 시선에서, 튀일리궁의 시기는 한 왕정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지만 동시에 한 가족이 가장 가까이 모인 시기이기도 했다. 한 왕비는 그 시기 자신의 자녀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자신의 남편과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 친밀함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분석은 간단하지 않다. 한 가지 가능성은, 외부의 위협이 한 가족을 자연스럽게 더 가까이 모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베르사유의 거대한 의식이 사라진 자리에 마침내 한 가족의 사적 공간이 자라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친밀함은 한 가지 분명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부부 관계가 1789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관계가 된 것이다. 그것은 한 정략결혼에서 시작된 관계가, 마침내 한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자라난 시기였다. 두 사람은 한 시대의 위기를 함께 견디고 있었고, 자신들의 자녀들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운명을 함께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변화의 가장 분명한 증거는 1791년 6월의 바렌 도주 계획에서 드러난다. 그 계획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주도한 것이지만, 루이 16세도 그것에 깊이 동의했고 함께 실행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마차에 앉아 한밤중에 튀일리궁을 떠난 그 순간은, 한 부부가 자신들의 모든 운명을 함께 걸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그 결정이 실패로 끝나고 그 후의 모든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 결정 자체가 한 부부의 변화된 관계를 보여준다.
한 시대의 새로운 풍경
튀일리궁의 약 2년 9개월 동안, 한 시대의 풍경은 분명히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방향은 한 왕정의 자리가 점점 더 좁아진다는 방향이었다.
1789년 10월 한 왕정이 튀일리궁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여전히 한 시대의 정치적 중심에 있었다. 그들의 결정이 여전히 의미 있는 무게를 가졌고, 그들의 의지가 한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1792년 8월 한 왕정이 튀일리궁을 떠날 무렵, 그들은 한 시대의 가장 주변부에 있었다. 그들의 결정은 거의 무의미해졌고, 그들의 의지는 한 시대의 흐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 변화는 한 가지 결정적인 사건들의 연속을 통해 일어났다. 1789년 11월의 가톨릭 교회 재산 국유화. 1790년 7월의 「성직자 시민 헌법」. 1790년 6월의 귀족 작위 폐지. 1791년 6월의 바렌 도주 실패. 1791년 9월의 헌법 승인. 1792년 4월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선포. 1792년 8월 10일의 튀일리궁 함락. 이 모든 사건들이 한 왕정의 자리를 한 단계씩 좁혀 갔다.
캉팡은 회고록에서 이 점진적인 변화를 한 가지 분명한 인식으로 기록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한 왕정은 자신의 정치적 자원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었다. 그들은 자신의 일상을 가능한 한 평온하게 유지하려 노력했고,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려 노력했으며, 한 가지 결정적인 외교적 가능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결국 오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은 이 시기 한 가지 결정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정치적 성숙이었다. 1770년 14세에 베르사유에 도착한 어린 신부, 1785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결백한 표적, 1789년 7월 자신의 친구를 망명시킨 한 어머니. 그녀는 평생 한 가지 정치적 학습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 학습이 가장 깊이 이루어진 시기가 바로 튀일리궁의 약 2년 9개월이었다.
그녀는 점차 더 단호해졌고, 더 결단력 있게 되었으며, 더 깊이 정치적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1789년 이전의 그녀가 사적인 호의와 사적인 우정의 세계에서 살았다면, 1789년 이후의 그녀는 점점 더 외교적 계산과 정치적 결단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이 변화는 한 가지 슬픈 역설을 동반한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가장 성숙해진 시기에, 그녀의 정치적 자원은 가장 작아져 있었던 것이다.
캉팡은 회고록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 변화를 짧게 묘사한다. 그녀가 본 마지막 시기의 한 왕비는, 자신이 처음 만난 어린 왕세자비와 거의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변화 안에는 한 가지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 특히 자녀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베르사유의 화려한 시기에도, 튀일리궁의 좁아진 일상에도, 그리고 그 후의 모든 비극에도 변하지 않고 그녀를 지탱하는 한 가지 가장 깊은 자원이었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튀일리궁의 시기를 한 왕정의 가장 사적인 풍경 중심으로 묘사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이 시기는 한 가족이 자신의 일상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노력한 시기였다. 그러나 후대의 정치사학자들, 특히 알베르 마티에즈, 프랑수아 퓌레, 그리고 영국의 윌리엄 도일과 같은 연구자들은 이 시기를 한 시대의 정치 구조가 결정적으로 변화한 단계로 본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튀일리궁의 약 2년 9개월이 한 왕정과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이 동거한 거의 유일한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이 동거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의 질문이 그 시기 내내 시험되었고, 결국 1792년 8월 그 시험은 부정적인 답으로 끝났다. 만약 이 시기에 한 왕정이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한 시대의 흐름에 더 적극적으로 협력했더라면, 한 시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같은 종류의 결말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왕정은 끝내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밀 서신, 루이 16세의 바렌 도주 시도,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선포에 대한 한 왕정의 양면적 태도. 이 모든 것이 한 왕정이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흐름에 끝내 진정으로 협력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는 1792년 8월의 결정적인 단절이었다. 또한 일부 페미니즘 사학자들은 이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치적 행위를 새롭게 평가한다. 그녀는 한 시대의 가장 어려운 정치적 결정들을 매우 직접적으로 내린 한 왕비였다. 비밀 서신, 도주 계획, 외국과의 외교.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손에서 직접 진행되었다. 그녀를 단순한 사치스러운 왕비나 정치에 무관심한 여자로 보는 시각은, 이 시기의 그녀의 실제 활동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캉팡은 이런 정치적 행위의 깊이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한 왕비의 사적 풍경에 더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가 회고록에서 한 왕비가 점차 더 단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짧게 짚은 그 묘사들 안에, 이 깊은 정치적 변화에 대한 한 가지 직감이 분명히 들어 있다.
다음 회 예고
1791년 6월 20일 밤, 튀일리궁에서 한 가지 비밀스러운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 왕정의 가족이 거대한 한 마차에 올라, 평민의 옷을 입은 채 한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들의 목적지는 프랑스 동부의 작은 도시 몽메디(Montmédy)였다. 그곳에 한 왕정에 충성스러운 군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거기서 한 왕정은 한 시대의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는 마지막 시도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도주는 한 작은 도시에서 멈춰진다. 그 도시의 이름이 바렌(Varennes)이었다. 다음 회에서는 1791년 6월의 바렌 도주 시도, 한 왕정의 마지막 큰 결단이 어떻게 실패로 끝났는지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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