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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9. 1792년 8월 10일, 튀일리궁 함락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30.

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19. 1792년 8월 10일, 튀일리궁 함락

"그날 새벽, 나는 한 왕비의 거처 가까이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잠을 깼다. 그것은 한 도시의 경보를 알리는 종이었고, 동시에 한 시대가 끝나가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분께서는 이미 깨어 계셨다. 그분의 얼굴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분명히 이해한 뒤에 보이는, 한 가지 깊은 고요함이 있었을 뿐이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혁명재판소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샤를로트 코르데(오른쪽)는 둥근 돌 단상인 법정에 서서 손목에 사슬을 묶은 채 판사들(왼쪽)에게 말을 걸고 있다 .

1년 동안의 약화

1791년 6월 바렌 도주가 실패한 뒤의 약 14개월 동안, 한 왕정은 점차 더 깊은 정치적 약화 속에 있었다. 도주 직후 의회는 한 왕정의 거의 모든 권한을 일시 정지시켰고, 그 후 1791년 9월 새로운 헌법이 완성된 뒤에야 한 왕정은 표면적인 권한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 회복된 권한은 매우 형식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헌법은 한 가지 결정적인 제도를 만들었다. 입헌군주제(monarchie constitutionnelle)였다. 이 제도 아래에서 한 왕은 더 이상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지 않았고, 의회가 통과시킨 법에 대해 단지 일시적인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거부권조차 무한정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회가 두 차례 연속 같은 법을 통과시키면, 한 왕은 그 법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새로운 입헌군주제 안에서 루이 16세는 자신의 자리를 한 가지 분명한 방식으로 정의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정의를 끝내 분명히 만들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그는 새 헌법을 승인하고 자신이 새로운 입헌군주제의 한 왕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사적으로 그는 여전히 한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가 사용한 거부권의 거의 모든 사례가 그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망명한 귀족들의 재산 몰수를 막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했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새로운 제재를 막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거부권들 하나하나가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에게 깊은 분노를 만들어냈다.

특히 한 가지 별명이 한 왕에게 붙기 시작했다. "므슈 베토(Monsieur Veto)"라는 별명이었다. 한 왕이 의회의 결정에 거부권을 자주 행사한다는 사실을 비꼬는 표현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같은 별명을 받았다. "마담 베토(Madame Veto)"였다. 그녀가 남편의 거부권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그 별명에 담겨 있었다. 이 두 별명은 1792년 봄과 여름의 거의 모든 풍자 팸플릿과 거리 노래에 등장했다.


전쟁이라는 결정적 사건

1792년 봄, 한 시대의 정치적 풍경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외국과의 전쟁 발발이었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배경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배경은 망명한 프랑스 귀족들의 활동이었다. 1789년 7월 이후 약 2만 명의 프랑스 귀족이 외국으로 망명해 있었고, 그들은 외국 군주들에게 프랑스 침공을 끊임없이 요청하고 있었다. 특히 라인강 너머의 코블렌츠(Koblenz)라는 작은 도시에 망명 귀족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작은 군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이 망명 군대의 존재 자체가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에게 큰 위협이었다.

두 번째 배경은 1791년 8월의 「필니츠 선언(Déclaration de Pillnitz)」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2세, 즉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함께 발표한 이 선언은,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만약 프랑스의 다른 유럽 군주들이 함께 행동한다면, 그들은 프랑스의 한 왕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이 선언이 그 자체로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에게 외국이 자신들의 운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분명한 인식을 만들었다.

1792년 봄,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한 그룹, 즉 지롱드파(Girondins)가 한 가지 결정적인 결심을 했다. 외국과의 전쟁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그들의 계산은 분명했다. 외국 군주들이 어떤 식으로든 프랑스를 침공할 것이라면, 프랑스가 먼저 행동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전쟁이 한 시대의 정치적 통합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외부의 적 앞에서 내부의 모든 분열이 잠시 사라질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1792년 4월 20일, 프랑스 의회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한 왕이 직접 그 선포를 의회에서 읽은 그 순간은, 그 자체로 한 가지 결정적인 풍경이었다. 한 왕정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외국 동맹, 즉 한 왕비의 출신 국가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는 풍경. 루이 16세는 그 선포를 읽으면서 거의 떨리는 목소리였다고 한 동시대 기록에 적혀 있다.

이 전쟁의 결과는 곧 한 왕정에게 가장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첫 번째 이유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밀 활동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 레오폴드 2세, 그리고 1792년 3월 레오폴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에는 새로운 황제인 조카 프란츠 2세와 비밀 서신을 계속 주고받고 있었다. 그 서신들 가운데 일부에서 그녀는 외국 군대의 군사 정보를 전달하기까지 했다. 특히 프랑스 군대의 작전 계획에 대한 일부 정보를 그녀가 외국으로 흘렸다는 증거가 후일 발견된다. 이 행위는 어떤 시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반역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것이 후일 그녀에 대한 재판에서 가장 결정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된다.

두 번째 이유는 프랑스 군대 자체의 약함이었다. 1789년 이후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 많은 귀족 출신 장교들이 망명했고, 군대의 지휘 체계가 깊이 흔들려 있었다. 1792년 봄의 첫 전투들에서 프랑스 군대는 거의 모든 곳에서 패배했다. 이 패배의 소식이 파리에 전해질 때마다, 그 책임을 어떻게든 한 왕정에게 돌리려는 분위기가 더 강해졌다.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습격 장면  을 묘사한 그림

7월의 분위기

1792년 7월의 파리는 한 시대의 가장 긴장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외국과의 전쟁은 거의 모든 곳에서 프랑스의 패배로 흘러가고 있었고, 그 패배의 원인이 한 왕정의 비밀스러운 적대 행위에 있다는 의심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

이 의심을 결정적으로 굳힌 사건이 1792년 7월 25일에 있었다. 그날 한 외국 사령관이 발표한 한 가지 성명서가 파리에 도착한 것이다. 그 사령관의 이름은 브룬슈비크(Brunswick) 공작이었다. 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가 발표한 「브룬슈비크 선언(Manifeste de Brunswick)」은 매우 직접적인 위협을 담고 있었다.

이 선언에 따르면, 만약 파리의 시민들이 한 왕정에 어떤 위해를 가한다면, 그 결과는 매우 단호할 것이었다. 브룬슈비크 공작은 자신의 군대가 파리에 도달하면 그 도시 전체를 "예시적인 군사적 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라고 분명히 적었다. 그가 사용한 표현은 매우 강력했다. 파리를 "완전한 파괴(une subversion totale)"의 대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외국의 시각에서는 한 왕정을 보호하기 위한 위협이었다. 그러나 파리의 시각에서는 정반대의 효과를 만들었다. 파리의 시민들은 이 선언을 한 왕정 자신이 사실은 외국 군대와 한 편이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한 왕정이 자신의 백성의 적이며, 외국 군대의 동맹이라는 결론이 그 선언과 함께 굳어졌다.

이 결론은 한 가지 결정적인 정치적 결심을 만들었다. 한 왕정을 폐위시켜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그 결심을 누가 실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한 가지 새로운 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답은 의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파리의 시민들 자신, 더 정확히는 새로 조직된 한 시 정부, 즉 코뮌(Commune)이었다.


8월 9일 밤의 종소리

1792년 8월 9일 밤, 파리의 한 시 청사에서 한 가지 결정적인 모임이 있었다. 약 200명의 새로운 대표들이 그곳에 모였다. 그들은 파리의 48개 구역(section)에서 각각 보낸 사람들이었고, 그들 자신을 새로운 "혁명 코뮌(Commune révolutionnaire)"이라고 선언했다. 이 새 코뮌이 그날 밤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다음 날 아침 튀일리궁을 직접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심이 분명해진 직후, 파리의 모든 교회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종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도시의 경보(tocsin)를 알리는 종이었다. 이 종소리는 약 18세기 후반 프랑스 도시들의 가장 분명한 위기 신호였다. 시민들이 무장하고 거리로 나와야 한다는 신호였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파리의 거의 모든 구역에서 무장한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약 2만 명의 파리 시민군이 곧 조직되었다. 그것에 더해, 외부에서 도착한 약 5,000명의 의용군이 그들과 합류했다. 이 의용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룹은 마르세유에서 온 약 500명의 의용군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진 노래를 가지고 있었고, 그 노래가 곧 한 시대의 가장 분명한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된다.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였다.

이 모든 군중의 목표는 한 가지였다. 튀일리궁을 점령하고, 그 안의 한 왕정을 폐위시키는 것이었다.


튀일리궁 안의 그 밤

같은 시각, 튀일리궁 안에서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캉팡의 회고록은 이 부분을 자신이 직접 본 경험으로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8월 9일 저녁부터 한 왕정은 곧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의회와 시 정부의 분위기, 거리의 분위기, 그리고 한 왕정 안으로 들어오는 정보 모두가 한 가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은 한 큰 공격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방향이었다.

루이 16세는 그날 밤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가 튀일리궁의 방어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가 가진 방어 자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스위스 용병 약 900명. 그들은 한 왕정의 가장 충성스러운 호위 부대였고, 한 명의 마지막까지 한 왕정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둘째, 약 300명의 귀족 신사들. 그들은 자신들의 검을 들고 한 왕정의 거처에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셋째, 파리 국민군의 일부 충성스러운 부대.

그러나 이 세 번째 자원은 매우 불안정했다. 1792년 8월 무렵의 파리 국민군은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에 깊이 동화되어 있었고, 그들이 한 왕정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보장이 없었다. 그 사실은 곧 다음 날 아침의 가장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날 밤은 어떠했는가. 캉팡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녀는 그날 밤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적 살롱에서 자신의 자녀들 가까이에 앉아 있었고, 가끔씩 자녀들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캉팡에게 그날 밤 짧게 한 마디 했다고 한다.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이 그들이 도착하는 일보다 더 힘들어요."

이 한 마디는 한 시대의 가장 깊은 두려움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어떤 일이 분명히 일어날 것이라는 인식과, 그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인식 사이의 그 좁은 시간. 그 시간이 한 사람에게 가장 무거운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날 밤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포위 및 함락

8월 10일 새벽, 한 가지 결정적 결심

새벽 4시경, 한 왕정의 가장 가까운 보좌관 가운데 한 사람인 로데레르(Roederer)가 튀일리궁에 도착했다. 그는 파리 시의 한 행정관이었고, 한 왕정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의 인물이었다. 그가 가져온 보고는 매우 단호했다. 튀일리궁의 방어로는 곧 도착할 군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 왕정 가족이 즉시 의회로 피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데레르의 권유는 분명한 논리에 기반한 것이었다. 의회는 한 왕정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한 왕정을 직접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공식 기관이었다. 의회 건물 안에서는 군중이 한 왕정에 직접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었다. 따라서 한 왕정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의회로 가는 길밖에 없었다.

이 권유 앞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호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그녀는 튀일리궁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왕이 자신의 거처에서 도망친다는 사실은 한 왕정의 마지막 권위마저 무너뜨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한 왕정의 운명을 무릎 꿇은 채로 받아들이느니, 자신의 자리에서 서서 그것을 마주하는 편이 낫다는 입장이었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새벽의 격렬한 토론을 짧지만 인상 깊게 묘사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분명한 어조로 말하는 동안, 루이 16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아내의 결단력과 로데레르의 현실적 판단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짧게 한 마디 했다. "갑시다(Marchons)."

이 한 마디가 그날의 모든 운명을 결정지었다. 한 왕정은 의회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의 결정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들을 깨우라고 명령했고, 자신의 마지막 준비를 시작했다.

8월 10일 아침 8시 30분 무렵, 한 왕정 가족이 튀일리궁의 한 문을 통해 나왔다. 그들은 모두 평소의 옷차림을 한 채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짙은 색의 단순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평소의 외출 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린 루이 샤를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마리 테레즈는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의 곁에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들이 튀일리궁 정원을 가로질러 의회 건물로 향하는 그 짧은 약 200미터의 거리. 그 거리 위에서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정원의 나뭇잎들이 이른 가을의 색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잎들이 바람에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어린 루이 샤를이 그 잎 한 장을 손으로 잡으려 했다고 한 동시대 기록에 적혀 있다. 그가 짧게 한 말이 그 기록에 남아 있다. "잎이 일찍 떨어지네요." 그의 어머니는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한 왕정 없는 튀일리궁

한 왕정 가족이 의회로 향한 직후, 튀일리궁에 거대한 군중이 도착했다. 그 시각은 아침 9시 30분 무렵이었다. 군중의 첫 번째 무리는 튀일리궁의 한 정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한 왕정의 호위 부대와 마주쳤다.

처음에 분위기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군중은 한 왕정이 이미 의회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한 왕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한 가지 사고가 일어났다.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후 200년이 넘게 의견이 분분하다. 한 설에 따르면 군중 안의 한 사람이 먼저 총을 쏘았고, 또 한 설에 따르면 스위스 용병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발포했다.

어느 쪽이 먼저였든, 그 첫 번째 발포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즉시 양쪽이 격렬한 사격전을 시작했다. 군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곧 더 큰 분노로 바뀌었다. 새로운 군중이 계속 도착하고 있었고, 그들의 압도적인 수 앞에서 한 왕정의 호위 부대는 점차 밀려가기 시작했다.

이 시각, 의회 건물 안의 한 왕정에게 한 가지 명령이 전달되었다. 그 명령은 루이 16세가 자신의 스위스 용병들에게 즉시 발포를 중지하고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그 명령을 따랐다. 그는 짧은 메모를 작성해 튀일리궁의 스위스 용병 사령관에게 보냈다. 그 메모에는 단순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왕이 명령한다. 스위스인들이 즉시 무기를 내려놓고 자신들의 막사로 돌아가야 한다."

이 명령이 도착했을 때, 스위스 용병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한 왕의 명령에 따라 즉시 발포를 중지했고,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한 가지 비극적 결과를 만들어냈다. 무기를 내려놓은 스위스 용병들이 격노한 군중의 공격에 노출된 것이다. 그 후의 몇 시간 동안, 약 600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튀일리궁 안과 그 주변에서 살해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한 왕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충성이 그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이 학살은 그 자체로 한 가지 끔찍한 풍경이었다. 일부 스위스 용병들은 거리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일반 시민들에게 발견되어 살해되었다. 일부는 튀일리궁의 한 작은 방에 숨었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발견되어 한 명씩 처형되었다. 한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그날 튀일리궁 안의 한 복도에는 약 200명의 스위스 용병들의 시신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내려놓은 채로 죽었다.

오늘날 스위스의 루체른(Lucerne)에는 그날 죽은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는 한 거대한 조각이 있다. '빈사의 사자상(Löwendenkmal)'이라 불리는 이 조각은 1820년에 만들어졌고, 한 거대한 사자가 부서진 창에 가슴을 찔린 채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사자의 발 아래에는 부르봉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한 방패가 놓여 있다. 이 조각이 그날 죽은 스위스 용병들의 충성과 그들이 받은 비극적 결말을 함께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후일 이 조각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 가장 감동적인 돌"이라고 적었다.


캉팡의 그날

캉팡 자신은 그날 어떤 풍경 안에 있었는가. 그녀의 회고록은 자신의 직접 경험을 자세히 묘사한다.

캉팡은 8월 10일 새벽 튀일리궁 안에 있었다. 그녀는 한 왕비의 가까운 시녀로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한 왕정 가족이 의회로 떠난 직후, 그녀와 다른 시녀들은 튀일리궁의 한 작은 방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 방에서 군중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중이 도착했을 때, 캉팡과 다른 시녀들은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들이 한 왕정의 직접 측근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도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한 시녀가 짧게 외쳤다. "도망쳐야 해요. 더 늦기 전에." 캉팡은 그 외침에 따라 자신의 거처로 빠져나갔고, 거기서 자신의 가장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챙겼다.

그녀의 튀일리궁 탈출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 작은 출입구가 그날 아침 충분히 경비되어 있지 않았고, 그녀는 그곳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거리로 나섰을 때, 그녀는 자신의 평소 옷차림 그대로였다. 그 옷차림은 분명히 한 왕정의 측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고, 거리의 군중에게 발견되면 즉시 위해를 입을 수 있는 종류였다.

캉팡의 회고록은 이 시기 자신이 마주한 짧은 풍경을 묘사한다. 그녀는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한 군중을 마주쳤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녀를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짧게 한 마디 했다. "그 여자다. 한 왕비의 시녀다." 그 한 마디가 그녀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한 마디였다.

그 순간, 한 가지 우연이 그녀를 구했다. 군중 가운데 한 다른 사람이 짧게 외친 것이다. "그녀를 두어요. 그녀는 한 시민일 뿐이에요." 이 한 마디가 군중의 분위기를 잠시 바꾸었고, 캉팡은 그 짧은 순간을 활용해 다른 길로 도망쳤다.

그녀가 누구의 도움으로 그날을 살아남았는지는 회고록에서 분명히 적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 자신의 한 친척의 거처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며칠 동안 숨어 있었다. 그 며칠 동안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천천히 이해해 갔다. 그녀가 18년 넘게 지켜온 한 왕비의 곁, 그녀의 모든 사적 일상, 그녀의 모든 공식 자리. 이 모든 것이 그 8월 10일의 한 아침에 사라졌다.


의회에서의 13시간

한 왕정 가족은 8월 10일 아침부터 그날 밤까지 의회 건물의 한 작은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의회 회의장 옆의 한 좁은 방이었고, '특별 위원회의 사무실(Logographe)'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 방에는 한 작은 창문이 있어, 의회 회의장의 진행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었다.

한 왕정 가족이 그 방에서 보낸 약 13시간 동안, 의회는 한 가지 결정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한 왕정의 운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 결정은 매우 단호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의회는 한 왕정을 정지(suspension)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1791년 헌법에 따른 한 왕의 모든 권한이 그 순간 일시 정지되었다.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의회, 즉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를 소집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한 왕정의 사실상의 폐위를 의미했다. 표면적으로는 단지 정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한 왕정의 모든 정치적 자원이 그 순간 사라진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그 결정 과정을 작은 창문을 통해 부분적으로 지켜보았다. 그가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그 순간 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 시간은 어떠했는가. 한 시녀의 후일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그날 그 작은 방에서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두 자녀를 자신의 양옆에 가까이 두고, 가끔씩 그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린 루이 샤를은 그 방의 분위기에 깊이 지쳐, 한 번은 어머니의 무릎에 잠시 잠들었다. 그녀는 잠든 아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 8시 무렵, 의회는 한 왕정 가족을 임시 거처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 임시 거처는 한 옛 수도원이었던 푀양 수도원(Couvent des Feuillants)이었다. 한 왕정 가족은 의회 건물에서 푀양 수도원까지의 짧은 거리를 호위 아래 걸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며칠을 보낸 뒤, 8월 13일 마침내 자신들의 다음 거처로 옮겨진다. 그 다음 거처는 한 중세의 오래된 요새였다. 탕플 탑(Tour du Temple)이었다.


한 시대의 분명한 단절

1792년 8월 10일이 한 시대에 남긴 가장 분명한 흔적은 한 가지였다. 그것은 프랑스의 왕정이 그 순간 사실상 끝났다는 사실이었다. 9월 21일 국민공회가 처음 모인 그날, 의회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왕정 자체를 공식적으로 폐지한다는 결정이었다. 그 다음 날인 9월 22일이 프랑스 공화국의 첫 번째 날이 되었다.

이 단절의 의미는 매우 깊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 이후의 약 3년 동안, 한 시대는 한 가지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었다. 한 왕정과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가의 가능성이었다. 입헌군주제라는 새로운 제도 안에서 한 왕정이 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가의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은 1792년 8월 10일에 분명히 부정적인 답을 받았다. 한 왕정과 한 시대 사이의 단절이 그날 결정적으로 분명해졌다.

이 단절은 한 왕정 가족의 사적 운명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1789년 10월 베르사유를 떠나 튀일리궁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여전히 한 왕정의 정치적 중심에 있었다. 1791년 6월 바렌 도주가 실패한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질서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792년 8월 10일 이후, 그들은 더 이상 어떤 정치적 자리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상의 포로였고,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결정의 직접적인 표적이었다.

이 표적의 결말이 어떨 것인가는 1792년 8월 시점에서는 분명하지 않았다. 일부는 한 왕정 가족이 외국으로 추방될 것이라고 예상했고, 일부는 그들이 한 옛 거처에서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가능성 모두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의 결말은 그보다 훨씬 더 단호하고 비극적인 것이었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처형,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이 두 결말이 한 왕정 가족의 운명을 마무리한다.


한 시녀의 책임

이 시기 이후 캉팡의 자리는 분명히 변했다. 그녀는 한 왕비의 직접 시녀로서의 모든 공식 자리를 잃었다. 1792년 8월 10일 이후 그녀는 한 왕비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시기는 정확히 언제였는가에 대해서는 회고록에서 분명히 적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마지막 만남의 한 짧은 풍경이 회고록 안에 짧게 남아 있다.

캉팡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 왕비는 그 마지막 만남에서 그녀에게 한 가지 분명한 부탁을 했다. "당신은 살아남아야 해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적어야 해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요." 이 한 마디가 캉팡이 후일 자신의 회고록을 쓰게 된 가장 깊은 동기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회고록 전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부탁의 무게가 캉팡에게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자리를 잃은 한 시녀였고, 한 시대의 가장 위험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생명조차 위협받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한 가지 분명한 결심을 가지고 살아갔다. 그것은 한 왕비의 부탁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녀가 한 왕비의 그 부탁을 어떻게 실현했는가는 우리가 이 시리즈를 통해 따라가 본 그 모든 풍경이다. 그녀의 회고록은 1822년 처음 출간되었고, 그 후 200년이 넘게 한 시대를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1차 사료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녀가 자신의 가장 사랑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진실하게 적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친 결과가 바로 그 회고록이다.

캉팡 자신은 1793년 이후 자신의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갔다. 그녀는 파리 외곽의 생제르맹앙레(Saint-Germain-en-Laye)에 한 여자 기숙학교를 열었고, 그곳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새로운 일상을 만들었다. 그 학교는 후일 매우 성공한 학교가 되었고, 나폴레옹 시기에 더욱 번성했다. 나폴레옹의 두 자매 폴린과 카롤린이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나폴레옹은 후일 캉팡에게 더 큰 책임을 맡겼다. 그녀는 1807년부터 한 왕정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고, 18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평생 가장 깊은 자리로 여긴 것은, 한 왕비의 시녀였던 18년이었다. 그녀의 회고록의 거의 모든 장이 그 18년에 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그 회고록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녀는 한 가지 짧은 한 마디를 남긴다. "내가 평생 모신 한 분에 대한 진실한 묘사를 남기는 일이, 나의 마지막 의무였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1792년 8월 10일을 한 왕정의 가장 비극적인 날로 묘사한다. 그녀의 시선에서 그날은 한 무고한 가족이 부당한 폭력의 직접 표적이 된 풍경이었고,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한 왕정에 대한 어떤 정당한 협상의 가능성도 거부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정치사학자들, 특히 알베르 마티에즈, 미슐레, 그리고 영국의 사이먼 샤마와 같은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매우 다른 각도에서 본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8월 10일이 단순한 한 폭력 사건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치적 단절을 결정적으로 만든 의식적이고 조직된 정치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코뮌의 결성, 의용군의 사전 조직, 「라 마르세예즈」의 등장. 이 모든 요소가 8월 10일을 단순한 봉기가 아닌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단계의 시작으로 만들었다. 또한 일부 역사가들은 한 왕정 자신의 책임을 분명히 지적한다. 1792년 4월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 선포, 그 전쟁에서 한 왕정이 보인 양면적 태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외국과의 비밀 서신. 이 모든 행위가 한 왕정과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 사이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그 결과 8월 10일의 단호한 결말이 정치적으로 거의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고 그들은 분석한다. 「브룬슈비크 선언」 또한 한 가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 선언이 한 왕정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든 그렇지 않았든,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 선언이 한 시대의 새로운 정치 세력에게 한 왕정과 외국 군대가 한 편이라는 가장 분명한 인식을 만들었고, 그 인식이 8월 10일의 결단을 가속화시켰다. 캉팡은 이런 구조적 분석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녀의 묘사는 한 가족의 사적 풍경에 더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가 회고록에서 한 왕비의 차분한 태도, 한 왕의 짧은 결단, 그리고 그날 죽은 스위스 용병들의 충성을 묘사한 그 짧은 문장들 안에, 한 시대의 가장 깊은 비극에 대한 한 가지 직감이 분명히 들어 있다. 한 시대의 흐름이 한 가족을 어떻게 압도해 갔는지, 그리고 그 압도의 풍경 안에서 한 사람의 인간적 위엄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의 질문이 그 회고록의 가장 깊은 주제다.


다음 회 예고

1792년 8월 13일 저녁, 한 왕정 가족은 자신들의 마지막 거처로 옮겨졌다. 그곳은 중세에 지어진 한 거대한 요새, 탕플 탑이었다. 그곳에서 한 왕정 가족이 보낸 시간은 그들의 가장 마지막 시간이었다. 한 왕은 그곳에서 1793년 1월까지 약 5개월을 보낸 뒤 처형되었다. 한 왕비는 그곳에서 1793년 8월까지 약 1년을 보낸 뒤 다른 감옥, 즉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1793년 10월까지 약 두 달을 보낸 뒤 단두대로 향했다. 다음 회, 즉 이 시리즈의 마지막 회에서는 탕플 탑과 콩시에르주리에서의 한 왕비의 마지막 시간, 그리고 1793년 10월 16일 그녀가 단두대로 향한 그 마지막 길을 따라가 본다. 그리고 캉팡이 왜 이 회고록을 쓰기로 결심했는가의 질문, 그녀가 자신의 평생을 바친 그 한 가지 의무의 의미를 함께 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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