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의 질문
1963년, 에드먼드 게티어라는 무명의 미국 철학자가 단 세 쪽짜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제목은 「정당화된 참된 믿음은 지식인가?(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였습니다. 이 짧은 논문은 2,400년 동안 철학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지식의 정의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게티어는 이 논문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한 편의 논문으로 철학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류가 2,500년 넘게 씨름해온 문제이며, 아직도 완결된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이, 인간 지성이 도달한 가장 정교한 분석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우리는 이 시리즈의 첫 편에서 지식의 정의를 간략하게 소개했습니다. 이제 훨씬 더 깊이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플라톤에서 시작해서 현대 인식론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지식'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발전시켜왔는지를 함께 따라가 봅시다.
이 여정은 단순한 철학사 공부가 아닙니다. 지식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매일 "나는 안다"고 말할 때 정확히 무슨 주장을 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모든 앎에 대한 태도를 결정합니다.
■ 생각의 실마리 : 왜 이 질문이 이렇게 어려운가
"지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일상에서 우리는 별 문제없이 "나는 안다"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정의하려고 하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먼저 생각해봅시다.
첫째, '안다'는 말이 너무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서울을 안다", "나는 수영하는 법을 안다", "나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안다", 이것들은 모두 '안다'는 말을 쓰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앎입니다. 하나의 정의로 이 모든 것을 포괄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지식과 인접한 개념들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믿음은 어떻게 다른가요? 지식과 의견은? 지식과 이해는? 지식과 지혜는? 이 경계들을 명확하게 그으려고 할수록, 더 많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셋째,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정의를 찾기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의를 제안하면, 반드시 그 정의가 들어맞지 않는 반례가 등장합니다. 게티어의 논문이 바로 이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플라톤의 출발 : 정당화된 참된 믿음
서양 철학에서 지식에 대한 체계적 탐구는 플라톤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대화록 『메논』과 『테아이테토스』에서 지식을 정의하려는 소크라테스의 탐구를 기록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테아이테토스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정의가 제안되고 검토됩니다.
첫 번째 시도 : "지식은 지각이다"
테아이테토스가 처음 제안합니다. "지식은 지각이 아닐까요?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곧 지식 아닌가요?" 이것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상대주의와 연결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반박합니다. 지각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릅니다. 같은 바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차갑고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같은 바람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두 지식이 동시에 참인 것이 됩니다. 또한 꿈속의 지각은 지식이 아닙니다. 지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시도 : "지식은 참된 믿음이다"
그렇다면 지각보다 더 나아가, 참된 믿음이 지식인가요? 어떤 것을 믿고, 그 믿음이 실제로 참이라면, 그것이 지식 아닐까요?
소크라테스는 이것도 반박합니다. 배심원이 능란한 변호사의 설득에 넘어가 무죄인 피고를 유죄로 판결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 판결이 우연히 맞았다면, 즉 피고가 실제로 유죄였다면, 배심원은 참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지식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배심원은 올바른 이유가 아니라 설득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시도 : "지식은 설명이 있는 참된 믿음이다"
마침내 테아이테토스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참된 믿음에 설명이나 근거(logos)가 더해진 것이 지식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정당화된 참된 믿음(Justified True Belief, JTB)'으로 알려진 고전적 지식 정의의 원형입니다.
- 믿음(Belief): 어떤 것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 참(Truth): 그 믿음이 실제로 참인 것.
- 정당화(Justification): 그 믿음이 왜 참인지에 대한 합당한 근거가 있는 것.
이 세 조건이 모두 충족될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정의는 매우 그럴듯합니다. 그리고 이후 2,400년 동안 철학에서 지식의 표준 정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 게티어의 폭탄 : JTB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1963년, 에드먼드 게티어가 등장합니다.
게티어는 JTB의 세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만 우리가 직관적으로 지식이라고 볼 수 없는 사례들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이 '게티어 반례(Gettier Counter-examples)'입니다.
가장 유명한 게티어 사례 중 하나를 살펴봅시다.
농부와 들판의 사례
한 농부가 들판을 바라보다가 양처럼 생긴 것을 봅니다. 그는 "저 들판에 양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 믿음은 정당화됩니다. 그는 양처럼 생긴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그가 본 것은 양이 아니라 양처럼 생긴 큰 바위였습니다. 하지만 우연히도, 그 바위 뒤에 실제로 양이 한 마리 숨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농부의 믿음 ( "저 들판에 양이 있다" ) 은 참입니다. 들판에 실제로 양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믿음은 정당화됩니다. 그는 양처럼 보이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세 조건이 모두 충족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농부는 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직관적으로, 아닙니다. 그는 운 좋게 맞은 것입니다.
이것이 게티어 문제의 핵심입니다. JTB는 지식의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무언가가 더 필요합니다.
■ 게티어 이후 : 지식의 정의를 다시 찾아서
게티어의 논문 이후 철학자들은 JTB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수정함으로써 더 나은 지식의 정의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 주요한 시도들을 살펴봅시다.
① 인과 이론 (Causal Theory)
앨빈 골드먼이 제안한 이 이론은, 지식이 되려면 믿음과 사실 사이에 적절한 인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농부의 경우, 그의 믿음(들판에 양이 있다)은 실제 양에 의해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본 것은 바위였으니까요. 따라서 그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이 이론은 많은 게티어 반례를 해결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를 낳습니다. 수학적 진리나 논리적 진리에서는 '인과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합니다. "2+2=4라는 것을 안다"고 할 때, 이 믿음과 수학적 사실 사이의 인과 관계는 무엇인가요?
② 신뢰성주의 (Reliabilism)
역시 골드먼이 발전시킨 이 이론은, 지식이 되려면 믿음이 신뢰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상적인 시각을 통해 사물을 지각하는 것, 올바른 수학적 계산을 하는 것, 잘 설계된 실험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 — 이런 신뢰할 수 있는 인지 과정에서 나온 믿음이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농부의 경우, 그의 믿음은 사실 신뢰할 수 없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양처럼 보이는 바위를 보고 결론을 내렸으니까요. 따라서 그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이 이론의 매력은 실용성입니다. 우리는 모든 믿음의 근거를 일일이 의식적으로 검토하지 않아도, 신뢰할 수 있는 과정에서 나온 믿음을 지식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판도 있습니다. 무엇이 '신뢰할 수 있는 과정'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③ 안전성 이론 (Safety Theory)
어니스트 소사와 티모시 윌리엄슨이 발전시킨 이 이론은, 지식이 되려면 믿음이 안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안전하다는 것은, 가까운 가능 세계에서도 그 믿음이 거짓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농부의 경우, 그 바위가 없었다면 그는 양이 없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믿음은 안전하지 않고, 지식이 아닙니다.
④ 덕 인식론 (Virtue Epistemology)
린다 재그젭스키 등이 발전시킨 이 접근은, 지식을 개별 믿음의 속성이 아니라 인식론적 덕(epistemic virtue)을 가진 사람의 행위로 바라봅니다. 지식은 지적으로 덕스러운 사람, 즉 열린 마음, 지적 용기, 철저함, 정직함 같은 덕을 갖춘 사람의 인지 활동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접근은 지식을 단순히 명제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품성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알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질문과 연결됩니다.

■ 지식의 또 다른 차원들
JTB와 그 이후의 논쟁은 주로 명제적 지식, 즉 "~라는 것을 안다"는 형태의 지식을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지식에는 다른 중요한 차원들도 있습니다.
절차적 지식 : 몸이 아는 것
자전거 타는 법, 악기 연주하는 법, 언어를 구사하는 법 — 이런 지식들은 명제적 지식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습니다. 자전거 타는 법을 아무리 언어로 설명해도, 직접 타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마이클 폴라니는 이것을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 이 말은 명제적 지식이 지식의 전부가 아님을 시사합니다.
친숙의 지식 : 직접 경험으로 아는 것
고통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아는 것과, 고통에 대한 설명을 읽은 사람이 아는 것은 다릅니다. 파리에 가본 사람과 파리에 대한 책을 읽은 사람이 파리를 아는 방식은 다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것을 '직접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이라고 불렀습니다. 언어적 기술을 통한 간접 지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앎입니다.
이해 : 단순한 앎을 넘어서
최근 인식론에서는 '이해(Understanding)'가 지식과 별개의 중요한 인지적 성취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을 암기한 사람은 그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 다양한 기하학적 맥락에서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 증명의 논리를 파악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합니다'. 이해는 개별 사실들을 연결하고 그 관계를 파악하는 더 깊은 인지적 성취입니다.
■ 철학자의 목소리
르네 데카르트 (1596~1650)
데카르트는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찾기 위해 '방법적 회의(Methodological Doubt)'를 사용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만 지식의 토대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감각은 우리를 속입니다. 수학도 악한 신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면 믿을 수 없습니다. 꿈과 현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데카르트가 도달한 것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의 탐구는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수학처럼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모든 앎의 모델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 이상은 아름답지만, 후대 철학자들은 이런 수준의 확실성이 수학과 논리학 외에는 달성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데이비드 흄 (1711~1776)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흄은 지식에 대한 급진적인 회의주의를 전개했습니다. 그는 모든 지식을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관념의 관계(Relations of Ideas): 수학과 논리학처럼,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 이것들은 부정하면 논리적 모순이 생기므로 절대적으로 참입니다.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 경험적 세계에 관한 것. 이것들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 않으며,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흄의 핵심 주장은 경험적 지식의 한계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그의 '귀납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는 충격적입니다. 우리는 태양이 내일도 뜰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요? 과거에 항상 떴기 때문에 미래에도 뜰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하지만 이 귀납적 추론은 논리적으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미래를 보장한다는 것 자체를 어떻게 증명하는가요? 그것을 증명하려면 또 귀납을 사용해야 하는 순환 논리가 됩니다.
흄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임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칸트가 "흄이 나를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에드먼드 게티어 (1927~2021)
게티어는 단 세 쪽으로 철학사를 바꿨습니다. 그의 반례들은 단순히 JTB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깊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지식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직관은 어디서 오는가? 그 직관 자체가 지식의 본질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 아닌가?
게티어 문제는 지식의 정의라는 이론적 질문이, 우리의 직관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철학에서 직관은 단순한 느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알고 있는 것의 신호입니다.
앨빈 골드먼 (1938~)
현대 인식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하나인 골드먼은 '사회적 인식론(Social Epistemology)'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지식이 단순히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과 제도 속에서 생산되고 전달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누가 전문가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증언을 믿어야 하는가? 인터넷 시대에 지식의 민주화는 어떤 의미인가? 이런 질문들이 사회적 인식론의 핵심 주제입니다.
골드먼의 관점에서 보면, 지식론은 개인의 인지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와 제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우리 삶에서 보면
"알았어"와 "이해했어"는 같은 말인가
한국어에서 우리는 종종 "알겠습니다"와 "이해했습니다"를 혼용합니다. 하지만 이 두 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학생이 수업 시간에 "알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험에서 응용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그는 공식을 외웠지만, 그것이 왜 성립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업무를 설명한 후 "알겠죠?"라고 묻습니다. 부하직원은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막상 혼자 처리하려고 하면 막힙니다. 그는 지시의 내용을 들었지만, 그 맥락과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우리 교육이 오랫동안 '아는 것'에 집중해왔다면 — 사실을 암기하고 공식을 외우는 것 —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연결하고, 적용하고, 변형하는 능력이 지식을 살아있게 만듭니다.
전문 지식을 어떻게 신뢰할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직접 알지 못하고 전문가를 신뢰합니다. 의사의 진단, 변호사의 법적 판단, 과학자의 연구 결과 — 이것들을 직접 검증할 수 없는 일반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게티어 이후의 신뢰성주의 관점에서 보면, 핵심은 그 전문 지식이 신뢰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생산되었는가입니다. 동료 심사를 거쳤는가? 이해충돌은 없는가? 그 주장이 반증 가능한가? 다른 독립적 전문가들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가?
이것은 전문가를 무조건 신뢰하라는 것도, 무조건 의심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지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AI 시대의 지식 문제
오늘날 인공지능은 방대한 양의 정보를 처리하고 그럴듯한 답변을 생성합니다. 그런데 AI는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JTB의 틀로 보면, AI의 출력은 믿음이 아닙니다. AI는 무언가를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주체가 없습니다. 신뢰성주의의 틀로 보면, AI의 정보 처리 과정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가 핵심인데, AI는 종종 그럴듯하지만 틀린 정보를 자신있게 제시합니다. 덕 인식론의 틀로 보면, AI는 지적 덕을 가진 주체가 아닙니다.
AI가 생성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처럼 보이는 패턴의 처리입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것은, AI의 출력을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AI를 올바르게 사용하려면, 그것이 지식의 도구이지 지식 자체가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 지식의 정의를 넘어서
2,500년의 탐구 끝에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솔직히 말하면, 철학자들은 아직도 지식의 완전하고 반례가 없는 정의에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게티어 이후 수십 개의 새로운 정의가 제안되었고, 각각에 대해 새로운 반례가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실패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탐구 과정에서 우리는 지식에 대해 훨씬 더 정교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식과 믿음의 차이, 지식과 이해의 차이, 개인 지식과 사회적 지식의 관계, 지식 생산 과정의 신뢰성 — 이 모든 것들이 이 2,500년의 탐구를 통해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완벽한 정의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지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보유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과정, 인식론적 덕, 사회적 검증, 그리고 깊은 이해가 얽혀 있는 풍요로운 인간적 성취입니다. 이 복잡성을 인식하는 것이, 진정으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시작입니다.
■ 오늘의 지식 질문
당신이 "나는 이것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JTB의 세 조건을 충족합니까? 그 믿음은 신뢰할 수 있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까? 당신은 그것을 단순히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 차이를 느낀 적이 있습니까?
■ 다음 회 예고
지식이 무엇인지를 탐구했습니다. 이제 그 지식에는 어떤 종류와 층위가 있는지를 더 정교하게 살펴볼 차례입니다.
EP.12 앎에도 층위가 있다: 지식의 유형과 수준
"많이 아는 것"과 "깊이 아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정보와 지식은 어떻게 구분되고, 지식과 이해는, 이해와 지혜는 어떻게 다를까요? 앎의 층위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구독과 즐겨찾기로 함께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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