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의 질문
1972년 12월 7일, 아폴로 17호의 우주비행사들이 지구에서 약 45,000킬로미터 떨어진 우주 공간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 사진이 바로 '블루 마블(The Blue Marble)'입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 전체가 찍힌 사진. 푸른 바다와 흰 구름, 갈색 대륙이 어우러진 이 한 장의 사진은 인류의 의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국경도 없고, 인종의 구분도 없고, 오직 우주의 어둠 속에 떠 있는 하나의 연약한 행성. 이 사진이 환경 운동의 폭발적 성장에 기여했다고 많은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블루 마블 사진에서 아프리카 대륙이 위에 있고 남극이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확한' 방향인가요? 우주에는 위도 아래도 없습니다. 지구의 어느 방향이 위이고 어느 방향이 아래인지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은 없습니다. 실제로 원본 사진에서는 남극이 위쪽에 있었는데, NASA가 사진을 뒤집어 배포했습니다. 북반구가 위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당시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지요.
'객관적인' 지구 사진조차도, 그것을 찍고 배포하는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탐구할 질문의 핵심입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일상에서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법정에서 판사는 객관적으로 판결한다고 합니다. 과학자는 객관적으로 실험한다고 합니다. 언론은 객관적으로 보도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 '객관성'은 실제로 달성 가능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일까요?
■ 생각의 실마리 : 객관성과 주관성이란 무엇인가
먼저 두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해봅시다.
객관성(Objectivity)은 관찰자의 개인적 감정, 편견,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객관적 지식은 누가 보아도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누가 측정하든 물의 끓는점은 100도(1기압 기준)입니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주관성(Subjectivity)은 개인의 관점, 감정, 경험, 가치관이 개입된 인식을 의미합니다. 주관적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음악은 아름답다"는 주관적 판단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뜻 보면 이 구분은 명확해 보입니다. 과학은 객관적, 예술 감상은 주관적. 하지만 실제로는 이 경계가 훨씬 흐릿합니다.

■ 객관성의 여러 얼굴
객관성은 단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철학에서는 객관성을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① 존재론적 객관성 (Ontological Objectivity)
어떤 것이 관찰자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에베레스트 산은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든 안 하든 존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베레스트는 객관적으로 존재합니다. 반면 '아름다움'이나 '정의'가 관찰자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지는 훨씬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② 인식론적 객관성 (Epistemic Objectivity)
우리가 어떤 것을 편향 없이 인식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주로 다루는 차원입니다. 에베레스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감각, 인지적 틀, 문화적 배경이 인식에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③ 절차적 객관성 (Procedural Objectivity)
완전한 객관적 인식이 불가능하더라도, 객관적인 절차를 통해 편향을 줄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과학의 이중 맹검법(Double-blind test), 법정의 증거 규칙, 저널리즘의 복수 취재원 원칙 같은 것들이 이 절차적 객관성의 구현입니다. 완전한 객관성은 아니지만, 절차를 통해 주관적 편향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입니다.
④ 상호주관적 객관성 (Intersubjective Objectivity)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주관적 경험이 객관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어떤 것이 한 개인의 주관적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의 가치, 법의 권위, 언어의 의미, 이것들은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호주관성 위에 서 있습니다.
■ 과학은 정말 객관적인가
자연과학은 객관성의 대명사로 여겨집니다.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된 지식, 개인의 감정이나 가치관과 무관한 사실. 하지만 과학도 완전한 객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 (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
과학 철학자 노우드 핸슨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관찰은 항상 이론에 의해 형성됩니다. 우리는 이론적 배경 없이 순수하게 관찰하지 않습니다. 16세기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는 같은 일몰을 관찰했습니다. 하지만 브라헤에게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이론의 틀에서 본 일몰이었고, 케플러에게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이론의 틀에서 본 일몰이었습니다. 같은 현상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본 것입니다.
실험 설계의 선택
과학 실험을 설계할 때부터 선택이 개입됩니다. 무엇을 측정할 것인가, 어떤 변수를 통제할 것인가, 어떤 결과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볼 것인가, 이 모든 선택이 연구자의 판단과 가치관에 의존합니다.
특히 의학과 심리학 연구에서, 어떤 집단을 연구 대상으로 선택하는가가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오랫동안 많은 의학 연구가 남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했고, 그 결과가 여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과학 연구가 젠더 편향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구 자금과 이해관계
과학 연구는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가 연구 자금을 제공하는가, 어떤 결과가 게재되고 어떤 결과가 묻히는가 — 이것이 과학 지식의 형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제약회사가 자금을 지원한 임상시험은 그렇지 않은 임상시험보다 해당 약물에 유리한 결과가 나올 확률이 통계적으로 더 높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과학자도 사회적, 경제적 맥락 안에 있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학이 쓸모없다거나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학은 인류가 개발한 가장 강력한 지식 생산 도구입니다. 하지만 과학도 완전한 객관성을 달성하지는 못하며, 그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과학을 더 잘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 역사와 언론의 객관성 문제
역사는 객관성의 문제가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는 영역입니다.
역사가의 관점
역사가는 과거의 사건을 연구합니다. 하지만 그 과거는 직접 관찰할 수 없습니다. 남아있는 기록과 유물을 통해 재구성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가의 관점이 필연적으로 개입됩니다. 어떤 사료를 선택하는가, 어떤 사건을 중요하게 보는가, 어떤 인과관계를 설정하는가, 이 모든 것이 역사가의 판단입니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해석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 해석은 역사가가 살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같은 역사적 사건이 서로 다른 나라의 교과서에서 전혀 다르게 서술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은 한국과 일본에서, 6·25전쟁은 한국과 북한과 중국에서 전혀 다르게 기술됩니다. 어느 쪽이 '객관적인' 역사인가요?
언론의 객관성
저널리즘에서 객관성은 오랫동안 핵심 가치로 여겨졌습니다. 사실만을 보도하고,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는 원칙. 하지만 이것도 실현 가능한가요?
어떤 사건을 보도할 것인가 자체가 이미 선택입니다. 어떤 목소리를 담을 것인가, 어떤 배경 정보를 제공할 것인가, 어떤 단어를 선택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기자와 편집자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더 나아가, 양측의 주장을 동등하게 다루는 것이 항상 객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97%의 과학자가 동의하는 입장과 3%의 반대 입장을 동등하게 다루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균형 잡혀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왜곡입니다. 이것을 '거짓 균형(False Balance)'이라고 합니다.
■ 철학자의 목소리
토머스 네이글 (1937~)
미국의 철학자 네이글은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본 전망(The View from Nowher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완전한 객관성이란 어디에도 없는 곳, 즉 특정한 위치나 관점 없이 세상 전체를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상적으로는 추구할 만한 목표이지만, 실제로 어떤 관찰자도 완전히 달성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네이글은 그러나 이 한계가 객관성의 추구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자신의 특수한 관점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가능한 한 최선의 객관성에 가까워지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도나 해러웨이 (1944~)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해러웨이는 '위치한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는 개념으로 이 논의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그녀에게 객관성이란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 불가능성을 숨기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왜곡을 만들어냅니다.
해러웨이는 대신 '부분적이고 위치한 지식'을 제안합니다. 자신이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는지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정직하고 더 책임감 있는 지식 생산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관점들이 더 넓게 볼 수 있게 해주는지, 어떤 관점들이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지를 따지는 더 정교한 객관성의 기준을 제안합니다.
리처드 번스타인 (1932~2022)
미국의 철학자 번스타인은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의 이분법을 '카르테시안 불안(Cartesian Anxiety)'이라고 불렀습니다. 완전한 객관성이 없다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불안, 확실한 기반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두려움.
번스타인은 이 이분법 자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완전한 객관성은 달성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관점이 동등하게 유효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근거와 이유를 따지고, 대화하고, 검토하는 실천적 과정을 통해,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지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우리 삶에서 보면
법정에서의 객관성
법정은 객관적 판단의 상징입니다. 판사는 감정을 배제하고 법과 증거에 따라 판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심리학 연구들은 불편한 사실들을 드러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는 가석방 심사 결정을 분석했습니다. 판사들이 식사 직후에는 가석방을 승인하는 비율이 약 65%였지만, 식사 전 허기진 상태에서는 그 비율이 거의 0%에 가까웠습니다. 판결이 법과 증거만이 아니라 판사의 혈당 수준에도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한 피의자의 인종, 외모, 복장이 판결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도 많습니다. 판사들 자신은 객관적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도 완전히 주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것이 법 제도 자체를 불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배심원 제도, 항소 제도, 증거 규칙 같은 절차적 장치들은 이 불완전한 인간의 주관성을 보완하기 위해 발전해온 것입니다. 완전한 객관성이 불가능하다는 인식 위에서 최선의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일상의 객관성 착각
우리는 일상에서도 종종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착각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능력이 없다고 봐요." 과연 그 평가는 정말 객관적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한 개인적 감정, 첫인상, 자신과의 비교, 주변의 평판이 무의식적으로 개입된 것은 아닌가요?
"나는 감정 없이 이성적으로 이 결정을 내렸어요." 하지만 우리의 뇌는 감정과 이성을 분리해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신경과학자 다마지오가 보여준 것처럼, 감정은 이성적 결정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필수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자신이 객관적이라는 확신이 강할수록, 역설적으로 자신의 주관적 편향을 점검하지 않을 위험이 높아집니다. "나는 편견이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오히려 가장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객관성을 추구하는 실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완전한 객관성이 불가능하다면,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객관성은 달성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몇 가지 실천적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먼저 점검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결론에서 어떤 이득을 얻는가?" 이 질문이 자신의 편향을 드러내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반대 증거를 적극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는 증거만이 아니라, 그것에 반하는 증거를 의도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확증 편향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배경, 다른 경험,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시각이 나의 맹점을 보완해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관점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배경에서, 이런 관점으로 이것을 보고 있다"고 밝히는 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객관성의 실천입니다.

■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에서
결론적으로, 완전한 객관성은 인간이 달성할 수 없는 이상입니다. 우리는 항상 특정한 위치에서, 특정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그 렌즈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관점이 동등하게 유효하다거나, 진리를 향한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렌즈는 다른 렌즈보다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합니다. 어떤 관점은 더 많은 증거와 더 엄밀한 절차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어떤 주장은 다른 주장보다 더 많은 반증을 견뎌냈습니다.
완전한 객관성 대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비판적 반성을 통한 더 나은 이해'입니다. 자신의 관점을 인식하고, 그 한계를 인정하며, 더 넓은 시야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성숙한 아는이의 자세이며, 진정한 의미의 지적 겸손입니다.
■ 오늘의 지식 질문
당신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것 한 가지를 떠올려보십시오. 그 믿음은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그 안에 당신의 문화적 배경, 교육, 이해관계가 얼마나 개입되어 있을까요? 만약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이 같은 것을 보았다면, 그것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였을까요?
■ 다음 회 예고
객관성과 주관성의 긴장 속에서, 이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기다립니다.
EP.09 모든 것은 상대적인가: 상대주의의 매력과 함정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나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어." 우리 시대에 이 말은 관용과 다양성의 표현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이 극단까지 밀려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홀로코스트도 단지 나치의 관점에서 본 것에 불과한가요? 상대주의의 매력과 그 치명적 함정을 다음 편에서 함께 탐구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구독과 즐겨찾기로 함께해 주세요. 🙏
'지식론 > 1부. 아는이와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 EP.11 지식이란 무엇인가: 2,500년의 질문 (0) | 2026.05.05 |
|---|---|
| EP.10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상식이란 무엇인가 (0) | 2026.05.04 |
| EP.09 모든 것은 상대적인가: 상대주의의 매력과 함정 (0) | 2026.05.01 |
| EP.07 우리는 함께 무엇을 아는가: 집단 지식의 힘과 위험 (0) | 2026.04.24 |
| EP.06 나는 누구로서 아는가: 개인으로서의 아는이 (0) | 2026.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