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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거장의 초상

카라얀, 제10편 | 카라얀의 적 : 첼리비다케와의 반세기 전쟁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4. 12.

카라얀, 완벽이라는 이름의 삶 — 열 번째 이야기

제10편 | 카라얀의 적 : 첼리비다케와의 반세기 전쟁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를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카라얀은 침묵으로 무시했고, 첼리비다케는 독설로 저격했다. 그 비대칭적 전쟁이 반세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우리는 그 전쟁이 사실은 음악에 대한 두 개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안다.


루마니아에서 온 남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

1912년 루마니아 로만(Roman)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음악에 둘러싸였다. 파리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고, 이후 베를린으로 건너와 베를린 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그가 배운 스승들 중에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임 지휘자들도 있었다.

첼리비다케는 카라얀과 달랐다. 모든 면에서.

카라얀이 오스트리아의 안정된 중산층 가문 출신이었다면, 첼리비다케는 동유럽의 불안정한 변방에서 왔다. 카라얀이 일찌감치 커리어의 방향을 정하고 체계적으로 나아갔다면, 첼리비다케는 더 방랑적이고 철학적인 경로를 걸었다. 카라얀이 음반과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첼리비다케는 그것들을 원칙적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카라얀이 눈을 감고 지휘했다면, 첼리비다케는 눈을 활짝 뜨고 오케스트라 전체를 바라봤다.

그 두 사람이 1945년 베를린에서 처음 만났다.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


전쟁이 끝난 베를린

1945년, 베를린은 폐허였다.

전쟁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도시의 상당 부분이 무너졌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장이었던 필하모니 홀도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흩어졌고, 일부는 전사했으며, 일부는 피난을 떠났다.

그 혼란 속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다시 시작해야 했다.

수장이 없었다. 푸르트벵글러는 탈나치화 심사를 받는 중이었고, 공개 활동이 금지된 상태였다. 카라얀도 마찬가지였다.

그 공백을 채운 사람이 첼리비다케였다.

첼리비다케는 전쟁 중 베를린에 있었고, 나치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것이 그를 전후의 베를린에서 활동할 수 있게 했다. 연합군 통제 아래의 베를린에서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를 맡기 시작했다. 공식 상임 지휘자 타이틀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끄는 역할이었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했다. 폐허의 도시에서, 악보도 부족하고 악기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다시 세웠다.

그 7년이 첼리비다케에게는 자신의 것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의 오케스트라였다.


1952년의 투표

1952년, 푸르트벵글러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미래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언제까지 활동할 수 있을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베를린 필은 차기 상임 지휘자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1952년, 아직 푸르트벵글러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베를린 필은 내부적으로 한 번의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 결과는 첼리비다케를 충격에 빠뜨렸다.

단원들은 카라얀을 선택했다.

첼리비다케가 7년간 함께 일한 단원들이, 카라얀을 선택했다.

공식적인 선출은 아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아직 상임이었고, 이 투표는 미래를 위한 비공식적인 의향 조사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결과가 첼리비다케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단원들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

이 사건이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하모닉과 거리를 두게 된 계기였다. 그는 1952년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관계를 사실상 끊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카라얀이 들어왔다.


첼리비다케의 음악

첼리비다케를 이해하려면 그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먼저 말해야 한다. 첼리비다케는 원칙적으로 음반 녹음을 거부했다. 그의 말년에 일부 실황 녹음들이 허가를 받아 발매되었지만, 생전에 그가 스스로 만든 상업 음반은 거의 없다.

그 이유가 바로 카라얀과의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에 있었다.

첼리비다케는 음악이 공간과 시간의 현상이라고 믿었다. 음악은 특정한 공간, 특정한 순간에 살아있는 공기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 음악을 녹음하여 재생하는 것은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의 흔적일 뿐이다.

그는 이 생각을 불교 철학과 연결시켰다. 첼리비다케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그 무상함 안에 본질이 있다는 것. 음악도 마찬가지다. 사라지는 것이 음악의 본질이다. 그것을 붙잡으려 하는 것은 음악의 본질에 반한다.

카라얀은 정반대였다. 카라얀은 음악을 붙잡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이 철학적 대립이 두 사람의 음반에 대한 태도를 갈랐다. 카라얀은 900장의 음반을 남겼고, 첼리비다케는 의도적으로 거의 남기지 않았다.


첼리비다케의 독설

첼리비다케는 입이 날카롭기로 유명했다.

그의 독설은 카라얀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동시대의 음악가들 중 그의 비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카라얀에 대한 독설이 가장 날카롭고 가장 자주 인용되었다.

"카라얀의 음반들을 들어보라. 그것은 포르말린에 담근 시체와 같다. 아름다운 시체. 그러나 시체다."

"카라얀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만든다. 그의 음반 카탈로그는 소시지 공장과 다를 바 없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조종한다. 그 차이가 전부다."

"카라얀이 지휘하면 오케스트라는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음악은 없다. 소리와 음악은 다른 것이다."

이 말들은 음악계에 빠르게 퍼졌다. 첼리비다케의 독설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재미있어했고, 반복했으며,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첼리비다케의 비판을 단순한 라이벌에 대한 시기로 읽으면 그 핵심을 놓친다. 첼리비다케의 비판은 카라얀이라는 개인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카라얀이 대표하는 음악 산업화에 대한 것이었다. 음반 회사, 스타 지휘자 시스템, 클래식 음악의 상업화. 첼리비다케에게 그 모든 것의 상징이 카라얀이었다.


카라얀의 침묵

카라얀은 첼리비다케의 독설에 공개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인터뷰에서 첼리비다케의 이름이 나오면 카라얀은 짧고 중립적인 답변을 했다. "재능 있는 지휘자"라거나, "흥미로운 음악가"라거나.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그 침묵을 무시로 읽었다. 카라얀이 첼리비다케를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었다.

다른 해석도 있었다. 카라얀은 말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첼리비다케가 아무리 독설을 쏟아내도, 카라얀의 음반들이 세계에서 팔리고 청중이 그 음악을 사랑하는 한, 그 음반들이 답이었다.

그러나 카라얀의 침묵이 완전한 무관심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있다.

카라얀의 가까운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카라얀은 사적인 자리에서 첼리비다케의 이름이 나올 때 미세하게 표정이 굳었다고 한다.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리고 첼리비다케가 어떤 오케스트라와 어디서 무엇을 연주하는지를 카라얀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시하는 척하면서, 서로를 의식했다.


첼리비다케의 음악 세계

첼리비다케의 지휘 철학은 카라얀과의 대립을 통해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예술 세계였다.

첼리비다케의 음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극도로 느린 빠르기였다.

그는 악보에 적힌 빠르기 표시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특히 느린 악장들을 다른 지휘자들보다 훨씬 더 느리게 연주했다. 브루크너 교향곡을 첼리비다케가 지휘하면 연주 시간이 카라얀의 것보다 20~30분 더 길었다.

그것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었다. 첼리비다케는 음악이 공간 안에서 울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소리는 홀의 공기 속으로 퍼지고, 그 잔향이 사라지기 전에 다음 소리가 나와야 한다. 빠르기가 너무 빠르면 소리들이 서로 뭉쳐서 음악의 공간감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첼리비다케는 앙상블의 완벽한 통일에 집착했다. 카라얀과 같은 방향이었지만 방법이 달랐다. 카라얀이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단원들에게 주입하는 방식이었다면, 첼리비다케는 단원들이 서로의 소리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도록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첼리비다케의 리허설은 카라얀의 리허설만큼이나 강도 높은 것으로 유명했다. 단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달랐지만, 그 요구의 강도는 비슷했다.

첼리비다케와 함께 일한 단원들은 그의 리허설에서 음악의 본질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고 회고한다. 단순히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왜 그렇게 연주해야 하는지. 음악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첼리비다케의 리허설은 때로 음악 철학 세미나처럼 진행되었다.


뮌헨에서의 제국

베를린을 떠난 첼리비다케는 오랫동안 중심 무대에서 멀리 있었다.

유럽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면서 활동했지만, 베를린 필하모닉 같은 최정상급 포스트를 가지지 못했다. 음반을 거부하는 그의 원칙이 그를 음악 산업의 주류에서 밀어냈다. 음반이 없는 지휘자는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어려운 시대에, 첼리비다케는 의도적으로 그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1979년, 첼리비다케에게 기회가 왔다.

뮌헨 필하모닉(Münchner Philharmoniker)의 수석 지휘자 자리였다. 뮌헨 필하모닉은 베를린 필하모닉에 비해 국제적 명성이 낮았다. 그러나 첼리비다케는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뮌헨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첼리비다케는 뮌헨 필하모닉을 자신의 방식으로 완전히 변화시켰다. 극도로 느린 빠르기, 완벽한 앙상블, 음악의 공간감. 그것들이 집적되어 뮌헨 필하모닉만의 소리가 만들어졌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는 정반대 방향의 소리였다.

첼리비다케의 뮌헨 공연 티켓은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유럽의 음악 애호가들이 뮌헨으로 모여들었다. 음반이 없는 지휘자의 연주를 듣기 위해 직접 와야 했다. 그것이 오히려 첼리비다케의 공연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녹음으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 그 자리에서만 존재하는 음악.

베를린에서 카라얀이 음반의 황제였다면, 뮌헨에서 첼리비다케는 실황의 황제가 되었다.


같은 곡, 두 개의 극단

두 사람이 같은 곡을 어떻게 다르게 연주했는지를 들어보면 그들의 철학적 차이가 소리로 변환된다.

브루크너 교향곡 8번.

카라얀은 이 곡을 1988년 베를린 필과 녹음했다. 전체 연주 시간 약 80분. 카라얀의 브루크너는 명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베를린 필의 완벽한 앙상블이 음악의 거대한 건축물을 세운다. 3악장 아다지오에서 현악기의 흐름은 물처럼 자연스럽다.

첼리비다케는 뮌헨 필하모닉과 이 곡을 여러 차례 연주했다. 실황 녹음들이 남아 있는데, 연주 시간이 100분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카라얀보다 20분 이상 더 느리다.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에서 소리는 마치 홀의 공기 자체가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각 성부가 충분히 울리고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음이 온다. 그 기다림 안에 긴장이 있고, 그 긴장 안에 음악이 있다.

두 연주를 나란히 들으면 같은 악보가 이렇게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카라얀의 브루크너는 완벽한 건물이다.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는 그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이다. 어느 것이 더 좋은가가 아니라, 어느 것이 자신에게 더 닿는가의 문제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었을 때

카라얀과 첼리비다케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의 일이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첼리비다케가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참석한 어느 해, 카라얀과 로비에서 마주쳤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나눴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의 짧은 교환은 어색했다. 공기가 팽팽했다. 이후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것이 두 사람이 가장 가까이 있었던 순간이었다고 전해진다. 반세기의 긴장 관계가 로비에서의 짧은 인사로 상징되는 것이 어쩌면 적절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직접 만나 대화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 거리가 반세기 내내 유지되었다.


첼리비다케가 카라얀에 대해 한 말 중 가장 복잡한 것

첼리비다케의 독설 중에서 가장 단순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사적인 대화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인용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그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여러 음악가들이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어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렵다.

"카라얀이 어떤 음악을 만드는지, 나는 안다.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도."

이 말이 사실이라면, 첼리비다케는 카라얀의 음악적 능력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라얀이 하는 것을 자신은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이 탁월한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은 인정했다는 것.

그것이 라이벌에 대한 가장 솔직한 평가였을지도 모른다.

음악 세계에서 적이 된다는 것이 항상 무능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다른 방향을 향하는 두 개의 탁월함이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 카라얀과 첼리비다케의 경우가 그랬다.


첼리비다케가 음반을 거부한 진짜 이유

첼리비다케가 음반을 거부한 것에는 철학적 이유와 함께 개인적 이유도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1952년의 베를린 필하모닉 투표. 단원들이 자신 대신 카라얀을 선택했던 그 순간. 그리고 카라얀이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을 맺고 음반 제국을 건설해가는 것을 지켜본 시간들.

카라얀이 음반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있을 때, 첼리비다케는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나는 그 방향으로 가지 않겠다는 것. 음반을 거부함으로써 카라얀의 방식 전체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 단순한 예술적 원칙이었는지, 아니면 카라얀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첼리비다케를 오랫동안 주류에서 밀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카라얀이 음반을 통해 세계 어디서든 들릴 수 있는 이름이 되었을 때, 첼리비다케는 직접 찾아가야만 들을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희소성이 첼리비다케를 전설로 만들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화해

카라얀이 1989년 세상을 떠난 뒤, 베를린 필하모닉은 첼리비다케를 초청했다.

40년 만의 귀환이었다.

첼리비다케는 초청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첼리비다케 자신만이 알았을 것이다. 40년 전 자신을 거부했던 오케스트라로의 귀환. 카라얀이 35년간 군림했던 그 오케스트라 앞에 다시 서는 것.

1992년,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연주 전 리허설에서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에게 처음부터 다시 가르쳤다. 카라얀의 방식으로 수십 년간 훈련된 오케스트라에게 다른 방식으로 듣는 법을, 다른 방식으로 함께 연주하는 법을.

단원들은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방식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 그러나 리허설이 진행될수록 무언가 다른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 공연의 녹음이 일부 남아 있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 첼리비다케의 베를린 필. 같은 오케스트라이지만 전혀 다른 소리. 그것이 지휘자가 무엇을 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두 개의 완벽주의

카라얀과 첼리비다케의 대립을 오해하는 방식이 있다.

카라얀은 완벽주의자였고 첼리비다케는 예술가였다는 식의 단순화. 카라얀은 상업적이었고 첼리비다케는 순수했다는 식의 이분법.

그러나 첼리비다케도 완벽주의자였다. 그의 완벽주의는 카라얀의 것과 방향이 달랐을 뿐, 강도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첼리비다케의 리허설은 카라얀의 것만큼 혹독했다.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반복하는 것,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것은 두 사람이 같았다.

카라얀이 완벽한 균형과 정확성을 추구했다면, 첼리비다케는 완벽한 앙상블과 공간감을 추구했다. 두 가지 모두 완벽함을 향한 추구였다. 단지 그 완벽함의 정의가 달랐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히 예술 대 상업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음악의 본질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이해, 두 가지 다른 사랑의 충돌이었다.

카라얀은 음악을 붙잡으려 했다. 음반 속에, 완벽한 소리 안에. 첼리비다케는 음악을 흐르게 하려 했다. 공기 속으로, 순간 속으로.

두 방향이 모두 음악에 대한 깊은 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이 이 반세기의 전쟁이 단순한 개인 감정을 넘어서는 이유다.


첼리비다케의 마지막

첼리비다케는 1996년 세상을 떠났다.

카라얀보다 7년 후였다. 그때까지 뮌헨 필하모닉과의 작업을 이어갔고, 말년에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휘봉을 잡았다.

그의 말년에 일어난 변화가 있었다. 음반을 거부해온 첼리비다케가, 자신의 뮌헨 시절 실황 연주들이 녹음 형태로 남겨지는 것을 어느 정도 허용했다. 생전에 공식 발매는 아니었지만, 세상을 떠난 뒤 그 녹음들이 발매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에 따라 다르다. 음악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결국 그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음악적 세계가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는지.

확실한 것은,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 첼리비다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카라얀과는 다른 방식으로 울리는 그 소리를.


두 사람이 남긴 것

카라얀과 첼리비다케.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그들의 유산은 각자의 방식으로 남아 있다.

카라얀은 900장의 음반으로 남아 있다. 전 세계 어디서든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 그가 원했던 대로,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첼리비다케는 실황 녹음들로 남아 있다. 불완전한 음질, 홀의 소음, 기침 소리까지 담긴 그 녹음들. 완벽하지 않은 기록이지만, 그 불완전함 안에 그 순간의 공기가 담겨 있다.

두 사람의 음악을 나란히 들으면 클래식 음악이 얼마나 넓은 세계인지를 느낀다. 같은 악보에서 이렇게 다른 세계가 나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름이 모두 음악이라는 것.

어쩌면 카라얀과 첼리비다케는 서로의 적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음악이라는 같은 산을 다른 방향에서 오르는 두 사람이었다. 정상에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각자의 길을 오르는 동안 남긴 발자국들이 지금 우리의 귀를 더 넓게 만든다.


오늘 감상곡 — 두 개의 브루크너

오늘은 같은 곡을 두 번 들어보는 것을 권한다. 두 사람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곡으로 브루크너를 선택했다.


① 카라얀 — 브루크너 「교향곡 7번 E장조」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1989년, 마지막 음반)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음반이다. 브루크너 7번의 2악장 아다지오는 브루크너가 스승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얀의 연주에서 그 애도가 완벽하게 균형 잡힌 소리 안에 담겨 있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의 카라얀이 이 음악을 어떻게 들었는지가 느껴진다.

 


② 첼리비다케 — 브루크너 「교향곡 7번 E장조」

첼리비다케 지휘, 뮌헨 필하모닉 (1990년대 도쿄 실황)

카라얀의 연주를 먼저 듣고, 그 다음에 이것을 들어라. 처음에는 당황할 것이다. 이렇게 느릴 수 있는가. 그러나 조금씩 그 느림 속으로 들어가면, 소리들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피어나고 사라지는지가 들리기 시작한다. 2악장이 특히 그렇다. 카라얀보다 훨씬 더 느리게 흐르는 그 선율 안에서, 음악이 숨을 쉰다.

 


두 연주를 나란히 들은 뒤, 어느 것이 더 브루크너에 가까운지를 판단하려 하지 마시길. 그 판단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신 두 소리가 각자 당신에게 어떻게 다르게 닿는지를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차이 안에 카라얀과 첼리비다케 두 사람의 음악 철학이 있고, 음악이 얼마나 넓은 세계인지에 대한 답이 있다.


다음 편에서는 카라얀과 오페라의 세계, 라 스칼라, 잘츠부르크, 그리고 카라얀이 사랑한 가수들을 이야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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