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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거장의 초상

카라얀, 제12편 | 황제의 황혼 : 카라얀의 마지막 10년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4. 14.

카라얀, 완벽이라는 이름의 삶 — 열두 번째 이야기

제12편 | 황제의 황혼 : 카라얀의 마지막 10년


모든 제국은 끝난다. 카라얀의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라얀은 끝을 인정하지 않았다. 몸이 무너지고, 오케스트라가 등을 돌리고, 시대가 달라져도 카라얀은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위대함이었고, 그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닉

1980년대, 균열의 시작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닉 시대는 1955년부터 1989년까지 35년이었다.

그 35년이 균일하게 빛난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와 60년대가 카라얀 제국의 건설기였다면, 70년대는 그 제국의 완성기였다. 그리고 80년대는 균열의 시작이었다.

균열은 여러 방향에서 왔다.

첫째는 카라얀의 몸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카라얀은 척추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랜 지휘 생활로 인한 직업병이었다. 지휘자는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팔을 들고, 긴 시간 서있는다. 그 반복이 척추에 축적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통증이 간헐적이었다. 카라얀은 무시했다. 리허설과 연주를 계속했다. 그러나 통증은 더 자주, 더 심하게 찾아왔다. 1978년 카라얀은 첫 번째 척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 회복 과정에서 카라얀은 일정 기간 지휘를 쉬어야 했다. 그것이 카라얀에게는 최악의 벌이었다. 음악 없이 지내는 것. 그는 회복 기간에도 악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악보를 읽었다.

둘째는 시대의 변화였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클래식 음악계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카라얀이 대표하는 거대한 스타 지휘자 시스템, 음반 중심의 클래식 음악 산업화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젊은 음악가들은 카라얀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고음악 운동, 시대악기 연주, 레지테아터. 카라얀이 만들어온 방식에 대한 도전들이었다.

그리고 셋째이자 가장 직접적인 균열이 1982년에 왔다. 사비네 마이어 사건이었다.


사비네 마이어 사건의 후유증

사비네 마이어 사건은 6편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카라얀에게 남긴 후유증의 깊이는 당시에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마이어가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난 것은 1983년이었다. 표면적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관계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단원들은 자신들에게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35년간 카라얀의 결정에 복종해온 단원들이 집단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저항이 카라얀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였다.

카라얀은 외형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리허설을 계속했다. 음반 작업을 계속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계속 이끌었다.

그러나 단원들이 느끼는 카라얀의 권위는 달라졌다. 이전에는 카라얀의 결정이 곧 법이었다. 사비네 마이어 사건 이후에는 그 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을 단원들이 알았다. 그 앎이 리허설의 공기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바꾸었다.

카라얀은 그 변화를 감지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엘리에트만 알았을 것이다.


척추, 그리고 지휘봉

1980년대 중반, 카라얀의 건강은 더 악화되었다.

두 번째 척추 수술. 세 번째 척추 수술. 수술과 회복이 반복되면서 카라얀의 몸은 점점 제한되었다. 서있기가 어려워졌다. 지휘하는 동안 몸이 흔들리는 것을 단원들이 눈치채기 시작했다.

카라얀은 의자에 앉아 지휘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것은 음악계에서 드문 일이었다. 지휘자는 서서 지휘하는 것이 관례였다. 앉아서 지휘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카라얀은 그것을 다르게 생각했다. 앉아서 지휘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몸의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하지 않고,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그러나 단원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달랐다. 힘겹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들, 지휘봉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들. 그것들을 단원들은 보았다.

그럼에도 카라얀은 멈추지 않았다.

리허설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음반 녹음은 계속되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프로그램은 여전히 카라얀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몸이 무너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카라얀은 움직이려 했다.

그것이 완벽주의자의 방식이었다. 한계가 보이면 그 한계를 무시하는 것. 한계는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마지막 관계들

1987년,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단원들은 카라얀이 추천한 객원 지휘자들과의 작업에 대해 불만을 표명했다. 카라얀이 추천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통적인 단원 자치권이 카라얀의 독단적 운영에 의해 침해된다는 것이었다.

공개적인 갈등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원들의 불만이 조직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의 대표 기구가 카라얀에게 공식적으로 서한을 보냈다. 오케스트라 운영에서 단원들의 발언권을 강화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카라얀은 그 서한을 무시했다. 35년간의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단원들과 카라얀의 긴장은 1988년으로 이어졌다. 그 해 카라얀은 건강 악화를 이유로 몇 차례 공연을 취소했다. 오케스트라는 다른 지휘자를 섭외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카라얀과 오케스트라 관리 측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균열을 지나 분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1989년 4월, 사임

1989년 4월 24일,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성명서에는 건강상의 이유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카라얀의 몸은 더 이상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역할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음악계는 알았다.

단원들과의 누적된 갈등, 사비네 마이어 사건 이후 변화된 오케스트라 내부의 역학, 카라얀의 독단적 운영 방식에 대한 단원들의 저항.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사임 발표 이후 카라얀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카라얀은 담담했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엘리에트는 후에 그 시기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헤르베르트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알았어요. 베를린 필이 없는 그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그 시간들이 그에게 쉬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잃었습니다."

35년. 그 세월이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것이 끝났다. 카라얀의 나이 여든하나였다.


잘츠부르크에서의 마지막 음악들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를 사임한 뒤,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에 머물렀다.

여름 음악제 준비. 그것이 카라얀이 마지막으로 집중한 것이었다. 1989년 잘츠부르크 여름 음악제가 카라얀의 마지막 프로젝트였다.

음악제 프로그램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공연들이 예정되어 있었다. 카라얀은 리허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몸이 허락하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리허설 도중 쉬어야 하는 순간들이 생겼다. 음악이 멈추고, 단원들이 기다리고, 카라얀이 숨을 고르는 그 순간들.

그래도 카라얀은 계속했다.

1989년 7월 초, 카라얀은 빈 필하모닉과의 리허설을 진행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난 뒤 빈 필하모닉과의 작업이 카라얀의 마지막 음악적 관계였다. 슈베르트와 브루크너. 카라얀이 선택한 마지막 레퍼토리들.

리허설 도중 카라얀이 잠시 쉬어야 했을 때, 빈 필하모닉의 한 단원이 조용히 카라얀에게 물이 담긴 컵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카라얀은 그것을 받아 마시고, 단원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지휘봉을 들었다.

그 장면이 카라얀의 마지막 리허설에 대한 기억으로 전해진다.


1989년 7월 16일

카라얀의 마지막 날.

1989년 7월 16일 이른 아침, 잘츠부르크의 카라얀 자택에서.

카라얀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마흔한 번째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개막하기 불과 몇 주 전이었다. 그 음악제의 리허설이 진행 중이던 시점이었다.

향년 여든한 살.

엘리에트가 곁에 있었다. 두 딸 이사벨과 아라벨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카라얀의 죽음은 즉각 세계에 알려졌다. 베를린, 빈, 밀라노, 뉴욕. 클래식 음악계 전체가 그 소식에 멈췄다.

미렐라 프레니는 이탈리아에서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한동안 있었다고 전해진다.

주빈 메타는 비행기 안에서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혼자 간직하고 싶었다고.

오자와 세이지는 미국에서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날 예정되어 있던 인터뷰를 취소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갈등과 사임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스승의 부음을 들었다. 그 복잡한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단원들은 각자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애도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뒤, 베를린 필하모닉은 추모 공연을 열었다.

그 공연에서 연주된 곡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공연에서 단원들이 카라얀 없이 연주했다는 것이다. 지난 35년간 카라얀의 지휘 아래서만 베를린 필하모닉이었던 소리가, 처음으로 카라얀 없이 울렸다.

그 소리가 어땠는지를 들은 사람들은 무언가 달랐다고 한다. 더 취약하고, 더 인간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더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었다고. 완벽한 지휘자의 통제에서 벗어나 오케스트라 자체가 숨 쉬는 소리가 처음으로 들렸다고.

카라얀이 없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달라질 것이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의 판단보다, 그냥 달라질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달라졌다.


카라얀 이후의 베를린

카라얀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된 것은 클라우디오 아바도였다.

아바도는 카라얀과 의도적으로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단원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주었다. 리허설 방식이 달라졌다. 카라얀이 하나하나 통제했다면, 아바도는 단원들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가도록 이끌었다.

소리가 달라졌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이 완벽하게 다듬어진 금속 같은 소리였다면, 아바도의 베를린 필은 더 유기적이고 더 유연한 소리를 향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었다. 두 소리는 서로 다른 것이었다. 카라얀이 만든 것과 아바도가 만든 것은 다른 방향을 향한 두 개의 탁월함이었다.

아바도 이후 시몬 라틀(Simon Rattle)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어받았고, 그 다음은 키릴 페트렌코(Kirill Petrenko)가 이어받았다. 각각 다른 방향, 다른 소리.

그 모든 변화의 토대에 카라얀의 35년이 있었다. 카라얀이 만든 오케스트라의 기초, 카라얀이 훈련시킨 연주의 수준. 이후의 모든 지휘자들은 그 위에서 시작했다.


황제가 남긴 것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산에 대한 평가가 시작되었다.

음반. 900장이 넘는 음반들. 그것은 클래식 음악 역사상 단일 지휘자로서는 전례 없는 양이다. 그 음반들은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 팔렸다. 스트리밍 시대가 되면서 접근성이 더 높아졌다. 오늘날 카라얀의 음반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되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다.

베를린 필하모닉. 카라얀이 만든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그 오케스트라가 지금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카라얀의 35년이 만든 기초 위에서다.

잘츠부르크 음악제. 카라얀이 세계 최고의 클래식 음악 축제로 만든 그 이벤트는 카라얀 이후에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연주자들. 카라얀이 발굴하고 지원한 안네-조피 무터, 기돈 크레머, 미샤 마이스키, 호세 카레라스. 그들의 커리어가 카라얀의 유산의 일부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유산. 카라얀이 보여준 것, 클래식 음악에서 완벽함을 향한 집요한 추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 그 기준이 이후 모든 지휘자들에게 도전이자 참조점이 되었다.


황제의 비극

카라얀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의 비극이 있다.

완벽함을 향한 추구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카라얀은 평생 완벽한 소리를 찾았다. 리허설에서, 녹음 부스에서, 무대에서. 그러나 완벽함은 항상 한 발 앞에 있었다.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높은 곳이 보였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세 번 녹음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1952년의 전집이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1963년에 다시 녹음했고, 1963년의 것이 또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1977년에 다시 녹음했다. 그리고 아마도 카라얀은 네 번째 전집을 녹음하고 싶었을 것이다. 몸이 허락했다면.

그 완성되지 않는 추구가 카라얀을 35년간 베를린 필하모닉 앞에 세웠고, 900장의 음반을 만들게 했으며, 척추가 무너지는 몸으로도 지휘봉을 놓지 않게 했다.

그것이 위대함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비극이었다. 완벽함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 달림이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라얀이 마지막 리허설에서 지휘봉을 들었을 때, 그는 무엇을 들으려 했을까. 이미 만들어진 완벽함이 아니라,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완벽함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는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그것이 황제를 황제이게 한 것이었다.


잘츠부르크의 묘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근교 아니프(Anif)에 묻혔다.

그가 살았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 태어난 도시에서, 살았던 집 근처에서, 카라얀은 잠들었다.

묘비는 단순하다. 이름과 날짜. 그것으로 충분했다.

잘츠부르크의 여름이면 지금도 음악제가 열린다. 대페스티벌하우스에서, 펠젠라이트슐레에서, 모차르테움에서. 카라얀이 만들고 다듬은 그 공간들에서 음악이 울린다.

카라얀의 이름을 딴 것들이 잘츠부르크 곳곳에 있다. 카라얀 광장, 카라얀 재단. 그의 이름이 새겨진 공간들에서 오늘도 음악이 울린다.

그리고 그 음악들 중 어디선가 카라얀의 음반이 흘러나온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만든 브람스, 베토벤, 브루크너. 그 소리들이 잘츠부르크의 공기 속으로 퍼진다.

카라얀이 붙잡으려 했던 소리들이 아직 여기 있다.


오늘 들어볼 곡 — 황제의 마지막 소리


① 브루크너 「교향곡 7번 E장조」

카라얀 지휘, 빈 필하모닉 (1989년, 마지막 녹음)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주 전에 빈 필하모닉과 함께 녹음한 마지막 음반이다. 척추 수술의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만들어진 녹음. 그러나 그 음악 안에는 약해진 몸의 흔적이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다. 평생 통제를 추구해온 사람이 그 통제를 조금씩 내려놓을 때 나오는 소리. 완벽함의 갑옷이 벗겨진 자리에서 들리는 인간의 목소리 같은 것이 이 녹음 안에 있다.

특히 2악장 아다지오를 들어보시길. 브루크너가 스승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이 악장을, 죽음을 앞둔 카라얀이 연주한다. 그 겹침이 음악에 다른 무게를 더한다.

 


② 슈베르트 「교향곡 8번 b단조 「미완성」」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1988년)

카라얀의 마지막 베를린 필하모닉 시기의 녹음이다. 슈베르트가 미완성으로 남긴 이 교향곡을,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관계가 끝을 향해 가던 시점에 카라얀이 녹음했다. 두 악장만 있는 이 교향곡은 그 미완성 때문에 오히려 더 완결된 것처럼 들린다. 말하지 않은 것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음악. 카라얀이 완성하지 못한 것들과 그 교향곡이 겹쳐 들린다.

 


두 곡을 들으면서 황제의 황혼을 생각해보시길. 완벽함을 향해 달려온 사람이 몸이 무너지고 오케스트라와의 관계가 끝나가는 그 시간에도 지휘봉을 들었다는 것. 그 마지막 소리들 안에 카라얀의 전부가 담겨 있다. 위대함과 비극, 완성과 미완성, 황제와 인간이 동시에.


다음 편에서는 카라얀이 우리에게 남긴 것, 그의 음악이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하는 마지막 편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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