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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거장의 초상

카라얀, 제11편 | 카라얀과 오페라 : 또 다른 제국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4. 13.

카라얀, 완벽이라는 이름의 삶 — 열한 번째 이야기

제11편 | 카라얀과 오페라 : 또 다른 제국


카라얀은 오케스트라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또 다른 제국이 필요했다. 무대 위의 목소리들, 조명, 무대 장치, 의상. 오페라는 카라얀이 지배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예술 형식이었다. 그리고 카라얀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오페라라는 세계

오케스트라 음악은 순수하다.

악보가 있고, 지휘자가 있고, 연주자들이 있다. 그 세 요소가 만나는 공간에서 음악이 태어난다. 지휘자는 그 공간의 중심에 있다.

오페라는 다르다.

오케스트라 위에 성악가들의 목소리가 더해지고, 그 위에 무대 장치와 조명과 의상과 연출이 더해진다. 수십 명의 합창단, 발레 무용수들, 무대 스태프들. 오페라 전막은 수백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종합 예술이다.

그 거대한 것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 그것이 오페라 지휘자의 역할이고, 카라얀이 오페라에서 추구한 것이었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에서 황제였다. 오페라에서 그는 더 큰 황제가 되려 했다. 음악만이 아니라 무대 위의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 아래 있기를 원했다.

그 야망이 그를 오페라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로 만들었다.


라 스칼라의 첫 발

1948년, 카라얀은 밀라노 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에 데뷔했다.

라 스칼라. 이름만으로도 그 무게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1778년 개관한 이 오페라 극장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본산이며 세계 오페라계의 성지다. 베르디와 푸치니의 작품들이 이 무대에서 초연되었고, 카루소와 칼라스가 이 무대에서 노래했으며, 토스카니니가 이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독일인 지휘자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본산에서 지휘한다는 것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음악적 경계를 넘는 행위였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이탈리아 지휘자의 것이라는 암묵적인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에.

카라얀이 라 스칼라에서 처음 지휘한 것은 베르디의 오페라였다. 공연이 끝난 뒤 이탈리아 언론의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독일 지휘자가 베르디를 이해한다는 것, 아니 이탈리아인보다 더 베르디적인 무언가를 꺼낸다는 것.

카라얀의 베르디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자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달리 들렸다. 선율의 흐름이 더 명확했고, 오케스트라와 성악의 균형이 더 섬세했으며, 음악의 극적 구조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라 스칼라의 문이 열렸다.

카라얀은 이후 라 스칼라와 오랜 관계를 이어갔다. 베르디, 푸치니, 바그너. 라 스칼라 무대에서 카라얀이 만들어낸 오페라들은 하나씩 전설이 되어갔다.


카라얀과 칼라스 — 만남과 충돌

오페라 '루치아 디 람메르무어' 의 엄청난 성공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 칼라스와 젊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의 모습

라 스칼라와 카라얀의 관계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그리스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했고, 라 스칼라를 중심으로 유럽 오페라계를 정복했다. 칼라스의 목소리는 기술적 완벽함과 극적 표현력을 동시에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단순히 노래하지 않았다. 인물을 살아냈다.

카라얀과 칼라스는 1948년부터 협업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라 스칼라에서 함께 여러 오페라를 만들었다. 루치아 디 람메르무어, 맥베스, 노르마. 두 완벽주의자의 만남이었다.

처음에 두 사람의 협업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칼라스의 목소리가 카라얀의 오케스트라 위에서 피어나는 방식. 카라얀은 칼라스를 위해 오케스트라를 조율했고, 칼라스는 카라얀의 음악적 방향 안에서 자신의 극적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강한 자아를 가진 완벽주의자였다. 충돌은 불가피했다.

리허설에서 두 사람은 자주 의견을 달리했다. 어떤 구간의 빠르기, 어떤 음의 처리 방식, 어떤 장면에서 오케스트라가 얼마나 두드러져야 하는지. 카라얀은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고집했고, 칼라스는 자신의 극적 직관을 굽히지 않았다.

칼라스는 훗날 카라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훌륭한 지휘자다. 그러나 오페라에서 지휘자는 가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카라얀은 가수가 지휘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였다."

카라얀은 칼라스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두 사람의 협업은 줄어들었다. 칼라스는 카라얀이 아닌 다른 지휘자들과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완벽주의자와 완벽주의자. 두 사람이 만날 때 시너지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 만남이 오래 지속되기에는 두 자아가 너무 강했다.


미렐라 프레니 — 카라얀이 가장 오래 사랑한 목소리

칼라스와의 관계가 충돌로 점철되었다면, 카라얀이 가장 오랫동안 신뢰하고 함께 작업한 소프라노는 달랐다.

미렐라 프레니(Mirella Freni).

1935년 이탈리아 모데나 출신. 프레니의 목소리는 칼라스와 달랐다. 칼라스가 극적 강렬함의 화신이었다면, 프레니는 자연스럽고 따뜻한 아름다움의 소프라노였다. 기교보다 선율의 순수함. 극적 충격보다 음악의 서정성.

카라얀이 프레니를 처음 발견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카라얀은 프레니의 목소리에서 오페라가 원래 가져야 할 무언가를 들었다.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 강요하지 않는 감정.

카라얀은 프레니와 함께 푸치니의 거의 모든 주요 오페라를 녹음했다. 라 보엠의 미미, 나비부인의 초초상, 마농 레스코의 마농. 그리고 베르디의 오텔로에서의 데스데모나.

두 사람의 협업에서 특히 주목받는 것이 「라 보엠(La Bohème)」이다. 1972년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녹음한 이 음반은 지금까지도 라 보엠의 대표 음반 중 하나로 꼽힌다. 프레니의 미미와 파바로티의 로돌포가 만나는 그 음반에서 카라얀의 오케스트라는 두 성악가의 사랑 이야기를 위한 완벽한 배경이 된다.

프레니는 카라얀과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과 함께 노래할 때,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오케스트라가 나를 받쳐주었다.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그는 내가 말하기 전에 알았다."

카라얀과 프레니의 관계는 칼라스와의 것과 달랐다. 프레니는 카라얀의 음악적 방향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라얀의 오케스트라 위에서 노래하는 것을 즐겼고, 카라얀은 프레니의 목소리를 위해 오케스트라를 섬세하게 조율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것을 존중했다.

카라얀은 프레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레니의 목소리는 오케스트라 안으로 들어온다. 다른 소프라노들은 오케스트라 위에서 노래한다. 프레니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노래한다. 그 차이가 전부다."

미렐라 프레니(Mirella Freni)


파바로티와의 화산 위 요리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와 카라얀의 관계는 미렐라 프레니와 카라얀의 관계와 달랐다.

파바로티는 1935년 이탈리아 모데나 출신이었다. 공교롭게도 미렐라 프레니와 같은 해, 같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알았고, 같은 성악 선생님에게 배우기도 했다.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20세기 최고의 테너 목소리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최고음(C# 이상)에서의 광채와 힘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목소리는 음악홀을 가득 채웠고, 청중을 압도했다.

카라얀과 파바로티는 여러 차례 협연했다. 베르디와 푸치니 오페라에서. 두 사람의 협업은 음악적으로 빛나는 결과를 냈다.

그러나 리허설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종종 긴장으로 가득 찼다.

파바로티는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확신, 오페라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 카라얀이 원하는 방향이 파바로티의 것과 다를 때, 파바로티는 조용히 물러서는 타입이 아니었다.

파바로티는 카라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휘자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화산 위에서 요리하는 것과 같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지만, 그 열기로 만들어진 요리는 최고다."

화산 위의 요리. 그 표현이 파바로티와 카라얀의 관계를 정확하게 포착한다. 위험하지만 그 긴장감 안에서 최고의 결과가 나오는 것.

카라얀은 파바로티의 목소리의 위대함을 인정했지만, 그 자아의 크기에 대해서는 덜 편안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두 강한 자아의 만남은 항상 조율이 필요했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잘츠부르크 음악제 — 오페라의 왕국

카라얀이 오페라에서 가장 완전하게 자신의 비전을 실현한 공간은 라 스칼라가 아니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Salzburger Festspiele)였다.

카라얀의 고향 도시에서 열리는 이 음악제는 1920년에 설립되었다.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여름마다 세계 최고의 음악가들이 모이는 축제. 그것이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출발이었다.

카라얀이 잘츠부르크 음악제와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부터였다. 그리고 1956년,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예술 감독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카라얀의 것이 되었다.

카라얀은 예술 감독으로서 음악제 전체를 재설계했다. 프로그램의 구성에서 출연 연주자와 성악가 선발까지, 무대 디자인에서 홍보 이미지까지. 카라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오페라 프로덕션에서 카라얀은 전례 없는 권한을 행사했다. 지휘자로서만이 아니라 무대 연출가로서도 잘츠부르크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것이 카라얀 최대의 실험이었다.


연출가 카라얀

카라얀이 오페라를 직접 연출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것은 당시 오페라계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휘자와 연출가는 다른 역할이다. 지휘자는 음악을 이끌고, 연출가는 무대 위의 모든 것을 설계한다. 카라얀은 두 역할을 동시에 하려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카라얀의 오페라에 대한 이해의 깊이 때문이었다. 카라얀은 오페라를 처음부터 통합적으로 보았다. 음악과 무대는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다. 1악장의 오케스트라 전주곡이 울릴 때 무대 위의 조명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어떤 음악적 클라이막스에서 어떤 무대 동작이 필요한지. 그것은 지휘자의 감각과 연출가의 감각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었다.

카라얀이 연출한 오페라들은 그 시각적 완성도로 주목받았다. 무대 디자이너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만들어진 무대들은 음악적 아름다움과 시각적 아름다움이 일치하는 방향을 추구했다.

베르디의 「오텔로(Otello)」,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베르디의 「팔스타프(Falstaff)」.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이 연출하고 지휘한 이 프로덕션들은 오페라 역사에 남는 공연들로 기억된다.

무대 디자이너 귄터 슈나이더-지엠센(Günther Schneider-Siemssen)은 카라얀과 수십 년을 함께 작업한 협력자였다. 두 사람은 무대 위의 색깔과 조명이 음악의 흐름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했다. 슈나이더-지엠센은 카라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은 악보를 보면서 무대를 본다. 어떤 화음에서 어떤 조명이어야 하는지를 악보에서 읽어낸다. 그것은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음악과 시각이 하나로 통합된 감각."


바그너 — 카라얀의 또 다른 집

카라얀의 오페라 세계에서 베르디와 푸치니만큼 중요한 또 다른 영역이 있었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바그너의 오페라는 다른 오페라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연주 시간이 5시간을 넘는 대작들, 중단 없이 이어지는 음악의 흐름, 성악과 오케스트라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녹아드는 구조. 바그너는 오페라를 음악극(Musikdrama)이라고 불렀다. 노래를 들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 드라마를 경험하러 가는 곳.

카라얀은 바그너를 일찍부터 깊이 이해했다. 아헨 시절부터 바그너 오페라를 지휘했고, 베를린에서도 바그너는 중요한 레퍼토리였다.

카라얀의 바그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케스트라의 처리였다. 바그너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반주가 아니다. 오케스트라 자체가 드라마를 이끄는 주역이다. 라이트모티프(특정 인물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반복되는 음악 주제들)가 교차하고 변형되면서 이야기를 전달한다.

카라얀은 그 라이트모티프들의 그물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들려주었다. 어떤 라이트모티프가 어느 시점에 어떻게 변형되어 나타나는지를 청중이 들을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에서 카라얀의 바그너 해석이 가장 잘 드러난다. 전주곡의 그 유명한 미해결 화음에서 시작되는 음악이 거의 5시간에 걸쳐 해결을 향해 나아가다가 마지막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에서 완성되는 그 여정을 카라얀은 하나의 끊임없는 흐름으로 만들어냈다.


가수들을 다루는 방법

오페라에서 지휘자와 성악가의 관계는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와 단원들의 관계보다 더 복잡하다.

성악가들은 독립적인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단체의 일원으로 훈련되지 않았다. 각자의 해석, 각자의 스타일, 각자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이 오케스트라와, 다른 성악가들과, 그리고 지휘자와 만나야 한다.

카라얀이 성악가들을 다루는 방식은 지휘자마다 달랐다.

일부 지휘자들은 성악가들에게 음악적 자유를 많이 주었다. 음악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성악가들이 자신의 것을 할 수 있게 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그런 유형이었다.

카라얀은 달랐다. 그는 오페라 전체의 음악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성악가들이 그 비전 안에서 움직이기를 원했다. 성악가의 개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이 전체의 조화 안에서 발현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일부 강한 개성의 성악가들과 충돌을 낳았다. 칼라스와의 충돌도 그런 것이었다. 파바로티와의 긴장도.

그러나 카라얀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성악가들은 카라얀과의 작업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냈다. 미렐라 프레니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카라얀은 성악가를 발굴하는 데도 탁월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젊은 성악가를 잘츠부르크 무대에 세우고, 그 성악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것. 그것을 카라얀은 여러 번 했다.

호세 카레라스(José Carreras)도 그런 경우였다. 스페인 출신의 테너 카레라스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카라얀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라얀은 카레라스의 서정적이고 따뜻한 테너 목소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었다. 라 스칼라와 잘츠부르크에서 카레라스를 기용했고, 음반 녹음에도 참여시켰다.


모차르트 오페라 — 카라얀의 또 다른 얼굴

카라얀의 오페라 세계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모차르트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도시다. 그 도시에서 음악제를 이끄는 카라얀이 모차르트 오페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카라얀의 모차르트는 베르디나 바그너와 전혀 다른 접근을 요구했다. 거대한 스케일이 아니라 투명한 실내악적 섬세함. 극적 폭발이 아니라 인간 심리의 미묘한 뉘앙스. 카라얀은 그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과 「돈 조반니(Don Giovanni)」에서 카라얀은 모차르트 오페라의 본질을 독특하게 포착했다. 빠르기는 활기차면서도 음악이 충분히 숨을 쉬었고, 오케스트라는 가벼우면서도 각 섹션의 색깔이 선명했다.

카라얀이 잘츠부르크에서 만든 모차르트 오페라 프로덕션들은 당시 음악제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였다.


오페라 연출의 논쟁

카라얀의 오페라 연출이 항상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카라얀의 연출이 너무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음악에 비해 무대가 지나치게 압도적이라고 비판했다. 음악이 먼저이고 무대는 그것을 지원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카라얀의 프로덕션에서는 무대가 음악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비판은 카라얀의 연출이 보수적이라는 것이었다. 1970년대부터 유럽 오페라계에서는 연출의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즉 연출가 중심의 오페라. 원작의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옮기거나 완전히 해체하는 실험적 연출들. 카라얀은 그런 방향에 동조하지 않았다. 베르디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옷을 입어야 하고, 바그너는 그 신화적 공간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카라얀의 입장이었다.

두 진영의 충돌이 잘츠부르크 음악제 안에서도 일어났다. 실험적 연출을 선호하는 측과 카라얀의 전통적 방식을 지지하는 측. 카라얀은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고,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카라얀이 살아있는 동안 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녹음된 오페라들

카라얀의 오페라 유산은 실황 무대에서만이 아니라 음반으로도 방대하게 남아 있다.

도이치 그라모폰과 EMI를 통해 카라얀이 녹음한 오페라 전막들의 목록은 방대하다. 베르디의 오텔로, 아이다, 팔스타프,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투란도트, 마농 레스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 반지 사이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 피리.

이 음반들 중 상당수가 지금도 해당 작품의 대표 음반으로 거론된다. 1972년의 라 보엠, 1960년의 아이다, 1973년의 오텔로. 이 음반들은 최고의 성악가들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만남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카라얀의 오페라 유산 중 가장 빛나는 부분들이다.

카라얀은 오페라 음반에서도 녹음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성악과 오케스트라의 음향적 균형, 목소리의 따뜻함과 명료함의 조화, 홀의 잔향이 오페라 특유의 분위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카라얀의 오페라 음반들은 음향적 완성도에서 오케스트라 음반들과 동일한 수준의 집요함이 담겨 있다.


오페라가 카라얀에게 준 것

카라얀이 오페라에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케스트라 음악에서 카라얀은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가장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악보가 있고, 그 악보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면 된다. 지휘자의 비전이 가장 직접적으로 소리로 변환되는 공간.

오페라에서는 달랐다. 목소리가 들어온다. 목소리는 오케스트라 단원과 달리 지휘자의 완전한 통제 아래 있지 않다. 성악가는 자신만의 숨 쉬는 방식이 있고, 자신만의 감정 표현이 있다. 그것을 완전히 통제하려 하면 충돌이 생긴다.

카라얀은 오페라를 통해 자신의 완벽주의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때로는 놓아주는 것, 성악가의 목소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도록 두는 것, 그 예상치 못한 것이 오히려 음악을 살아있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카라얀이 오케스트라에서만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완벽함을 향한 통제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오히려 더 살아있는 음악이 태어난다는 것. 미렐라 프레니가 노래할 때, 파바로티가 최고음을 내뿜을 때, 그 순간들은 카라얀이 계획하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음악을 가장 생생하게 만든 것들이었다.

오페라는 카라얀의 완벽주의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균열에서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 흘러나왔다.


오늘 감상곡 — 두 개의 오페라


① 푸치니 「라 보엠(La Bohème)」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 미렐라 프레니 & 루치아노 파바로티 (1972년 녹음)

카라얀, 프레니, 파바로티. 세 거인이 만난 이 음반은 라 보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녹음 중 하나다. 1막에서 미미와 로돌포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들어보시길. 프레니의 미미가 처음 목소리를 낼 때, 카라얀의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그 목소리를 받아들이는지를. 그리고 파바로티의 로돌포가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을 노래하는 순간, 그 목소리의 광채가 어떻게 베를린 필의 소리와 만나는지를.


② 베르디 「오텔로(Otello)」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 욘 빅커스 & 미렐라 프레니 (1973년 녹음)

카라얀의 베르디 오페라 중 가장 완성도 높은 녹음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특히 4막 데스데모나의 아리아 「버드나무 노래(Canzone del salce)」와 「아베 마리아(Ave Maria)」를 들어보시길. 프레니의 목소리가 가장 서정적이고 가장 내면적으로 노래하는 순간들이다. 카라얀은 그 순간들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최대한 뒤로 물렸다. 목소리가 혼자 숨 쉴 수 있도록.

 

 

두 음반을 들으면서 카라얀의 오페라가 오케스트라 음악과 어떻게 다른지를 느껴보시길. 오케스트라 음반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카라얀이, 성악가의 목소리 앞에서 한 발 물러서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그 순간들에서 오페라의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태어난다.


다음 편에서는 카라얀의 마지막 10년, 사비네 마이어 사건 이후 베를린 필과의 결별, 그리고 황제의 황혼을 이야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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