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 완벽이라는 이름의 삶 : 여덟 번째 이야기
제8편 | 카라얀의 세 번의 결혼 : 황제는 집에서 무엇이었는가
무대 위에서 카라얀은 황제였다. 눈을 감고 지휘봉을 들면 세상이 그의 것이었다. 그러나 지휘봉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카라얀은 무엇이었는가. 세 명의 여인이 그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답했다.
완벽주의자의 사생활
카라얀에 관한 책과 기사들은 대부분 그의 음악에 집중한다.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35년, 음반 제국, 리허설의 전설, 눈을 감은 지휘. 카라얀이라는 이름은 그 음악적 업적들과 함께 기억된다.
그러나 카라얀도 인간이었다. 지휘봉을 내려놓으면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누군가의 아버지였으며, 누군가의 연인이었다. 음악 바깥의 카라얀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 답을 가장 가까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카라얀과 함께 살았던 세 명의 여인들.
첫 번째 아내 엘미 홀거슨, 두 번째 아내 아니타 구텐베르크, 그리고 마지막 아내 엘리에트 무레.
세 번의 결혼. 세 개의 다른 이야기.
첫 번째 아내 : 엘미 홀거슨
1938년, 카라얀은 서른 살에 처음 결혼했다.
상대는 엘미 홀거슨(Elmy Holgersson). 스웨덴 출신의 오페라 가수이자 배우였다. 두 사람이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음악계에서의 만남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만남.
1938년은 카라얀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해였다. 아헨의 음악감독으로 자리를 잡았고,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서 첫 데뷔를 했으며, '기적의 카라얀'이라는 별명을 얻은 해였다. 카라얀의 상승이 가파르게 시작된 바로 그 시점에 첫 번째 결혼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의 결혼은 4년 만에 끝났다. 1942년에 이혼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카라얀은 이 결혼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의 말하지 않았다. 엘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조용히 헤어졌고, 카라얀은 곧 다른 여인을 만났다.
음악계에서 도는 이야기는 이렇다. 카라얀의 커리어가 빠르게 올라가면서 두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카라얀은 음악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삶을 살았다. 리허설이 끝나면 음반 녹음, 음반 녹음이 끝나면 다음 공연 준비. 그 안에서 결혼 생활이 설 자리는 좁았다.
그리고 1942년, 카라얀은 다른 여인을 만났다.
두 번째 아내 : 아니타 구텐베르크
두 번째 아내는 카라얀의 삶에서 가장 복잡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아니타 구텐베르크(Anita Gütermann). 스위스의 유서 깊은 섬유 가문 출신이었다. 구텐베르크 가문은 독일과 스위스에서 오래된 산업 명문가로,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아니타는 그 가문의 딸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41년 혹은 1942년으로 추정된다. 카라얀이 아직 첫 번째 아내 엘미와 결혼 중이던 시기였다. 즉, 두 번째 결혼은 첫 번째 결혼이 끝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카라얀의 인간적 면모에서 가장 불편한 부분 중 하나다. 음악에서의 완벽함을 추구한 사람이, 개인적인 삶에서는 그 완벽함과 거리가 있었다.
카라얀은 1942년 엘미와 이혼하고, 같은 해 아니타와 결혼했다.
아니타와의 16년
아니타와의 결혼은 1942년부터 1958년까지, 16년간 이어졌다.
이 기간은 카라얀의 생애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간과 겹친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 탈나치화 심사와 활동 금지, 그리고 복권 이후 국제 무대에서의 급격한 상승. 카라얀이 무너질 수도 있었던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아니타가 곁에 있었다.
아니타는 카라얀의 야망을 이해했다. 아니, 이해 이상이었다. 그녀는 카라얀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려 하는지를 알았고, 그 방향을 지지했다.
전쟁 후 카라얀의 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이 있었다. 아니타의 집안은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카라얀은 그 시간에 아니타의 경제적 지원에 기댔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텐베르크 가문의 재력이 카라얀이 어려운 시기를 버티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 전부가 아니었다. 아니타는 카라얀의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카라얀의 연주회에 항상 함께했고, 카라얀이 새 레퍼토리를 준비할 때 옆에서 악보를 함께 들여다보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
단원들과 스태프들은 아니타에 대해 "카라얀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카라얀의 기분 변화, 음악적 고민, 인간적 불안. 그것들을 옆에서 가장 가까이 지켜보고 이해한 사람이 아니타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결혼이 끝났는가.
엘리에트, 그리고 두 번째 결혼의 끝
1950년대 중반, 카라얀은 새로운 여인을 만났다.
엘리에트 무레(Eliette Mouret).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출신으로, 당시 패션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다. 카라얀보다 스물네 살 어린 그녀를 카라얀이 처음 만난 것은 1954년 혹은 1955년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이 만난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가장 많이 전해지는 것은 파리에서의 만남이다. 카라얀이 파리에서 연주 일정이 있었고, 그 주변에서 엘리에트와 처음 마주쳤다는 것이다.
카라얀은 엘리에트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음악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여인. 패션과 미(美)의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 그리고 카라얀보다 스물네 살 어린 젊음.
아니타는 알았을 것이다. 혹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카라얀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과는 분명했다.
1958년, 카라얀과 아니타는 이혼했다. 그리고 카라얀은 엘리에트와 결혼했다.
아니타는 이후 공개적으로 카라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라얀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인터뷰를 거부했고, 회고록도 쓰지 않았다. 16년을 함께한 사람이 이렇게 침묵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카라얀도 아니타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두 번째 결혼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끝났다.

세 번째 아내 : 엘리에트 무레
엘리에트 무레(Eliette Mouret).
1927년 프랑스 알비 출신. 프로방스의 작은 도시에서 자란 그녀는 파리로 나와 패션 모델로 활동했다. 당시 파리의 패션계는 디올과 발렌시아가의 시대였다. 엘리에트는 그 세계에서 아름다움으로 주목받은 사람이었다.
카라얀을 만났을 때 엘리에트는 스물일곱이었고, 카라얀은 쉰하나였다. 스물네 살의 나이 차이. 음악과 패션, 완벽주의자와 아름다움의 세계. 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전혀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58년에 결혼했다. 그리고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는 1989년까지 31년을 함께했다.
세 번의 결혼 중 가장 긴 결혼이었다. 그리고 카라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이었다.
엘리에트가 본 카라얀
엘리에트는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뒤 여러 인터뷰에서 남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이야기 속 카라얀은 음악계가 아는 카라얀과 달랐다.
"집에서 헤르베르트는 황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헤르베르트였어요. 리허설에서 그가 어떤지 저는 직접 보지 않아도 알았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눈을 보면 오늘 리허설이 어땠는지가 보였으니까요."
카라얀은 집에서 피아노를 거의 치지 않았다고 엘리에트는 말했다. 음악은 그에게 일이었다. 집은 음악으로부터의 도피처였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완벽주의자가 완벽함을 추구하는 공간과 그것으로부터 쉬는 공간을 분리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집에서 카라얀은 어떻게 쉬었는가.
요트. 카라얀은 지중해에서 요트를 몰았다. 스스로 배를 조종하면서 바다 위를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엘리에트는 처음에 배멀미로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카라얀이 요트 위에서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는지를 보면서, 그것을 함께하게 되었다고.
"요트 위의 헤르베르트는 웃었습니다. 베를린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어요. 바다 위에서 그는 진짜로 쉬었습니다."
자동차도 카라얀의 탈출구였다. 카라얀은 빠른 자동차를 좋아했다. 포르쉐와 페라리를 몰았다. 스스로 운전했고, 속도를 즐겼다. 비행기 조종도 마찬가지였다. 카라얀은 직접 비행기를 조종하여 유럽 각지의 연주회장을 다녔다. 엘리에트는 그 비행기에 동승하는 것이 처음에는 두려웠다고 했다.
"헤르베르트가 비행기를 조종할 때, 그는 완전히 다른 집중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음악을 지휘할 때와 같은 집중이었어요. 그것을 보면서 나는 그가 조종간을 지휘봉처럼 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딸, 이사벨과 아라벨
카라얀과 엘리에트 사이에는 두 딸이 태어났다.
이사벨(Isabel von Karajan), 1960년생. 그리고 아라벨(Arabel von Karajan), 1964년생.
두 딸이 어릴 때, 카라얀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다. 베를린, 빈, 잘츠부르크, 밀라노. 아버지가 집에 없는 날이 많았다. 엘리에트가 아이들을 주로 키웠다.
이사벨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드물게 공개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카라얀은 집에서 피아노를 거의 치지 않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집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릴 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세계 최고의 음악가인데 왜 집에서는 피아노를 치지 않는 걸까.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음악은 삶의 전부였지만, 집은 음악이 없는 곳이어야 했다는 것을."
아라벨은 아버지와 음악에 대해 나눈 대화들을 기억한다고 했다. 카라얀은 딸들에게 음악을 강요하지 않았다. 음악가로 키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악이 아닌 다른 것들을 경험하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음악가가 되라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는 했지만. 그 차이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두 딸은 음악가가 되지 않았다. 이사벨은 후에 자선 활동과 문화 사업에 종사했고, 아라벨은 사회적 기업가로 활동했다. 카라얀의 피가 흐르지만 카라얀의 길을 가지 않은 딸들. 카라얀은 그것을 실망했는가, 아니면 만족했는가. 알 수 없다.
엘리에트가 카라얀을 붙들었던 방식
카라얀의 성격은 함께 살기 쉽지 않았다.
완벽주의자의 집은 어떤 곳인가.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 곳인가, 아니면 완벽함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인가. 카라얀에게는 후자였다. 그러나 그것이 함께 사는 사람에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카라얀은 음악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기분이 가라앉았다.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리뷰가 나오면 침울해졌다. 리허설이 뜻대로 되지 않은 날은 집에서도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그것을 옆에서 감당하는 것이 엘리에트의 역할이기도 했다.
엘리에트가 카라얀의 곁에서 31년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의 강함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녀는 음악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카라얀의 음악적 권위에 압도되지 않았다. 카라얀이 황제인 세계와 분리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엘리에트는 카라얀의 완벽주의를 음악 바깥에서는 요구하지 않았다. 집에서 카라얀이 쉴 수 있도록,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것이 카라얀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카라얀은 엘리에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음악 안에서 잃는 것들을 삶 안에서 찾게 해준다. 음악은 나를 채우지만 동시에 비운다. 엘리에트는 그 빈 곳을 채운다."
이 말은 카라얀이 공개적으로 남긴 가장 사적인 말 중 하나다. 완벽주의자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한 말이기도 하다. 음악이 자신을 비운다는 것. 그 빈 곳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
잘츠부르크의 집
카라얀 가족의 주요 거주지는 잘츠부르크였다.
카라얀의 고향이기도 한 이 도시에서, 카라얀은 안스부르크(Anif) 지역의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외곽의 조용한 지역에 자리한 그 집은 알프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위치에 있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 기간에는 전 세계의 음악 애호가들과 귀족, 사업가들이 잘츠부르크로 모여들었다. 카라얀의 집도 그 계절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음악계의 거물들,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카라얀의 집을 방문했다.
엘리에트는 그 집의 안주인이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사교적 부분을 사실상 엘리에트가 담당했다. 어떤 손님을 어떻게 맞을지, 저녁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지, 누구를 누구에게 소개할지. 그것이 엘리에트의 역할이었고, 그녀는 그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카라얀은 그것을 고마워했다. 사교적인 역할을 직접 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카라얀에게, 엘리에트가 그 부분을 대신해주었다.
베를린에도 카라얀의 집이 있었지만, 카라얀은 베를린을 일하는 곳으로 여겼고 잘츠부르크를 집으로 여겼다. 태어난 도시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카라얀의 마지막 귀의처였다.
황제의 두려움
완벽주의자에게도 두려움이 있는가.
있다. 카라얀의 가장 큰 두려움은 두 가지였다고 엘리에트는 증언했다.
첫째는 음악적 능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카라얀은 노년으로 갈수록 자신의 귀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음향 엔지니어들과 녹음 작업을 할 때, 전에는 바로 잡아내던 소리의 미세한 차이를 놓치는 순간들이 생겼다. 카라얀은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엘리에트는 알아챘다.
"그는 자신이 약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방어 방식이었어요. 더 오래 리허설 하고, 더 많은 녹음을 하고. 마치 음악으로 시간의 흐름을 막으려는 것처럼."
둘째는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의외의 두려움처럼 들린다. 황제가 고독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그러나 엘리에트는 카라얀이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의 침묵을 불편해했다고 했다.
"음악이 끝나고 청중이 떠나고, 단원들이 악기를 챙겨 나가고, 마지막으로 조명이 꺼지는 그 순간. 그 순간을 헤르베르트는 힘들어했습니다. 내가 항상 그 순간에 곁에 있어야 했어요."
두려움을 가진 황제. 그 두려움을 알고 곁에 있어준 여인.
그것이 카라얀과 엘리에트의 31년이 유지된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 결혼의 균열들
31년이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카라얀은 음악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 사로잡힘이 때로는 가정을 비웠다. 아이들이 어릴 때 카라얀이 집을 오래 비우는 것이 반복되었다. 베를린의 리허설, 잘츠부르크 음악제, 밀라노 라 스칼라. 카라얀의 달력은 항상 꽉 차 있었다.
엘리에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받아들임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지 않았다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의 증언에서 간간이 드러난다.
카라얀의 여성 관계에 대한 소문들도 있었다. 카라얀의 커리어를 통해 만난 많은 여성 음악가들, 가수들, 음악 행사에서의 만남들. 구체적인 것은 확인되지 않지만, 그런 소문들이 돌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엘리에트는 그것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침묵이 그녀의 방어 방식이었다. 아니면 그것이 카라얀이라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31년의 결혼 생활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두 사람이 끝까지 함께했다는 것. 그것이 카라얀의 세 번째 결혼의 진실이었다.
음악이 있었던 자리
카라얀이 집에서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세계 최고의 음악가가 집에서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음악이 카라얀에게는 일이었다는 것. 아니, 일 그 이상이었지만 그것이 그를 완전히 채웠기 때문에 집에서까지 음악을 해야 한다면 그에게 쉬는 공간이 없다는 것.
그러나 엘리에트는 카라얀이 집에서 절대 음악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 아주 가끔, 늦은 밤에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우리 모두 잠든 후에.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지만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 시간은 그의 시간이었으니까. 어떤 때는 새로운 곡이었고, 어떤 때는 한 선율을 반복해서 쳤습니다. 마치 혼자 무언가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늦은 밤, 가족이 모두 잠든 후, 혼자 피아노 앞에 앉은 카라얀.
그 모습이 어쩌면 가장 진짜 카라얀이었는지도 모른다. 황제도, 완벽주의자도, 지휘자도 아닌. 음악 앞에서 혼자인 사람.
마지막 날들
1989년 여름, 카라얀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척추 수술의 후유증이 깊었고, 심장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리허설을 계속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사임한 뒤였지만, 잘츠부르크에서의 작업은 포기하지 않았다.
엘리에트는 그 마지막 시간을 곁에서 지켰다.
카라얀이 리허설에서 돌아오면 엘리에트가 있었다. 지휘봉을 내려놓으면 엘리에트가 있었다. 몸이 힘든 밤에 엘리에트가 있었다.
1989년 7월 16일 아침,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엘리에트가 곁에 있었다.
카라얀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엘리에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조용히 갔습니다. 싸우지 않고. 마치 마지막 음이 끝난 뒤 지휘봉을 내려놓는 것처럼."
지휘봉을 내려놓는 것처럼. 엘리에트가 선택한 그 표현이 모든 것을 말한다.
세 여인이 본 카라얀
엘미는 상승하는 카라얀을 보았다. 음악가로서의 꿈이 실현되기 시작하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 상승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니타는 무너질 뻔한 카라얀 곁에 있었다. 나치 입당의 그림자, 활동 금지, 그리고 복권. 카라얀이 가장 취약했던 시간을 함께 통과했다.
엘리에트는 황제 카라얀 곁에 있었다. 세계 최고의 지휘자라는 영광과, 그 영광 뒤의 고독과 두려움을 함께 보았다.
세 사람은 각각 카라얀의 다른 면을 보았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 카라얀의 가장 큰 특성을 공유한다. 카라얀은 음악이 있는 곳과 음악이 없는 곳을 분리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분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 없다. 카라얀이 집에서 피아노를 치지 않으려 해도, 늦은 밤 혼자 건반 앞에 앉았다. 그것이 인간 카라얀이었다.
황제도 집에서는 그냥 헤르베르트였다. 두려움도 있고, 외로움도 있고, 쉬고 싶을 때도 있는. 그리고 그 헤르베르트를 알았던 사람이 엘리에트였다.
🎵 오늘 들어볼 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 —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 소프라노 굴드 야노비츠(Gundula Janowitz) (1973년 녹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48년에 완성한 이 네 곡의 가곡은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로 꼽힌다.
봄, 9월, 잠들 때, 황혼에. 네 개의 계절과 하루의 시간을 담은 이 노래들은 삶의 끝을 앞둔 사람이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시선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고요함으로. 저항이 아니라 받아들임으로.
카라얀이 이 곡을 즐겨 지휘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불완전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이 곡에서 무언가를 찾았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곡 '황혼에(Im Abendrot)' 를 주목하라.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서서히 내려오는 그 마지막 선율. 그리고 오케스트라가 혼자 남아 마무리하는 그 침묵 직전의 소리.
카라얀이 지휘봉을 내려놓는 것처럼. 엘리에트의 말처럼.
그리고 이 곡이 끝난 뒤 잠시 그대로 있어보시길. 음악이 끝난 뒤 공기 속에 남는 것이 있다. 카라얀이 늦은 밤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찾던 것이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는 카라얀과 테크놀로지의 이야기, 음반 제국과 CD 탄생의 비화를 전합니다. 🎼
'음악 > 거장의 초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카라얀, 제10편 | 카라얀의 적 : 첼리비다케와의 반세기 전쟁 (0) | 2026.04.12 |
|---|---|
| 카라얀, 제9편 | 카라얀과 테크놀로지 : 음반, 영상, 그리고 CD (1) | 2026.04.11 |
| 카라얀, 제7편 | 카라얀과 오자와 세이지 : 동양에서 온 제자 (0) | 2026.04.07 |
| 제6편 | 카라얀이 발굴한 사람들 ② 크레머, 마이스키, 그리고 사비네 마이어 사건 (0) | 2026.04.04 |
| 카라얀, 제5편 | 카라얀이 발굴한 사람들 ① 안네-조피 무터 (0) | 2026.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