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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거장의 초상

카라얀, 완벽이라는 이름의 삶 — 일곱 번째 이야기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4. 7.

제7편 | 카라얀과 오자와 세이지 — 동양에서 온 제자


카라얀은 제자를 키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1959년 가을, 스물네 살의 일본 청년이 카라얀의 문을 두드렸을 때, 황제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문이 세계를 바꿨다.


베를린으로 가는 길

1959년, 스물네 살의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는 낡은 스쿠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정확히는 스쿠터로 유럽 대륙을 횡단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와 프랑스에서 스쿠터를 산 오자와는 그것을 타고 유럽 음악의 도시들을 돌아다녔다. 파리, 빈, 베를린. 낭만적이면서도 무모한 여정이었다.

그 여정의 목적은 하나였다. 지휘자가 되는 것.

오자와는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 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지휘였다. 히데오 사이토(齋藤秀雄)에게 지휘를 배웠다. 사이토는 일본 클래식 음악계의 선구자적 인물로, 체계적이고 엄격한 지휘 교육으로 유명했다. 오자와는 사이토의 지도 아래 지휘의 기초를 철저히 다졌다.

그러나 사이토는 오자와에게 유럽으로 가라고 했다. 클래식 음악의 본산인 유럽에서 진짜 음악을 배워야 한다고. 오자와는 그 말을 따랐다. 여비는 넉넉하지 않았다. 일본 음악 장학금을 받았지만 유럽에서 오래 버티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오자와는 개의치 않았다. 스쿠터에 짐을 싣고, 악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음악의 도시들을 향해 나아갔다.

파리에 도착한 오자와는 지휘자 샤를 뮌슈(Charles Munch)가 이끄는 부장주 국제 지휘 콩쿠르(Concours International de Jeunes Chefs d'Orchestre)에 참가했다. 그리고 우승했다.

그 우승이 카라얀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오자와 세이지


뮌슈의 편지

샤를 뮌슈는 오자와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다.

뮌슈는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카라얀과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오자와에게 두 가지를 해주었다. 첫째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조수 지휘자 자리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카라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뮌슈가 카라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편지가 카라얀의 마스터클래스 참가로 이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뮌슈는 오자와에 대해 카라얀이 주목할 만한 무언가를 썼을 것이다.

카라얀은 당시 베를린에서 젊은 지휘자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스터클래스보다 오디션에 가까운 것이었다. 유망한 젊은 지휘자들이 카라얀 앞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카라얀이 그것을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1959년 가을, 오자와는 베를린으로 갔다.


카라얀 앞에 선 청년

카라얀의 마스터클래스 참가자들은 대부분 유럽 출신이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들. 그들 사이에 동양인 얼굴이 하나 있었다.

오자와였다.

오자와는 긴장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카라얀은 전설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황제, 세계 최고의 지휘자. 그 앞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야 했다.

오자와가 지휘대에 올랐다. 오케스트라를 마주했다. 지휘봉을 들었다.

그 순간에 대해 오자와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카라얀 앞에서 지휘를 시작하는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긴장도, 카라얀도, 동양인이라는 것도. 음악만 남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사이토 선생님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지휘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으로 하는 것이라고."

카라얀이 오자와의 지휘를 보았다.

후에 카라얀이 측근에게 한 말이 전해진다.

"저 청년은 온몸으로 지휘한다. 손만이 아니라 눈도, 등도, 발끝도. 음악이 몸 전체에서 나온다."

그것이 카라얀이 처음으로 오자와에게서 본 것이었다.


마스터클래스, 그리고 조수 자리

카라얀은 오자와를 마스터클래스에서 통과시켰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카라얀은 오자와에게 베를린 필하모닉의 조수 지휘자 자리를 제안했다. 이것은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의 조수 지휘자는 카라얀의 가장 가까운 음악적 조력자였다. 유럽의 젊은 지휘자들이 그 자리를 원했다. 카라얀이 그 자리를 동양에서 온 무명의 일본 청년에게 주었다는 것은 음악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의아해했다. 왜 오자와인가. 더 경험 많고 더 검증된 유럽 출신 지휘자들이 있었다. 카라얀은 왜 동양에서 온 이 청년을 선택했는가.

카라얀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는 음악을 듣는다. 진짜로 듣는다. 그리고 들은 것을 오케스트라에 전달한다. 그것이 지휘의 전부다."

오자와는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베를린에서의 1년

오자와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조수 지휘자로 활동한 것은 약 1년이었다.

그 1년 동안 오자와는 카라얀의 리허설을 모두 지켜봤다. 카라얀이 어떻게 오케스트라에 접근하는지, 리허설에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소리를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모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오자와는 카라얀의 리허설에서 배운 것들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했다.

"카라얀의 리허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오케스트라를 지치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오케스트라가 스스로 더 나은 소리를 찾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자와가 카라얀에게서 배운 것은 리허설 방식만이 아니었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었다. 카라얀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 악보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지휘자의 역할은 그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해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

오자와는 그 태도를 흡수했다. 자신의 방식으로.


카라얀이 오자와에게 한 말

오자와가 베를린에서 보낸 1년 동안, 카라얀과 오자와 사이에는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한 리허설에서의 일화가 전해진다. 오자와가 카라얀의 허락을 받아 오케스트라 앞에 서서 브람스의 교향곡 일부를 지휘했다. 카라얀이 뒤에서 지켜봤다.

리허설이 끝난 뒤 카라얀이 오자와에게 다가와 말했다.

"좋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당신은 너무 많이 요구합니다. 한 번에."

오자와는 그 말의 의미를 한동안 생각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카라얀은 내가 리허설에서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고치려 한다는 것을 봤다. 오케스트라는 한 번에 하나씩만 받아들일 수 있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요구하면 단원들이 혼란스러워진다. 카라얀은 한 가지를 완벽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카라얀이 오자와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카라얀이 물었다.

"당신은 왜 지휘자가 되고 싶었습니까?"

오자와가 대답했다. 음악이 좋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에게 음악을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카라얀이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따라옵니다."

오자와는 그 말을 평생 기억했다고 했다. 기술도, 경험도, 명성도 모두 나중의 것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다. 카라얀이 그것을 말했다는 것이 오자와에게는 뜻밖이었다.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카라얀이, 기술보다 사랑이 먼저라고 말하다니.

어쩌면 카라얀은 자신이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을 오자와에게서 보았는지도 모른다.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

1년 후, 오자와는 베를린을 떠났다.

샤를 뮌슈의 제안대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조수 지휘자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이전에 오자와는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에게도 사사받기로 했다. 카라얀, 뮌슈, 번스타인. 세 명의 거장에게서 배운 지휘자. 그 이력 자체가 오자와의 특별함을 말해주었다.

카라얀은 오자와가 떠나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격려했다.

"여러 곳에서 배우십시오. 한 스승에게만 머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 자신의 것을 찾으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카라얀답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고 싶어하는 카라얀이, 떠나는 제자에게 다양한 스승을 찾으라고 했다는 것이.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카라얀이 오자와에게만 보여준 면모였는지도 모른다.

오자와는 이후 빠르게 성장했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29년간 역임했다.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도 맡았다. 아시아 출신으로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을 이끈 최초의 지휘자였다.

그 과정에서 오자와는 카라얀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했다.

비평가들은 오자와 초기에 종종 카라얀의 영향을 언급했다. 음악적 접근 방식, 리허설 방법론, 소리에 대한 감각. 카라얀에게서 배운 것들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오자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음악으로 증명해나갔다.

오자와가 보스턴 심포니와 함께 만든 소리는 카라얀의 베를린 필 사운드와 달랐다. 더 유연하고, 더 다채로우며, 어떤 면에서는 덜 완벽하지만 더 살아있는 소리였다. 오자와는 카라얀에게 완벽함을 향한 태도를 배웠지만, 자신의 완벽함은 카라얀의 그것과 다른 방향이었다.


카라얀이 만든 지휘자들

오자와만이 카라얀의 영향을 받은 지휘자가 아니었다.

카라얀의 시대를 통과한 지휘자들의 목록은 길다. 그 중에서 특히 세 명의 이름이 중요하다.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으로, 카라얀 시대에 베를린 필에서 여러 차례 객원 지휘를 하면서 카라얀의 주목을 받았다. 카라얀은 아바도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아바도는 카라얀의 완벽주의를 존중하면서도 카라얀의 권위적인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바도는 카라얀이 사임한 뒤 베를린 필하모닉의 다음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카라얀의 계승이었지만 실제로는 카라얀과의 단절이었다. 아바도는 의도적으로 카라얀과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단원들의 자율성을 강화하고, 소리의 투명성을 추구하며, 권위보다 협력을 앞세웠다. 그 결과 베를린 필의 소리는 카라얀 시대와 달라졌다.

아바도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이 만든 베를린 필하모닉이 없었다면, 내가 지휘할 베를린 필하모닉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카라얀이 만든 것 위에 다른 것을 쌓아야 했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주빈 메타(Zubin Mehta). 인도 봄베이(현 뭄바이) 출신의 지휘자로, 오자와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카라얀과 접촉했다. 메타는 카라얀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고, 카라얀의 음악적 방법론에서 많은 것을 흡수했다. 이후 이스라엘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빈 국립 오페라 등을 이끌며 국제적인 지휘자로 자리매김했다.

메타는 카라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은 우리에게 완벽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우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완벽함을 향해 나아가게 만들었다."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 라트비아 출신으로, 카라얀의 제자라고 불리는 지휘자 중 가장 늦은 세대다. 얀손스는 카라얀에게 직접 사사받지는 않았지만, 카라얀의 음악과 방법론을 깊이 연구했다. 오슬로 필하모닉, 피츠버그 심포니,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이끌며 카라얀 이후 세대의 가장 중요한 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얀손스는 카라얀에 대해 평생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카라얀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따뜻했다. 완벽한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처럼.


스승을 넘어서는 것의 의미

카라얀에게 배운 지휘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카라얀의 영향을 받았지만, 카라얀을 복제하지 않았다. 카라얀의 방식을 흡수하되, 자신만의 방향을 찾았다. 오자와는 유연함으로, 아바도는 투명성으로, 메타는 열정으로, 얀손스는 따뜻함으로.

그것이 위대한 스승이 남기는 유산의 방식이다. 제자들이 스승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통과하여 자신이 되는 것.

카라얀은 자신의 영향권 안에 제자들을 묶어두려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위대한 음악가란 자신의 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모순이 카라얀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에 항상 긴장을 만들었다.

오자와는 그 긴장을 가장 우아하게 해결한 경우였다. 그는 카라얀에게 깊이 감사하면서도 카라얀으로부터 분명하게 독립했다. 카라얀의 이름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카라얀의 그늘에 머물지 않았다.

오자와가 후에 어떤 인터뷰에서 한 말이 그것을 잘 표현한다.

"카라얀 선생님은 내게 이미 알고 있지만 감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꺼내주었다. 그것이 스승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평생 기억한다."


오자와, 카라얀의 마지막을 보다

오자와가 베를린을 떠난 뒤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어졌다.

오자와가 세계적인 지휘자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두 사람은 때때로 유럽의 음악제에서 만났다. 카라얀은 오자와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공개적으로 칭찬을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오자와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따뜻한 말들을 남겼다.

"오자와는 내가 가르친 것 이상으로 자랐다. 그것이 좋은 제자의 증명이다."

카라얀의 말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오자와는 카라얀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1989년 7월, 카라얀이 세상을 떠났다.

오자와는 그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그는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며칠 뒤 한 인터뷰에서 카라얀에 대해 물었을 때, 오자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도 그분의 목소리가 들린다. 리허설에서 하시던 말씀들이. 다시, 들어요. 그 두 마디. 그것이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음악 교육이었다."


카라얀이 남긴 지휘자들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다.

그러나 카라얀의 영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오자와를 통해, 아바도를 통해, 메타를 통해, 얀손스를 통해 계속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배운 다음 세대의 지휘자들을 통해 또 이어지고 있다.

음악의 전통은 그렇게 이어진다. 악보로만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한 지휘자의 손짓이 다음 지휘자의 손짓에 스며들고, 그것이 또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

카라얀이 오자와에게 말했던 것. "언젠가 당신 자신의 것을 찾으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자와는 그 말을 따랐다. 그리고 오자와를 통해 그 말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황제는 198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황제가 만든 것들은 아직 우리 곁에 있다. 음반 안에, 그리고 음악가들의 몸과 기억 안에.


오자와의 마지막 무대

오자와 세이지는 2024년 2월, 여든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심부전이었다. 노년에 식도암과 심장 질환으로 오래 투병했지만, 그는 가능한 한 마지막까지 음악을 놓지 않으려 했다.

오자와가 마지막으로 공개 무대에 선 것은 2023년이었다.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도 지휘봉을 들었다. 카라얀이 그랬듯이. 몸이 허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휘봉을 놓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도 카라얀에게서 배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오자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세계 음악계는 애도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자와의 이름 옆에 카라얀의 이름을 함께 언급했다. 1959년 베를린에서 시작된 그 만남이, 오자와의 생애 전체를 관통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이제 모두 세상에 없다.

그러나 오자와가 보스턴 심포니와 녹음한 말러와 베토벤이 있고,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 남긴 브람스와 브루크너가 있다.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남긴 소리들이 아직 여기 있다. 그리고 그 소리 안에, 1959년 베를린의 리허설장에서 나눴던 무언가가 담겨 있다.

스승과 제자. 황제와 청년. 완벽주의자와 자유로운 음악가.

두 사람은 달랐다. 그러나 같은 것을 향했다. 음악의 본질을 향해.


오늘 감상곡 — 스승과 제자의 소리


① 카라얀 — 브람스 「교향곡 4번 e단조」 Op.98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1988년, 마지막 녹음 중 하나)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1년 전의 녹음이다. 건강이 이미 악화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이 음반은, 카라얀의 마지막 음악적 유언에 가깝다. 브람스의 4번은 브람스 교향곡 중 가장 어둡고 가장 깊은 곡이다. 4악장의 파사칼리아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음악처럼 들린다. 카라얀이 그 음악을 선택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② 오자와 세이지 —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오자와 지휘,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1995년)

 

오자와가 스승 사이토를 기념하여 창단한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와의 베토벤 9번이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과 비교하며 들으면 두 지휘자의 차이가 선명하게 들린다. 카라얀이 조각한 베토벤과 오자와가 노래한 베토벤. 어느 것이 더 낫다기보다, 같은 음악이 얼마나 다른 표정을 가질 수 있는지를 느끼는 경험이다.

 

③ 아바도 — 말러 「교향곡 9번 D장조」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1999년 실황)

카라얀의 후계자로 베를린 필을 이어받은 아바도가 카라얀의 오케스트라로 만든 음악이다. 카라얀은 말러를 거의 연주하지 않았다. 아바도가 베를린 필과 말러를 연주한 것은 의도적인 차별화이기도 했다. 이 음반은 아바도의 베를린 필 시대를 대표하는 녹음이자, 20세기 말러 연주의 정점으로 꼽힌다. 카라얀이 만든 오케스트라가 카라얀이 하지 않은 음악을 하는 것. 그 안에서 베를린 필이라는 오케스트라의 본질이 드러난다.

 

 

세 곡을 나란히 들으면서 생각해보시길. 카라얀이 시작한 것이 오자와를 통해, 아바도를 통해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했는지를. 음악의 전통은 복제가 아니라 변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변형들이 모여 클래식 음악이라는 거대한 강을 만든다.


다음 편에서는 카라얀의 세 번의 결혼과 사생활, 황제는 집에서 무엇이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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