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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 완벽이라는 이름의 삶 — 두 번째 이야기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3. 3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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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 나치의 그림자 — 카라얀과 정치

위대한 예술가는 도덕적으로도 위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예술과 삶은 분리될 수 있는가. 카라얀의 이야기는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도 피할 수 없다.


1933년, 독일의 봄

1933년 4월, 독일은 달라져 있었다.

그해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취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실상 끝났다. 나치당은 빠르게 권력을 장악했고, 독일 사회의 모든 영역에 그 손을 뻗었다. 문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치 정권은 음악, 미술, 영화, 문학을 선전의 도구로 삼았다. '독일적'이지 않은 예술은 퇴폐 예술(Entartete Kunst)로 낙인찍혔다. 유대인 음악가들은 무대에서 쫓겨났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에서 유대인 단원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독일에서 음악가로 일하려면 제국 음악원(Reichsmusikkammer)에 등록해야 했다. 등록을 거부하거나 자격을 얻지 못하면 공개 활동이 불가능했다. 제국 음악원의 회원이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나치 체제를 인정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독일에서 음악으로 먹고살려면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 맥락 안에서 카라얀의 선택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맥락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두 번의 입당

카라얀은 나치당에 두 번 입당했다.

첫 번째는 1933년 4월 8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의 나이 스물다섯. 그가 아헨 음악감독 자리를 얻기 약 1년 전의 일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은 아직 합법적인 정당이었다.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된 지 불과 두 달여 만의 입당이었다.

두 번째는 1935년 5월. 독일 아헨에서. 아헨의 음악감독으로 일하면서 독일 내에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행정적 절차였다는 것이 카라얀 측의 설명이다. 독일에서의 활동을 위해 독일 나치당 당원 번호가 필요했다는 것.

두 번의 입당. 이것이 카라얀의 생애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실이다.

카라얀은 이 사실을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음악만이 나의 관심사였다. 당시 독일에서 지휘자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 절차를 밟아야 했다. 나는 어떤 이념을 믿어서 입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사실들이 있다.


기회주의였는가, 생존이었는가

카라얀의 첫 번째 입당은 1933년 4월이었다.

이 시점을 주목해야 한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것이 1933년 1월. 카라얀이 입당한 것은 불과 두 달여 후다. 당시 나치 정권의 성격이 완전히 드러나기 전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1933년 초에는 많은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들이 나치당을 단순한 우파 민족주의 정당으로 여겼다. 대규모 학살과 전쟁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카라얀의 두 번째 입당은 1935년이었다. 그 시점에는 나치 정권의 성격이 훨씬 더 분명해져 있었다. 1935년은 뉘른베르크 법이 제정되어 유대인들을 독일 시민권에서 배제한 해이기도 하다. 카라얀은 그 해에 두 번째 입당 서류에 서명했다.

비판자들은 이것이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카라얀은 나치 정권 아래서 빠르게 커리어를 쌓았다. 아헨에서 음악감독이 된 것,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서 데뷔 기회를 얻은 것, '기적의 카라얀'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독일 음악계에서 주목받은 것. 이 모든 것이 나치 체제의 문화 정책 속에서 이루어졌다.

나치 정권은 '독일적' 음악가를 필요로 했다. 유대인 음악가들이 자리를 잃은 곳에 비유대인 독일 음악가들이 들어섰다. 카라얀이 그 빈자리 중 일부를 채웠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반면 카라얀을 옹호하는 시각도 있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나치에 협력하지 않고 음악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카라얀의 선택이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나치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 독일을 떠난 음악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커리어를 포기하거나, 망명지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카라얀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남았다. 그리고 올라갔다.


푸르트벵글러의 선택, 카라얀의 선택

같은 시대, 같은 독일에서 다른 선택을 한 음악가들이 있었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hur Rubinstein)은 유대인이었고, 독일에서 쫓겨나 망명 생활을 했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도 유대인으로 독일을 떠나야 했다.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비유대인 음악가들의 선택도 달랐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는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그는 나치 정권과 협력하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지키려 했고, 유대인 음악가들을 보호하려 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나치 정권의 문화 행사에 참여했고, 정권의 선전에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푸르트벵글러의 선택도 완전히 깨끗하지 않았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달랐다. 이탈리아 파시즘에 반대하여 이탈리아를 떠났고, 나치 독일에서의 지휘 초청도 모두 거절했다. 그는 음악가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선택했다. 그 대가로 오랜 세월 유럽 무대를 포기해야 했다.

카라얀은 토스카니니도, 푸르트벵글러도 아닌 방식을 선택했다. 그는 체제에 편입되었고, 그 안에서 상승했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은 이 글을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평가를 내리기 전에 한 가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커리어 전체를 포기하고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타협했을까.

그 물음이 불편하다면,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다.


전쟁이 끝났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했다.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나치 정권 아래서 수행된 만행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600만 명의 유대인, 수십만 명의 집시와 장애인, 정치범들이 학살되었다. 유럽은 폐허였고, 생존자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남았으며, 세상은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물었다.

연합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탈나치화(Denazification) 작업을 시작했다. 나치 정권에 협력한 사람들을 조사하고, 그 정도에 따라 처벌하거나 활동을 제한하는 작업이었다. 문화계 인사들도 예외가 없었다.

카라얀도 심사 대상이 되었다.

조사 결과, 카라얀의 두 차례 나치 입당 기록이 확인되었다. 나치 정권의 문화 행사에 지휘자로 참여한 기록도 있었다. 연합군 심사위원회는 카라얀의 공개 지휘 활동을 금지했다.

카라얀은 그 기간 동안 공개 무대에 서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월터 레그, 구원자인가 공모자인가

카라얀을 구한 사람이 있었다.

월터 레그(Walter Legge). 영국 EMI 음반사의 프로듀서이자 당대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레그는 탁월한 귀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떤 연주자가 녹음에 적합한지, 어떤 음악이 청중에게 닿을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판단했다. 그가 발굴하고 지원한 음악가들의 목록은 20세기 클래식 음악사의 핵심 이름들로 가득하다.

레그가 카라얀의 연주를 처음 들은 것은 전쟁 전이었다. 그는 카라얀의 지휘에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카라얀의 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레그는 심사위원회에 카라얀을 위한 증언을 제공했다. 카라얀이 정치적 신념이 아닌 커리어를 위해 입당한 것이며, 나치 이념을 진심으로 믿은 사람이 아니라는 취지였다.

레그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음악가들의 증언도 있었다. 그러나 레그의 영향력이 카라얀의 복권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47년, 카라얀의 활동 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리고 레그는 카라얀에게 음반 계약을 제안했다. 당시 막 설립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Philharmonia Orchestra)와 함께 녹음 작업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카라얀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음반사와 지휘자의 관계를 넘어섰다. 레그는 카라얀에게 녹음 기술의 가능성을 가르쳐주었고, 카라얀은 레그에게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실현할 공간을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용했고, 서로를 키웠다.

그러나 이 관계에도 불편한 면이 있다. 레그가 카라얀을 지원한 것이 순수하게 음악적 판단이었는지, 아니면 재능 있는 지휘자를 음반 시장에 활용하려는 상업적 계산이었는지.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계산이 결과적으로 나치 입당 경력을 가진 음악가가 빠르게 복권되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거울

카라얀의 나치 과거가 가장 선명하게 반사되는 거울이 있었다.

이스라엘이었다.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이 만든 나라였다. 600만 명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와 다하우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나치 독일에 협력한 예술가는 단순한 역사적 논쟁 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와 자녀의 죽음과 연결된 문제였다.

카라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에서 지휘할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음악계와 청중 사이에서 카라얀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이스라엘 필하모닉은 카라얀을 초청하지 않았다.

한편 카라얀과 함께 일하기를 거부한 유대인 음악가들도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Itzhak Perlman)은 카라얀과의 협연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이스라엘 출신 음악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 음악가가 카라얀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은 카라얀과 협연했다.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복잡한 감정을 가지면서도 카라얀의 음악적 위대함을 인정했다. 각자의 역사, 각자의 판단이 달랐다.

카라얀 자신은 이스라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방어 방식이었다. 말하지 않는 것. 언급하지 않는 것. 음악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는 것.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이 답이 되지는 않는다.


카라얀이 끝까지 말하지 않은 것

카라얀은 19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치 입당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을 공개적으로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커리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자신은 나치 이념을 믿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내려 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나치 독일에서 쫓겨난 음악가의 후손에게, '어쩔 수 없었다'는 설명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자신이 체제에 편승했다는 것, 그 체제 아래서 이익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

카라얀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인터뷰에서 이 주제가 나올 때마다 카라얀은 화제를 돌리거나 짧은 답변으로 넘겼다. 그의 전기를 집필한 저자들이 직접 이 문제를 물었을 때도, 카라얀은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방어인지, 진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 그 기억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지침인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카라얀의 그 침묵은 그의 위대한 음악만큼이나 그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음악은 도덕을 초월하는가

카라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위대한 예술가는 위대한 인간이어야 하는가. 예술의 가치는 예술가의 도덕적 행위와 분리될 수 있는가. 나치에 협력한 지휘자가 만든 음악을 우리는 즐겨도 되는가.

이것은 카라얀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폭력을 저지른 작곡가의 음악, 여성을 착취한 영화 감독의 영화, 인종차별주의자 시인의 시. 예술사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인간들이 만든 위대한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과 예술가를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음악은 음악 자체로 평가받아야 하며, 그것을 만든 사람의 도덕적 실패가 음악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은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술가를 지지하고 그의 작품을 소비하는 것은 그 예술가의 행위를 용인하는 것이며, 피해자들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카라얀의 경우는 이 논쟁의 극단에 있다. 나치 입당은 단순한 개인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역사상 가장 끔찍한 집단 학살과 연결된 체제에 편입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논쟁에 이 글이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리고 내려서도 안 된다. 그것은 각자가 스스로 씨름해야 할 문제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카라얀의 음악을 들을 때, 그 불편함을 함께 듣는 것. 그 아름다움 뒤에 있는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예술을 진지하게 대하는 방식이다.


복권 이후, 상승은 계속되었다

1947년 활동 금지가 해제된 카라얀은 빠르게 국제 무대로 나아갔다.

월터 레그와의 협업으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을 시작했고, 그 음반들이 유럽 전역에서 주목받았다. 1948년에는 밀라노 라 스칼라에 데뷔했고, 1949년에는 빈 필하모닉과 처음으로 협연했다. 빈 필하모닉과의 협연은 카라얀에게 또 다른 차원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1954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장이었던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났다.

카라얀은 기다렸던 그 자리를 향해 나아갔다. 탈나치화 심사를 통과하고, 활동 금지를 견디고, 국제 무대에서 자신을 입증한 카라얀. 그는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선출되었다.

그 자리에서 카라얀은 이후 35년을 군림했다. 나치의 그림자를 짊어진 채로.

그것이 카라얀이라는 인물의 전모다. 위대함과 결함이 분리되지 않는 채로, 아름다운 음악과 부끄러운 역사가 같은 사람 안에 공존하는 채로. 우리는 그것을 통째로 바라보아야 한다.


역사의 심판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그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아니, 더 복잡해졌다. 나치 협력 예술가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계속되면서, 카라얀의 경우도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새로 발굴된 기록들에 따르면, 카라얀이 단순히 '어쩔 수 없어서' 입당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있다. 나치 문화 기관들과의 협력이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반면 카라얀이 유대인 음악가를 몰래 도왔다는 증언도 있다. 진실은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다.

역사는 계속 카라얀을 심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카라얀 개인을 넘어, 예술가의 책임과 용기에 대한 더 넓은 질문을 향해 있다.

예술가에게 자신의 시대에 맞서는 용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인가. 아니면 시대와 타협하는 예술가는 예술의 본질을 배신하는 것인가.

카라얀의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때, 이 질문이 그 선율과 함께 울린다.

아름답다. 그리고 불편하다.

그 두 감정을 동시에 안고 듣는 것. 그것이 카라얀을 제대로 듣는 방식이다.


오늘 감상곡

브람스 「독일 레퀴엠(Ein deutsches Requiem)」 Op.45 —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1964년 녹음)

ohannes Brahms - A German Requiem - Karajan - Großes Festspielhaus Salzburg 1978 - REMASTERED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죽은 자를 위한 위로의 음악이다. 라틴어 전통 레퀴엠과 달리 브람스는 독일어 성경 텍스트를 사용했고, 신의 심판보다 인간의 슬픔과 위로에 집중했다.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겁고 깊으며, 그 안에 인간적인 온기가 흐른다.

이 음반을 오늘 추천하는 것은 단순히 음악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전쟁의 죽음을 위로하는 음악을, 그 전쟁에 협력한 지휘자가 지휘했다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를 의식하면서 듣는 것이 오늘의 청취 방식이다.

카라얀의 1964년 베를린 필 녹음은 이 곡의 대표적 음반 중 하나로 꼽힌다. 현악기의 두터운 울림 위로 합창이 올라앉는 방식,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티시모로 이어지는 다이나믹의 컨트롤, 그리고 전체를 관통하는 무게감. 카라얀의 음악은 여기서도 완벽하다.

그러나 이 완벽함이 그가 짊어진 역사를 지우지는 않는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이 음반을 듣는 이유다.

 


다음 편에서는 카라얀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20세기 음악계의 가장 드라마틱한 라이벌 관계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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