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 완벽이라는 이름의 삶 — 첫 번째 이야기

제1편 | 잘츠부르크에서 온 소년
모차르트가 태어난 도시에서, 또 한 명의 음악적 천재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 천재는 모차르트와 달리,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 세상을 지배하려 했다.
잘츠부르크, 1908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음악의 도시다.
알프스 산자락에 자리 잡은 이 작은 도시는 잘츠아흐 강이 가르고, 구시가지 위로 호엔잘츠부르크 요새가 내려다보며, 여름마다 음악제가 열리는 유럽 문화의 심장부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 도시의 이름 앞에는 항상 하나의 이름이 붙는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56년 이 도시에서 태어나 서른다섯 해를 살다 간 천재.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모차르트와 함께 산다. 게트라이데 거리의 모차르트 생가, 광장의 모차르트 동상, 초콜릿 포장지 위의 모차르트 얼굴. 음악은 이 도시의 공기 속에 녹아 있다.
1908년 4월 5일, 그 도시의 한 집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아버지 에른스트 폰 카라얀은 의사였고, 아마추어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어머니 마르타는 음악을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집 안에는 항상 음악이 있었다. 저녁이면 아버지의 클라리넷 소리가 거실을 채웠고, 어머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슈베르트의 소품들을 연주했다.
그리고 이름 앞의 '폰(von)'. 이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다. 카라얀 가문의 '폰'은 그리스계 혈통을 가진 유서 깊은 귀족 가문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카라얀의 선조들은 오스만 제국 시절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오스트리아로 이주한 상인 가문이었고, 세대를 거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관료와 전문직 계층으로 자리를 잡았다. 카라얀은 평생 이 '폰'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였다. 그것은 자부심이었고, 정체성이었으며, 어쩌면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훗날 카라얀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귀족적 허세를 자주 언급했다. 그러나 카라얀의 입장에서 그 귀족성은 꾸민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안에 있던 것이었다. 잘츠부르크의 중산층 가정, '폰'이 붙는 이름, 음악이 가득한 집.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그 환경 속에서 자신이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감각했다.
네 살의 피아노
카라얀이 피아노를 시작한 것은 네 살이었다.
당시 잘츠부르크의 상류 중산층 가정에서 어린 자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것은 교양의 일부였다. 카라얀의 부모도 그런 마음으로 아들을 피아노 앞에 앉혔다.
그런데 헤르베르트는 달랐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피아노 앞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 지루해하고, 딴 곳을 바라보고,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면 도망가려 한다. 헤르베르트는 그렇지 않았다. 한번 피아노 앞에 앉으면 놀러 가자고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손가락으로 멜로디를 찾다가, 두 손가락이 되고, 어느 날은 양손이 되었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을 넘어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는 아이였다.
다섯 살 무렵, 헤르베르트는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아 간단한 멜로디를 즉흥으로 만들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멈추곤 했다고 전해진다. 교육받은 귀를 가진 어머니는 아들의 즉흥 연주가 그냥 아무렇게나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거기에 무언가 음악적인 것이 있었다. 음의 관계를 감각하는 귀, 선율을 만들어가는 직관.
일곱 살에 카라얀은 처음으로 공개 연주를 했다. 잘츠부르크의 작은 자선 음악회였다. 짧은 피아노 소품 하나. 헤르베르트는 무대에 올라 의자를 조금 당기고,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리고,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청중이 박수를 쳤다. 헤르베르트는 그 박수 소리가 싫지 않았다고 훗날 회고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청중의 박수를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좋았다."
일곱 살 아이의 말치고는 범상치 않다. 그리고 그 안에 훗날 카라얀이라는 인물 전체가 씨앗 형태로 들어 있다.
모차르테움, 그리고 첫 번째 충격
1917년, 아홉 살의 헤르베르트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Mozarteum)에 입학했다.
모차르테움은 잘츠부르크의 음악 교육 기관이다. 모차르트의 이름을 딴 이 학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음악 교육 기관 중 하나로, 어린 음악도들이 이곳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헤르베르트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음악 이론, 시창, 음악사를 공부했다.
그러나 모차르테움에서 헤르베르트에게 가장 결정적인 경험은 교실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열렸다. 정확히 몇 살 때의 일인지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열 살 무렵의 일로 전해진다. 헤르베르트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었다.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수십 명의 연주자가 각자의 악기를 들고 각자의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는데, 그것이 하나의 소리가 되었다. 바이올린이 노래하고, 첼로가 그 아래를 받치고, 오보에가 그 위를 가로지르고, 호른이 공간을 채우는 그 순간. 수십 개의 다른 소리가 동시에 울리는데, 그것이 하나의 음악으로 들리는 그 순간.
헤르베르트는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연주가 끝난 뒤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가야 한다고 재촉해도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대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오케스트라를 향해 등을 돌리고, 지휘봉을 들고, 자신의 손짓 하나에 수십 명이 반응하는 그 사람. 지휘자.
헤르베르트가 선생님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뭘 하는 건가요?"
선생님이 대답했다. "저 사람이 저 많은 연주자들을 하나로 만드는 거야."
헤르베르트는 잠시 그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전해진다.
그것이 카라얀이 지휘자의 꿈을 가진 순간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탁월함이 이미 인정받고 있었지만, 그 순간부터 헤르베르트의 진짜 목표는 달라졌다. 피아노는 한 사람의 악기였다. 지휘봉은 모든 사람의 악기였다. 그것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원하는 것이었다.
빈으로
1926년, 열여덟 살의 카라얀은 빈(Wien)으로 갔다.
빈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유럽 음악의 심장이었다. 하이든이 살았고, 모차르트가 활동했으며, 베토벤이 죽고 슈베르트가 묻힌 도시. 브람스가 말년을 보냈고, 말러가 빈 오페라를 이끌었으며, 당시에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활동하던 도시. 빈 필하모닉과 빈 국립 오페라는 세계 음악의 중심이었다.
카라얀은 빈 음악원(Wiener Musikakademie, 현 빈 음악 연극 대학)에 입학했다. 피아노 전공이었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지휘 수업이었다.
빈 음악원에서 카라얀의 지휘 스승은 알렉산더 바인가르트너가 아닌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Bernhard Paumgartner)와 이후 프란츠 샬크(Franz Schalk)였다. 샬크는 당시 빈 국립 오페라의 감독이었고, 브루크너의 제자이기도 했다. 카라얀은 그에게서 브루크너와 바그너의 음악적 전통을 직접 이어받는 기회를 얻었다.
빈에서 카라얀은 부지런했다. 아침에는 피아노를 연습했고, 오후에는 지휘 수업을 들었으며, 저녁에는 빈 국립 오페라의 공연을 들으러 갔다. 표를 살 돈이 없을 때는 서서 듣는 입석 자리에 섰다. 빈 국립 오페라의 입석 구역은 당시 음악학도들의 성지였다. 거기서 젊은 카라얀은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의 지휘를 눈과 귀로 흡수했다.
특히 카라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의 지휘였다. 토스카니니는 1920년대 빈에서 자주 객원 지휘를 했는데, 카라얀은 그의 지휘를 볼 때마다 입석 구역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토스카니니의 지휘는 명확하고 정확하며 음악의 구조를 유리처럼 투명하게 만들었다. 카라얀은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의 방향을 처음으로 언어 이전의 형태로 감각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토스카니니를 그냥 모방하지 않았다. 그는 토스카니니의 명확성과 자신이 잘츠부르크에서 타고난 음향적 감수성을 결합하는 방식을 모색했다. 좋은 예술가는 스승을 모방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스승을 통과한다. 카라얀은 훗날 토스카니니에 대해 말할 때, 그를 극도로 존경하면서도 자신은 다른 방향을 향한다고 분명히 했다.
지휘봉을 처음 든 날
1928년, 스물 살의 카라얀은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앞에 섰다.
빈 음악원 학생 오케스트라를 대상으로 한 졸업 시연이었다. 악보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후안(Don Juan)」. 빠르고 화려하며 기술적으로 까다로운 곡. 베테랑 지휘자도 긴장하는 레퍼토리였다.
카라얀이 지휘대에 올랐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를 쳐다봤다. 스물 살. 지휘 경험이 거의 없는 학생. 단원들 중 카라얀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몇몇 단원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이 어린 학생이 과연.
카라얀은 지휘봉을 들었다.
그리고 첫 음을 지시했다.
「돈 후안」의 첫 마디는 현악기의 폭발적인 유니즌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지휘자가 단원들을 얼마나 집중시켰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첫 음이다. 카라얀의 그 첫 지시에 오케스트라가 반응했다. 후에 그 자리에 있었던 한 단원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카라얀이 지휘봉을 내리기 직전의 그 짧은 순간에 무언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고 한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무언가.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전달되는 느낌.
연주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한 순간들이 있었다. 학생 오케스트라였고, 지휘자도 학생이었다. 완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연주가 진행될수록 오케스트라는 점점 이 스물 살 지휘자의 손을 따라갔다. 카라얀의 지시는 명확했다. 원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가 지휘봉의 움직임에서 느껴졌다.
연주가 끝났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단원들이 자발적으로 활로 악기를 두드렸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지휘자에게 보내는 박수의 방식. 경험 없는 스물 살 학생에게 단원들이 보낸 인정이었다.
그날 카라얀의 지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자네는 기술을 더 배워야 해. 하지만 가르칠 수 없는 것은 이미 있어."
울름, 그리고 첫 번째 직업
1929년, 스물한 살의 카라얀은 독일 울름(Ulm)으로 갔다.
울름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는 중소 도시로, 세계 최고 높이의 성당 첨탑으로 알려진 곳이다. 음악적으로는 변방이었다. 빈이나 베를린, 뮌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도시의 작은 오페라단.
카라얀이 그곳을 선택한 것은 간단한 이유였다. 다른 곳에서는 그를 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라얀의 빈 음악원 졸업 연주는 인상적이었지만, 스물한 살의 무명 지휘자를 선뜻 고용하려는 오케스트라나 오페라단은 없었다. 유럽의 음악 기관들은 경험 있는 지휘자를 원했다. 그러나 경험을 쌓으려면 어딘가에서 시작해야 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 카라얀은 울름을 선택했다. 보수가 형편없었고, 오케스트라 수준은 낮았으며, 레퍼토리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휘봉을 잡을 수 있는 자리였다.
울름에서 카라얀은 5년을 보냈다.
그 5년은 훗날 카라얀을 만든 시간이었다. 수준 낮은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야 했다. 예산이 없어서 리허설 시간이 제한되었다. 가수들은 제각각이었고, 무대 장치는 낡았으며, 청중은 많지 않았다.
카라얀은 그 조건들을 변명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리허설 시간이 적을수록 리허설의 밀도를 높이는 법을 배웠다. 단원들의 수준이 낮을수록 어떻게 그들로부터 최선을 끌어낼지를 연구했다. 오페라 전막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다. 성악, 오케스트라, 무대 동선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그래야만 제한된 조건 안에서도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
울름 시절의 카라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리허설에서 지칠 줄 몰랐다고 한다. 리허설이 끝나도 혼자 남아 악보를 들여다봤고,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와 있었다. 단원들이 지쳐서 더 이상 못 하겠다고 할 때까지 카라얀은 계속했다.
그것이 카라얀의 완벽주의가 형성된 과정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황제가 되기 전에, 카라얀은 울름의 초라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밤마다 더 나은 소리를 향해 싸우고 있었다.
눈을 감기 시작한 이유
울름 시절에 카라얀이 눈을 감고 지휘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카라얀 본인이 남긴 여러 인터뷰를 종합하면 이런 배경이 있었다.
울름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실력이 일정하지 않았다. 리허설에서 아무리 맞춰도 실제 공연에서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카라얀은 그 이유를 분석했다. 단원들이 자신을 너무 많이 본다. 지휘자의 눈짓, 표정, 고개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려다가 오히려 음악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카라얀은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봤다.
단원들은 처음에 당황했다. 지휘자가 눈을 감으면 어떻게 지시를 받나. 그러나 카라얀은 지휘봉의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으로 모든 지시를 전달했다. 단원들은 눈짓 대신 손과 몸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단원들이 더 집중했다. 지휘자의 얼굴에서 정보를 얻으려 하는 대신, 음악 자체를 더 깊이 듣기 시작했다.
카라얀의 눈이 감기면 오케스트라의 귀가 열렸다.
카라얀은 이후 이 습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눈을 감는 것은 단원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내 안에서 들리는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내가 원하는 소리의 이미지가 있다. 그 이미지와 지금 오케스트라가 내는 소리의 간격을 느끼는 것, 그것이 내 일의 전부다. 눈을 뜨면 시각 정보가 그 집중을 방해한다."
이 습관은 울름에서 시작되어 카라얀의 평생 방식이 되었다. 훗날 베를린 필하모닉 앞에서,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카라얀은 항상 눈을 감고 지휘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라얀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아헨, 그리고 상승의 시작
1934년, 스물여섯의 카라얀은 독일 아헨(Aachen)의 음악감독 자리를 얻었다.
울름에서 아헨으로. 그것은 작은 변방에서 조금 더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아헨은 독일 서부의 중견 도시로, 당시 제법 규모 있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물여섯 살의 음악감독은 당시 독일 음악계에서도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였다.
카라얀은 아헨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얻었다. 그는 레퍼토리를 과감하게 바꾸었다. 청중에게 익숙한 안전한 곡들만 하는 대신, 잘 알려지지 않은 현대 작품들을 프로그램에 포함했다. 오케스트라 수준을 높이기 위해 단원들에게 강도 높은 리허설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불만도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자 아헨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달라졌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했다.
아헨에서의 카라얀 소식은 베를린까지 전해졌다.
1938년, 카라얀은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서 처음으로 지휘할 기회를 얻었다. 바그너의 「피델리오」. 베를린은 달랐다. 관객 수준도, 오케스트라 수준도, 비평가들의 눈도 아헨과 달랐다. 카라얀은 그 차이를 느끼면서 지휘대에 올랐다.
공연이 끝난 다음 날 베를린의 신문들이 쏟아냈다. 비평가 에드윈 폰 더 뉠(Edwin von der Nüll)은 이렇게 썼다.
"기적의 카라얀(Das Wunder Karajan)."
스물아홉 살의 아헨 음악감독에게 붙여진 이 별명은 독일 음악계에 빠르게 퍼졌다. 카라얀은 베를린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이 통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이었다. 아직 그 위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장,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그러나 카라얀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스물아홉이었고, 시간이 있었다.
잘츠부르크에서 온 소년이 세상에 나오다
1938년, 카라얀의 이름이 베를린 음악계에 처음으로 크게 울린 그 해, 그는 이미 아헨에서 5년째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었다.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모차르테움에서 첫 음악 교육을 받고, 빈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쌓고, 울름의 초라한 오페라단에서 완벽주의를 벼리고, 아헨에서 자신의 방식을 입증한 스물아홉 살의 지휘자.
그는 아직 전설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설이 될 사람이었다.
카라얀의 첫 번째 시절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이후의 카라얀을 이해할 수 없다. 훗날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황제로 군림하고, 나치 입당 논란에 시달리고, 수백 장의 음반을 남기고,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정점에 서게 될 때. 그 모든 것의 뿌리는 잘츠부르크의 그 집, 네 살의 피아노, 열 살의 오케스트라 충격, 울름의 초라한 오페라단, 눈을 감기 시작한 리허설에 있었다.
어떤 황제도 처음부터 황제이지 않았다.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에서 온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일찍,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지휘봉 하나로 모든 소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
그것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평생 추구한 것이었다.
오늘 감상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Don Juan)」 Op.20 — 카라얀이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앞에서 지휘한 바로 그 곡.
Don Juan Oboe solo - KARAJAN - L. Koch
이 곡은 스물네 살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교향시로,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후안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 이 곡은 지휘자의 에너지와 오케스트라의 반응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레퍼토리다.
카라얀이 1959년 베를린 필하모닉과 녹음한 버전을 추천한다. 첫 마디의 현악기 폭발에서 시작해 클라이막스를 거쳐 처연한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그 흐름 안에서, 카라얀이 음악을 어떻게 조각하는지가 선명하게 들린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해보시길. 열 살의 헤르베르트가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소리를 들었을 때의 충격을. 그 충격이 씨앗이 되어 결국 이 소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다음 편에서는 카라얀 이야기에서 가장 불편하고 가장 피할 수 없는 챕터, 나치 입당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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