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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거장의 초상

슈만, 사랑과 광기 사이에서 — 여섯 번째 이야기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3. 26.

제6편 | 클라라가 연주를 멈추지 않은 이유

 

클라라 슈만. 1842년 Em. Raerentzen & Co.에서 제작한 동판화 초상화.

그녀는 남편이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무대에 섰다. 사람들은 그것을 냉정함이라 했다. 그러나 그것은 클라라가 슈만과 연결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아이

1819년 9월 13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클라라 비크(Clara Wieck)는 말을 늦게 배웠다.

네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부모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나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달리 생각했다. 말이 늦은 대신, 이 아이는 듣는다. 음악 소리가 들리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귀가 남다르다.

비크는 클라라가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직접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교육 방식은 체계적이고도 철저했다. 단순히 건반을 두드리는 법이 아니라, 음악을 이해하고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법. 음의 무게, 음의 색깔,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가진 의미. 비크는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음악의 언어 전체를 가르쳤다.

클라라는 빠르게 흡수했다.

여섯 살에 음계를 완전히 익혔고, 여덟 살에 바흐의 인벤션을 연주했으며, 아홉 살에 베토벤 소나타를 무대에서 연주했다. 열 살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무대에 섰을 때, 청중은 이 작은 소녀가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숨을 죽였다. 소녀의 몸에서 나오는 음악이 어른의 것이었다. 아니, 어떤 어른도 흉내 낼 수 없는 무언가였다.

클라라는 열두 살에 유럽 순회 연주를 시작했다. 파리, 빈, 베를린. 귀족들의 살롱에서, 황실의 홀에서, 시민들의 콘서트홀에서 그녀는 연주했다. 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왕실 및 황실 명예 피아니스트' 칭호를 받은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역사상 그 칭호를 받은 사람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클라라에게 피아노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을 늦게 배운 아이가 찾아낸,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아버지의 딸, 슈만의 아내

클라라의 삶에는 항상 강한 남성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비크, 결혼 후에는 슈만. 그러나 이 해석은 클라라를 지나치게 수동적인 존재로 읽는 것이다.

사실 클라라는 아버지의 뜻에 맹목적으로 따른 인물이 아니었다. 슈만과의 결혼을 위해 법정 소송까지 불사한 것은 클라라 자신이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설계한 연주자로서의 삶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아버지와 정면으로 싸웠다.

결혼 후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슈만과의 관계는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복잡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슈만은 클라라가 연주 여행을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가정을 비운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아니라, 아내가 자신보다 더 유명하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슈만의 일기에는 그 솔직한 고백이 여러 번 등장한다.

클라라는 그것을 알면서도 피아노를 놓지 않았다.

단순한 고집이 아니었다. 클라라에게 피아노를 그만두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녀는 음악 없이 아내와 어머니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슈만도 결국 그것을 이해했다. 두 사람은 부딪히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면서, 서로의 예술이 상대방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받아들여갔다.

클라라는 슈만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가장 강력한 통로이기도 했다. 슈만이 새 곡을 완성할 때마다 클라라가 초연했고, 클라라의 연주 여행이 닿는 곳마다 슈만의 이름도 함께 퍼졌다. 역설적이게도, 클라라가 무대에 서는 것이 슈만의 음악을 살리는 길이었다.


2년 반의 기다림

슈만이 엔데니히에 입원한 것은 1854년 3월이었다.

클라라는 그때 여덟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슈만이 병원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 펠릭스가 태어났다. 클라라는 남편이 없는 집에서 혼자 아이를 낳았다. 브람스가 곁에 있었지만, 그것이 슈만의 부재를 채울 수는 없었다.

생계 문제도 시급했다. 슈만의 수입이 끊긴 상황에서 클라라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아이는 여덟. 병원비. 일상의 모든 비용. 클라라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연주 여행을 떠나는 것.

그녀는 무대에 섰다.

임신으로 늘어난 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클라라는 다시 연주복을 입었다. 슈만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은 이미 유럽 음악계에 퍼져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아내가 연주 여행을 다니는 것을 두고 혀를 찼다. 남편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무대에 선다는 것이 비정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클라라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무시했다.

무대 위에서 클라라는 슈만의 곡을 쳤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피아노 소품집을, 연가곡의 반주를.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클라라는 엔데니히의 그 방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슈만의 음표 하나하나를 연주하는 것이, 그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그와 나누는 대화였다.

클라라가 연주를 멈추지 않은 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었다.


클라라가 작곡가였다는 사실

클라라 슈만을 이야기할 때 종종 간과되는 것이 있다.

그녀가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라 작곡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클라라는 열 살 무렵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아버지 비크의 권유로 시작된 것이었지만, 클라라는 거기서 진심으로 즐거움을 찾았다. 스무 살 이전에 이미 피아노 협주곡과 피아노 소나타, 다수의 가곡과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다.

그 중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7은 클라라가 열세 살에 작곡을 시작해 열여섯에 완성한 곡이다. 초연 무대에서 클라라가 직접 피아노를 치고 슈만이 客석에서 그것을 들었다. 슈만은 그날 일기에 "천재적"이라고 썼다.

클라라의 가곡들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이네와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붙인 그녀의 가곡들은 슈만의 가곡들과 나란히 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 실제로 슈만과 클라라는 같은 시에 각자 곡을 붙여 함께 출판한 적도 있는데, 두 사람의 음악적 목소리가 얼마나 가까우면서도 독자적인지를 그 나란한 악보들이 증명한다.

그러나 클라라는 결혼 후 작곡을 점점 줄여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여덟 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 슈만의 곡들을 연주하고 알리는 데 집중한 것. 그리고 클라라 자신의 솔직한 고백도 있다.

"나는 때때로 내가 창작의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착각인지도 모른다. 여성은 작곡가가 될 수 없다고들 하는데, 나도 그 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유럽에서 여성 작곡가는 예외적 존재였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아무리 유명한 피아니스트라도, 여성이 작곡한 음악은 남성의 음악보다 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클라라는 그 벽을 알았고, 그 벽 앞에서 작곡보다는 연주를 선택했다.

훗날 음악학자들은 이것을 19세기 젠더 구조가 낳은 비극 중 하나로 평가한다. 클라라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어떤 음악이 나왔을까. 그 물음은 영원히 답할 수 없다.


슈만 사후, 클라라의 선택

슈만이 세상을 떠난 1856년, 클라라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그녀 앞에는 아직 40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클라라는 재혼하지 않았다. 브람스와의 오랜 관계에 대해 주변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돌았지만, 클라라는 끝까지 슈만의 아내로 남았다. 그녀는 슈만의 음악을 세상에 온전히 전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여겼다.

클라라는 슈만의 전집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슈만이 남긴 수많은 원고들을 정리하고, 출판사와 교섭하고, 연주 가능한 형태로 악보를 다듬는 작업. 그것은 몇 년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작업이었다. 클라라가 아니었다면 슈만의 상당수 작품들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거나, 전혀 다른 형태로 전해졌을 것이다.

동시에 클라라는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슈만 사후에도, 그녀는 유럽 전역을 돌며 무대에 섰다. 영국에서,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에서. 그녀가 무대에 설 때마다 슈만의 곡이 연주 목록에 있었고, 청중은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클라라가 마지막으로 공개 연주를 한 것은 1891년이었다. 일흔한 살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지 5년 후, 1896년 5월 20일, 클라라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묘비에는 로베르트 슈만의 묘비와 나란히 이름이 새겨졌다. 라인강이 내려다보이는 본의 묘지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다시 나란히 누웠다.


브람스와의 관계, 그 진실

클라라 슈만에 대한 이야기에서 브람스는 빠질 수 없다.

슈만이 엔데니히에 있는 동안 곁에 남은 브람스, 슈만 사후에도 클라라와 수십 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브람스.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가는 슈만 연구자들이 가장 자주 다루는 주제 중 하나다.

브람스는 분명히 클라라를 깊이 사랑했다. 그것은 그의 편지들이 증명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 낭만적 사랑이었는지, 예술적 경외였는지, 모성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이었을 것이다.

클라라는 브람스에게 무엇이었나. 그녀는 브람스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음악의 영역 바깥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 슈만의 아내라는 정체성이 클라라에게는 단순한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예술적 정체성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슈만의 음악을 연주하고 전파하는 것이 클라라의 사명이라면, 그 사명 안에 머무는 것이 클라라가 선택한 삶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연인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는, 어떤 연인의 편지보다도 깊고 솔직한 감정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죽은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람스 자신도, 클라라 없는 세상에서 오래 살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 아니었을까.


연주자 클라라 — 음악사를 바꾼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의 음악사적 중요성은 단지 위대한 작곡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클라라는 피아노 연주의 역사 자체를 바꾼 사람이다.

19세기 초반까지 피아노 연주회의 관행은 지금과 달랐다. 연주자들은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주로 연주했고, 타인의 곡을 연주할 때도 자유롭게 변형하거나 즉흥적으로 장식을 덧붙이는 것이 당연했다. 무대에서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고, 암보(暗譜, 악보 없이 외워서 연주하는 것)는 드문 일이었다.

클라라는 이 관행을 바꾸었다.

그녀는 무대에서 악보 없이 전곡을 암보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곡뿐 아니라 바흐, 베토벤, 슈만, 쇼팽의 곡들을. 그것은 청중에게 충격이었다.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한다는 것은, 그 음악이 연주자의 손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체에서 나온다는 의미였다. 청중은 클라라의 연주를 보면서 피아노가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것을 처음으로 감각했다.

클라라는 또한 연주 프로그램의 개념을 바꾸었다. 당시 연주회는 자신의 곡과 유명 작품들을 섞어 화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자리였다. 클라라는 프로그램을 하나의 음악적 여정으로 구성했다. 바흐에서 시작해 베토벤을 거쳐 슈만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역사와 내면적 흐름이 있는 구성.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독주 리사이틀의 원형이다.

클라라 이전에도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있었다. 리스트의 화려함, 쇼팽의 서정성. 그러나 클라라는 그것들과 다른 무언가를 피아노 연주에 가져왔다. 과시 없는 깊이. 기교를 위한 기교가 아니라, 음악을 위한 기교. 브람스는 클라라의 연주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클라라의 연주는 피아노를 잊게 만든다. 음악만 들린다."


어머니로서의 클라라

클라라 슈만의 삶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녀는 슈만과의 사이에서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에밀(1846~1847), 마리(1841), 엘리제(1843), 율리(1845), 루트비히(1848), 페르디난트(1849), 오이게니(1851), 펠릭스(1854). 그 중 첫째 에밀은 태어난 지 일 년 반 만에 세상을 떠났다. 루트비히는 성인이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막내 펠릭스는 스물네 살에 결핵으로 요절했다.

클라라는 아이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남편의 정신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모든 것을 견디며 건반 앞에 앉았다. 슬픔을 삭이는 방식이 피아노였고, 삶을 지속하는 힘의 원천이 피아노였다. 클라라에게 음악은 도피처가 아니었다. 삶 자체였다.

그 아이들 중 딸들인 마리와 오이게니는 훗날 어머니의 헌신을 기록으로 남겼다. 클라라가 얼마나 치밀하게 연습했는지, 무대 위에서 얼마나 철저했는지, 그리고 무대 밖에서는 얼마나 조용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는지를. 클라라를 지켜본 두 딸의 기록은 지금도 클라라 슈만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뮤즈가 아니라 예술가였다

클라라 슈만은 오랫동안 로베르트 슈만의 뮤즈로, 브람스의 비밀스러운 연인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클라라는 분명히 슈만의 음악에 영감을 주었다. 슈만의 많은 작품에 클라라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클라라를 사랑하는 감정이 음악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단지 영감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 음악을 창조하고, 해석하고, 전파한 예술가였다.

클라라가 없었다면 슈만의 음악은 지금 우리에게 닿지 못했을 것이다. 클라라가 없었다면 브람스는 그토록 빠르게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클라라가 없었다면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이 19세기 청중들에게 그토록 깊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클라라는 자신의 시대가 허락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낸 사람이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 어머니, 아내, 교육자, 편집자. 클라라는 이 모든 역할을 동시에 살았다. 그 어떤 역할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 어떤 역할에도 완전히 잠식되지 않으면서.

그것이 클라라 슈만이라는 사람이었다.


남겨진 선율

클라라가 죽은 뒤 그녀의 방에서 악보 하나가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한 곡의 악보. 여백에는 클라라의 필체로 작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날짜도, 수신인도 없는 메모.

"이 음악 안에 그이가 있다."

클라라는 평생 피아노 앞에 앉을 때마다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슈만이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슈만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건반 위에 손을 올리면 슈만의 음표들이 손가락을 통해 공기 속으로 퍼졌다. 그것이 클라라가 연주를 멈추지 않은 이유였다.

슈만은 클라라의 연주 안에서 계속 살았다. 클라라는 슈만의 음악 안에서 계속 사랑했다.

그리고 그 음악은 지금, 우리의 귀에 닿아 있다.


오늘 감상곡

클라라 슈만 「세 개의 로망스」 Op.21

Clara Schumann: Drei Romanzen Op. 21 (1853)

 

클라라 슈만이 작곡한 이 세 곡은 단아하고 서정적이며, 듣는 내내 클라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화려한 기교보다는 깊은 서정성이 우선하는 이 곡들 안에서, 우리는 연주자 클라라가 아니라 작곡가 클라라를 만난다.

그 중 두 번째 로망스를 특히 추천한다. 오른손의 노래하는 선율 아래 왼손이 조용히 물결치는 구성이, 클라라가 평생 품었던 감정의 결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다.

함께 들으면 좋은 곡으로 로베르트 슈만이 같은 Op.94 번호로 클라라에게 헌정한 「세 개의 로망스(Drei Romanzen)」도 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같은 형식으로 각자 쓴 로망스를 나란히 들어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같은 음악적 언어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로 말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린다.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한 클라라의 피아노 소품들도 추천한다. 아르헤리치는 클라라의 음악을 연주할 때 자신의 강렬함을 잠시 내려놓고, 그 섬세한 서정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 절제된 연주가 오히려 클라라의 음악을 더 또렷하게 들려준다.


다음 편에서는 슈만의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의 의미를, 호로비츠, 아르헤리치, 페라이어 세 연주자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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