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편 | 두 목소리로 살다 :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
그는 하나의 몸 안에서 두 사람으로 살았다. 한 명은 폭풍이었고, 한 명은 안개였다.
어느 날 슈만은 자신 안에서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슈만의 일기와 편지를 읽다 보면 묘한 대목에 자꾸 걸린다. 그는 종종 자신을 '나'라고 쓰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어떤 날은 '플로레스탄(Florestan)'이 말하고, 어떤 날은 '오이제비우스(Eusebius)'가 느꼈다고 썼다. 처음 읽는 사람은 이것이 소설 속 인물인가 싶다. 그러나 플로레스탄도, 오이제비우스도 슈만이 발명한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 두 인물은 단순한 필명이 아니었다. 슈만은 이들을 자신의 내면에 실제로 존재하는 두 개의 목소리로 여겼다. 음악을 쓸 때도, 비평을 쓸 때도, 심지어 사랑을 할 때도 이 두 목소리는 번갈아 말을 걸었다. 슈만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름을 붙이고, 음악 안에 살려두었다.
그것이 슈만을 다른 작곡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든 핵심이었다.
플로레스탄 : 폭풍 같은 남자
플로레스탄은 충동적이다.
그는 생각하기 전에 먼저 느끼고, 느끼기 전에 먼저 행동한다. 세상의 관습과 규칙에 답답함을 느끼며, 음악에서도 삶에서도 언제나 경계를 밀어붙인다. 그는 유머가 넘치고, 때로는 신랄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슈만이 음악 잡지 『음악 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창간했을 때, 그것은 플로레스탄의 목소리로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당시 독일 음악계는 보수적이고 형식적인 평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기존 대가들의 작품을 칭송하고, 새로운 시도에 냉담하며, 음악을 기술적 잣대로만 평가하는 풍토였다. 슈만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플로레스탄은 그 지면에서 거침없이 기존 평론계를 비판했고,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쇼팽과 브람스를 공개적으로 천재라 선언했다.
플로레스탄의 음악적 얼굴은 격렬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카니발(Carnaval)」에서 플로레스탄이 직접 등장하는 소품은 숨 가쁘게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고, 다시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오르는 형식으로 쓰였다. 악보를 보면 빠른 음표들이 쉼표 없이 질주하다 갑자기 강렬한 화음으로 돌변하는 구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플로레스탄이 말하는 방식이다. 논리가 아니라 충동으로, 설명이 아니라 선언으로.
오이제비우스 : 안개 속을 걷는 남자
오이제비우스는 다르다.
그는 느리게 걷는다. 세상을 바라볼 때 안개 너머를 보듯 눈을 가늘게 뜬다. 말하기보다 듣고, 행동하기보다 느끼며,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대신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상처를 잘 받고, 오래 기억하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많은 말을 한다.
오이제비우스가 쓴 음악은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때로는 끝을 내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의 선율은 명확한 결론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공중에서 흐릿하게 맴돌다 소리 없이 녹아드는 것, 그것이 오이제비우스의 음악적 언어다.
「카니발」에서 오이제비우스가 등장하는 소품은 플로레스탄과 완전히 반대다. 느리고 부드러운 선율이 오른손에서 흘러나오고, 왼손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쳐준다. 악보에 적힌 지시어는 단 두 단어, 'innig(내면 깊이)'. 슈만이 가장 즐겨 쓴 지시어 중 하나였다. 기술적 지시가 아니라 감정의 방향을 가리키는 말. 그것이 오이제비우스의 세계다.
슈만은 왜 자신을 둘로 나눴는가
오늘날의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슈만의 이 자기 분열은 조울증(양극성 장애)의 전형적인 패턴과 겹쳐 읽힌다. 극도의 흥분과 창작 에너지가 폭발하는 시기와, 깊은 우울과 무기력이 찾아오는 시기가 번갈아 찾아오는 것. 슈만의 생애를 돌아보면 이 패턴은 너무나 선명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슈만의 이중 자아를 단순히 정신 질환의 증상으로만 읽는 것은 지나치게 협소하다. 슈만은 그것을 병으로 느끼기 이전에, 먼저 예술적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모순된 충동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것, 그 모순을 억압하거나 하나로 통합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음악 안에 풀어놓는 것, 그것이 슈만의 선택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아(自我)의 문제에 유독 집착했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두 영혼이 내 가슴 속에 있다고 외쳤을 때, 슈만은 그 선언을 문학이 아닌 음악으로 실천하려 했다.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슈만판 파우스트의 두 영혼이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슈만이 자라면서 경험한 상실들과 연결된다. 그는 열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이듬해에는 누나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의 관계도 감정적으로 복잡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곧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자신의 감정을 직접 표현했다가 거절당할 것 같은 불안. 그런 심리적 배경 안에서 오이제비우스는 슈만의 숨겨진 연약함이었고, 플로레스탄은 그 연약함을 공격성으로 덮으려는 방어였는지도 모른다.
음악 비평가 슈만 : 다비드 동맹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슈만의 음악 비평 활동과도 깊이 연결된다.
슈만은 1834년 『음악 신보』를 창간하면서 상상 속의 단체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다비드 동맹(Davidsbündler)'. 구약성서의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처럼, 음악계의 속물과 진부함이라는 거인들에 맞서 싸우는 진보적 음악가들의 비밀 결사. 실제로 존재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슈만은 이 상상의 결사를 지면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운용했다.
평론을 쓸 때 슈만은 종종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 그리고 가끔은 '마이스터 라로(Meister Raro)'라는 세 번째 인물을 등장시켜 대화체로 음악을 논했다. 마이스터 라로는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중재자로, 일부 연구자들은 이 인물이 클라라와 비크의 이름을 합쳐서 만든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Clara + Wiek = Raro).
이 대화 형식의 비평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딱딱한 권위의 언어로 음악을 판결하는 대신, 음악을 앞에 두고 내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그대로 지면에 옮겨놓는 방식. 슈만은 음악 비평도 하나의 예술 행위여야 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이 형식을 통해 실천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를 논하면서 플로레스탄은 열광하고 오이제비우스는 조심스럽게 반박한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평하면서 두 목소리는 서로 다른 귀로 같은 음악을 듣는다. 독자는 두 인물의 논쟁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에 대한 자기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게 된다. 슈만의 비평은 결론을 주는 대신 질문을 남겼다.
「카니발」 : 두 목소리가 춤추는 무대
1834년에서 1835년에 걸쳐 완성된 피아노 소품집 「카니발(Carnaval)」 Op.9은 슈만의 이중 자아가 가장 직접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다.
이 곡은 21개의 작은 소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에 제목이 붙어 있다. 프레암블(서주), 피에로, 아를르캥, 발스 노블(고귀한 왈츠)... 그리고 그 안에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직접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또한 당시 슈만이 사랑했던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이라는 여인을 암시하는 '에스트렐라', 클라라를 암시하는 '키아리나(Chiarina)'도 등장한다.
이 곡에는 또 하나의 숨겨진 장치가 있다. 슈만은 에르네스티네의 고향 마을 이름 '아슈(Asch)'에서 음악적 모티프를 끌어냈다. 독일어로 A♭-C-B(시♭)-B(시♭)는 'As-C-H'로 읽히고, 또한 A-Es(E♭)-C-H로도 읽힌다. 슈만은 이 네 개의 음을 모든 소품의 바탕에 숨겨두었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 카니발 무대지만, 그 아래에는 특정한 이름으로 엮인 비밀 코드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슈만은 음악을 암호로 사용했다.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감정을 숨기고, 이름을 새기고, 이야기를 심어두었다. 그것은 공개 고백이면서 동시에 비밀 일기였다.
두 목소리의 비극
그러나 두 목소리를 동시에 품고 사는 삶은 점점 더 큰 대가를 요구했다.
플로레스탄이 극단적인 흥분 상태로 치달을 때, 슈만은 밤새 잠을 자지 않고 곡을 썼다. 하루에 여러 곡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흥분이 가라앉으면 오이제비우스의 깊고 검은 우울이 찾아왔다. 며칠씩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들. 슈만은 그것을 견뎌냈지만, 매번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끌려 내려가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클라라는 그 기복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다. 슈만이 플로레스탄의 상태일 때 그는 눈빛이 빛나고 말이 빠르며 피아노 앞에서 시간을 잊었다. 오이제비우스의 상태일 때 그는 침묵했고, 무겁게 가라앉았으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클라라는 두 남편을 번갈아 사랑해야 했다.
나이가 들수록 두 목소리의 진폭은 커졌다. 플로레스탄의 흥분은 점점 더 경계를 잃어갔고, 오이제비우스의 우울은 점점 더 깊어졌다. 슈만 말년에 찾아온 환청과 환각은 결국 이 두 목소리가 통제를 벗어난 결과이기도 했다.
1854년, 라인강에 뛰어든 것은 누구였을까. 플로레스탄이었을까, 오이제비우스였을까. 아니면 두 목소리 모두에게 지쳐버린 슈만 자신이었을까.
내 안의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
슈만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우리 안에도 그 두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과, 멈추고 싶은 마음. 소리치고 싶은 욕구와,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바람. 세상에 나를 드러내고 싶은 열망과,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
슈만은 그 모순을 통합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음악이라는 공간 안에서 두 목소리 모두에게 무대를 주었다. 그것이 슈만 음악의 특별한 긴장감이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이다.
훗날 슈만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음악가에게 가장 높은 과제는 빛을 인간의 깊은 내면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의 목적이기도 하다."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 두 이름은 슈만이 자신의 내면에 빛을 비추기 위해 발명한 두 개의 거울이었다. 그리고 그 거울은 지금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조용히 빛을 반사하고 있다.
오늘 감상곡
슈만 「카니발(Carnaval)」 Op.9
전체 연주 시간은 약 30분. 21개의 소품이 연이어 펼쳐지는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마치 슈만의 내면을 통과하는 여행 같다. 유쾌하고, 낭만적이고, 갑자기 어두워지고, 다시 환해지는 그 변화 속에서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다음 세 소품을 주의해서 들어보시길 권한다.
'플로레스탄' : 격렬하게 치고 나왔다가 중간에 갑자기 다른 선율이 끼어든다. 마치 자기 말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다른 감정에 끼어들리는 사람처럼.
'오이제비우스' : 느리고 조용하다. 악보의 지시어는 단 하나, 'innig(내면 깊이)'. 이 짧은 소품이 끝날 때 피아노 소리가 공중에서 사라지는 방식을 들어보라.
'다비드 동맹원들의 행진' :마지믹을 장식하는 이 곡에서 슈만은 바흐의 미뉴에트와 자신이 만든 주제를 함께 엮어 행진곡으로 만들었다. 과거의 음악과 현재의 음악이 함께 걸어가는 그 장면은 슈만의 음악적 세계관을 축약해서 보여준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클라라-하스킬의 녹음이 특히 추천할 만하다. 두 연주자는 같은 악보에서 완전히 다른 슈만을 꺼내 보인다.
다음 편에서는 스무 살의 무명 청년 브람스가 슈만의 문을 두드리던 날, 그리고 슈만이 그를 향해 쏘아올린 마지막 불꽃 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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