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 슈만을 연주한다는 것
같은 악보, 다른 영혼. 슈만의 음악은 연주자를 통해 매번 다시 태어난다. 세 사람의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슈만의 내면을 두드렸다.
악보는 지도가 아니다
음악에는 이상한 특성이 있다.
문학 작품은 어느 판본으로 읽든 텍스트가 동일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누가 읽어도 같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 독자의 해석이 다를 수는 있지만, 글자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은 다르다. 악보는 음악의 설계도이지 음악 그 자체가 아니다. 음악은 연주자가 그것을 소리로 변환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주자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된다.
이 사실이 슈만의 음악에서 특히 극적으로 드러난다. 슈만의 악보는 다른 작곡가들의 악보에 비해 유독 해석의 여지가 많다. 빠르기 지시가 모호하거나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기술적 지시보다 앞선다. 'innig(내면 깊이)', 'zart(섬세하게)', 'mit Humor(유머를 담아)', 'Im Legendenton(전설을 이야기하듯)'. 이런 말들은 연주자에게 정확한 속도나 강도를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감정의 방향, 음악이 지향해야 할 세계를 가리킨다.
슈만의 악보는 지도가 아니라 나침반이다.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할지는 알려주지만,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는 연주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슈만을 연주하는 것은 다른 작곡가를 연주하는 것과 다른 종류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기술적 정확성만으로는 슈만에게 닿을 수 없다. 연주자 자신의 내면이 그 음악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신의 기억, 자신의 상처, 자신의 사랑이 건반 위에서 슈만의 음표들과 만나야 비로소 무언가가 일어난다.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슈만의 내면을 두드렸다.

호로비츠 — 노년이 연주하는 유년(幼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3~1989).
20세기가 낳은 가장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중 한 명. 그의 기교는 초인적이었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달릴 때 청중은 그것이 사람의 손인지 의심했다.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의 화려하고 폭발적인 작품들을 연주할 때 호로비츠는 무대를 지배했고, 청중을 압도했으며, 콘서트홀을 아레나로 만들었다.
그러나 호로비츠가 슈만의 「어린이 정경(Kinderszenen)」을 연주할 때,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1968년, 호로비츠는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당시 그의 나이 예순다섯. 긴 연주 공백을 깨고 돌아온 무대였다. 그날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어린이 정경」이 있었다. 호로비츠는 피아노 앞에 앉아 첫 음을 눌렀다.
홀이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해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공기로 가득 찼다.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어린이 정경」은 빠르지 않았다. 화려하지도 않았다. 열세 곡의 작은 소품들이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안개를 뚫고 천천히 가까워지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일곱 번째 곡 '트로이메라이(꿈)'에 이르렀을 때, 청중 중 일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선율이 끝난 뒤의 침묵이었다. 마지막 음이 울리고 난 다음, 그 음이 공기 중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호로비츠는 손가락을 들지 않았다. 소리가 소리가 아닌 것이 되는 그 경계에서, 무언가 남겨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노년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유년의 음악이었다. 슈만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곡을, 예순다섯의 호로비츠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연주했다. 두 겹의 향수, 두 겹의 그리움이 그 짧은 곡 안에 쌓였다.
호로비츠가 「어린이 정경」 연주를 마쳤을 때, 카네기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폭발적인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나 호로비츠는 그 박수 소리보다 그 앞의 침묵이 더 좋았다고 나중에 말했다.
"청중이 박수를 치기 전에 잠시 숨을 멈추는 그 순간. 그것이 음악이 성공했다는 신호다."
호로비츠의 슈만은 기교의 언어가 아니라 기억의 언어로 쓰여 있다. 그의 손가락은 건반을 치는 것이 아니라 건반 위에서 무언가를 어루만지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슈만을 들으면 묘하게 슬프다. 아름다운 것이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감각. 그러나 그 슬픔이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따뜻하다.
아르헤리치 — 폭풍이 노래할 때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1941~ ).
아르헤리치의 피아노는 불이다.
그녀가 건반 앞에 앉으면 공기가 달라진다. 프로코피에프와 라벨, 리스트와 쇼팽을 연주할 때 아르헤리치의 손가락은 마치 폭풍처럼 건반을 쓸어간다. 리듬은 절박하고, 다이나믹의 진폭은 극단적이며, 음악의 흐름은 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질주한다. 청중은 그 앞에서 압도된다. 저항하기 어려운 힘이 있다.
그런 아르헤리치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54를 연주할 때,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외면적으로 보면 격렬하고 낭만적인 곡이다. 첫 악장은 피아노의 폭발적인 도입부로 시작하고, 카덴차는 길고 극적이며,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대화는 때로 충돌에 가깝다. 그러나 그 안에는 슈만 특유의 섬세한 내면성이 흐른다. 특히 2악장의 인터메조(간주곡)는 피아노와 현악기가 조용히 속삭이는 구간으로, 협주곡 전체에서 가장 사적이고 취약한 순간이다.
아르헤리치는 이 두 얼굴을 모두 연주할 수 있는 희귀한 피아니스트다.
1982년 아르헤리치가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과 녹음한 이 협주곡은 지금도 최고의 슈만 협주곡 녹음 중 하나로 꼽힌다. 첫 악장의 도입부에서 아르헤리치의 피아노는 폭풍처럼 몰아치지만, 동시에 그 폭풍 안에 방향이 있다. 무작위적인 격렬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힘. 그것이 아르헤리치의 슈만을 단순한 기교 과시와 다르게 만드는 핵심이다.
2악장 인터메조에서 아르헤리치는 완전히 달라진다. 빠르기가 느려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음색 자체가 바뀐다. 방금 전까지 강철 같았던 손가락이 갑자기 비단처럼 건반을 어루만진다. 클라리넷과 현악기들이 만드는 부드러운 음향 위에 피아노의 선율이 올라앉는 그 순간, 청중은 이것이 아까 그 폭풍과 같은 사람의 연주인지 의심하게 된다.
아르헤리치는 슈만의 협주곡에서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를 모두 연주한다. 아니, 플로레스탄의 옷을 입은 채 오이제비우스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 모순이 팽팽하게 유지되는 순간들이 이 연주를 위대하게 만든다.
인터뷰에서 아르헤리치는 슈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슈만의 음악은 연주자를 솔직하게 만든다. 숨을 곳이 없다. 기교 뒤에 숨을 수 없고, 화려함 뒤에 숨을 수도 없다. 그냥 거기 있어야 한다. 음악 안에 그냥."
아르헤리치의 슈만은 폭풍이 노래하는 음악이다. 그 폭풍 안에 서면 흠뻑 젖겠지만, 그것이 싫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젖어야만 슈만을 제대로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페라이어 — 선율이 숨 쉬는 방식
머리 페라이어(Murray Perahia, 1947~ ).
페라이어의 피아노는 말을 한다.
호로비츠의 기억도, 아르헤리치의 폭풍도 아닌, 페라이어의 음악은 조용하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연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선율의 처리 방식이다. 페라이어는 선율을 노래하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피아노는 본질적으로 타악기다. 해머가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구조이기 때문에, 소리는 시작되는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한다. 피아노로 '노래한다'는 것은 그 소멸을 이기는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페라이어는 그 환상을 만드는 데 누구보다 탁월하다.
페라이어가 슈만의 「다비드 동맹 무곡집(Davidsbündlertänze)」 Op.6을 연주할 때, 그 탁월함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비드 동맹 무곡집」은 슈만이 클라라와의 약혼 직후 작곡한 18개의 피아노 소품 모음이다. 각 소품에는 'F'(플로레스탄) 또는 'E'(오이제비우스)의 서명이 붙어 있다. 이 곡은 슈만의 두 자아가 가장 균형 있게, 그러면서도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작품이다. 기쁨과 우울, 흥분과 체념, 유머와 서정이 18개의 소품 안에서 쉼 없이 교차한다.
페라이어의 연주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각 소품들 사이의 연결이다.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는 그 짧은 순간, 페라이어는 음악이 끊기지 않도록 호흡을 잇는다. 기술적으로는 분명히 끊겼지만, 감정의 흐름은 이어진다. 18개의 소품이 마치 하나의 긴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것은 악보에 적혀 있는 것이 아니다. 페라이어가 슈만의 내면적 논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페라이어는 슈만의 음악에서 특히 리트(Lied, 독일 가곡)의 영향을 강조한다. 슈만이 피아노 음악을 쓸 때 항상 성악적 선율을 의식했다는 것, 피아노 선율이 노래처럼 호흡해야 한다는 것. 페라이어의 손가락은 그 호흡을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한다.
인터뷰에서 페라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슈만을 연주할 때 나는 항상 그 음악 안의 목소리를 찾으려 한다. 슈만은 피아노를 위해 쓰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의 목소리를 위해 쓴 것 같다. 그 목소리가 들릴 때, 연주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페라이어의 슈만은 조용히 당신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음악이다. 극적이지 않고, 압도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난 뒤 한참 동안 무언가가 남는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다 읽고 나서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악보, 다른 세계
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나란히 놓고 들어보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다.
호로비츠의 슈만은 기억 속에 있다. 이미 지나간 것,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에 대한 연주다. 그의 건반은 현재를 연주하면서 과거를 향한다.
아르헤리치의 슈만은 현재 안에 있다. 지금 이 순간 타오르는 감정, 지금 이 순간 달려가는 힘. 그녀의 건반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있다.
페라이어의 슈만은 내면 깊은 곳에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이야기. 그의 건반은 음악의 수면 위가 아니라 수면 아래를 향한다.
슈만의 음악이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세계를 모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음악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말해준다. 슈만은 자신의 상처와 사랑과 광기를 악보 위에 새겨두었고, 그 악보는 시대마다 다른 손가락을 통해 다른 소리로 우리에게 닿는다.
이것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즐거움의 핵심이다.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은 매번 새롭다. 100년 전에 연주된 슈만과 오늘 연주되는 슈만은 같은 음표이면서 다른 음악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차이 안에서 슈만을 계속 발견한다.
슈만을 연주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슈만은 유독 까다로운 작곡가로 통한다.
기술적 난이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슈만의 음악은 연주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강제한다. 베토벤의 음악은 건축적 구조가 워낙 명확해서 그 구조를 따라가면 어느 정도 안전한 연주가 된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투명하고 균형 잡혀 있어서 음표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슈만의 음악은 다르다. 구조가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형식은 있지만 그 형식이 음악의 핵심이 아니다. 슈만에게 형식은 감정을 담는 그릇일 뿐, 그릇의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슈만을 연주할 때 연주자는 자신의 내면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기억하는지. 그것이 음악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이 두렵기 때문에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슈만을 어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기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 연주자만이 슈만의 음악을 진짜로 연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호로비츠는 자신의 노년을 드러냈다. 아르헤리치는 자신의 폭풍 같은 현재를 드러냈다. 페라이어는 자신의 조용한 내면을 드러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슈만이 모두 다르고, 모두 옳다.
슈만이 연주자에게 남긴 것
슈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접었지만, 연주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글을 통해, 악보의 지시어를 통해, 그리고 음악 교육에 대한 그의 짧은 에세이 모음 「음악과 음악가(Gesammelte Schriften)」를 통해 연주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그 안에 이런 말이 있다.
"훌륭한 연주란 작곡가가 의도한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작곡가가 의도했지만 표현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문장은 슈만이 연주자에게 요청한 것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창조적 해석임을 말한다. 악보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 연주자는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사람이고, 그 실현은 매번 새롭고 매번 독자적이어야 한다.
슈만이 이 말을 남긴 것은 어쩌면 자신의 악보를 향한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내 음악을 정확하게 재현하려 하지 말고, 그 안에서 당신 자신을 찾으라고. 당신의 기억으로, 당신의 폭풍으로, 당신의 내면으로 이 음악을 살려내라고.
호로비츠가, 아르헤리치가, 페라이어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딘가의 연주자가 슈만의 악보를 펼치고 자신의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리면서, 슈만이 말한 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슈만의 음악은 그렇게, 매번 다시 태어난다.
오늘 감상곡 — 세 가지 슈만, 세 가지 방식
오늘은 한 곡을 추천하는 대신, 같은 슈만을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들어보는 것을 권한다.
슈만 「어린이 정경 Op.15」 — 세 연주자 비교
호로비츠의 1968년 카네기홀 실황 — 가장 먼저 이것을 들으라. 특히 7번 트로이메라이. 소리가 끝난 뒤 호로비츠가 손가락을 건반 위에 얹어두는 그 시간을 주목하라. 음악이 끝났지만 무언가가 아직 공중에 남아 있는 그 순간.
Schumann - Kinderszenen Op.15, "Scenes from Childhood" | Vladimir Horowitz
아르헤리치의 연주 — 호로비츠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다른지 느껴보라. 아르헤리치의 「어린이 정경」은 호로비츠보다 리듬이 선명하고 대비가 강하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Martha Argerich Schumann - Kinderszenen (Scenes from Childhood) Op. 15
페라이어의 연주 — 마지막에 들으라. 페라이어의 선율이 어떻게 노래하는지를, 각 소품의 선율이 어떻게 다음 소품으로 이어지는지를 들어보라. 악보에는 없는 연결이 거기 있다.
Murray Perahia on Kinderszenen part 1
세 연주 모두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다. 같은 곡을 세 번 듣는 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한 시간이 끝난 뒤 슈만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음악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54」 — 아르헤리치 & 아바도 & 베를린 필 (1982) 을 꼭 들어보시길. 1악장의 폭풍 같은 도입부에서 시작해 2악장 인터메조의 조용한 속삭임으로 이어지는 그 흐름이, 슈만이라는 사람의 전모를 보여준다.
슈만: 피아노 협주곡 | 마르타 아르헤리히, 리카르도 차일리 & 게반트하우스오르케스터 라이프치히
마지막 편에서는 슈만이 우리에게 남긴 것, 그리고 그의 음악이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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