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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 완벽이라는 이름의 삶 — 네 번째 이야기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4. 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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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 베를린 필하모닉의 황제

황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카라얀은 35년에 걸쳐 베를린 필하모닉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카라얀을 통해 20세기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그 35년 안에는 영광과 공포와 애증이 함께 있었다.


1955년, 왕좌에 앉다

1955년 봄,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마흔일곱 살.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울름의 초라한 오페라단에서 시작하여, 아헨의 음악감독을 거쳐, 나치 입당과 전후 활동 금지를 통과하고, 월터 레그와의 협업으로 국제 음반 시장에서 이름을 알린 끝에 도달한 자리였다. 그것은 단순한 직함이 아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는 당시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자리 중 하나였다.

카라얀은 그 자리에 앉으면서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이것은 내 오케스트라다.

푸르트벵글러의 방식을 이어받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통과 역사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 전통 위에 자신의 방식을 새겨 넣겠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이 처음부터 분명했다.

단원들은 새 지휘자를 지켜봤다. 기대와 긴장이 섞인 시선으로. 그 시선 앞에서 카라얀은 첫 리허설을 시작했다.


첫 리허설, 새로운 법칙

카라얀의 첫 공식 리허설은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날이 되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과 브람스. 카라얀은 악보 없이 지휘대에 올랐다. 이미 모든 것을 외우고 있었다. 그것 자체가 첫 번째 신호였다. 이 지휘자는 리허설에 준비되지 않은 채로 오는 사람이 아니다.

카라얀이 지휘봉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단원들은 처음에 당황했다. 푸르트벵글러는 눈을 떴다. 불명확한 지휘봉 움직임이었지만, 눈만큼은 항상 단원들을 향해 있었다. 카라얀은 달랐다. 눈을 감은 채 지휘봉을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명확했지만 단원들은 지휘자의 표정에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처음 몇 마디가 연주되었다. 카라얀이 멈췄다.

"첫째 바이올린. 여섯 번째 마디에서 활의 무게를 더 실어주십시오. 소리가 아니라 무게입니다."

단원들이 다시 연주했다. 카라얀이 다시 멈췄다.

"목관악기. 피아노(p)가 아직 크게 들립니다. 피아노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피아노는 멀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카라얀의 방식이었다. 크기가 아닌 거리. 강약이 아닌 공간. 그는 단원들에게 다른 언어로 음악을 설명했다. 기술적 지시어가 아니라 이미지와 감각의 언어로.

리허설이 끝났을 때 한 베테랑 단원이 옆 동료에게 속삭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람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을 원한다."

그것이 칭찬인지 불만인지는 그 단원만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 다름이 무엇인지 단원들은 알게 되었다.


카라얀이 원한 소리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만들고자 한 소리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카라얀이 직접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현악기가 단순히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기를 원한다. 오케스트라 전체가 하나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를 원한다. 어떤 악기도 다른 악기보다 돌출되지 않고, 그러면서도 각각의 색깔이 살아있기를. 마치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거대한 악기인 것처럼."

이것은 말로는 쉽다. 실현하기는 극도로 어렵다.

오케스트라는 서로 다른 악기들의 집합이다. 바이올린과 오보에와 호른과 팀파니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낸다. 그것들이 하나의 소리처럼 들리게 만드는 것은 수십 년의 앙상블 연습과 지휘자의 일관된 방향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카라얀은 그것을 리허설로 만들었다.

카라얀의 리허설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두 가지였다. "다시(Noch einmal)"와 "들어요(Hören Sie)". 다시. 그리고 들어라. 이 두 마디가 수십 년의 리허설을 요약한다.

카라얀은 단원들에게 자신의 소리를 내는 것 이전에, 옆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을 먼저 요구했다. 당신이 내는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를 알기 전에, 당신 옆에서 무슨 소리가 나고 있는지를 먼저 들어야 한다고. 그 듣는 행위가 앙상블의 시작이라고.

단원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들의 연주를 폄하하는 것처럼 느꼈다. 우리가 듣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카라얀이 원하는 방식으로 듣기 시작하자, 소리가 달라졌다. 각자가 더 잘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 잘 연주하게 된 것이었다.


리허설의 공포와 경외

카라얀의 리허설은 전설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은 카라얀의 리허설을 두 가지 감정으로 기억한다. 공포와 경외. 이 두 감정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공존했다.

공포는 카라얀의 완벽주의에서 왔다.

카라얀은 불만족스러운 연주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멈추고 다시 했다. 어떤 리허설에서는 단 두 마디를 위해 한 시간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과장이라 해도, 카라얀의 리허설에서 같은 부분을 수십 번 반복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단원들이 지쳐서 더 이상 못 하겠다는 신호를 보낼 때도 카라얀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몸의 피로가 음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신이 제대로 되어 있으면 몸은 따라온다고 믿었다.

한 베테랑 첼리스트의 회고가 있다.

"카라얀의 리허설이 끝나면 우리는 실제 연주를 마친 것보다 더 지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지침 속에서도 우리가 방금 만들어낸 소리에 대한 뿌듯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카라얀의 마법이었다."

경외는 그 마법에서 왔다.

카라얀의 리허설에서 단원들이 가장 많이 경험한 것은 자신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카라얀은 단원들의 한계를 그들 자신보다 더 높게 설정했다. 그리고 그 높은 기준에 맞추는 과정에서 단원들은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어디까지인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두려운 경험이면서 동시에 해방적인 경험이었다. 자신의 한계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 깨달음이 단원들을 카라얀의 오케스트라로 묶었다.


단원 선발 — 카라얀의 귀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행사한 권력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은 단원 선발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이 되는 과정은 여러 단계의 오디션을 거친다. 첫 오디션, 시보 기간, 그리고 최종 입단 투표. 카라얀은 이 모든 단계에 깊이 관여했다.

카라얀이 오디션에서 중시한 것은 기술적 완성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필요조건이었지만 충분조건이 아니었다. 카라얀이 더 깊이 들은 것은 그 연주자가 앙상블 안에서 어떻게 소리를 낼 수 있는지였다. 혼자 연주할 때의 소리와, 오케스트라 안에서 연주할 때의 소리는 다르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귀와 감각을 가진 연주자를 원했다.

오디션에서 카라얀이 자주 했다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지금 연주에서 무엇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은 함정 질문이 아니었다. 카라얀은 자신의 연주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는 능력, 즉 자기 인식 능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자신이 방금 내린 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앙상블 안에서 조율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당황하거나,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탈락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구체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기술이 조금 부족해도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카라얀의 시대를 만든 단원들

카라얀이 35년간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면서, 그와 함께 오케스트라의 황금시대를 만든 단원들이 있었다.

미셸 슈발베(Michel Schwalbé)는 카라얀 시대 베를린 필의 악장이었다.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전후 유럽에서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카라얀이 그를 베를린 필의 악장으로 발탁한 것은 여러 의미에서 상징적이었다. 나치 입당 경력이 있는 지휘자의 오케스트라를,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이 악장으로 이끌었다는 것. 카라얀은 슈발베의 기용에 대해 직접 설명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선택 자체가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했다.

슈발베는 카라얀과 25년 이상 함께 일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상호 존중에 기반했다. 카라얀은 슈발베에게 다른 단원들에게 하듯 고압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슈발베는 카라얀의 음악적 비전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실현하는 사람이었다. 악장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다리이기도 하다. 슈발베는 그 다리 역할을 묵묵히, 그리고 탁월하게 수행했다.

카를 라이스터(Karl Leister)는 카라얀 시대 베를린 필의 수석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그는 카라얀이 직접 발탁한 단원 중 한 명이었고, 카라얀의 소리 미학을 가장 잘 이해한 목관악기 연주자로 평가받았다. 라이스터의 클라리넷 소리는 베를린 필 사운드의 핵심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정확하고, 충분히 개성적이면서도 앙상블 안에서 잘 녹아드는 그 소리. 카라얀이 목관악기에서 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라이스터는 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카라얀은 내게 클라리넷을 새로 배우게 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표면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려주었다."

오이겐 두비에(Eberhard Finke), 게르트 자이페르트(Gerd Seifert) 같은 호른 연주자들, **로타르 코흐(Lothar Koch)**와 같은 오보에 연주자들도 카라얀 시대 베를린 필의 소리를 만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파트에서 카라얀이 원하는 방향으로 소리를 다듬었고, 그 집합이 '베를린 필 사운드'가 되었다.


베를린 필 사운드의 탄생

'베를린 필 사운드'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베를린 필하모닉이 내는 소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카라얀이 만들어낸 특정한 음향적 미학을 가리키는 말이다.

카라얀 시대 베를린 필의 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종종 이런 반응을 보인다. 무겁고 풍부한 현악기, 광채 나는 금관악기, 모든 섹션이 하나의 덩어리처럼 움직이는 느낌. 어떤 악기도 다른 악기를 압도하지 않으면서, 전체가 함께 거대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

이 소리가 만들어진 과정을 단원들의 회고를 통해 재구성하면 몇 가지 핵심이 보인다.

첫째, 현악기의 통일성. 카라얀은 현악기 섹션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활을 움직이는 것, 즉 보잉(bowing)의 통일성에 집착했다. 활의 방향이 통일되면 소리의 결이 같아진다. 그것이 현악기 섹션 전체가 하나의 악기처럼 들리게 만드는 기초였다. 카라얀은 단원들의 보잉을 수없이 수정했다. 악보의 어느 지점에서 다운 보잉이어야 하고 어느 지점에서 업 보잉이어야 하는지가 카라얀에게는 음표만큼이나 중요한 정보였다.

둘째, 피아니시모의 극단. 카라얀은 조용한 소리를 극도로 작게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단순히 작은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를 원했다. 그 피아니시모는 청중에게 무언가를 향해 귀를 더 기울이게 만들었다. 침묵 직전의 소리. 카라얀의 피아니시모는 그것이었다.

셋째, 포르티시모의 절제. 이것은 역설처럼 들리지만 카라얀 사운드의 핵심 중 하나다. 카라얀은 큰 소리를 낼 때도 단원들이 자신의 최대치를 내지 않도록 했다. 최대치 직전의 소리. 그 절제가 오히려 더 큰 소리처럼 들리게 만들고, 소리가 찢기지 않게 했다. 음악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 폭발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것. 그것이 카라얀의 포르티시모였다.

이 세 가지가 수십 년에 걸쳐 쌓여, '베를린 필 사운드'가 되었다.


음반 제국의 건설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황제였다면, 그의 제2제국은 음반 시장이었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가 된 직후부터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과 독점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후 30년 이상 도이치 그라모폰과 함께 방대한 음반 카탈로그를 구축했다.

카라얀이 음반에 접근하는 방식은 독특했다. 그는 음반을 연주의 기록으로 보지 않았다. 음반은 독립적인 예술 작품이어야 했다. 콘서트홀의 라이브 연주와 음반은 다른 것이다. 라이브 연주에서는 그 순간의 공기와 긴장감이 있다. 음반에서는 그것이 없는 대신, 완벽한 균형과 음향을 구현할 수 있다. 카라얀은 그 차이를 이해하고, 각각을 다른 목표를 향해 만들었다.

녹음 세션에서 카라얀의 방식은 음향 엔지니어들을 놀라게 했다. 연주가 끝나면 카라얀은 바로 음향 부스로 가서 녹음을 들었다. 그는 어떤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구체적인 수정 요청을 했다. 제1바이올린의 레벨을 0.5dB 낮추어라. 팀파니의 잔향을 조금 더 길게. 목관악기 전체를 약간 앞으로.

음향 엔지니어들은 카라얀이 청각적으로 얼마나 예민한 사람인지에 대해 경이로운 반응을 남겼다. 그는 마이크가 잡은 소리와 실제 홀에서 들리는 소리의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 차이를 조정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도이치 그라모폰의 프로듀서 한스 히르쉬(Hans Hirsch)는 카라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음향 엔지니어보다 녹음에 대해 더 많이 알았다. 우리가 기술적으로 무엇이 가능한지를 설명하면, 그는 그 가능성의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그와 일하는 것은 배움의 과정이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남긴 음반의 수는 방대하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세 차례, 브람스 교향곡 전집을 세 차례. 브루크너,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시벨리우스, 드보르자크. 그리고 베르디와 푸치니의 오페라들. 그 목록은 클래식 음반 역사상 단일 지휘자로서는 가장 방대한 것 중 하나다.


잘츠부르크와 빈 — 제국의 확장

카라얀의 제국은 베를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56년부터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음악제(Salzburger Festspiele)의 예술 감독을 맡았다. 그것은 단순한 직함이 아니었다.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음악제 전체를 자신의 예술적 비전에 따라 재구성했다. 프로그램 선정, 무대 연출, 출연 연주자와 가수 선발, 심지어 새로운 콘서트홀 건설에도 카라얀이 관여했다.

1960년, 잘츠부르크에 대페스티벌하우스(Großes Festspielhaus)가 개관했다. 2,200석 규모의 이 홀은 카라얀이 직접 음향 설계에 참여한 공간이었다. 홀의 잔향 시간, 무대의 넓이, 피트의 깊이까지 카라얀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그 홀은 지금도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중심이다.

잘츠부르크는 카라얀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는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단순한 음악 행사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문화 이벤트로 만들고자 했다. 매년 여름, 유럽과 세계의 음악 애호가들이 잘츠부르크로 모여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 목표는 달성되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카라얀 시대에 세계 최고의 클래식 음악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빈 필하모닉(Wiener Philharmoniker)과의 관계도 카라얀 제국의 중요한 축이었다. 빈 필하모닉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양대 오케스트라로 불리지만, 성격이 다르다. 빈 필하모닉은 특정 상임 지휘자 없이 단원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오케스트라다. 카라얀은 빈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아니었지만, 잘츠부르크 음악제와 빈에서 빈 필하모닉과 정기적으로 협연했다.

두 오케스트라는 성격이 달랐다. 베를린 필이 카라얀의 완벽주의에 의해 단련된 정밀 기계 같은 소리를 냈다면, 빈 필하모닉은 그 전통적인 빈 사운드, 즉 부드럽고 따뜻하며 약간의 불완전함이 오히려 인간적인 느낌을 주는 소리를 유지했다. 카라얀은 두 오케스트라에서 다른 음악을 만들었다. 그것이 카라얀의 유연성이었고, 동시에 그가 오케스트라를 자신의 이미지로만 주조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황제의 일상

카라얀의 일상은 음악가로서는 이례적이었다.

그는 요트를 좋아했다. 지중해에서 스스로 배를 몰았다. 높은 속도를 즐겼고, 자동차 경주에도 관심이 있었다. 비행기를 직접 조종했다.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여 자신의 전용기를 직접 몰고 유럽 각지의 연주회장을 다녔다.

이것들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카라얀에게 속도와 통제는 음악에서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요트를 몰 때 바람과 파도를 읽고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 비행기를 조종할 때 수많은 계기판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것. 그것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수십 명의 소리를 동시에 처리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집중이라고 카라얀은 느꼈다.

"나는 비행기를 조종할 때 가장 완전히 집중된다고 느낀다. 동시에 수십 가지를 처리해야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 안에 있다. 음악도 그렇다."

카라얀은 건강에도 집착했다. 정기적으로 수영을 했고, 식단을 관리했으며, 수면을 중요시했다. 그는 지휘자의 몸이 악기라는 것을 알았다. 몸이 최상의 상태에 있지 않으면 음악도 최상이 될 수 없다는 믿음.

리허설 전 카라얀의 루틴이 있었다. 연주 직전 대기실에서 카라얀은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는 무엇을 했는가. 한 스태프의 증언에 따르면, 카라얀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조용히. 음악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연주하는 것이었다. 지휘봉 없이, 오케스트라 없이, 완벽한 음악이 내면에서 울리도록 준비하는 것.


황제의 고독

권력은 고독을 만든다.

카라얀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단원들, 스태프들, 음반 프로듀서들, 잘츠부르크 음악제 관계자들, 그리고 그의 명성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카라얀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깊은 고독을 느꼈다는 증언들이 있다.

카라얀의 친구는 많지 않았다. 그는 동료 음악가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타입이 아니었다. 음악적 관계는 분명했지만, 그것이 인간적 우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단원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카라얀은 단원들을 존중했지만 가까워지지 않았다. 리허설 중에는 이름 대신 악기로 불렀다. 제1바이올린, 호른, 오보에. 그것이 단원들을 개인이 아닌 음악적 기능으로 대하는 방식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반면 그것이 음악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카라얀의 방식이었다는 옹호도 있다.

카라얀이 가장 친밀감을 표현한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연주자들이었다. 자신이 발굴하고 지원한 연주자들에게 카라얀은 다른 면을 보였다. 안네-조피 무터에 대한 그의 태도, 오자와 세이지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것을 보여준다. 이미 권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막 시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카라얀은 조금 더 열려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카라얀 자신의 시작을 기억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울름의 초라한 오페라단에서 지휘봉을 처음 잡았던 스물한 살의 청년을.


단원들이 기억하는 카라얀

카라얀과 함께 수십 년을 보낸 단원들의 회고는 복잡하다.

두려움과 존경, 불만과 자부심이 뒤엉켜 있다. 어떤 단원은 카라얀의 리허설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경험이었다고 했다. 다른 단원은 카라얀 아래서 연주한 것이 자신의 음악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몇 가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한 리허설에서 호른 주자가 중요한 솔로 부분을 실수했다. 카라얀은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 리허설이 끝난 뒤 카라얀이 그 호른 주자를 조용히 불렀다. 두 사람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다음 리허설에서 그 호른 주자의 솔로는 달라져 있었다.

다른 에피소드. 한 젊은 단원이 긴장한 나머지 리허설에서 계속 실수를 했다. 카라얀이 멈추고 그 단원을 바라봤다. 단원은 얼어붙었다. 카라얀이 말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 오케스트라의 단원입니다.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단원은 후에 그 말이 자신의 음악가 인생을 바꿨다고 했다.

카라얀은 두려운 사람이었지만, 그 두려움 안에 때로는 이런 면이 있었다. 완벽주의자이면서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차갑게 대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따뜻함을 보였다. 그 모순이 카라얀이라는 사람이었다.


제국의 그림자

황제의 시대에는 항상 그림자가 있다.

카라얀의 35년 지배에서 가장 자주 제기되는 비판은 그의 독점적 권력 행사였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 잘츠부르크 음악제, 도이치 그라모폰의 음반 카탈로그를 동시에 장악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유럽 클래식 음악계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한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카라얀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음악가는 그 많은 플랫폼에서 배제될 수 있었다. 카라얀의 눈 밖에 나는 것이 커리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또한 카라얀이 만들어낸 소리의 미학이 지나치게 지배적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모든 오케스트라가 베를린 필 사운드를 지향하면서, 오케스트라마다 가지고 있던 고유한 지역적 음색과 전통이 희석되었다는 것이다. 카라얀의 완벽한 소리가 표준이 되면서, 그 표준에서 벗어난 소리는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생겼다.

이 비판들은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카라얀 없이 20세기 클래식 음악이 지금과 같은 수준에 도달했을까 하는 반론도 있다. 카라얀이 만들어낸 기준이 결과적으로 전체 클래식 음악계의 수준을 높였다는 것이다.

제국은 항상 양면을 가진다. 카라얀의 제국도 그랬다.


35년이 남긴 것

1989년,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35년이 끝났다.

그가 떠난 뒤 베를린 필하모닉의 소리가 달라졌다는 평가가 있다. 카라얀의 후임으로 온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의도적으로 카라얀과 다른 방향을 추구했다. 소리가 더 투명해지고, 더 유연해지고, 각 섹션의 개성이 더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이 더 나은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평가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카라얀이 35년간 만들어낸 베를린 필하모닉의 기초 위에 아바도의 음악이 있었다는 것. 카라얀이 없었다면 아바도의 베를린 필도 없었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관계는 그렇다. 지휘자는 지나가지만 오케스트라는 남는다. 그리고 위대한 지휘자는 떠난 뒤에도 오케스트라의 몸 안에 남는다. 손가락의 기억처럼, 호흡의 패턴처럼.

카라얀의 35년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몸 안에 새겨졌다. 그것은 지금도 거기 있다.


오늘 감상곡

베토벤 교향곡 전집 —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카라얀은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세 차례 녹음했다. 1952년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1963년 베를린 필과, 그리고 1977년 베를린 필과. 이 세 녹음을 비교하는 것은 카라얀의 음악적 변화를 추적하는 흥미로운 경험이다.

그 중 1963년 녹음이 카라얀 베를린 필 시대의 정점으로 가장 많이 꼽힌다.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 지 8년이 지나, 카라얀이 원하는 사운드가 오케스트라에 충분히 스며든 시점이었다.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Pastoral)」 F장조를 특히 추천한다.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유쾌한 감정'에서 카라얀이 만드는 현악기의 흐름을 들어보라. 물이 흐르듯, 바람이 부듯, 그러나 동시에 완벽하게 균형 잡힌 그 소리. 카라얀 사운드의 본질이 거기 있다.

 

그리고 같은 곡의 푸르트벵글러 버전도 함께 들어보시길.

Beethoven - Symphony No 6 ‘Pastoral’ - Furtwängler, VPO (1952)

 

두 연주를 나란히 들으면, 3편에서 이야기한 두 지휘자의 철학적 차이가 음악으로 들린다. 그것이 카라얀의 35년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다음 편에서는 카라얀이 열네 살 소녀 바이올리니스트를 발굴한 날, 안네-조피 무터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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