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 카라얀이 발굴한 사람들 ② — 크레머, 마이스키, 그리고 사비네 마이어 사건
황제는 제국을 넓히는 방법을 알았다. 더 많은 땅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뛰어난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 그러나 황제의 선택이 항상 환영받지는 않았다. 1982년,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그것이 폭발했다.
카라얀의 눈이 향한 곳
카라얀이 안네-조피 무터를 발굴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카라얀의 눈이 향한 곳은 무터만이 아니었다. 카라얀은 평생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들을 찾아다녔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카라얀의 눈앞에 나타날 때 카라얀이 알아봤다. 그것이 카라얀의 방식이었다. 직접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앞에 선 연주자에게서 남다른 무언가를 감지하는 것.
그 감지의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
두 명의 이름이 특히 기억된다.
기돈 크레머(Gidon Kremer)와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
두 사람 모두 소련 출신이었고, 두 사람 모두 서방으로 넘어와 새로운 무대를 찾고 있었으며, 두 사람 모두 카라얀과의 만남으로 세계 음악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그 과정은 각자 달랐다. 그리고 두 사람과 카라얀의 관계도 달랐다.
기돈 크레머 — 철의 장막을 건너온 바이올린
기돈 크레머(Gidon Kremer)는 1947년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음악 가문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크레머는 일곱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리가 음악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음악원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에게 사사받았다. 오이스트라흐는 20세기 소련이 낳은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 밑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크레머가 이미 소련 음악계에서 최정상급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
1970년, 크레머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2위를 했다. 이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도 입상했다. 국제 무대에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 내에서 크레머의 삶은 쉽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기계적으로 완벽한 연주를 하는 소련식 음악 교육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하는 연주자였다. 악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을 음악 안에 담으려 했다. 그것이 소련 음악계의 기준과 충돌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허가된 음악만 연주해야 하는 체제 안에서, 크레머는 점점 좁아지는 공간을 느꼈다.
1980년, 크레머는 서방에 남기로 결정했다. 소련 당국의 허가 없이 귀국을 거부하는 사실상의 망명이었다. 그것은 용기 있는 결단이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소련에 남은 가족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 있었고, 크레머 자신도 서방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카라얀이 크레머를 들었을 때
카라얀이 크레머를 처음 주목한 것은 크레머가 서방으로 넘어오기 전, 1970년대 초의 일이었다.
당시 크레머는 소련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서방의 음악제와 연주회에 참여하는 것이 간헐적으로 허용되었다. 카라얀은 그런 자리 중 하나에서 크레머의 연주를 들었다.
카라얀이 크레머에게서 들은 것은 무터에게서 들은 것과 달랐다.
무터의 소리가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었다면, 크레머의 소리는 날카롭고 지적이었다. 크레머는 악보를 그대로 연주하지 않았다. 그는 악보 뒤의 무언가를 찾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꺼냈다. 어떤 음을 다르게 강조하고, 어떤 프레이징을 예상과 다르게 처리하는 것. 그것이 때로는 파격적으로 들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크레머의 연주는 불편했다. 너무 독특하고, 너무 자기 주장이 강하며, 전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카라얀은 달리 들었다.
"크레머의 연주에서 나는 오케스트라가 들린다. 그는 솔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도 오케스트라 전체의 소리를 듣고 있다. 그 귀가 특별하다."
카라얀이 크레머에게서 본 것은 단순한 바이올린 기교가 아니었다. 음악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소리로 표현하는 용기였다.
카라얀은 크레머와 협연을 추진했다. 크레머가 서방에 정착한 이후,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무대에 함께 섰다.
크레머와 카라얀의 불편한 협력
그러나 크레머와 카라얀의 관계는 무터와 카라얀의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무터는 카라얀의 방향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했다.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카라얀의 음악적 세계를 존중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찾아갔다.
크레머는 달랐다. 그는 카라얀의 권위에 쉽게 복종하지 않았다. 카라얀이 원하는 방향이 자신이 음악에서 듣는 것과 다를 때, 크레머는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리허설에서 두 사람의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카라얀이 특정 구간의 빠르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잡으려 했을 때, 크레머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카라얀은 처음에 자신의 해석을 고집했다. 크레머는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입장을 오가며 긴 시간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한쪽에서는 카라얀이 결국 크레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카라얀의 방향으로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었다. 카라얀의 리허설장에서 솔리스트가 지휘자에게 정면으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크레머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라얀은 그 크레머를 무대에서 밀어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다. 그 음반들은 지금도 크레머의 음반 목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카라얀의 음악과 크레머의 음악이 부딪히고 섞이는 그 긴장감이 오히려 음악에 특별한 활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크레머는 후에 카라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은 내가 동의하지 않는 많은 것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들을 줄 알았다. 진짜로 들을 줄 알았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미샤 마이스키 — 수용소에서 카네기홀로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의 이야기는 크레머보다 더 극적이다.
마이스키는 1948년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났다. 크레머와 같은 도시 출신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첼로에 재능을 보였고, 소련의 음악 교육 시스템 안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레닌그라드 음악원을 거쳐 모스크바에서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에게 사사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 밑에서 배웠다는 것은 최고의 증명이었다.
그러나 마이스키의 삶은 갑자기 무너졌다.
1970년, 마이스키는 이스라엘로 이주하려 한 형을 도왔다는 이유로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다. 당시 소련에서 이스라엘 이주를 돕는 것은 반국가 행위로 간주되었다. 마이스키는 18개월을 노동 수용소에서 보냈다.
수용소 생활은 마이스키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무너뜨렸다. 첼로를 연주할 수 없는 환경에서 보낸 18개월. 음악가에게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고통 이상이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빼앗긴 것이었다.
석방된 후 마이스키는 소련에서의 음악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1972년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이스라엘에서 마이스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수용소 생활로 손의 감각이 달라져 있었고, 연주 기량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스라엘을 거쳐 서방으로 나온 마이스키는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의 협연으로 서방 음악계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아르헤리치는 마이스키의 첼로에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들었다. 그것은 기교만이 아니었다. 그 소리 안에 삶의 무게가 있었다. 수용소를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소리의 깊이.
카라얀이 마이스키의 첼로를 들었을 때
카라얀이 마이스키를 처음 들은 것이 언제, 어디서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확실한 것은 카라얀이 마이스키의 연주를 듣고 즉각적인 관심을 표했다는 것이다. 카라얀은 마이스키의 이력을 알고 있었다. 소련의 수용소. 그리고 그로부터의 귀환. 카라얀이 그것에 얼마나 무게를 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카라얀이 마이스키의 첼로에서 들은 것은 분명히 그 이력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이스키의 첼로 소리는 독특했다. 풍부하고 어둡고 깊었다. 슬픔과 열정이 동시에 담긴 소리. 그것은 연주 기술만으로 만들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삶이 소리 안에 들어있는 것이었다.
카라얀은 마이스키에게 협연을 제안했다.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은 첼로 협주곡 레퍼토리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힌다. 첼로라는 악기의 모든 가능성을 끌어내면서도, 음악적 깊이와 서정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곡.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기교뿐 아니라 음악적 내면의 깊이가 필요하다.
카라얀은 마이스키가 그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봤다.
리허설에서 카라얀과 마이스키의 관계는 크레머와의 관계와 또 달랐다. 마이스키는 카라얀 앞에서 긴장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도, 카라얀의 리허설장은 긴장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카라얀은 마이스키를 다루는 방식이 달랐다는 증언이 있다. 마이스키에게는 더 부드럽게 접근했다는 것이었다. 마이스키가 가져온 음악적 해석을 더 많이 존중했다는 것이었다.
카라얀이 마이스키에게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교적으로 다듬어야 할 것들이 있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음악의 본질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 본질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마이스키는 후에 카라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은 내게 음악의 언어를 다시 가르쳐주었다. 수용소에서 나는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라얀과 함께 연주하면서 내가 잃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카라얀의 선택 방식
크레머와 마이스키, 그리고 무터. 세 사람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 카라얀이 젊은 연주자를 선택하는 방식의 패턴이 보인다.
카라얀은 기교적 완성도만을 보지 않았다. 그것은 최소 조건이었다. 카라얀이 더 깊이 들은 것은 그 연주자가 음악 안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지였다. 기술이 아니라 말. 연주가 아니라 이야기.
무터는 순수한 음악적 아름다움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크레머는 지적이고 독립적인 음악적 사유를 가진 사람이었다. 마이스키는 삶의 무게가 소리 안에 담긴 사람이었다. 세 사람은 달랐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카라얀은 그것을 들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꼈다.
그러나 카라얀의 선택이 항상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베를린 필하모닉 안에서는.
1982년, 베를린 필하모닉에 폭풍이 왔다
1982년 가을,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한 클라리넷 연주자로 인해 시작되었다.
사비네 마이어(Sabine Meyer). 1959년생, 당시 스물세 살의 독일 여성 클라리넷 연주자. 그녀는 이미 독일 음악계에서 탁월한 연주자로 알려져 있었다. 뮌헨 음악원에서 공부했고,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객원 연주를 하며 실력을 쌓았다.
카라얀은 마이어의 연주를 듣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 클라리넷 자리가 비어 있었다. 카라얀은 마이어를 그 자리에 앉히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폭풍의 시작이었다.
단원들의 반란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사비네 마이어의 기용에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표면적으로 음악적인 것이었다. 마이어의 클라리넷 소리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앙상블 사운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베를린 필의 목관악기는 특유의 소리 색깔과 앙상블 방식이 있는데, 마이어의 소리가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단원들의 반대는 그 표면적 이유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첫째는 성별의 문제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1982년 당시 사실상 남성만의 오케스트라였다. 여성 단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극히 소수였고, 수석 자리에 여성을 앉히는 것은 당시 단원들의 정서와 충돌했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이유였지만, 실질적으로 반대의 핵심 중 하나였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둘째는 카라얀의 독단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었다. 단원들은 오랫동안 카라얀의 완벽주의와 독단적 결정에 복종해왔다. 35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인 불만이 있었다. 마이어 사건은 그 불만이 터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단원들은 왜 단원 선발에 단원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클라리넷 연주자의 문제가 아니라, 카라얀의 권력에 대한 구조적 도전이었다.
단원들은 집단 투표를 통해 마이어의 입단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단원 투표로 입단을 결정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에 따라, 단원들은 마이어의 정식 입단을 거부했다.
카라얀의 대응
카라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마이어를 시보 단원(probationary member)으로 계속 오케스트라에 두려 했다. 정식 단원은 아니지만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면서 그 기간에 단원들을 설득하겠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단원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부 단원들은 마이어가 있는 리허설에 불참하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오케스트라 전체가 카라얀과 단원들 두 진영으로 나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사태는 베를린 시 당국과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안에서 지휘자와 단원들이 공개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독일 언론은 이 사건을 크게 다루었다. '마이어 사건(Maier-Affär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카라얀은 언론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나는 이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다. 단원을 선발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다. 그리고 사비네 마이어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필요한 연주자다."
단원들 측 대표도 언론에 말했다.
"카라얀의 음악적 권위를 존중한다. 그러나 이 오케스트라는 카라얀의 사유물이 아니다. 단원들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두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마이어, 오케스트라를 떠나다
결국 1983년, 사비네 마이어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났다.
단원들의 집단 저항을 카라얀이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35년간 베를린 필하모닉의 황제로 군림했던 카라얀이 처음으로 단원들에게 패배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음악적 사건이 아니었다. 권력의 사건이었다. 카라얀의 지배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신호였다.
카라얀은 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개적으로는 마이어가 자신의 의지로 떠난 것처럼 처리되었다. 그러나 음악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다.
마이어는 베를린 필을 떠난 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 클라리넷으로 활동했다. 이후 독주자와 앙상블 연주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역설적으로 베를린 필 사건이 그녀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리는 결과를 낳았다.
마이어는 이 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을 피하면서도, 카라얀이 자신을 지지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했다.
"카라얀은 내 연주를 믿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 신뢰가 내게 어떤 것이었는지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사비네 마이어 사건이 남긴 것
마이어 사건은 단순한 인사 갈등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층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첫째, 젠더의 문제. 베를린 필하모닉이 여성 단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은 당시 클래식 음악계의 성차별적 구조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에서 거부당했다는 것. 이 사건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여성 단원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공식적으로 여성 단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1982년부터였지만, 완전한 의미에서의 변화는 카라얀 사후에야 이루어졌다.
둘째, 권력과 예술의 문제. 카라얀의 35년 지배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지배는 단원들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이어 사건은 그 억압된 자율성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은 단원들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셋째, 카라얀 자신에게 남긴 것. 마이어 사건은 카라얀에게 자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단원들이 공개적으로 저항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카라얀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것이 카라얀의 내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이어 사건 이후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관계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크레머, 마이스키, 마이어 — 세 이야기의 공통점
기돈 크레머, 미샤 마이스키, 사비네 마이어. 세 사람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다르다.
크레머는 소련에서 넘어온 지적인 반항아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마이스키는 수용소를 통과한 첼리스트였다. 마이어는 카라얀이 베를린 필에 기용하려 했다가 단원들의 반발에 부딪힌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그러나 세 이야기에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있다.
카라얀이 본 것과 세상이 본 것이 달랐다는 것이다.
크레머의 파격적인 해석을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했을 때, 카라얀은 그 안에서 진짜 음악을 들었다. 마이스키의 상처 입은 이력이 음악계에서 장애가 될 수 있었을 때, 카라얀은 그 상처가 소리가 된 것을 들었다. 마이어에 대한 단원들의 집단 반발 앞에서, 카라얀은 자신이 들은 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카라얀이 항상 옳았다는 것이 아니다. 마이어 사건에서 카라얀은 단원들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카라얀이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눈이 세상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황제는 권력을 원했다. 그러나 그 권력의 원천은 결국 소리를 듣는 귀였다. 그 귀가 없었다면 카라얀은 단순한 권력자였을 것이다. 그 귀가 있었기에 카라얀은 음악의 황제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변화
마이어 사건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카라얀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단원들도, 카라얀도 알았다. 리허설의 긴장감은 예전과 달랐다. 카라얀의 지시가 이전처럼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들이 생겼다. 단원들은 자신들에게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라얀의 건강도 악화되고 있었다. 척추 수술을 받았고, 지휘 중 몸에 힘이 빠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이 단원들의 눈에도 보였다. 황제가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카라얀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지휘봉을 들었다. 리허설은 계속되었다. 완벽함을 향한 추구는 계속되었다.
그 집요함이 카라얀이었다. 몸이 약해지고 권위에 균열이 생겨도, 지휘봉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완벽주의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황제의 눈이 본 것
카라얀이 수십 년에 걸쳐 발굴하고 지원한 연주자들의 목록을 보면, 한 가지가 보인다.
카라얀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선택했다.
무터는 카라얀보다 훨씬 순수하고 자연스러웠다. 크레머는 카라얀보다 훨씬 반항적이고 파격적이었다. 마이스키는 카라얀이 경험하지 못한 삶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마이어는 카라얀의 오케스트라에 새로운 색깔을 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카라얀은 자신의 복제품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닌 것을 가진 사람들을 원했다. 그것이 카라얀의 선택에 담긴 역설이었다.
완벽주의자가 자신의 완벽함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들을 곁에 두었다는 것.
카라얀이 눈을 감고 지휘할 때, 그가 들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완벽한 음악? 아니면 그 완벽함이 닿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다른 소리?
크레머의 파격, 마이스키의 깊이, 무터의 순수함, 마이어의 새로운 색깔. 그것들이 카라얀이 자신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것들이었다.
황제의 제국은 황제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 제국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소리들이 함께 만든 것이었다.
오늘 감상곡 — 세 가지 소리
① 기돈 크레머 —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77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1976년, EMI 녹음)
Brahm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77 - Gidon Kremer, Herbert von Karajan, Berlin Philharmonic
크레머 특유의 날카롭고 지적인 소리가 카라얀의 베를린 필 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들어보시길. 예상을 벗어나는 프레이징, 독특한 음색. 그리고 그 독특함이 카라얀의 완벽한 오케스트라와 만날 때 생기는 팽팽한 긴장감이 이 음반의 핵심입니다.
② 미샤 마이스키 —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b단조」 Op.104
번스타인 지휘, 이스라엘 필하모닉 (1988년 실황)
Dvořák: Cello Concerto in B Minor, Op. 104, B. 191: I. Allegro
수용소를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소리의 깊이가 이 녹음 안에 있습니다. 1악장에서 첼로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을 집중해서 들어보시길.
③ 사비네 마이어 —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Sabine Meyer, Mozart Clarinet Concerto in A major Kv 622
역설적이게도 마이어는 카라얀 사건 이후 카라얀의 후임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과 이 곡을 녹음했습니다. 카라얀이 기용하려 했던 바로 그 오케스트라와, 카라얀이 아닌 지휘자로. 따뜻하고 유연하며 표현력이 풍부한 마이어의 클라리넷 소리를 들으면, 카라얀이 왜 이 소리를 베를린 필에 넣고 싶었는지가 들릴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카라얀과 오자와 세이지의 이야기, 그리고 카라얀의 그늘에서 자라난 지휘자들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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