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스, 목소리로 산 여자 : 네 번째 이야기
세상에는 두 종류의 만남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만남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만남. 1947년 베로나에서의 그 저녁, 마리아는 두 번째 종류의 만남을 가졌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필요였는지는 지금도 대답하기 어렵다.
1947년, 베로나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베로나.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로 선택한 그 도시. 고대 로마 시대에 건설된 원형경기장 아레나 디 베로나(Arena di Verona)가 있는 곳. 매년 여름 그 거대한 원형경기장에서 오페라 축제가 열리는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1947년 여름, 스물세 살의 마리아는 이 도시에 도착했다.
악보 가방 하나, 그리고 빈 주머니.
전쟁이 끝난 직후의 유럽은 혼란스러웠다. 뉴욕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게 거절당하고, 아버지 게오르기오스와 짧은 재회를 마친 마리아는 이탈리아로 왔다. 이달고 선생님이 가르쳐준 음악이 살아있는 땅으로. 벨칸토가 태어난 곳으로.
그러나 이탈리아에도 마리아를 기다리는 자리는 없었다.
마리아에게는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연줄이 없었다. 라 스칼라도, 로마 오페라도 마리아를 알지 못했다. 아테네 왕립 오페라에서의 경험은 있었지만, 그것이 이탈리아 음악계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베로나 아레나 오페라 축제의 오디션을 받기로 했다. 이달고의 소개로 얻은 기회였다. 그 오디션이 통과되면 베로나 아레나의 무대에 설 수 있었다. 2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야외 원형경기장.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그 베로나에서, 마리아는 한 남자를 만났다.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Giovanni Battista Meneghini).
1896년 베로나 근처의 작은 도시 포르토 레그나고(Porto Legnago) 출신. 당시 쉰한 살. 벽돌과 건축 자재 사업으로 상당한 재력을 쌓은 사업가였다.
그러나 메네기니를 단순한 사업가로 부르는 것은 그의 중요한 면을 놓치는 것이다. 메네기니는 오페라 열광적인 팬이었다. 베로나 아레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축제를 매년 빠지지 않았고, 오페라 관련 자선 행사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메네기니가 1947년 베로나 아레나 오디션 행사장에 있었다.
마리아가 노래하는 것을 들었을 때, 메네기니는 멈췄다.
무슨 곡이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 노래가 끝난 뒤 메네기니가 보인 반응은 일치한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저 소프라노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마리아 칼라스. 그리스계 미국인. 아테네에서 활동했다.
메네기니는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첫 만남의 저녁
오디션이 끝난 저녁, 베로나의 한 레스토랑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다.
오디션 관계자들과 참가자들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마리아도 그 자리에 있었고, 메네기니도 있었다.
메네기니는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처음 나눈 대화에 대해 메네기니는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이미 그 소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직접 이야기해보니, 그녀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스물세 살이었지만 이미 노련한 예술가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리아의 첫인상도 기록되어 있다. 메네기니에 대해 마리아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오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에 대해 가장 먼저 한 말이 내 목소리에 대한 것이었다. 외모가 아니라 목소리.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날 저녁이 길어졌다. 두 사람은 오페라에 대해, 음악에 대해, 이탈리아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리아의 이탈리아어는 완벽하지 않았다. 메네기니의 영어는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음악을 공통 언어로 가지고 있었다.

스물여덟 살의 차이
메네기니는 마리아보다 스물여덟 살 위였다.
마리아는 스물세 살이었고, 메네기니는 쉰한 살이었다.
그 나이 차이는 주변에서 화제가 되었다. 메네기니의 지인들은 의아해했다. 베로나의 부유한 사업가가 가난한 외국 출신 소프라노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마리아의 주변에서도 이 관계를 의심스럽게 보는 시선이 있었다. 마리아가 메네기니의 재력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시선을 알았다.
메네기니는 개의치 않았다. 마리아의 목소리가 진짜라는 것, 마리아가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 만난 날부터 믿었다. 그 믿음이 나이 차이보다 강했다.
마리아는 더 복잡했다.
메네기니에게 무엇을 느꼈는지를 마리아는 나중에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그 이야기들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다. 어떤 인터뷰에서는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했고, 다른 자리에서는 그것이 안정과 신뢰에 대한 필요였다고 했다.
아마도 두 가지가 모두 사실이었을 것이다.
마리아에게 메네기니는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마리아의 목소리를 사랑했지, 마리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마리아를 사랑했지만 멀리 있었다. 메네기니는 마리아의 목소리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마리아 자신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스물세 살의 마리아에게 강하게 다가왔다.
메네기니의 투자
메네기니와 마리아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메네기니는 행동으로 자신의 신뢰를 표현했다.
마리아의 커리어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마리아는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좋은 레슨, 좋은 의상, 인맥 형성. 그 모든 것에 돈이 들었다. 뉴욕에서 온 무명의 소프라노에게 그 돈이 없었다.
메네기니는 그것을 해결해주었다.
마리아가 베로나 아레나 오디션을 통과한 것, 그리고 1947년 베로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La Gioconda)」로 이탈리아 데뷔를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메네기니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메네기니가 한 것은 단순한 재정 지원이 아니었다. 그는 마리아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 공연 계약을 협상하고, 오페라단과 교섭하고, 언론을 상대하고, 이탈리아 음악계의 인맥을 통해 마리아에게 기회를 열어주었다. 마리아의 이름이 이탈리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메네기니의 네트워크 덕분이기도 했다.
메네기니는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는 것처럼, 마리아에게 투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단순한 사업이 아니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위대하다고 믿는 예술가에게 모든 것을 거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그 투자의 의미를 이해했다.
"메네기니가 없었다면 내가 이탈리아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는 나를 믿었다. 세상이 나를 알기 전에."
베로나 아레나에서의 데뷔
1947년 8월, 마리아는 베로나 아레나에서 데뷔했다.
폰키엘리(Ponchielli)의 「라 조콘다(La Gioconda)」.
2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야외 원형경기장. 로마 시대에 검투사들이 싸웠던 그 공간이 여름밤 오페라 무대가 되었다. 조명이 켜지고, 오케스트라가 자리를 잡고, 관객들이 채워졌다.
마리아는 무대 뒤에서 기다렸다.
그 공간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아테네의 오페라 극장과는 달랐다. 여기서 목소리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2만 명에게 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막이 열리고, 마리아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노래했다.
나중에 그 공연을 본 사람들의 회고가 여럿 남아 있다. 베로나 아레나의 거대한 공간을 마리아의 목소리가 채웠다는 것. 특별한 것은 그 목소리가 크기로 공간을 채운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소리의 질로, 소리의 밀도로 공간이 채워졌다. 야외의 거대한 공간에서 피아니시모가 들렸다. 그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의 조용한 소리가 관객에게 닿았다.
공연이 끝난 뒤 반응이 있었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주목할 만한 데뷔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메네기니는 객석에서 그 공연을 지켜봤다.

툴리오 세라핀 : 세 번째 운명적 만남
베로나 아레나 데뷔가 마리아에게 준 또 다른 선물이 있었다.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과의 만남이었다.
세라핀은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베로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를 지휘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토스카니니의 뒤를 이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이끌었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위대한 전통을 몸소 살고 있는 지휘자. 그의 귀는 반세기에 걸쳐 훈련된 것이었다.
세라핀은 마리아의 노래를 들었다.
리허설에서, 그리고 실제 공연에서. 세라핀은 마리아의 목소리 안에 있는 것을 들었다. 기술적 미완성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 이달고가 처음 들었던 것을, 세라핀도 들었다.
세라핀은 마리아에게 말했다.
"당신의 목소리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 그것의 절반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말이 마리아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이달고에게 배운 것들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인정이면서, 동시에 더 갈 수 있다는 격려였다.
세라핀은 이후 마리아의 음악적 여정에서 중요한 동반자가 되었다. 그는 마리아를 이끌어 19세기 벨칸토 오페라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게 했다. 잊혀진 오페라들, 공연되지 않던 작품들을 마리아에게 소개했다. 그 과정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어떤 레퍼토리에서 가장 빛나는지를 발견했다.
이달고가 씨앗을 심었다면, 세라핀은 그 씨앗에 물을 주었다.
에반겔리아의 등장
마리아가 이탈리아에서 메네기니를 만나고 커리어를 시작하는 그 시간 동안, 에반겔리아는 어디 있었는가.
에반겔리아는 아테네에 있었다. 마리아가 뉴욕으로 갔다가 이탈리아로 온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잠시 분리되었다.
그러나 에반겔리아는 마리아의 성공 소식을 들었다. 베로나 아레나 데뷔. 그리고 부유한 이탈리아 사업가와의 관계.
에반겔리아는 이탈리아로 왔다.
마리아와 에반겔리아의 재회는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찼다. 어머니와 딸의 재회였지만, 동시에 마리아를 다시 통제하려는 어머니와 이제는 자신의 길을 가는 딸의 만남이었다.
에반겔리아는 메네기니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스물여덟 살의 나이 차이, 사업가라는 직업. 에반겔리아가 딸에게 원한 것은 더 젊고 더 화려한 배우자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에반겔리아는 단순히 마리아가 자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지도.
두 사람의 갈등은 메네기니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다시 한 번 불거졌다.
마리아는 이번에는 어머니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아테네에서 어머니를 따라 그리스로 간 열세 살 소녀는 이제 없었다. 스물셋의 마리아는 자신이 선택하는 사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 결정이 에반겔리아와의 관계에 또 하나의 균열을 만들었다.
결혼식, 1949년 4월 21일
메네기니와 마리아가 처음 만난 것은 1947년이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49년 4월 21일, 두 사람은 결혼했다.
베로나 근처의 작은 교회에서 조용한 결혼식이 있었다. 성대한 결혼식이 아니었다. 메네기니의 형제들과 몇몇 가까운 지인들이 함께했다.
마리아는 스물다섯. 메네기니는 쉰셋.
결혼 후 마리아는 공식적으로 마리아 메네기니 칼라스(Maria Meneghini Callas)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의 성을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 관습을 따른 것이었다. 그것이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방식이었다.
마리아 메네기니 칼라스. 그 이름으로 마리아는 이후 10년간 세계를 정복했다.

후원자인가, 사랑인가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질문은 칼라스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다룬 것이다.
메네기니를 단순한 후원자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 시각에서 마리아는 커리어를 위해 필요한 재정과 인맥을 가진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감정보다 계산이 앞선 결합이라는 것.
반대로 메네기니를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마리아가 평생 찾아온 것,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주는 사람. 메네기니가 그것을 처음으로 해준 사람이었다는 것.
아마도 진실은 그 두 가지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메네기니와의 결혼이 마리아에게 준 것은 분명했다. 재정적 안정, 이탈리아 음악계에서의 발판, 그리고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의 존재. 그 세 가지가 마리아로 하여금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메네기니는 후에 자신들의 결혼에 대한 회고록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마리아에 대한 깊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마리아가 음악을 자신보다 더 사랑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마리아에게 나는 두 번째였다. 음악이 항상 첫 번째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그것이 메네기니가 마리아를 사랑한 방식이었다. 두 번째 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곁에 있는 것.
결혼이 가져온 것
결혼 이후 마리아의 커리어는 빠르게 상승했다.
1950년, 마리아는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공연했다. 그리고 그 성공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런던, 빈, 파리. 마리아의 이름이 세계 오페라계의 지도 위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메네기니가 있었다. 그는 마리아의 커리어 관리자이면서 남편이었다. 계약 협상을 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언론을 상대하고, 마리아가 노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나머지 모든 것을 처리했다.
마리아는 그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때로 답답하기도 했다.
메네기니는 마리아를 보호하려 했다. 모든 결정에 자신이 관여하려 했다. 마리아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직접 결정하려 할 때, 메네기니는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 긴장은 처음에는 미미했다. 결혼 초기에는 메네기니의 판단이 옳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마리아가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로 성장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판단이 남편의 사업적 판단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긴장이 훗날 더 큰 것과 만났을 때, 결혼은 끝을 향해 갔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다.
1950년의 마리아는 메네기니와 함께 베네치아 리도 해변을 걸었다. 사진이 남아 있다. 둥근 체형의 마리아와 나이 든 메네기니가 나란히 서있는 그 사진. 두 사람 모두 웃고 있다.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카메라를 의식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리아가 메네기니에게 배운 것
메네기니와의 결혼에서 마리아가 얻은 것은 재정과 커리어 지원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메네기니에게서 이탈리아를 배웠다.
언어만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음악을 어떻게 듣는지, 오페라가 이탈리아 문화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탈리아 청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메네기니는 평생 이탈리아 오페라 팬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 경험에서 나오는 감각이 있었다.
마리아는 그것을 흡수했다.
또한 마리아는 메네기니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메네기니는 마리아가 받아야 할 것보다 적은 계약료로 공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 최고의 소프라노는 그에 걸맞은 조건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 그 믿음을 메네기니가 마리아에게 심어주었다.
그것이 나중에 마리아가 까다로운 예술가라는 평판을 얻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불합리한 조건을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 그것은 메네기니에게 배운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마리아의 생각
칼라스는 메네기니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오나시스와의 관계가 시작되면서 메네기니와의 결혼이 끝난 뒤, 마리아는 메네기니에 대한 여러 인터뷰를 했다. 그 말들이 모순적이었다.
어떤 날은 메네기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했다. 다른 날은 그것이 사랑보다 의존이었다고 했다. 또 다른 자리에서는 메네기니가 자신을 관리했지 사랑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모순들 안에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의 관계 안에 여러 감정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사랑이면서 의존이고, 감사이면서 속박이고, 안정이면서 제한인 것.
메네기니와의 결혼이 그런 것이었다.
완전한 사랑도 아니었고, 순수한 계산도 아니었다. 두 가지가 뒤섞인 것. 그것이 인간의 관계가 대개 그런 것처럼.
마리아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몰랐다. 메네기니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안전했다.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다. 안전함과 사랑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그 나중에 안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다음 이야기들에서 드러날 것이다.
오늘 감상곡
폰키엘리 「라 조콘다(La Gioconda)」 중 '자살(Suicidio!)' — 마리아 칼라스, 라 스칼라 (1952년 녹음)
마리아가 1947년 베로나 아레나에서 데뷔한 바로 그 오페라. 「라 조콘다」의 마지막 아리아 '자살'은 거리의 가수 조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다.
그 결심의 무게가 목소리 안에 있다. 체념이면서 동시에 의지인 것. 슬프면서 동시에 숭고한 것. 칼라스의 목소리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한다.
1947년 베로나에서 이 아리아를 처음 불렀을 때의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들어보시길. 메네기니가 객석에서 그 노래를 들으며 무언가를 결심하던 그 저녁을.
📌 다음 편 예고
제5편 | 라 스칼라를 정복하다 : 전설의 탄생
밀라노 라 스칼라. 그 이름 앞에서 세계의 모든 오페라 가수들이 멈춘다. 1950년, 마리아는 그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 그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가 노래를 시작하자, 무대가 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칼라스가 세계 오페라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간 그 순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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