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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적 권력의 원천

「권력의 지도」 45화, 1차 세계대전 : 산업화된 살육의 정치경제학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27.

1916년 7월 1일 새벽 7시 30분, 영국군이 참호에서 일어섰습니다.

솜 강(Somme) 유역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무인지대가 있었습니다. 철조망. 진흙. 그리고 맞은편 독일 참호.

전날 밤부터 7일간 영국 포병이 독일 진지를 포격했습니다. 160만 발의 포탄이었습니다. 지휘관들이 확신했습니다. 독일군이 이미 壊滅되었을 것이라고. 병사들이 걸어서 진격하면 된다고.

병사들이 걸어갔습니다.

독일군이 참호 속 깊은 대피호에서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기관총이 불을 뿜었습니다.

그날 하루, 영국군 사망자 19,240명. 부상자 38,230명. 합계 57,470명.

단 하루였습니다.

역사상 어느 군대도 하루에 이만한 손실을 입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솜 전투가 1916년 11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4개월 반이었습니다. 양측 합계 사상자가 약 100만 명이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전선이 얼마나 이동했을까요.

약 12킬로미터였습니다.

12킬로미터를 위해 100만 명이 죽고 다쳤습니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산업 문명이 만들어낸 가장 효율적인 살육 기계가 작동한 전쟁이었습니다. 철강, 화학, 전기, 내연기관 — 산업 혁명의 모든 성과가 인간을 죽이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1차 세계대전을 산업 자본주의가 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으로 봅니다. 단순히 더 큰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이 경제 권력, 이념 권력, 군사 권력, 정치 권력을 모두 재편했습니다. 낡은 세계를 끝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1장. 산업 전쟁의 탄생 : 기계가 인간을 대량으로 죽이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전쟁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대들이 줄지어 서서 서로를 향해 발사했습니다. 머스킷 소총이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기병이 돌격했습니다. 백병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약 70,000명이 싸웠고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하루 전투였습니다.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1916년 솜 전투와는 규모 자체가 달랐습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기관총이었습니다. 맥심 기관총이 분당 600발을 발사했습니다. 한 명이 수백 명이 하는 일을 했습니다. 돌격하는 보병대가 기관총 앞에서 쓸려나갔습니다.

포병이었습니다. 산업화가 포탄 생산을 대량화했습니다. 더 큰 포. 더 정확한 포. 더 많은 포탄. 1차 세계대전에서 발사된 포탄이 약 14억 발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 넘었지만 벨기에와 프랑스의 밭에서 아직도 불발탄이 발견됩니다.

철조망이었습니다. 산업 생산된 철조망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전선을 뒤덮었습니다. 공격군이 철조망 앞에서 멈추면 기관총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화학 무기였습니다. 1915년 독일이 처음으로 염소 가스를 사용했습니다. 나중에 더 치명적인 포스겐, 머스터드 가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산업 화학이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통신과 철도였습니다. 전신이 수백 킬로미터 전선을 통합했습니다. 철도가 수백만 명의 병사와 물자를 전선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기술들이 방어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구조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기관총, 철조망, 참호가 방어를 거의 완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공격 전술이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 불일치가 수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군사 지도자들이 이 현실을 이해했을까요.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대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더 많은 포탄, 더 많은 병사, 더 많은 공격뿐이었습니다.

2장. 총력전의 경제학 : 국가가 경제를 장악하다


1914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경고했습니다. 전쟁이 경제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영국이 기껏해야 몇 달 버틸 자원을 가졌다고.

그가 틀렸습니다.

전쟁이 4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국가가 경제를 장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경제로의 전환이었습니다.

독일이 먼저였습니다. 1914년 8월 발터 라테나우가 독일 정부에 제안했습니다. 원자재를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 전쟁 물자 생산을 중앙에서 계획해야 한다. 독일 전쟁 원자재국(KRA, Kriegsrohstoffabteilung)이 설립되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현대 국가가 경제를 전면적으로 계획하고 통제한 사례였습니다. 나중에 소련 계획 경제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독일이 전쟁에서 경제 계획의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영국도 뒤따랐습니다. 군수성이 설립되었습니다. 로이드 조지가 장관이 되었습니다. 민간 공장들이 포탄, 소총, 폭발물 생산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국가가 생산 목표를 정하고 원자재를 배분했습니다. 자유 시장이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여성 노동의 폭발이었습니다.

남성들이 전선으로 갔습니다. 공장이 돌아가야 했습니다. 여성들이 공장에 들어왔습니다. 영국에서 전쟁 기간 약 80만 명의 여성이 군수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포탄을 만들었습니다. 총을 만들었습니다. 비행기를 조립했습니다.

**머니션 걸즈(munitions girls)**가 당시 표현이었습니다. TNT에 노출된 여성들의 피부가 노랗게 변해 **카나리아 걸즈(canary girls)**라고도 불렸습니다. 독성 물질에 노출되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했습니다.

전쟁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바꾸었습니다. 여성이 공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이 여성 참정권 운동에 중요한 논거가 되었습니다. 전쟁 후 영국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얻었습니다. 군수 공장 기여가 논거 중 하나였습니다.

국가 부채의 폭발이었습니다.

전쟁 비용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영국이 하루에 500만 파운드를 지출했습니다. 각국 정부가 채권을 발행했습니다. 세금을 올렸습니다. 화폐를 찍었습니다. 전쟁 채권 캠페인이 시민들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영국의 국가 부채가 전쟁 전 6억 5000만 파운드에서 전쟁 후 76억 파운드로 11배 증가했습니다.

이 채무가 전후 경제를 짓눌렀습니다. 1920년대의 경제 어려움, 대공황으로의 취약성 — 이것들이 전쟁 부채와 연결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전쟁 경제를 경제 권력이 전시 국가에 의해 전면적으로 통제되는 새로운 경험으로 봅니다. 이 경험이 두 가지 유산을 남겼습니다. 첫째, 국가가 경제를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이 소련의 계획 경제, 케인스주의, 복지 국가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둘째, 총력전이 산업 동원 능력의 전쟁임이 드러났습니다. 가장 많이 생산하는 쪽이 이깁니다.


3장. 참호 속의 인간 : 전쟁이 개인에게 한 것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1차 세계대전 사망자가 약 1700만 명이었습니다. 부상자가 약 2100만 명이었습니다. 숫자가 압도적입니다. 그러나 숫자 뒤에 개별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참호가 어떠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진흙이었습니다. 항상. 비가 오면 참호가 진흙 구덩이가 되었습니다. 차가운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습니다. **참호 족(trench foot)**이라는 병이 생겼습니다. 발이 썩었습니다.

이가 들끓었습니다. 쥐가 들끓었습니다. 죽은 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때로 시신을 치울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그 옆에서 먹고 자고 싸웠습니다.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포탄 소리. 기관총 소리. 부상자의 신음 소리. 무인지대에서 죽어가는 동료의 소리. 닿을 수 없는 곳에서.

공격 명령이 내려올 때 어떠했을까요. 병사들이 알았습니다. 올라가면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그러나 올라갔습니다. 명령이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함께 가기 때문에. 비겁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포탄 충격(shell shock)이었습니다. 현대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였습니다. 지속적인 포격, 목격한 공포, 죽음의 공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신을 무너뜨렸습니다. 병사들이 떨었습니다. 말을 잃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당시 군 의학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비겁함으로 처리했습니다. 일부가 총살되었습니다.

전선의 문학이 이것을 기록했습니다.

월프레드 오웬이 참호 속에서 시를 썼습니다. 1918년 11월 4일, 종전 일주일 전에 전사했습니다. 그의 시 「둘세 에트 데코룸 에스트(Dulce et Decorum Est)」가 전쟁의 영광이라는 거짓말을 찢었습니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가 **『서부 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를 썼습니다. 젊은 독일 병사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전쟁이 그들의 청춘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지그프리트 사순이 훈장을 강물에 던지고 반전 선언을 했습니다.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옳았습니다.

마이클 만은 1차 세계대전에서 군사 권력이 이념 권력의 도움 없이 병사들을 계속 동원하는 문제를 봅니다. 처음의 민족주의적 열광이 참호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 이후에 병사들을 계속 싸우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강제. 동료 압박. 그리고 대안의 부재. 민족주의가 아니라 구조가 그들을 참호 안에 붙잡았습니다.

 

4장. 주요 전투들 : 전쟁의 전환점들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들이 어떻게 전쟁의 성격을 바꾸었는지를 살펴봅니다.

베르됭 전투(1916년 2월~12월)였습니다.

독일 참모총장 팔켄하인이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를 피 흘려 죽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베르됭이 프랑스의 심장이었습니다. 프랑스가 베르됭을 지키기 위해 모든 병력을 투입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프랑스 군대가 소모될 것이었습니다.

팔켄하인이 말했습니다. "마지막 한 명까지 피를 흘리게 하겠다."

10개월 전투에서 양측 합계 70~100만 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전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베르됭이 프랑스 국민 의식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베르됭이라는 단어 자체가 집단적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솜 전투(1916년 7월~11월)였습니다.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첫날 57,470명의 영국군 사상자. 4개월 반의 전투. 양측 100만 명 사상자. 12킬로미터의 전진.

영국 원수 헤이그가 나중에 이 전투를 정당화했습니다. 독일군을 소모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도 소모되었습니다. 상호 소모전이었습니다.

파스샹달 전투(1917년 7~11월)였습니다.

벨기에 플랑드르였습니다. 특별히 비가 많이 왔습니다. 땅이 진흙 늪이 되었습니다. 포탄이 배수 체계를 파괴했습니다. 병사들이 진흙에 빠져 익사했습니다. 전진이 거의 없었습니다. 양측 합계 약 50만 명 사상자.

이 전투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것이 있었습니다. 공격이 엄청난 손실을 내지만 전선을 의미 있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지휘관들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계속했습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적을 소모시켜야 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1917년의 반란이었습니다.

솜과 베르됭 이후 프랑스 군대 일부에서 집단 불복종이 일어났습니다. 명령 이행을 거부했습니다. 전진을 거부했습니다. 방어는 하겠지만 무의미한 공격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50개 사단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 군 지도부가 공황 상태였습니다. 비밀에 부쳤습니다. 독일이 알면 총공세를 펼칠 것이었습니다.

주동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다시 싸우러 갔습니다. 단지 쓸모없는 자살 돌격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전투들에서 군사 권력과 이념 권력의 분리가 더욱 명확해진다고 봅니다. 병사들이 처음에는 민족주의 이념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나 2년간의 참호 경험 후 이념이 소멸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군사적 강제와 동료에 대한 의무감만이 남았습니다. 이념 없는 군사 권력이 극한까지 작동했습니다.


5장. 새로운 전쟁 기술 : 전차, 독가스, 비행기


전쟁이 새로운 기술들을 촉진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기술들이 전쟁의 성격을 바꾸었습니다.

독가스였습니다.

1915년 4월 22일 이프르 근처에서 독일군이 염소 가스를 처음 대규모로 사용했습니다. 황록색 구름이 바람을 타고 프랑스·캐나다 진지로 흘러갔습니다. 병사들이 질식했습니다.

연합군이 방독면으로 대응했습니다. 독일이 더 치명적인 가스를 개발했습니다. 포스겐, 머스터드 가스. 연합군도 가스를 사용했습니다. 가스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약 91,000명이 가스로 사망했습니다. 100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습니다. 심각한 폐 손상을 남겼습니다.

독가스가 결정적 무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바람이 바뀌면 자기편에게도 피해를 줬습니다. 방독면이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공포의 무기로서 엄청난 심리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차였습니다.

1916년 솜 전투에서 영국이 처음으로 전차를 사용했습니다. 마크 I 전차였습니다. 느렸습니다. 자주 고장났습니다. 지형에 따라 움직임이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개념이 혁명적이었습니다. 기관총이 막지 못하는 이동 요새. 철조망을 짓밟는 기계. 1917년 캄브레 전투에서 400대의 전차가 집중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보병이 따라가지 못했고 독일이 반격했습니다.

전차가 1차 세계대전에서 결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전격전을 예고했습니다.

항공이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최초 비행에 성공한 것이 1903년이었습니다. 11년 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군용기가 이미 개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찰이었습니다. 적 진지를 하늘에서 관찰했습니다. 그 다음 폭격으로 발전했습니다. 독일 체펠린 비행선이 런던을 폭격했습니다. 최초의 전략 폭격이었습니다.

전투기가 등장했습니다. 제공권을 다투었습니다. 에이스 파일럿들이 영웅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붉은 남작). 80회 공중전 승리. 그가 격추되었을 때 연합군이 경의를 표하며 장례식을 치러주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새로운 전쟁 기술들이 산업 자본주의가 전쟁의 수단을 무한히 확장한다는 것의 증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술들이 새로운 딜레마를 만들었습니다. 더 파괴적인 무기를 만들수록 전쟁이 더 길어졌습니다. 결정적 승리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소모전이 계속되었습니다.


6장. 제국과 식민지 : 세계 전쟁의 지구적 차원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세계 전쟁이 되었습니다.

영국이 참전하면서 대영 제국 전체가 참전했습니다.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이집트가 병사를 보냈습니다.

인도군 약 150만 명이 참전했습니다. 서부 전선에, 메소포타미아에, 동아프리카에. 74,000명이 전사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안작(ANZAC)**이 갈리폴리에서 싸웠습니다.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작전이었습니다.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8개월 전투에서 연합군 46만 명 사상자. 그러나 갈리폴리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민족 정체성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안작 데이가 매년 기념됩니다.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이었습니다.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동아프리카에서 독일 장교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가 약 14,000명의 독일-아프리카 혼성 부대로 약 30만 명의 연합군을 4년간 묶어두었습니다.

연합군이 아프리카 병사들을 대규모로 동원했습니다. 약 6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직접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약 200만 명이 군 지원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사망자가 수십만 명이었습니다. 많은 수가 전투가 아닌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였습니다.

오스만이 독일 편에서 참전했습니다. 이것이 중동을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T. E. 로렌스)가 아랍 봉기를 지원했습니다. 아랍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오스만을 무너뜨리는 전략이었습니다.

영국이 아랍 독립을 약속했습니다. 동시에 프랑스와 비밀리에 중동을 분할하는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년)**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밸푸어 선언(1917년)**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수립을 지지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모순이었습니다. 아랍 독립 약속, 영불 분할 합의, 유대인 국가 지지. 이 모순이 오늘날 중동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식민지의 전쟁 참여를 식민지 인민들이 자신들의 동의 없이 유럽 강대국들의 전쟁에 동원된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탈식민화 운동에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식민지 인민들이 제국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전쟁 후 자치를 요구했습니다. 영국이 거부했습니다. 암리차르 학살이 뒤따랐습니다. 이것이 인도 민족주의를 급진화시켰습니다.


7장. 혁명의 물결 : 전쟁이 만든 정치 폭발


1917년이 전쟁의 전환점이었습니다.

두 가지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 혁명과 미국 참전.

러시아 혁명이었습니다.

러시아가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약 170만 명의 러시아 병사가 전사했습니다. 500만 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경제가 붕괴했습니다.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차르 정권의 무능이 드러났습니다.

1917년 2월, 2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페트로그라드 빵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군대가 가담했습니다.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습니다. 로마노프 왕조가 끝났습니다.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치명적 실수였습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레닌이 독일 봉인 열차를 타고 스위스 망명지에서 귀국했습니다. 독일이 의도적으로 레닌을 러시아로 보냈습니다. 러시아 내부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레닌이 말했습니다. "독일이 나를 러시아에 보내는 것은 유독한 세균을 넣은 밀봉 용기를 여는 것과 같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즉각 평화를 선언했습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1918년 3월)**에서 러시아가 굴욕적 조건으로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었습니다.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우크라이나를 잃었습니다. 러시아 영토의 34퍼센트, 인구의 32퍼센트, 산업의 54퍼센트.

레닌이 이 조약을 받아들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쁜 평화도 전쟁보다 낫다." 혁명을 살려야 했습니다.

미국 참전이었습니다.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했습니다. 44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참전이 전쟁의 균형을 바꾸었습니다. 러시아의 이탈로 독일이 동부 전선 병력을 서부로 이동시켰습니다. 1918년 봄 독일이 마지막 대공세를 펼쳤습니다. 처음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병력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11시, 휴전 협정이 발효되었습니다.

총성이 멈추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1917년의 혁명들을 전쟁이 이념 권력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으로 봅니다. 러시아 혁명이 새로운 이념 (공산주의)을 세계 정치의 전면에 세웠습니다. 이것이 20세기 이념 전쟁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이 구조가 이후 수십 년을 지배했습니다.


8장. 전쟁의 이념 : 왜 사람들은 계속 싸웠나


처음의 민족주의적 열광이 참호에서 소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후 3년간 무엇이 병사들을 싸우게 했을까요.

이것이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이 전쟁의 이념적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강제였습니다. 탈영하면 처형이었습니다. 전선을 이탈하면 총살이었습니다. 영국에서 306명이 비겁함과 탈영으로 총살되었습니다. 나중에 명예 회복되었습니다. 독일에서 48명. 프랑스에서 600명 이상.

동료에 대한 의무였습니다.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옆에 있는 동료를 위해 싸웠습니다. 소규모 집단 연대(primary group cohesion)가 전투 동기의 핵심이었습니다. 사회학자 E. A. 쉴스와 모리스 야노위츠가 2차 세계대전 독일군을 연구하며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민족주의의 지속이었습니다. 초기 열광이 사라졌지만 더 깊은 형태의 민족 정체성이 남았습니다. 독일이 이기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두려움. 자국의 이름으로 죽을 각오. 이것이 합리적 계산이 아니라 정체성의 차원에서 작동했습니다.

선전이었습니다. 각국 정부가 이념 전쟁을 치렀습니다. 독일이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들이 영국에서 생산되었습니다. 일부는 과장되었습니다. 일부는 사실이었습니다. 적을 악마화하는 것이 싸움의 명분을 만들었습니다.

영국 시인 루퍼트 브룩이 썼습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나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해준 것에 대해." 낭만적 전쟁 숭배였습니다. 그는 전선에 도달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반면 윌프레드 오웬이 썼습니다.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달콤하고 아름답다는 오래된 거짓말." 전쟁의 현실에서 나온 이념의 해체였습니다.

마이클 만은 1차 세계대전의 이념적 차원이 전쟁을 통해 민족주의가 한편으로 강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해체되는 이중 과정이었다고 봅니다. 전쟁이 민족 정체성을 강화했습니다.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이 낭만적 민족주의의 이념을 파괴했습니다. 이 이중 과정이 전후 세계에 모순된 유산을 남겼습니다.


9장. 전쟁의 끝 : 승리, 패배, 그리고 그 의미

 


1918년 11월 11일 아침 11시.

독일 대표단이 프랑스 콩피에뉴 숲의 열차 안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그 순간까지도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협정이 서명된 11시 직전까지. 마지막 미국 병사가 오전 10시 59분에 전사했습니다.

11시에 총성이 멈추었습니다.

서부 전선의 군인들이 잠시 당황한 듯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4년간 들어본 적 없는 침묵이었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복잡했습니다.

승자들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영국, 미국, 이탈리아. 그러나 이들도 엄청난 희생을 치렀습니다. 프랑스 남성 인구의 상당 부분이 죽었습니다. 영국 청년 세대가 참호에서 소멸했습니다.

패자들이 있었습니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불가리아. 제국들이 무너졌습니다. 로마노프, 합스부르크, 호엔촐레른, 오스만 왕조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베르사유 조약(1919년)이 전후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독일이 전쟁 책임 조항(War Guilt Clause)에 서명해야 했습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배상금이 부과되었습니다.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했습니다. 식민지를 잃었습니다. 군대 규모가 제한되었습니다.

이 조약이 얼마나 가혹했는가에 대해 논쟁이 있습니다. 경제학자 케인스가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비판했습니다. 이 조약이 독일 경제를 파괴하고 유럽 전체 경제에도 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관대한 평화가 지속 가능한 질서를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케인스가 옳았습니다. 베르사유가 독일의 굴욕을 만들었습니다. 이 굴욕이 나치즘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스페인 독감이었습니다.

전쟁 끝 무렵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를 덮쳤습니다. 1918~1919년 약 500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전쟁 사망자보다 더 많았습니다. 전쟁이 만든 영양 부족, 면역 약화, 인구 이동이 전염병 확산을 도왔습니다.

마이클 만은 전쟁의 결과를 모든 참전국이 잃은 전쟁으로 봅니다. 승자들도 인구, 자원, 경제 체력을 소진했습니다. 유럽 전체가 소진되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강대국들이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진정한 유산은 또 다른 전쟁이었습니다. 베르사유의 굴욕, 대공황의 충격, 새로운 이념들의 부상 — 이것들이 결합하여 20년 후 더 끔찍한 전쟁을 만들었습니다.


10장. 마이클 만의 분석 : 산업 전쟁이 권력 구조를 어떻게 바꾸었나

 


마이클 만은 1차 세계대전이 IEMP의 네 차원 모두를 근본적으로 재편했다고 봅니다.

이념 권력의 재편이었습니다. 전쟁이 민족주의의 낭만적 형태를 파괴했습니다. 동시에 민족 자결이라는 원칙을 국제 정치의 표준으로 만들었습니다. 윌슨의 14개 조항이 이것을 공식화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 유럽에만 적용되고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위선이 드러났습니다. 동시에 볼셰비즘이라는 새로운 이념이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이후 이념 전쟁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경제 권력의 재편이었습니다. 전쟁이 국가 주도 경제 관리를 가능하고 필요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전쟁 경제의 경험이 케인스주의와 복지 국가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전쟁 채무가 세계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대공황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경제 권력이 미국으로 이동했습니다.

군사 권력의 재편이었습니다. 전쟁이 대규모 징병제 군대와 산업 무기 체계의 결합이 현대 전쟁의 기본임을 확립했습니다. 전차, 항공기, 화학무기의 등장이 미래 전쟁의 방향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전쟁이 유럽 강대국들의 군사력을 소진시켰습니다.

정치 권력의 재편이었습니다. 4개 제국이 무너졌습니다. 로마노프, 합스부르크, 호엔촐레른, 오스만. 그 공간에서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했습니다. 민족주의 원칙에 따라 경계가 그어졌습니다. 그러나 경계가 민족 분포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이 전간기의 갈등과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의 핵심 통찰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산업 자본주의가 전쟁에 적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더 큰 생산 능력이 더 많은 살상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살상 능력이 결정적 군사 승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대신 상호 소모의 악순환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20세기를 형성했습니다. 세계 대전의 공포, 핵무기 개발의 논리, 국제 협력의 필요성 — 이것들이 모두 1914~1918년의 경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11시, 총성이 멈추었습니다.

콩피에뉴 숲에서. 이프르에서. 솜에서. 베르됭에서.

4년간 쉬지 않던 소리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참호 위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무도 쏘지 않았습니다. 무인지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땅이 자신들의 것이었습니다. 잠시 동안.

1700만 명의 죽음이 무엇을 바꾸었을까요.

마이클 만의 답이 비관적이면서도 분석적입니다.

전쟁이 낡은 제국들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가 충분히 좋지 않았습니다. 베르사유가 복수심을 심었습니다. 윌슨의 이상주의가 실패했습니다. 경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20년 후 더 큰 전쟁이 왔습니다.

1700만 명의 죽음이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교훈을 인류가 충분히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가장 슬픈 패턴입니다.


다음 화 예고 46화, 러시아 혁명 : 새로운 이념이 권력을 장악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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