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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적 권력의 원천

「권력의 지도」 43화, 미국의 부상 : 새로운 권력 중심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16.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시카고 만국 박람회)가 열렸습니다.

화이트 시티(White City)라고 불린 전시장이었습니다. 고전 건축 양식의 흰 건물들이 미시간 호수 옆에 펼쳐졌습니다. 전기 조명이 밤을 밝혔습니다. 세계 최초의 대관람차가 돌았습니다. 6개월간 2700만 명이 방문했습니다. 당시 미국 전체 인구의 약 절반이었습니다.

박람회의 주제가 있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 지 400주년 기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시된 것은 미국의 현재와 미래였습니다.

에디슨의 발명품들. 맥코믹의 농업 기계. 풀먼의 철도 차량. 새로운 식품 가공 기술. 새로운 건축 기술. 미국이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박람회를 방문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특사가 보고했습니다. "이 나라가 위험하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깨어나면 세계를 바꿀 것이다."

그 무렵 미국의 GDP가 영국을 추월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아직 세계 정치에서 주변적 존재였습니다. 강력한 해군이 없었습니다. 상비군이 작았습니다. 먼로 독트린(1823년)으로 유럽 문제 불개입을 선언하고 자국 대륙에 집중했습니다.

그 미국이 어떻게 20세기 초반에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을까요.

마이클 만은 미국의 부상을 경제 권력이 먼저 성장하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며 군사 권력, 이념 권력, 정치 권력으로 전환된 과정으로 봅니다. 단순한 제국주의 팽창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종류의 패권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패권이 이전의 어떤 패권과도 달랐습니다.


서부 팽창 : 대륙 제국의 건설

미국이 세계 무대로 나서기 전에 먼저 대륙을 정복했습니다.

1783년 독립 당시 미국이 대서양 연안의 13개 주였습니다. 1853년에는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가 확장되었습니다. 70년 만에 대륙을 가로질렀습니다.

이 팽창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매입이었습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 나폴레옹이 전쟁 자금이 필요하여 중부 아메리카 광대한 영토를 1500만 달러에 팔았습니다. 미국 영토가 두 배로 늘었습니다. 1867년 알래스카 매입. 러시아에서 720만 달러에 샀습니다. 당시 비웃음의 대상이었습니다. 나중에 석유가 나왔습니다.

전쟁이었습니다. 1846~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 텍사스 합병이 발단이었습니다. 전쟁 결과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뉴멕시코가 미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미국 서부의 절반이 이 전쟁으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원주민 학살과 추방이었습니다. 서부 팽창의 가장 어두운 측면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원주민이 살던 땅이 정복되었습니다.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습니다.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눈물의 길(Trail of Tears, 1830년대)에서 체로키 족을 비롯한 원주민들이 강제 이주 과정에서 수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버팔로가 대규모로 학살되어 평원 원주민들의 생존 기반이 파괴되었습니다.

프레더릭 잭슨 터너가 1893년, 바로 그 시카고 박람회에서, 유명한 강연을 했습니다. 프론티어 테제(Frontier Thesis)였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개인주의가 서부 개척의 경험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90년 서부 개척이 완결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프론티어가 없다. 미국이 새로운 프론티어를 찾아야 한다.

마이클 만은 미국의 대륙 팽창을 정착 식민주의의 내부적 형태로 봅니다. 유럽 강대국들이 해외 식민지를 만든 것처럼, 미국이 대륙 안에서 원주민 영토를 정복하고 정착민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이것이 미국 제국주의의 첫 번째 형태였습니다. 나중에 해외로 확장된 것이 그 연속이었습니다.


산업화의 폭발 : 경제 권력의 급성장

남북전쟁(1861~1865년) 이후 미국 산업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숫자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1860년 미국 제조업 생산이 영국의 약 60퍼센트였습니다. 1900년 영국의 약 200퍼센트였습니다. 40년 만에 역전되었습니다.

1870년 미국 철강 생산이 영국의 절반도 안 되었습니다. 1900년 미국이 영국, 독일, 프랑스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철강을 생산했습니다.

왜 이렇게 빠른 성장이 가능했을까요.

풍부한 자원이었습니다. 석탄, 철, 석유, 목재, 농지. 미국 대륙이 산업 원자재의 보고였습니다. 팔 곳 없어 수입해야 했던 유럽과 달리 미국이 자원을 국내에서 풍부하게 가졌습니다.

대규모 내수 시장이었습니다. 철도가 국토를 통합했습니다. 3억 명에 달하지는 않았지만 급성장하는 인구가 소비자 시장을 만들었습니다. 규모의 경제가 가능했습니다.

이민 노동력이었습니다. 유럽,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민자들이 쏟아졌습니다. 1880~1920년 사이 약 2500만 명이 미국으로 이민했습니다. 이들이 공장, 철도, 광산에서 일했습니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이었습니다.

기술 혁신이었습니다. 에디슨의 전기. 벨의 전화. 포드의 자동차. 미국이 2차 산업 혁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전기, 화학, 내연 기관 — 이 새로운 기술들에서 미국이 선두를 달렸습니다.

독점 자본의 형성이었습니다. 존 D.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앤드루 카네기의 철강. J. P. 모건의 금융. 이들이 엄청난 경제 권력을 집중했습니다. 트러스트(trust)라고 불린 독점 대기업들이 산업을 지배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경제 성장이 경제 권력의 독자적 팽창이 군사 권력의 팽창에 선행한 사례로 봅니다. 미국이 경제 강국이 되기 훨씬 전부터 군사 강국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제가 먼저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제력이 20세기에 군사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남북전쟁 : 미국 국가의 재탄생

1861~1865년 남북전쟁이 미국 역사의 분수령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미국이 어떤 종류의 국가인가에 대한 갈등이었습니다.

남부의 주장이었습니다. 각 주의 권리가 연방보다 우선한다. 주가 연방을 이탈할 권리가 있다. 노예제가 헌법적으로 보호되는 재산권이다.

북부의 주장이었습니다. 연방이 불가분하다. 어떤 주도 이탈할 수 없다. 노예제는 공화국의 이념과 양립할 수 없다.

4년간의 전쟁에서 약 62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모든 미국 전쟁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미국인이 이 내전에서 죽었습니다.

북부가 이겼습니다. 세 가지 결과가 따라왔습니다.

노예제가 폐지되었습니다. 수정헌법 13조. 약 400만 명의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

연방 정부가 강화되었습니다. 주의 권리보다 연방의 권위가 우선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습니다. 이것이 강력한 중앙 정부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산업 북부가 농업 남부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후 미국의 경제 방향이 확정되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흑인들의 운명이 비극적이었습니다. 재건 시대(1865~1877년) 이후 남부에서 인종 분리와 폭력이 제도화되었습니다. 짐 크로 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사실상의 재예속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남북전쟁을 이념 권력(노예제 대 자유), 경제 권력(농업 대 산업), 정치 권력(주권 대 연방 주권)의 충돌이 군사 충돌로 폭발한 사례로 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미국을 산업 강국으로, 중앙집권 국가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이것이 이후 미국의 세계적 부상의 국내적 기반이었습니다.


스페인-미국 전쟁 : 해외 팽창의 시작

1898년, 미국이 처음으로 해외 팽창에 나섰습니다.

쿠바에서 스페인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독립 운동이 있었습니다. 미국 언론이 스페인의 잔혹 행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일부는 과장되었습니다. 신문왕 허스트와 퓰리처가 경쟁적으로 독자를 끌어모으려 했습니다.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 전쟁 여론을 만들었습니다.

1898년 2월, 아바나 항구에서 미국 군함 메인 호가 폭발했습니다. 266명이 사망했습니다. 원인이 불명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이 스페인의 소행으로 몰았습니다. "메인 호를 기억하라!" 전쟁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4월,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 포고했습니다.

전쟁이 4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미국이 압도적으로 이겼습니다.

그 결과가 놀라웠습니다. 미국이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미국이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이 결과가 미국 안에서 논쟁을 만들었습니다.

제국주의 찬성론이었습니다. 해군 전략가 알프레드 마한이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강한 해군이 국가 번영의 핵심이다. 해군 기지를 위해 해외 영토가 필요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헨리 캐벗 로지가 이 입장이었습니다.

제국주의 반대론이었습니다. 앤드루 카네기, 마크 트웨인, 전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반대했습니다. 공화국이 식민지를 가질 수 없다. 우리가 독립을 위해 싸웠는데 다른 민족의 독립을 부정할 수 없다.

필리핀이 가장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1200만 달러를 스페인에 지불하고 필리핀을 샀습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미국에 맞서 독립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필리핀-미국 전쟁(1899~1902년)이 이어졌습니다. 공식적으로 3년이지만 실제로 10년 이상 저항이 지속되었습니다. 미군이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민간인 학살, 고문, 강제 수용소. 필리핀인 사망자가 최소 20만 명이었습니다. 민간인 포함 시 더 많았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격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성조기에 대한 새로운 서약을 제안했습니다. 흰색 줄 대신 해골이 있고 별 대신 독두개골이 있는 깃발. 풍자였지만 신랄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스페인-미국 전쟁을 미국의 해외 팽창이 어떤 이념적 긴장을 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봅니다. 공화주의와 제국주의가 충돌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이 긴장을 해결하지 않은 채 제국주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다만 영국식 공식 식민 제국이 아닌 다른 형태로.


먼로 독트린과 카리브해 헤게모니 : 비공식 제국

1823년 먼로 대통령이 유럽에게 선언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의 식민화 대상이 아니다. 유럽이 새로운 식민지를 아메리카에서 만들려 하면 미국이 간주합니다.

이것이 먼로 독트린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허풍에 가까웠습니다. 미국에 그것을 강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1904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이것을 확장했습니다. 루스벨트 추론(Roosevelt Corollary)이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유럽이 개입할 수 있다. 그것을 막으려면 미국이 먼저 개입해야 한다. 미국이 서반구의 경찰이 된다.

이후 수십 년간 미국이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에 반복적으로 군사 개입했습니다.

쿠바(1898년, 1906년, 1912년, 1917년), 파나마(1903년), 니카라과(1912~1933년), 아이티(1915~1934년), 도미니카공화국(1916~1924년), 멕시코(1914년, 1916년).

이것이 비공식 제국(informal empire)의 전형이었습니다. 공식 식민지를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군사 개입, 경제 지배, 정치 통제를 통해 사실상 지배했습니다.

파나마 운하가 상징적이었습니다. 루스벨트가 파나마 독립 운동을 지원하여 콜롬비아에서 파나마를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파나마 운하 지대를 영구 조차했습니다. 운하가 1914년 개통되었습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이 운하가 미국 해군과 무역에 결정적이었습니다.

루스벨트가 나중에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운하를 빼앗았다. 의회가 토론하는 동안."

마이클 만은 미국의 카리브해 헤게모니를 군사 권력이 경제 권력의 이익을 보호하고 정치 권력의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의 전형으로 봅니다. 이것이 영국 제국주의와 달리 공식 식민 행정을 최소화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 지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 미국 패권의 건축가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 1901~1909년)가 미국의 세계 강대국 부상을 의식적으로 추진한 첫 번째 대통령이었습니다.

그의 세계관이 있었습니다. 강한 나라가 세계를 이끌 권리와 의무가 있다. 미국이 강해야 한다. 강함이 덕이다.

구체적 업적들이 있었습니다.

해군 강화였습니다. 루스벨트가 미국 해군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1907~1909년 거대 백색 함대(Great White Fleet)를 전 세계 순항시켰습니다. 미국의 해군력을 과시하는 외교적 메시지였습니다. 아시아 각국이 이 함대를 보고 미국이 단순한 대륙 국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러일 전쟁 중재였습니다. 1905년 러일 전쟁 후 루스벨트가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했습니다. 미국이 처음으로 주요 강대국 전쟁의 중재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루스벨트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파나마 운하였습니다. 이미 살펴보았듯.

도덕주의적 외교 수사였습니다. 루스벨트가 미국의 팽창을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정당화했습니다. 미국이 세계 문명의 선두에 있다. 야만적 세력에 맞서 문명을 수호해야 한다. 이것이 이념 권력의 생산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루스벨트를 경제 권력을 군사 권력과 이념 권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핵심 행위자로 봅니다. 미국의 경제적 부가 이미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루스벨트가 그 부를 정치적·군사적 패권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등장 :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이 처음에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중립이 경제적으로 미국에 유리하게 작동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에서 전쟁 물자를 구입했습니다. 식량, 탄약, 무기, 철강. 미국 산업이 호황이었습니다. 미국이 동시에 연합국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국제 경제적 위치가 역전되었습니다.

1914년 전쟁 시작 당시 미국이 약 37억 달러의 순채무국이었습니다. 유럽, 특히 영국에게 돈을 빌린 나라였습니다.

1919년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이 약 126억 달러의 순채권국이 되었습니다. 유럽 나라들이 미국에 돈을 빌린 나라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세계 경제 패권의 이동을 예고했습니다. 런던에서 뉴욕으로.

1917년 미국이 참전했습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미국 상선을 침몰시켰습니다. 그리고 짐머만 전보 사건이 결정타였습니다. 독일이 멕시코에 비밀 제안을 했습니다. 미국과 전쟁이 나면 멕시코가 독일 편에서 싸우고 전쟁 후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돌려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이 이 전보를 가로채어 미국에 공개했습니다.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서 연설했습니다. "세계가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해져야 합니다(The world must be made safe for democracy)."

미국이 참전했습니다. 180만 명이 유럽에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이 지친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했습니다.

윌슨의 14개 조항이었습니다.

미국의 전쟁 목표가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윌슨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제안했습니다. 민족 자결. 비밀 외교 폐지. 공해의 자유. 군비 축소. 그리고 국제 연맹.

이것이 미국이 세계에 제시한 이념이었습니다. 패권 국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계를 분할하는 구질서를 끝내고 법과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이 전례 없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유럽 민중이 그를 구원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상원이 베르사유 조약 비준을 거부했습니다. 미국이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자신이 만든 국제 기구에서 빠져나갔습니다.

마이클 만은 1차 세계대전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경제 권력과 군사 권력이 이념 권력으로 변환되려 했지만 국내 정치 권력에 의해 제한된 사례로 봅니다. 윌슨이 국제주의를 원했습니다. 상원이 고립주의를 원했습니다. 이 긴장이 미국 패권의 조기 실현을 막았습니다.


전간기의 미국 : 고립과 번영의 시대

1920년대 미국이 국제 정치에서 후퇴했습니다. 고립주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팽창을 계속했습니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였습니다. 자동차 대중화. 라디오 보급. 영화 산업. 소비 사회. 미국이 현대 소비 문화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포드주의(Fordism)가 상징이었습니다. 헨리 포드가 조립 라인을 도입하여 자동차 생산 비용을 급격히 낮추었습니다. 1908년 Model T가 850달러였습니다. 1925년 290달러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이 만드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드가 노동자 임금을 일일 5달러로 올렸습니다. 당시 업계 평균의 두 배였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소비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대량 생산-대량 소비의 선순환이었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델이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왔습니다. 주식 시장 붕괴. 은행 연쇄 도산. 실업률 25퍼센트. 경제가 붕괴했습니다.

루스벨트(프랭클린 D.)의 뉴딜이 대응이었습니다.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했습니다. 은행 규제. 공공 사업. 사회 보장. 이것이 미국 복지 국가의 시작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뉴딜을 경제 위기가 정치 권력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방식의 사례로 봅니다. 자유 시장이 실패했을 때 국가가 개입했습니다. 이것이 이후 미국의 혼합 경제 모델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패권 확립

2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세기를 확립했습니다.

미국이 다시 처음에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미국이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미국 경제를 구했습니다. 군수 생산이 폭발했습니다. 실업률이 사라졌습니다.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미국의 산업 생산 능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전쟁 기간 미국이 생산한 것들이 있습니다. 전함 147척. 항공모함 18척. 전투기 86,338대. 폭격기 47,018대. 탱크 86,338대. 화물선 5,425척. 이 압도적 생산 능력이 전쟁의 결과를 결정했습니다.

전쟁 후 미국의 위치가 역사상 유례없었습니다.

소련이 엄청난 희생을 치렀습니다. 영국이 소진되었습니다. 독일,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폐허였습니다.

미국이 전쟁 전보다 강해졌습니다. 세계 GDP의 약 50퍼센트. 세계 최강 해군. 세계 최강 공군. 그리고 핵무기.

이것이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의 시작이었습니다. 헨리 루스가 1941년 라이프 지에 쓴 표현이었습니다.


브레턴우즈 체계 : 경제 패권의 제도화

1944년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에서 44개국이 모였습니다. 전후 국제 경제 질서를 설계하는 회의였습니다.

영국의 케인스와 미국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주도했습니다.

결과가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계였습니다.

달러가 금에 고정되었습니다(1온스 = 35달러). 다른 통화들이 달러에 고정되었습니다. 모든 통화의 기준이 달러가 되었습니다.

IMF와 세계은행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기관들이 워싱턴에 본부를 두었습니다.

GATT가 자유 무역의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달러가 기축 통화라는 것은 미국이 세계 경제의 규칙을 만드는 자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무역이 달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국이 화폐 주조 이익(seigniorage)을 누렸습니다. 달러를 찍어내는 것만으로도 이익이 생겼습니다.

마이클 만은 브레턴우즈 체계를 미국의 경제 패권이 국제 제도로 공식화된 것으로 봅니다. 영국이 19세기에 자유 무역 이념과 파운드 기축 통화로 경제 패권을 유지했듯이, 미국이 브레턴우즈 체계와 달러로 20세기 경제 패권을 구조화했습니다.


마셜 플랜 : 패권의 관용

1947년 국무장관 조지 마셜이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유럽 재건 지원을 제안했습니다.

1948~1952년 미국이 서유럽에 약 130억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오늘날 가치로 약 1400억 달러였습니다.

이것이 왜였을까요. 순수한 관용이었을까요.

마이클 만은 두 가지 동기가 결합했다고 봅니다.

전략적 동기였습니다. 유럽이 경제적으로 붕괴하면 공산주의가 확산됩니다. 이탈리아, 프랑스의 공산당이 이미 강력했습니다. 마셜 플랜이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성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에 대한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경제적 동기였습니다. 유럽이 구매력을 회복해야 미국 제품을 살 수 있습니다. 미국 수출 시장으로서 회복된 유럽이 필요했습니다.

마셜 플랜이 두 목표를 모두 달성했습니다. 서유럽이 빠르게 회복했습니다. 공산주의가 서유럽에서 집권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수출 시장이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이 헤게모니적 안정(hegemonic stability)의 사례였습니다. 패권 국가가 국제 질서의 비용을 일부 부담함으로써 그 질서에서 이익을 얻는 구조. 순수한 착취가 아니라 상대방도 이익을 얻는 패권. 이것이 미국 패권이 영국 패권보다 더 안정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냉전 패권의 구조 : 군사, 경제, 이념의 삼각 결합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패권이 세 가지 기둥 위에 섰습니다.

군사적 기둥이었습니다. NATO. 일본, 한국, 독일에 미군 기지. 핵무기. 세계 최강 해군. 이것들이 소련에 대한 군사적 억지력이었습니다.

경제적 기둥이었습니다. 달러 기축 통화. 브레턴우즈 체계. IMF, 세계은행, GATT. 이것들이 미국 주도 자유 무역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기둥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인권. 자기 결정. 이것들이 미국이 제시한 세계 질서의 이념이었습니다.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응하는 이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념이 미국의 실제 행동과 충돌했습니다.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남아메리카의 독재 정권들을 지원했습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이란에서, 과테말라에서, 칠레에서 민주 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이 모순이 미국 이념의 취약점이 되었습니다. 적들이 이 위선을 공격했습니다. 국내에서도 비판이 나왔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긴장을 이념 권력이 군사 권력 및 경제 권력과 충돌할 때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의 문제로 봅니다. 냉전 기간 미국이 대체로 반공 이념과 전략적 이익을 자유민주주의 이념보다 우선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이념의 보편성 주장을 약화시켰습니다.


베트남 전쟁 : 패권의 한계

베트남 전쟁(1955~1975년)이 미국 패권의 첫 번째 심각한 위기였습니다.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통일하려 했습니다. 미국이 남베트남을 지원했습니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목이었습니다.

1964년 통킹 만 사건이 미국의 직접 군사 개입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국 군함을 공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건이 과장되거나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미국이 점점 더 깊이 개입했습니다. 최고 54만 명의 미군이 베트남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였을까요. 군사 기술에서 미국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민족주의가 더 강했습니다. 베트콩이 정글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민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미군이 마을을 폭격하고 화학 무기를 사용할수록 베트남 민심이 반미로 기울었습니다.

1968년 테트 공세가 전환점이었습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동시 다발적 공세를 펼쳤습니다. 군사적으로 격퇴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여론이 바뀌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반전 운동이 성장했습니다.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시위했습니다. 베테랑들이 훈장을 반납했습니다. 1975년 미국이 철수했습니다. 사이공이 함락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베트남을 군사 권력이 이념 권력과 분리될 때 실패하는 사례로 봅니다. 미국이 압도적 군사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북베트남의 민족 해방 이념이 미국의 반공 이념보다 더 강한 대중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념 없는 군사력이 비대칭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패권의 특수성 : 영국과의 비교

미국 패권이 이전의 영국 패권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규모의 차이였습니다. 영국 패권이 지구 면적의 25퍼센트를 공식적으로 지배했습니다. 미국 패권이 공식 식민지 없이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경제적, 군사적, 이념적 지배였습니다.

방법의 차이였습니다. 영국이 직접 통치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미국이 동맹, 국제 기구, 경제적 연결을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미국 패권이 더 다자적이고 더 제도적이었습니다.

이념의 차이였습니다. 영국이 문명화 사명을 내세웠습니다. 미국이 자유, 민주주의, 자기 결정을 내세웠습니다. 이것이 더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졌습니다. 동시에 더 큰 위선의 여지를 만들었습니다.

비용 배분의 차이였습니다. 영국 패권이 식민지들에게 지배 비용을 전가했습니다. 미국 패권이 더 많은 비용을 직접 부담했습니다. 마셜 플랜, NATO 방위비, 기축 통화 비용. 이것이 더 많은 나라들이 미국 패권에 동의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미국 패권을 이전 패권들보다 더 정교하고 더 광범위한 동의 기반을 가진 패권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패권이기도 했습니다. 보편 이념과 특수 이익의 충돌. 국내 민주주의와 해외 개입주의의 충돌.


미국 패권의 경제적 기반 : 월스트리트와 달러

미국 패권의 가장 지속적인 기반이 경제였습니다.

달러 패권이 핵심이었습니다. 1971년 닉슨이 달러-금 연동을 폐기했습니다. 브레턴우즈 체계가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달러가 기축 통화로 계속 기능했습니다. 석유가 달러로 거래되었습니다. 국제 준비 통화로 달러가 지속되었습니다.

이것이 달러 패권(dollar hegemony)이었습니다. 달러 패권이 미국에게 엄청난 특권을 주었습니다.

미국이 달러를 찍어 수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달러를 보유해야 했기 때문에 미국 달러에 자연스러운 수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만성적 무역 적자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동시에 미국이 달러를 무기화할 수 있었습니다. SWIFT 국제 결제 시스템에서 배제하는 것이 경제 제재의 핵심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란, 러시아, 북한이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월스트리트의 지배도 결정적이었습니다. 국제 금융 시장에서 뉴욕이 런던과 함께 세계 금융의 중심이었습니다. 미국 대형 은행들이 전 세계 금융 흐름을 주도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미국의 경제 패권을 군사 패권보다 더 내구성 있는 패권의 기반으로 봅니다. 군사력은 도전받을 수 있습니다. 경제 구조는 더 느리게 변합니다. 달러 패권이 미국 군사력이 약화되어도 지속될 것입니다. 물론 무한정은 아닙니다.


21세기 미국 패권의 도전

마이클 만은 21세기 미국 패권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봅니다.

중국의 부상이었습니다. 43화에서 살펴보았듯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이미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중국 GDP가 미국을 앞질렀습니다. 군사력도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정학 구도가 되었습니다.

내부 쇠퇴의 신호들이었습니다. 불평등 심화. 사회 분극화. 정치 기능 마비. 인프라 노후화. 이것들이 미국 패권의 국내적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트럼프 현상이 이 위기의 정치적 표현이었습니다.

이념적 신뢰성의 위기였습니다. 이라크 전쟁의 WMD 거짓말. 아부 그라이브 고문 스캔들. 관타나모 수용소. 이것들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신뢰성을 훼손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고문하는 나라를 믿기 어려웠습니다.

다극화 경향이었습니다. 유럽연합이 독자적 외교를 추구했습니다. 인도가 전략적 자율성을 지향했습니다. 브라질, 남아공, 터키가 독립적 목소리를 냈습니다. 단극 세계가 다극 세계로 이동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미국의 상대적 쇠퇴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미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유일 초강대국에서 첫 번째 강대국으로. 이것이 마이클 만이 예측하는 21세기 미국의 위치입니다.


1893년 시카고 박람회의 화이트 시티가 꺼졌습니다. 전기 불빛이 하나씩 꺼지면서 박람회가 막을 내렸습니다.

그 불빛이 꺼질 때 미국의 세기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아직 아무도 몰랐지만.

마이클 만이 미국의 부상에서 읽어내는 핵심 교훈이 있습니다.

패권이 단순히 군사력이나 경제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패권이 다른 행위자들에게 어느 정도 수용될 때만 지속됩니다. 미국 패권이 이전 패권들보다 더 오래 지속된 것은 단순히 더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마셜 플랜, 브레턴우즈 체계, 자유민주주의 이념, 이것들이 미국 패권을 많은 나라들이 수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패권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자유를 말하면서 고문하고,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독재를 지원하고, 개방을 말하면서 자국을 우선시할 때, 그 수용이 침식됩니다.

권력이 이념과 분리될 때 취약해진다. 이것이 역사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지금 그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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