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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적 권력의 원천

「권력의 지도」 40화, 제국주의의 시대 : 자본, 깃발, 그리고 세계 분할

by 책으로떠나는여행 2026. 5. 14.

 

1884년 11월 15일, 베를린의 한 회의실에서 유럽 강대국 대표들이 지도 앞에 모였습니다.

지도 위에 아프리카 대륙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미국, 오스만 제국 — 14개국이 참여했습니다.

아프리카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3개월간 계속된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가 아프리카 분할의 규칙을 정했습니다. 실효적 점령의 원칙이었습니다. 어떤 나라가 해안에 깃발을 꽂고 내륙을 통제한다고 주장하면 그 영토가 그 나라의 것이 됩니다. 다른 나라들이 사전에 통보를 받아야 합니다.

그 후 15년, 아프리카가 분할되었습니다.

1880년 아프리카의 약 10퍼센트가 유럽의 식민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1900년 약 90퍼센트가 유럽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만이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지도에 직선으로 그어진 국경들이 아프리카를 잘랐습니다. 민족, 언어, 지형을 무시한 직선들이었습니다. 회의실에서 자와 연필로 그어진 선들이었습니다. 그 선들이 오늘날까지 아프리카 국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이클 만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를 경제 권력, 군사 권력, 이념 권력이 동시에 전 세계적 규모로 작동하여 새로운 지배 질서를 만들어낸 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으로 봅니다. 이전에도 제국이 있었습니다. 로마, 몽골, 오스만. 그러나 19세기 유럽 제국주의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산업 자본주의, 증기선, 전신, 기관총, 이것들이 결합했을 때 유럽이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배의 유산이 오늘날에도 살아있습니다.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 개념의 해부

제국주의(imperialism)를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단순한 정의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나 지역을 직접 지배하는 것입니다. 식민지를 획득하고 관리하는 것. 이것이 공식 제국주의(formal imperialism)입니다.

그러나 공식적 식민 지배 없이도 지배가 이루어집니다. 경제적 종속, 불평등 조약, 군사적 개입 위협 — 이것들이 비공식 제국주의(informal imperialism)입니다. 라틴아메리카가 19세기에 독립했지만 영국과 미국의 비공식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제국주의를 IEMP의 네 차원 모두에서 분석합니다.

경제적 차원이었습니다. 원자재를 싸게 얻고 제조품을 팔 시장을 확보하는 것. 자본을 투자할 공간을 확장하는 것.

군사적 차원이었습니다. 전략적 기지를 확보하는 것. 경쟁 국가들의 팽창을 견제하는 것. 식민지 저항을 진압하는 것.

이념적 차원이었습니다. 문명화 사명. 기독교 선교.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 이것들이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념이었습니다.

정치적 차원이었습니다. 국내 정치 갈등을 외부로 돌리는 것. 민족주의 감정을 제국적 영광으로 충족시키는 것.

이 네 차원이 어떻게 결합하여 19세기 후반의 제국주의를 만들었는지가 이 화의 핵심입니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동력 : 자본, 시장, 원자재

19세기 후반 유럽 경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산업 혁명이 성숙했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화가 독일, 프랑스, 벨기에로 퍼졌습니다. 공장들이 더 많은 것을 더 빠르게 생산했습니다. 이것이 세 가지 압박을 만들었습니다.

원자재 압박이었습니다. 공장들이 면화, 고무, 구리, 주석, 코코아, 팜유, 인디고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것들이 유럽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열대 지방에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이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싸게 얻으려면 그 지역을 통제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시장 압박이었습니다. 공장들이 생산하는 것보다 국내 시장이 소비하지 못했습니다. 더 큰 시장이 필요했습니다. 면직물을 팔 수 있는 인도. 기계를 팔 수 있는 아프리카. 철도를 깔 수 있는 중국. 해외 시장이 과잉 생산 문제의 해결책이었습니다.

자본 압박이었습니다. 산업화가 성숙할수록 국내 투자 수익률이 하락했습니다. 영국에서 철도를 더 짓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포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인도에는 아직 철도가 필요했습니다. 이집트에, 아르헨티나에. 더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는 해외 투자처가 매력적이었습니다.

레닌이 1916년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이것을 분석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윤율이 하락하고 자본이 해외로 수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레닌의 분석이 완전히 옳지는 않았습니다. 영국의 해외 투자가 반드시 식민지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 이미 독립한 나라들에게도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레닌의 핵심 통찰, 즉 자본주의의 팽창 압박이 제국주의의 경제적 동력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진실을 담았습니다.

마이클 만은 경제적 동력이 제국주의의 충분 조건이 아니라 필요 조건이었다고 봅니다. 경제적 이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제국주의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군사력, 이념, 정치적 경쟁이 함께 작동해야 했습니다.


기술이 만든 지배 : 맥심 기관총에서 증기선까지

19세기 후반 유럽과 비유럽 세계 사이에 군사 기술의 격차가 극적으로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제국주의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 조건이었습니다.

맥심 기관총(Maxim gun)이 1884년 발명되었습니다. 분당 600발을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 소총의 수십 배 화력이었습니다. 영국 시인 힐레어 벨록이 냉소적으로 읊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졌든 그들이 무엇을 가졌든 우리에게 맥심 기관총이 있고 그들에게는 없다."

1898년 수단 옴두르만 전투에서 영국군 8,000명이 마흐디 군대 52,000명을 격파했습니다. 마흐디군 사망자가 10,000명 이상이었습니다. 영국군 사망자가 48명이었습니다.

이 격차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19세기 초만 해도 유럽 군대가 아시아, 아프리카 군대보다 결정적으로 우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업화가 군사 기술을 혁명화했습니다. 유럽이 총을 만드는 동안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총을 살 처지였습니다.

증기선이었습니다. 바람에 의존하는 범선보다 빠르고 예측 가능했습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내륙이 열렸습니다. 이전에는 말라리아 때문에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키니네(quinine)였습니다. 말라리아 예방약이었습니다. 이것이 아프리카 내륙으로의 진출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기술이 의학과 결합했습니다.

전신(telegraph)이었습니다. 본국과 식민지 간의 통신을 실시간으로 가능하게 했습니다. 런던에서 인도에 명령을 내리고 몇 시간 안에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철도였습니다. 내륙의 원자재를 해안 항구로 운반했습니다. 군대를 내륙으로 신속하게 이동시켰습니다. 식민지 통제의 물리적 기반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기술 격차가 군사 권력과 경제 권력이 기술을 통해 결합한 결과라고 봅니다. 산업 혁명이 단순히 경제를 바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권력 관계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기술을 가진 쪽이 가지지 못한 쪽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영 제국 : 역사상 최대의 제국

19세기 제국주의의 핵심에 영국이 있었습니다.

전성기의 대영 제국이 지구 육지 면적의 약 25퍼센트를 지배했습니다. 세계 인구의 약 25퍼센트가 영국 치하에 있었습니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이집트, 말레이시아, 홍콩. 지구 어딘가에서 항상 해가 지지 않았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어떻게 영국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해군력이 핵심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이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습니다. 주요 해상 무역로를 통제했습니다. 적이 어디에 있든 전력을 투사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 무역 이념이었습니다. 영국이 19세기 중반 자유 무역을 선언했습니다. 보호 관세를 낮추었습니다. 이것이 영국 산업에 유리했습니다. 영국 제품이 가장 경쟁력 있었습니다. 자유 무역이 영국 경제 제국주의의 이념적 포장이었습니다.

간접 통치(indirect rule)였습니다. 영국이 모든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지 않았습니다. 현지 엘리트들을 이용했습니다. 인도의 마하라자들, 아프리카의 추장들. 이들이 영국의 이익을 위해 현지 행정을 맡았습니다. 이것이 비용을 줄이고 저항을 완화했습니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었습니다. 런던 시티가 세계 금융의 수도였습니다. 전 세계 무역이 영국 파운드로 결제되었습니다. 영국 은행들이 세계 각지에 자본을 투자했습니다. 금융 지배가 군사 지배와 함께 작동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대영 제국의 성공이 단일 원인이 아니라 경제, 군사, 이념, 정치 권력의 탁월한 결합에서 왔다고 봅니다. 어떤 단일 요소도 혼자서는 그 규모의 제국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네 권력이 서로를 강화하는 시너지가 있었습니다.


벨기에령 콩고 : 제국주의의 극단

제국주의가 가장 극단적 형태로 표현된 것이 벨기에령 콩고였습니다.

1885년 베를린 회의에서 콩고 자유국이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소유로 인정되었습니다. 나라가 아니라 한 개인의 사유지가 된 것이었습니다.

레오폴드가 콩고에서 고무를 추출했습니다. 고무는 자전거와 자동차 타이어의 원료로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습니다.

고무 할당량이 각 마을에 부과되었습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대가가 있었습니다. 손목을 잘랐습니다. 레오폴드의 군대 공개군(Force Publique)이 잘린 손목을 증거로 수집했습니다. 총알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했습니다.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약 10년간 콩고에서 최소 1000만 명, 어떤 추산으로는 1500만 명이 학살, 기아, 질병, 강제 노동으로 사망했습니다. 콩고 인구의 절반이었습니다.

이것이 공개되었을 때 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국 인도주의 운동가 에드먼드 모렐이 폭로했습니다. 그는 고무가 콩고에서 수출되는데 그에 상응하는 물건이 콩고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유일한 설명은 강제 노동이었습니다.

조셉 콘래드가 콩고를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을 썼습니다. 1899년. 문명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야만이 테마였습니다.

국제 압박으로 1908년 벨기에 정부가 레오폴드로부터 콩고를 인수했습니다. 그러나 착취는 형태를 바꾸어 계속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콩고를 경제 권력이 이념적 포장(문명화 사명)을 벗어 던지고 순수한 약탈로 드러난 사례로 봅니다.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들이 최소한 이념적 정당화를 가졌습니다. 철도를 건설하고 의료를 제공하고 교육을 보급한다는. 레오폴드의 콩고에는 그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고무와 이익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콩고를 제국주의의 예외로 보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성격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른 식민지들에서도 강제 노동, 토지 수탈, 문화 파괴가 이루어졌습니다. 콩고가 극단적이었지만 고립된 사례가 아니었습니다.


인도 : 영국 왕관의 보석

인도가 대영 제국의 핵심이었습니다. 왕관의 보석(Jewel in the Crown)이라고 불렸습니다.

어떻게 영국이 3억 명의 인도인을 10만 명 미만의 영국인으로 지배했을까요. 이것이 제국주의의 가장 흥미로운 퍼즐 중 하나입니다.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가 시작이었습니다. 1600년 설립된 무역 회사가 점차 군사력을 키우고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로버트 클라이브가 벵골 나와브를 격파했습니다. 이것이 영국의 인도 지배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 회사가 지배했습니다. 1857년 인도 대반란이 변곡점이었습니다. 세포이(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인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이 진압된 후 영국 왕실이 직접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했습니다.

간접 통치의 기술이었습니다. 영국이 600개 이상의 토후국들을 유지했습니다. 인도 왕자들이 영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 자신의 영지에서 지배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 협력 엘리트들이 영국 지배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분리 지배(divide and rule)였습니다. 영국이 힌두교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을 이용했습니다. 카스트 구분을 법적으로 고착화했습니다. 집단들을 서로 대립시킴으로써 영국에 대한 통합된 저항을 막았습니다.

경제적 착취였습니다. 인도가 영국에게 무엇을 주었을까요. 면화. 황마. 차. 아편(중국에 수출). 군대. 인도 군인들이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과 전쟁들에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세금. 인도인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비용을 세금으로 냈습니다.

다다바이 나오로지가 부의 유출(drain of wealth)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영국이 인도에서 매년 막대한 부를 뽑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도의 빈곤화 원인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경제학자 우트사 파트나이크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영국이 1765년부터 1938년까지 인도에서 뽑아간 부가 오늘날 가치로 약 45조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마이클 만은 인도 식민 지배를 경제 권력(착취), 군사 권력(지배 유지), 이념 권력(오리엔탈리즘), 정치 권력(분리 지배)의 정교한 결합으로 봅니다. 어느 하나가 없었다면 이 지배가 그렇게 오래, 그렇게 적은 비용으로 유지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리엔탈리즘 : 제국주의의 이념적 기반

제국주의가 힘만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이념이 필요했습니다. 지배자들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념. 그리고 때로 피지배자들이 자신의 복속을 당연하게 여기게 만드는 이념.

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이것을 분석했습니다.

사이드의 핵심 주장이 있었습니다. 서방이 동방(Orient)에 대한 지식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 지식 체계가 동방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동방이 신비롭고, 비합리적이고, 관능적이고, 정체되어 있고, 전제적이라고. 반면 서방이 합리적이고, 역동적이고, 자유롭고, 진보적이라고.

이 이분법이 지배를 정당화했습니다. 동방이 스스로 발전할 수 없으니 서방이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는 이념이었습니다.

러디어드 키플링이 1899년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화하는 것을 촉구하는 시였습니다. 서방이 열등한 민족들을 문명화해야 하는 부담을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가 제국주의 이념의 정수를 표현했습니다.

이 이념이 학문에도 침투했습니다. 인류학이 인종을 분류하고 서열을 매겼습니다. 진화론이 사회 다윈주의로 왜곡되었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오리엔탈리즘을 이념 권력이 경제 권력과 군사 권력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봅니다. 지식이 권력을 섬겼습니다. 학자들, 작가들, 예술가들이 제국주의 이념을 생산했습니다. 그 이념이 제국주의를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사이드의 분석이 너무 단선적이라고 봅니다. 유럽인들이 동방에 대해 단일한 이미지만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방을 낭만화하고 이상화하는 전통도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비판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념 권력이 일방향이 아니라 내부에 모순과 긴장을 담고 있었습니다.


저항과 반란 : 식민지의 목소리

식민지 인민들이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항이 있었습니다.

인도의 1857년 반란이었습니다.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새로운 소총 탄약 포장에 돼지기름과 쇠기름이 사용되었다는 소문이 이슬람과 힌두 병사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급격한 인도 사회 변화가 전통적 엘리트들의 지위를 위협했습니다. 반란이 처음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진압되었습니다. 사망자 수가 수십만 명이었습니다.

수단의 마흐디 운동이었습니다.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자신을 이슬람의 구원자 마흐디라고 선언했습니다. 1884년 그의 군대가 하르툼을 포위하여 영국 장군 찰스 고든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영국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영웅으로 여겨지던 고든의 죽음이 영국 여론을 격앙시켰습니다. 14년 후 키치너 장군이 오두르만 전투에서 마흐디 군대를 학살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저항이었습니다. 1896년 아도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를 격파했습니다. 유럽 강대국이 아프리카 군대에게 패배한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황제 메넬리크 2세가 근대화된 군대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유럽 강대국들에게서 무기를 사들이고 군사 기술을 배웠습니다. 에티오피아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필리핀의 저항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필리핀이 미국에 합병되었습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미국에 맞서 싸웠습니다. 필리핀-미국 전쟁(1899~1902년)에서 필리핀인 수십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미국이 제국주의의 새로운 행위자로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저항들이 두 가지를 보여준다고 봅니다. 첫째, 식민 지배가 동의에 기반하지 않았습니다. 지속적인 폭력적 억압이 필요했습니다. 둘째, 저항이 단순히 전통적 힘의 반발이 아니었습니다. 성공적인 저항은 유럽의 기술과 조직 방식을 수용한 것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가 유럽 무기로 이탈리아를 이겼습니다. 이것이 반식민주의 운동이 근대화와 불가분하게 연결된 이유였습니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역설

35화에서 살펴본 나폴레옹이 민족주의를 유럽에 퍼뜨렸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주의 이념이 제국주의와 어떻게 결합했을까요.

역설적이었습니다.

유럽 민족주의가 유럽 안에서는 억압받는 민족들의 해방 이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아시아에 대해서는 유럽 민족들의 제국 팽창을 정당화했습니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지배하면서 알제리 민족주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면서 인도 민족주의를 탄압했습니다. 유럽인들이 자신들에게는 민족 자결의 권리가 있지만 비유럽인들에게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 이중 기준이 결국 제국주의에 반격했습니다.

인도 민족주의자들이 유럽 민족주의 이념을 배웠습니다. 영국 학교에서. 영국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유럽인들이 스스로에게 적용한 원칙들 — 민족 자결, 자유, 평등 — 을 인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유럽 이념이 제국주의에 반격하는 역설이었습니다. 유럽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념이 유럽 제국주의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것을 이념 권력의 예측 불가능성의 전형적 사례로 봅니다. 이념이 만들어진 맥락을 넘어 다른 곳에서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제국주의자들이 자유와 문명을 가르쳤습니다. 피지배자들이 그 자유와 문명을 제국주의에 맞서는 무기로 만들었습니다.


제국주의와 강대국 경쟁 : 1차 세계대전의 씨앗

1870년대 이후 새로운 강대국들이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독일이 통일된 후 식민지를 원했습니다. 빌헬름 2세가 "태양 아래 우리의 자리(place in the sun)"를 요구했습니다. 독일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얻었습니다. 카메룬, 토고, 독일령 동아프리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와 리비아를 노렸습니다.

미국이 스페인-미국 전쟁(1898년) 이후 쿠바,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얻었습니다. 미국이 태평양 제국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빠르게 산업화하고 군사력을 키웠습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중국을 격파하고 대만을 얻었습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를 격파했습니다. 아시아인이 유럽인을 이겼습니다.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새로운 행위자들이 영국, 프랑스가 이미 나누어 가진 세계에 뒤늦게 들어왔습니다. 재분할을 요구했습니다. 기존 제국들이 저항했습니다. 갈등이 쌓였습니다.

두 번의 모로코 위기(1905년, 1911년)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에 도전했습니다. 두 번 모두 독일이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유럽 강대국들 사이의 불신과 적대감이 깊어졌습니다.

발칸 위기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약해지면서 발칸 반도가 강대국 경쟁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1912~13년 발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가 오스만에서 영토를 빼앗았습니다.

이 긴장들이 1914년 폭발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경쟁이 만들어낸 체계적 불안정성의 폭발로 봅니다. 전쟁이 단일 원인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민족주의, 제국주의 경쟁, 동맹 체계, 군비 경쟁, 지도자들의 오판이 결합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배경에 식민지와 자원을 둘러싼 강대국 경쟁이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비판론 : 당대의 목소리들

제국주의가 일방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강력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영국 경제학자 J. A. 홉슨이었습니다. 1902년 『제국주의 연구(Imperialism: A Study)』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제국주의가 경제적으로 영국에 이익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식민지 통치 비용이 이익보다 크다. 제국주의의 수혜자는 소수 금융 자본가들이고 비용은 대중이 세금으로 부담한다. 레닌이 나중에 홉슨의 분석을 차용했습니다.

마크 트웨인이었습니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반제국주의 연맹의 부회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강도들의 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다"고 썼습니다.

에드먼드 모렐이었습니다. 콩고의 잔혹상을 폭로했습니다. 그의 고발이 국제 여론을 바꾸었습니다.

인도의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였습니다. 영국 의회에서 발언권을 얻어 인도의 착취를 증언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비판자들이 이념 권력이 자체 내에 자기 비판의 자원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봅니다. 자유주의 이념이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자유주의 이념이 제국주의 비판의 근거도 제공했습니다. 자유, 평등, 인간 존엄의 원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면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 모순이 제국주의를 내부에서 약화시켰습니다.


제국주의가 남긴 것 : 식민지의 유산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무엇을 남겼을까요. 이 질문이 오늘날에도 논쟁이 됩니다.

긍정적 유산을 주장하는 쪽이 있었습니다. 철도, 전신, 현대 의료, 법 체계, 교육 제도, 관료 행정 — 이것들이 식민지에 현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제국주의가 없었다면 이 발전이 더 늦게 왔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부정적 유산을 강조하는 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 만이 여기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경제적 유산이었습니다. 식민지 경제가 원자재 수출에 특화되도록 왜곡되었습니다. 식민지 이익이 본국으로 유출되었습니다. 제조업이 억압되었습니다. 영국이 인도의 면직물 산업을 파괴했습니다. 자국 면직물을 팔기 위해. 이 구조적 왜곡이 독립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정치적 유산이었습니다. 인위적 국경. 적대적 집단들을 하나의 국가에 묶었습니다. 우호적 집단들을 여러 나라로 분리했습니다. 르완다에서 벨기에가 후투와 투치의 구분을 법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대학살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이라크에서 영국이 시아, 수니, 쿠르드를 하나의 국가로 묶었습니다. 이 구조적 긴장이 오늘날까지 계속됩니다.

심리적 유산이었습니다. 프란츠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서 분석했습니다. 식민화가 피식민자의 자아상을 파괴했습니다. 식민지 이념이 식민지인들에게 자신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내면화시켰습니다. 이 심리적 상처가 독립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긍정적 유산과 부정적 유산의 비교가 잘못된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국주의가 가져온 현대화가 착취 없이 가능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제국주의 없이 더 좋은 발전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제국주의의 현대화가 착취의 도구였기 때문에, 그것의 형태와 방향이 식민지 인민들의 이익이 아니라 제국의 이익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신제국주의 : 냉전 이후 지속

공식 식민 지배가 20세기 후반 탈식민화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권력 관계가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었습니다.

43화에서 살펴본 신식민주의와 세계화가 이것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명시적인 군사적 차원을 살펴봅니다.

미국이 냉전 기간 수십 개 나라에 군사 개입을 했습니다. 과테말라(1954년), 이란(1953년), 칠레(1973년),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이라크(1991년, 2003년), 아프가니스탄(2001년). 이것들이 공식 식민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강대국이 약소국의 내정에 군사력으로 개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이것을 민주주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했습니다. 19세기 영국이 문명화 사명으로 정당화한 것과 구조가 같았습니다.

마이클 만은 신제국주의가 19세기 제국주의와 다른 형태를 취하지만 같은 IEMP 논리로 분석된다고 봅니다. 경제적 이익(석유, 시장, 투자 보호), 군사적 패권(전략적 기지, 지역 동맹), 이념적 정당화(민주주의, 자유), 정치적 동기(국내 여론, 동맹 관리) — 이것들이 결합하여 신제국주의를 만들었습니다.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직선으로 그어진 아프리카 국경들이 오늘날도 그대로입니다.

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아프리카인들이 그 직선들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적대적인 민족들이 같은 국가 안에 묶여 있습니다. 같은 민족이 국경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직선들이 그어진 지 1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르완다에서, 수단에서, 이라크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마이클 만이 제국주의의 역사에서 읽어내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권력이 경제적 이익과 군사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념이 필요합니다. 문명화 사명처럼. 그 이념이 지배자들에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줍니다. 그리고 때로 피지배자들을 복종에 동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념은 양날의 검입니다. 자유, 평등, 인간 존엄의 이념이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념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베를린 회의의 직선들이 그어진 날, 그 방에 없었던 사람들이 결국 그 직선들을 무력화했습니다. 완전히는 아닙니다.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방향이 있습니다.

역사가 가르쳐줍니다. 권력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만든 구조가 오래 지속되더라도, 그 구조에 저항하는 힘이 항상 자라납니다.


다음 화 예고  41화, 영국 제국 : 역사상 최대 권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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