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9년 8월 16일, 영국 맨체스터 인근 피털루 광장에 6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했을까요.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투표권이었습니다.
산업 혁명의 한복판에서 맨체스터는 영국 최대 산업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회에 대표를 보낼 권리가 없었습니다. 인구 10만의 도시가 의원이 없었습니다. 반면 유권자가 7명밖에 없는 부패 선거구(rotten borough)가 의원을 두 명씩 보냈습니다.
군중이 평화롭게 모였습니다. 여성들도 왔습니다. 깨끗하게 차려입었습니다. 폭동이 아니라 청원이었습니다.
기병대가 군중 속으로 돌격했습니다.
15명이 죽었습니다. 600명 이상이 부상당했습니다. 4년 전 워털루 전투의 이름을 빌려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워털루의 영광에 대한 냉혹한 야유였습니다.
투표권을 요구한 사람들에게 기병대가 돌격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 확산의 진실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지배 계급이 웃으며 권력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가 투쟁으로 쟁취되었습니다. 피를 흘리고. 감옥에 가고. 때로 목숨을 잃으면서.
마이클 만은 민주주의의 확산을 정치 권력의 자발적 분산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이념 권력과 경제 권력의 압박이 위로부터의 정치 권력을 강제한 과정으로 봅니다. 지배자들이 민주주의를 선물로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을 때 내주었습니다.
그 조건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것이 38화의 핵심입니다.
민주주의의 역설 : 고대의 발명, 근대의 재발명
민주주의(democracy)가 그리스어에서 왔습니다. 데모스(demos, 민중)와 크라토스(kratos, 권력)의 합성어입니다. 민중의 권력.
고대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발명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이후 아테네 시민들이 민회에서 직접 투표로 주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의 민중이 누구였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인구의 약 15~20퍼센트가 시민이었습니다. 여성이 배제되었습니다. 노예가 배제되었습니다. 외국인 거주자(메토이코이)가 배제되었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노예 경제 위에 서있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적 역설을 보여줍니다. 민주주의가 항상 누군가를 배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이 배제의 경계를 확장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마이클 만은 근대 민주주의를 고대 민주주의의 단순한 부활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고대 민주주의가 직접 민주주의였다면 근대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였습니다. 수십만, 수백만의 시민이 직접 모일 수 없었습니다. 대표를 선출하여 그 대표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가 등장한 조건이 고대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산업 자본주의, 도시 노동 계급, 인쇄 매체, 민족주의 — 이것들이 근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가능하게 한 새로운 요소들이었습니다.
영국 의회의 역사 : 귀족 민주주의에서 대중 민주주의로
영국 의회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적 전통을 가졌습니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가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최초의 문서적 계약이었습니다. 국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원칙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1688년 명예혁명이 의회 주권을 확립했습니다. 왕이 의회 위에 있지 않고 의회의 법 아래 있다는 원칙이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초까지 영국 의회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선거권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인구의 약 3퍼센트만이 투표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토지 소유 귀족과 부유한 젠트리였습니다.
선거구 배분이 시대에 뒤떨어졌습니다. 중세에 만들어진 선거구가 그대로였습니다. 맨체스터 같은 신흥 공업 도시가 의원이 없었습니다. 바다에 잠긴 마을이 여전히 의원을 보냈습니다.
부패가 공공연했습니다. 선거구민을 매수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지주가 소작인들의 투표를 통제했습니다. 공개 투표였기 때문에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모두 알았습니다.
1832년 선거법 개혁(Reform Act)이 첫 번째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부패 선거구들이 폐지되었습니다. 맨체스터 같은 신흥 도시들이 의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선거권이 도시 중산층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인구의 약 7퍼센트가 투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 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노동자가 배제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1832년 개혁을 지배 계급이 더 큰 압박을 피하기 위해 부분적 양보를 한 사례로 봅니다. 개혁 운동의 압박이 강했습니다. 혁명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지배 귀족들이 선택해야 했습니다. 조금 양보하여 중산층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모든 것을 걸고 버티다가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거나.
그들이 양보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양보였습니다. 노동 계급을 배제하면서 중산층만 끌어들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혁명의 동력을 분열시켰습니다.
차티스트 운동 : 노동 계급의 정치적 요구
1832년 개혁이 중산층만 포함하자 노동 계급이 분노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운동을 만들었습니다. 차티스트 운동(Chartism)이었습니다.
1838년 차티스트들이 인민 헌장(People's Charter)을 발표했습니다. 여섯 가지 요구가 있었습니다.
보통 남성 선거권. 비밀 투표. 재산 요건 없는 의원 피선거권. 의원 세비 지급. 동등한 선거구. 연간 의회.
이 요구들이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1838년 영국에서 이것이 혁명적 요구였습니다.
차티스트 운동이 수백만 명의 서명을 모았습니다. 1839년 125만 명. 1842년 320만 명. 1848년 570만 명. 이 청원이 의회에 제출되었습니다.
의회가 세 번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차티스트 운동이 씨앗을 뿌렸습니다. 노동 계급이 정치적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이 요구들이 하나씩 실현되었습니다.
1867년 제2차 선거법 개혁이 도시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주었습니다. 보수당의 디즈레일리가 주도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보수 정치인이 노동자 선거권을 확대했습니다. 그의 계산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유권자들이 자유당보다 보수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1872년 비밀 투표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차티스트들의 두 번째 요구가 실현되었습니다.
1884년 제3차 선거법 개혁이 농촌 노동자들에게도 선거권을 주었습니다. 남성 성인의 대부분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영국의 점진적 민주화를 지배 계급이 단계적 양보로 혁명을 피한 사례로 봅니다. 프랑스가 혁명을 반복했습니다. 영국이 개혁으로 혁명을 피했습니다. 이것이 영국 정치 문화의 특성이 되었습니다. 타협, 점진주의, 제도 존중. 그러나 이 점진주의가 자발적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지속적 압박이 없었다면 그것도 없었을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유산 : 급진적 민주주의의 길
프랑스가 영국과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걸었습니다.
1789년 혁명이 급진적 민주주의를 선언했습니다. 국민 주권. 보통 선거권(남성). 이것이 혁명의 이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급진성이 테러를 낳았습니다. 반혁명이 왔습니다. 나폴레옹의 독재가 왔습니다. 왕정 복고가 왔습니다. 또 혁명이 왔습니다(1830년). 또 왕정이 왔습니다. 또 혁명이 왔습니다(1848년). 제2공화국이 왔다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왔습니다. 그리고 1870년 보불 전쟁 패배 후 제3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프랑스가 1789년부터 1870년까지 80년 동안 끊임없이 체제가 바뀌었습니다. 군주정, 공화정, 제정이 반복되었습니다.
왜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이렇게 불안정했을까요.
마이클 만의 분석이 있습니다.
계급 갈등이 더 날카로웠습니다. 프랑스 귀족과 부르주아, 부르주아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이 영국보다 더 극단적이었습니다. 점진적 타협보다 혁명과 반혁명의 순환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공화주의의 갈등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공화주의와 반성직주의가 연결되었습니다. 교회가 왕정 복고를 지지했습니다. 이 갈등이 프랑스 정치를 지속적으로 분열시켰습니다.
농민의 보수성이었습니다. 프랑스 농민이 인구의 다수였습니다. 그들이 종종 보수적 왕정주의를 지지했습니다. 1848년 루이 나폴레옹이 보통 선거에서 74퍼센트를 득표하여 대통령이 된 것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혼란이 민주주의의 확산에 역설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보통 선거권의 원칙을 유럽 전역에 퍼뜨렸습니다. 비록 프랑스 자체에서 그것이 불안정하게 실현되었지만, 그 이념이 유럽 민주주의 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보통선거권 쟁취의 정치경제학
보통선거권이 어떻게 확대되었는가를 경제적·정치적 관점에서 분석해보겠습니다.
왜 지배 계급이 결국 양보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혁명의 위협이었습니다. 산업화가 도시 노동 계급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조직하기 쉬웠습니다. 혁명의 잠재력이 있었습니다. 지배 계급이 이것을 두려워했습니다. 1848년 유럽 혁명의 물결이 이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선거권 확대가 혁명을 막는 안전 밸브로 기능했습니다.
통합의 필요였습니다. 민족주의 시대에 강한 국가를 만들려면 국민 통합이 필요했습니다. 대다수 국민이 정치에서 배제되어 있으면 그들의 충성심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선거권이 시민을 국가와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습니다. 1870년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원인 중 하나가 국민 통합의 부재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노동 운동의 성장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사회주의 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이 선거권 요구와 경제적 요구를 결합했습니다. 이 압박을 무시하기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경제 발전의 부산물이었습니다. 교육이 확산되었습니다. 문맹률이 낮아졌습니다. 신문이 퍼졌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역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거권 확대의 현실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이 과정을 IEMP 분석으로 봅니다. 이념 권력(민주주의 이념, 민족주의), 경제 권력(산업화, 노동 운동), 정치 권력(의회 개혁), 군사 권력(국민 통합의 필요성) — 이 네 가지가 각각 다른 이유로 민주주의 확산을 향해 수렴했습니다. 단일 원인이 아니라 복합적 원인의 결합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 : 배제된 절반
19세기 민주주의 확산 논의에서 가장 큰 역설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인구의 절반을 배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
보통 선거권(universal suffrage)이 실제로는 남성 보통 선거권이었습니다. 여성이 '보통'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당시 지배적 이념이 명확했습니다. 여성이 합리적 정치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다. 여성의 영역은 가정이다. 정치는 남성의 영역이다. 이것이 학문적으로 정당화되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두뇌가 작다는 주장, 감정에 지배된다는 주장이 의학적 권위와 함께 제시되었습니다.
심지어 민주주의와 평등을 지지한 사람들이 여성 참정권에는 반대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예외였습니다. 1869년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에서 여성 차별이 전통이 아니라 권력의 산물임을 논증했습니다. 그리고 의회에서 여성 참정권 개정안을 제출했습니다. 73표가 찬성했고 194표가 반대했습니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 운동이 영국에서 발전했습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맹(WSPU)을 창설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Deeds not Words)"이 구호였습니다.
처음에는 청원과 시위였습니다. 그러나 계속 거부당하자 전술이 바뀌었습니다. 창문을 깼습니다. 우체통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림을 훼손했습니다. 감옥에 갔습니다. 단식 투쟁을 했습니다. 영국 정부가 강제 급식으로 대응했습니다.
1913년 에밀리 데이비슨이 엡섬 경마장에서 국왕의 말 앞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머리를 크게 다쳐 나흘 후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코트 안에 서프러제트 깃발이 들어있었습니다. 의도적 순교인지 뜻하지 않은 사고인지 아직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이 운동에 강력한 상징을 더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역설적으로 돌파구를 만들었습니다. 여성들이 전시 경제를 유지했습니다. 공장, 농장, 병원에서 일했습니다. 이 기여가 여성이 무능하다는 주장을 무력화했습니다.
1918년, 영국 여성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30세 이상이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1928년에야 21세 이상 모든 여성에게 완전한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마이클 만은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이념 권력이 기존 이념 권력에 맞서는 방식을 봅니다. 지배적 이념(여성은 정치에 부적합하다)에 대한 도전이 이념(평등의 원칙은 여성에게도 적용된다)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념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행동, 전시 경제의 실증, 정치적 타협이 결합했을 때 변화가 왔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 노예제와 함께 태어난 공화국
미국이 1776년 독립 선언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언이 쓰인 종이 뒤에서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계 노예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독립 선언을 쓴 토마스 제퍼슨 자신이 노예 소유주였습니다.
미국 민주주의가 처음부터 이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헌법이 노예제를 보호했습니다. 1787년 헌법이 노예를 재산으로 인정했습니다. 노예 수입이 1808년까지 금지될 수 없었습니다. 남부 주들이 노예 인구를 5분의 3으로 계산하여 의석 수에 반영받았습니다. 노예들이 투표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숫자가 노예 소유주들의 의회 권력을 키웠습니다.
잭슨 민주주의가 백인 남성 보통선거권을 확립했습니다. 1820~30년대, 앤드루 잭슨의 시대에 재산 요건이 대부분의 주에서 폐지되었습니다. 백인 남성은 투표할 수 있었습니다. 흑인은 노예든 자유인이든 대부분 배제되었습니다. 원주민은 배제되었습니다. 여성은 배제되었습니다.
남북전쟁과 재건 시대(Reconstruction, 1865~1877년)였습니다.
노예제가 폐지되었습니다. 수정헌법 14조가 흑인에게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수정헌법 15조가 인종에 기반한 투표권 제한을 금지했습니다. 이론적으로 흑인 남성이 투표권을 얻었습니다.
재건 기간에 남부에서 흑인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의원을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연방군이 철수하고 재건이 끝나자 남부 주들이 흑인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두세, 문자 해독 시험, 할머니 조항(조부가 투표했던 자만 투표 가능), 폭력과 협박. 이 모든 수단이 흑인을 투표소에서 몰아냈습니다.
짐 크로 법(Jim Crow Laws)이 남부에서 인종 분리를 제도화했습니다. 이것이 1965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이념(모든 인간의 평등)과 현실(인종적 배제) 사이의 끝없는 긴장으로 봅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이념을 선언했지만 그 이념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이 간극이 미국 역사의 핵심 갈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갈등이 결국 이념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더디고 고통스럽게.
민권 운동 : 공식 민주주의의 실질화
1955년 12월 1일, 몽고메리 앨라배마에서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녀가 체포되었습니다. 버스 좌석 법 위반이었습니다.
몽고메리 흑인 공동체가 버스 보이콧을 시작했습니다. 381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젊은 목사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지도자로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민권 운동의 현대적 시작이었습니다.
비폭력 저항이 전략이었습니다. 간디의 방법을 미국에서 재현했습니다. 점심 카운터 농성(sit-in). 자유의 버스(Freedom Ride). 행진. 경찰의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이 도덕적 권위를 만들었습니다.
1963년 8월, 워싱턴에서 25만 명이 행진했습니다. 마틴 루서 킹이 연설했습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통과되었습니다. 인종에 따른 차별이 금지되었습니다.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통과되었습니다. 흑인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주법들이 무효화되었습니다. 수정헌법 15조가 통과된 지 95년 만에 비로소 실질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마이클 만은 민권 운동을 이념 권력이 정치 권력을 변화시킨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봅니다. 이미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들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운동이 그 법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이념(평등)이 이미 선언되어 있었습니다. 운동이 그 이념이 현실에서 관철되도록 싸웠습니다.
민주주의의 세 가지 물결 : 헌팅턴의 분석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1991년 『제3의 물결』에서 민주주의 확산을 파도처럼 분석했습니다.
첫 번째 물결(1828~1926년)이었습니다. 서구 국가들에서 점진적 민주화.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선거권이 확대되었습니다.
첫 번째 역파도(1922~1942년)였습니다. 파시즘과 군사 독재가 민주주의를 위협했습니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헝가리 등에서 권위주의가 등장했습니다.
두 번째 물결(1943~1962년)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의 승리가 민주주의를 확산시켰습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서 민주주의가 재건되었습니다. 탈식민화 과정에서 새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채택했습니다.
두 번째 역파도(1958~1975년)였습니다. 군사 쿠데타가 개발도상국에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렸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군사 독재가 확산되었습니다.
세 번째 물결(1974년~)이었습니다.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1974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 그리스가 민주화되었습니다.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습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이 공산주의 붕괴와 함께 민주화를 가져왔습니다.
마이클 만은 헌팅턴의 분석이 유용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파도 모델이 민주화가 선형적으로 진보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현실이 더 복잡합니다. 민주주의가 취약한 조건에서는 항상 역파도가 가능합니다. 21세기의 민주주의 후퇴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민주주의의 내부 모순 : 다수결과 소수 권리
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그 내부 모순도 드러났습니다.
다수결의 횡포 문제였습니다. 민주주의가 다수결 원칙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면 어떻게 됩니까. 인구의 51퍼센트가 나머지 49퍼센트의 권리를 박탈하는 투표를 한다면 그것이 민주주의입니까.
미국 건국자들이 이 문제를 알았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다수결의 횡포를 경계했습니다. 헌법이 권리 장전을 포함시켰습니다. 법원이 다수결 결정도 헌법의 기본 원칙을 위반하면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민주주의(다수 지배)와 자유주의(개인 권리 보호)의 결합. 다수결이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원칙.
대표성의 문제였습니다. 선거가 있어도 실제로 모든 집단이 동등하게 대표되는가. 돈이 있는 집단이 더 많은 정치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가. 선거 자금이 정치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마이클 만이 이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와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투표할 수 있어도, 정치 결과가 돈과 조직을 가진 집단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인가.
선동과 민주주의의 긴장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합리적 판단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선동, 허위 정보, 감정 조작이 시민들의 판단을 왜곡한다면. 플라톤이 이 우려를 처음 제기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중우 정치(ochlocracy)로 타락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1세기 소셜 미디어가 이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선거제도의 차이 : 다수제와 비례대표제
민주주의가 보통선거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거제도가 민주주의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다수제(first-past-the-post)였습니다. 영국, 미국, 캐나다. 선거구에서 한 표라도 더 받으면 이깁니다. 이기는 정당이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결과가 양당제를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안정적 정부를 만들지만 소수 의견이 대표되지 않습니다.
비례대표제였습니다.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정당 득표율에 비례하여 의석을 배분합니다. 소수 정당도 의회에 들어옵니다. 다양한 의견이 대표됩니다. 그러나 연립 정부가 필요하고 불안정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만은 선거제도의 선택이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를 원하는가에 대한 정치적 선택임을 강조합니다. 중립적 기술적 결정이 아닙니다. 다수제는 강한 정부를 만들지만 다양성을 억압합니다. 비례대표제는 다양성을 허용하지만 협상과 타협을 요구합니다.
이 선택이 정치 문화를 형성합니다. 영국 정치의 대립적 토론 문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정치의 협의 문화. 이것이 선거제도의 구조적 결과입니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 21세기의 도전
21세기에 민주주의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포퓰리즘이었습니다.
포퓰리즘이 무엇인가. 정치학자 얀-베르너 뮐러의 정의가 있습니다. 포퓰리즘이 "진정한 인민"과 "부패한 엘리트"를 대립시키는 이념입니다. 포퓰리스트 지도자가 "나만이 진정으로 인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이 왜 위험한가. 포퓰리즘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정한 인민"에서 배제합니다. 야당, 언론, 법원이 "부패한 엘리트"의 일부가 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리는 논리가 됩니다.
2010년대에 포퓰리즘이 세계적으로 부상했습니다. 헝가리의 오르반. 폴란드의 카친스키. 미국의 트럼프. 브라질의 볼소나루. 인도의 모디. 이들이 민주주의의 형식은 유지하면서 그 실질을 침식했습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합니다. 그러나 법원을 장악합니다. 언론을 압박합니다. 선거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꿉니다. 이것이 선거 권위주의(electoral authoritarianism)입니다.
마이클 만은 포퓰리즘의 부상이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이 42~43화에서 살펴본 불평등 심화와 세계화의 패자들이 만든 정치적 분노의 표현입니다. 이 분노가 정당한 배경을 가집니다. 그러나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이 분노를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용합니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민주주의 자체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서 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실제 삶을 개선해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긴장하는 이유
마이클 만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구조적 긴장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긴장입니다.
자본주의가 경제 권력을 불평등하게 분배합니다. 소수가 압도적 경제 권력을 가집니다.
민주주의가 정치 권력을 평등하게 분배합니다. 1인 1표.
이 두 원칙이 충돌합니다. 경제 권력을 가진 소수가 정치 권력도 가지려 합니다. 정치 자금, 로비, 언론 소유, 회전문 인사 — 이 수단들로 경제 권력이 정치 권력으로 전환됩니다.
역사가 이 긴장의 세 가지 결과를 보여줍니다.
첫째, 경제 권력이 민주주의를 정복합니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유지되지만 실질적으로 경제 엘리트가 지배합니다. 많은 나라의 현실이 이것에 가깝습니다.
둘째, 민주주의가 경제 권력을 통제합니다. 누진세, 반독점, 복지 국가, 금융 규제로 경제 불평등을 제한합니다. 황금기(42화)가 이것에 가장 가까웠습니다.
셋째, 경제적 절망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립니다. 대공황 이후 파시즘. 자본주의가 실패했을 때 민주주의도 취약해집니다.
마이클 만은 이 긴장이 민주주의가 영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고 봅니다. 한 번 해결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의 균형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 균형이 깨질 때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합니다.
민주주의는 왜 저항력이 있는가
그럼에도 마이클 만은 민주주의의 저항력에 주목합니다.
민주주의가 파시즘, 공산주의, 권위주의의 도전을 모두 견뎌냈습니다. 왜일까요.
민주주의가 오류 수정 메커니즘을 내장합니다. 정부가 잘못하면 다음 선거에서 교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다른 어떤 체계보다 실수에 잘 적응하게 만듭니다. 독재가 오류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가 오류를 제도적으로 교정합니다.
민주주의가 다양한 이익을 포용합니다. 경쟁하는 집단들이 선거와 의회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불만을 제도 안으로 흡수합니다. 독재는 불만을 억압합니다. 억압된 불만은 언젠가 폭발합니다.
민주주의 이념이 보편적 호소력을 가집니다. 자유, 평등, 인간 존엄 — 이것들이 특정 문화나 역사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 이념에 끌립니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이념적 힘입니다.
그러나 마이클 만은 민주주의의 저항력이 자동적이지 않다고 경고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 제도를 학습하고 이해하고 방어하는 시민 문화가 필요합니다. 그 문화가 약해질 때 민주주의가 위협받습니다.
1819년 피털루 광장에서 기병대의 말발굽에 짓밟힌 사람들이 원한 것은 간단했습니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의회에 닿기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의 운명에 자신들이 한 마디 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날 거부되었습니다. 15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한 것이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아주 천천히. 아주 불완전하게. 많은 투쟁과 희생 끝에.
마이클 만이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읽어내는 핵심 교훈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정치 권력의 분산입니다. 그러나 그 분산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래로부터의 압박, 이념의 힘, 경제 변화, 지배 계급의 전략적 양보가 복잡하게 결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완성형이 아닙니다. 그것이 과정입니다. 보통선거권이 이루어졌지만 실질적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있지만 경제 권력의 불평등이 정치를 왜곡합니다. 선거가 있지만 허위 정보와 선동이 판단을 흐립니다.
민주주의가 끝없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념입니다. 그 나아감을 멈추는 순간 역파도가 옵니다.
피털루의 죽은 자들이 그 대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결국 무엇을 만들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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