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궁정 회고록
EP.04. 1774년, 왕관이 너무 무겁다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어전에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신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는 너무 어리고, 너무 어려서 통치할 줄을 모릅니다." 마담 캉팡, 회고록 중에서

4년의 침묵, 그리고 갑작스러운 봄
1770년 5월의 결혼식과 그달 말의 비극 이후, 4년의 시간이 흐른다. 회고록을 읽다 보면 이 4년 동안 베르사유의 일상이 표면적으로는 비교적 평온했음을 알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전히 어린 왕세자비였고, 시고모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시아버지 루이 15세의 점심 식사 자리에 참석하고, 사냥 행사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 평온은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회고록의 여러 곳에 흩어진 단서를 모아보면, 이 4년은 어린 왕세자비에게 깊은 좌절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녀와 남편 루이 오귀스트의 결혼생활은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회고록에서 캉팡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빈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서 거의 매달 도착하던 편지의 무게는 분명히 기록한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물었다. 후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왕세자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사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 시기 베르사유의 정치적 분위기도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루이 15세는 통치 말년에 이르러 더욱 사적인 즐거움에 빠져들었고, 마담 뒤바리의 영향력은 한층 커져 있었다. 의회와 왕실 사이의 갈등은 풀리지 않고 있었고, 7년 전쟁 이후 누적된 재정 적자는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나 어떤 위기도 그날, 1774년 4월 27일의 사건만큼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트리아농의 사냥, 그리고 한 여자
1774년 4월 27일, 루이 15세는 작은 트리아농 궁 근처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64세의 왕은 아직 건강해 보였다. 그 무렵 그는 이미 마담 뒤바리와의 관계가 깊어진 상태였고, 사냥과 만찬으로 일과를 채우는 일상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 사냥 도중, 왕은 갑자기 두통과 오한을 호소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감기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왕의 얼굴에 작은 붉은 반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사들의 진단은 곧 충격으로 바뀌었다. 천연두였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천연두는 가장 두려운 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백신 접종은 일부 시도되고 있었지만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고, 천연두에 걸린 환자의 약 30퍼센트는 회복하지 못했다. 더구나 루이 15세는 어린 시절 천연두에 걸린 적이 없었다. 면역이 없는 64세의 노인이 그 병에 걸렸다는 것은 사실상의 사형 선고였다.
소식이 전해지자 베르사유 전체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가장 곤란한 상황에 놓인 사람은 따로 있었다. 마담 뒤바리였다.
당시의 관습상, 왕이 임종의 순간에 들어가려면 종부성사를 받아야 했다. 종부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사제가 왕의 영혼 상태를 확인해야 했고, 사제는 왕이 정부와 동거하고 있는 한 성사를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 따라서 마담 뒤바리는 베르사유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퇴출은 곧, 그녀를 지지하던 모든 정치 세력의 몰락을 의미했다.
캉팡은 회고록에서 이 시기의 베르사유 분위기를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왕의 병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고모들인 마담 아델라이드, 마담 빅투아르, 마담 소피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며칠 동안 임종을 지켰고, 결국 모두 천연두에 옮게 된다. 다행히 그녀들은 살아남았지만, 그 후유증은 평생 그녀들을 따라다녔다.

5월 10일, 베르사유의 한 촛불
루이 15세의 병세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얼굴의 반점은 곧 온몸으로 번졌고, 5월 초가 되자 그의 모습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캉팡의 회고록에는 직접적인 묘사가 거의 없지만,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왕의 시신에서 풍기는 냄새가 너무도 끔찍해, 마지막 며칠 동안은 병실 근처에 누구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베르사유 궁전에는 한 가지 관습이 있었다. 왕의 침실 창가에 촛불 하나를 켜두는 것이다. 왕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촛불은 계속 타올랐고, 왕이 숨을 거두는 순간 그 촛불이 꺼졌다. 궁정의 모든 사람들은 매일 그 창을 올려다보며 촛불의 상태를 확인했다.
5월 10일 오후 3시 15분, 마침내 그 촛불이 꺼졌다.
캉팡은 그 순간을 회고록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이미 며칠 전부터 베르사유 궁의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연두가 옮을 가능성 때문에 임종의 자리에는 갈 수 없었다. 그들은 어전실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촛불이 꺼지자, 베르사유 궁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회고록은 그 소리를 "거대한 천둥소리 같았다"라고 적는다. 그것은 궁정 안의 모든 신하와 시녀들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왕과 왕비에게 인사하기 위해 그들이 있는 방으로 달려가는 발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베르사유의 모든 사람들이 그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는 더 이상 왕세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였다. 그리고 그 옆의 어린 여인은 이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우리는 너무 어립니다"
캉팡이 회고록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순간이다. 새 왕과 왕비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함께 무릎을 꿇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신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우리는 너무 어리고, 너무 어려서 통치할 줄을 모릅니다."
이 기도는 그 후 200년이 넘게 인용되어 왔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것이 캉팡의 회고록에만 등장하는 일화이며, 후대의 극적 효과를 위한 윤색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이 짧은 문장은 1774년 5월 10일의 베르사유 분위기를 가장 정확히 압축한 표현으로 남아 있다.
루이 16세는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마리 앙투엣트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들은 한 나라를, 더구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복잡한 정치 구조를 가진 나라를 통치해야 했다.
루이 16세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물쇠 만들기를 좋아했고, 지도 그리기를 즐겼으며, 사냥에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외교 회담이나 재정 보고서를 마주할 때면 그는 종종 말을 잃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 그는 망설였고, 망설인 끝에 결정을 미루곤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치를 배운 적이 없었다. 빈의 어머니가 보낸 매뉴얼은 종교 생활과 일상 예절에 관한 것이었지, 한 나라의 통치에 관한 안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지만, 외교적 인내심은 부족했다. 한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면 끝까지 곁에 두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평생 외면했다.
이 두 사람이 통치해야 할 나라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캉팡이 기록한 그 기도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새 왕이 물려받은 나라
루이 16세가 즉위한 1774년의 프랑스는 화려한 외양 뒤로 깊은 구조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먼저 재정 문제가 있었다. 7년 전쟁(1756~1763)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패했고, 그 결과 캐나다와 인도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더구나 전쟁 비용은 막대한 빚으로 남았다. 1770년대 초반 프랑스 정부의 부채는 통제 불능 상태로 늘어나고 있었고, 매년의 지출은 수입을 크게 초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제 개혁은 거의 불가능했다. 가장 부유한 계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거의 면세 특권을 누리고 있었고, 모든 부담은 평민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정치 구조의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의 의회들(parlements)은 사법 기관이었지만, 동시에 왕의 법령을 등록하지 않으면 그 법령이 효력을 갖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사실상의 거부권을 갖고 있었다. 루이 15세는 통치 말년에 이 의회들과 격렬한 갈등을 벌인 끝에 1771년 그것들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새 왕 루이 16세에게 남겨진 첫 정치적 결정 중 하나는, 그 의회들을 복원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결국 복원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 결정은 곧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볼테르는 1778년까지 살아 있었고, 루소는 1778년까지 살아 있었다. 디드로의 백과전서는 이미 출간되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왜 어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특권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평생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왕의 권력은 정당화되는가. 신분제는 자연스러운 것인가.
이런 시대에 통치해야 할 새 왕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새 왕비가 외교적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결국 한 시대의 운명에 가까운 무게를 지니게 된다.
라 뮈에트로의 도피
캉팡의 회고록에는 즉위 직후의 작은 일화가 하나 더 기록되어 있다. 루이 15세의 시신은 천연두로 인해 부패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베르사유에 그대로 두면 위험할 정도였다. 따라서 즉위 의식과 별도로, 시신은 곧 생드니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동안 새 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 가족은 베르사유에서 가까운 라 뮈에트(La Muette) 성으로 일시적으로 거처를 옮겼다. 베르사유 궁의 소독과 정비를 위해서였다.
라 뮈에트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캉팡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왕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마침내 그녀는 옆에 앉은 시녀에게 짧게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군요."
이 한 문장 안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 있다. 그녀가 더 이상 어린 왕세자비가 아니라는 사실. 베르사유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리던 시절이 끝났다는 사실. 이제부터 그녀의 모든 행동이 한 나라의 왕비로서 해석되고 평가받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가, 그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단 며칠 만에 일어났다는 사실.
캉팡은 이 시기를 회고하며 한 가지 안타까움을 적는다. 어린 왕비는 그때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게에 맞게 자신을 단련할 시간이 그녀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캉팡은 이렇게 기록했지만
캉팡의 회고록은 1774년 즉위의 순간을 어린 왕과 왕비의 순수한 무지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적 차원에서 그린다. "우리는 너무 어립니다"라는 기도는 그 전형적인 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 특히 사이먼 샤마와 윌리엄 도일은 이 시기를 좀 더 구조적인 각도에서 본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1774년 프랑스가 직면한 위기는 어떤 능숙한 통치자가 와도 풀기 어려운 종류의 위기였다는 사실이다. 재정 적자, 신분제의 모순, 의회와 왕권의 갈등,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이 모든 요인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루이 16세의 무능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미숙함은 분명히 문제였지만, 그것만으로 1789년의 혁명을 설명할 수는 없다. 캉팡은 회고록에서 이 모든 구조적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한 사람으로서의 왕비를 변호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을 균형 있게 읽기 위해서는, 캉팡이 그리지 않은 그 거대한 배경을 함께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다음 회 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한 1770년부터, 첫 자녀인 마리 테레즈가 태어난 1778년까지.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무려 8년 가까이 자녀 없이 이어진다. 18세기 유럽 왕실에서 후사가 없다는 것은 단순한 사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외교적 위기이자 정치적 약점이었다. 빈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거의 매달 편지를 보냈고, 베르사유의 정신적 압력은 어린 왕비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1777년 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가 마침내 베르사유를 직접 방문한다. 동생의 결혼생활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회에서는 7년의 침묵을 깬 한 오빠의 방문,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변화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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